장제스, 중화민국 제1-5대 총통, 쑨원, 황포군관학교, 국민당, 국공 합작, 중일전쟁, 장쉐량, 서안 사건, 국부천대, 대만
장제스
중화민국 제1-5대 총통
蔣介石(장개석) | Chiang Kai-shek
본명
장중정(蔣中正)
출생
1887년 10월 31일
청 절강성 영파부 봉화현 계구진
(現 중국 저장성 닝보시 펑화구 시커우진)
사망
1975년 4월 5일 (향년 8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스린 관저
초대 총통
1948년 5월 20일 ~ 1954년 5월 20일
제2대 총통
1954년 5월 20일 ~ 1960년 5월 20일
제3대 총통
1960년 5월 20일 ~ 1966년 5월 20일
제4대 총통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제5대 총통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중화민국의 초대-제5대 총통이다.
약력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5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
집안의 전승에 따르면 장제스는 주공단의 3자 백령(白齡)의 후손이며 희성 장씨? 저장성 펑화현으로 이주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17세기에 장제스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곳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는데 명, 청 교체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원인이 된 듯하다. 그의 아버지 장조총(蔣肇聰)은 태평천국의 난 시기에 가산을 모두 소실했음에도 가업인 소금 도매업으로 몇 년 만에 재기했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제스는 1894년 12월, 일찍 아버지를 잃은 후로 삼촌들의 농간으로 인해 유산을 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과부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10살 때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고 저항하는 장제스 일가에 대한 부패한 관료들의 보복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이때 장제스의 어머니가 세금(사실상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 왕채옥(王采玉)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일찍 사별한 충격으로 잠시 비구니가 되기도 했던 여자인데 22세의 나이로 45세의 장제스의 아버지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았는 데다가 남편을 잃고 나서는 생계를 위해서 다른 지방으로 떠났는데 이방인이란 이유로 백안시를 당했다.
관리들이 장제스를 감옥에 넣었던 것은 그의 일가가 타향 출신이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홀로 장제스까지 2남 2녀를 키우면서도 일상 예절, 신체 단련, 위생 상식, 가사 노동 등을 가르쳤으며 자녀들을 사숙에 보내기에 힘썼는데 이러한 교육은 장제스가 평생 엄격한 생활을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출생과 성장
할아버지 장사천(蔣斯千)이 지어준 아명은 '상서로운 시작'이란 뜻의 서원(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 학명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 본명 지청(志淸). 그리고 존경의 의미로 선총통 장공(先總統 蔣公). 그래서 대만에서 F-5 전투기를 라이선스 생산할 때 별명을 중정호라고 붙였다.
한편 장제스는 6세부터 16세까지 고전 교육을 받았고 17살에는 고향 계구진(溪口鎭)을 떠나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각지의 스승들에게 고전을 강의받았다. 이후 1902년에 동자시에 응시하지만 무질서와 부패에 실망하고 과거 시험에 대한 미련을 끊고 만다. 이후 1905년에 쑨원에 대해서 최초로 인지하고 혁명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군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1906년, 장제스는 도일하지만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군사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일본어만 공부하고 다시 귀국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다녔던 학교는 캉유웨이가 세운 청화(淸華) 학교였다고 한다.
군관학교 입학
이후 귀국한 뒤에 어머니를 설득한 후 통국육군속성군관학교(通國陸軍速成學敎) 1기생으로 입학하며, 졸업 후 좋은 학업 태도와 성적을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한다. 그 시기에 그는 혁명의지를 보이기 위해 변발을 잘라 집에 보내는 선전 포고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이후 1909년 중국 동맹회에 입회하며, 같은 저장성 출신인 중국 동맹회 간부인 천치메이(진기미)로부터 호감을 얻고 그의 정치적 제자이자 심복이 되었다. 이후 1910년 진무 학교를 졸업해 니카타현 다카다시 야전 포병 13연대의 견습 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신해혁명과 귀국
1911년 8월, 진기미와 장제스는 혁명이 발생할 경우의 전술 등을 공부하는데 이것은 신해혁명이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한 봉기가 성공하자 장제스는 자신이 탈영병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군복과 군도를 학교에 소포로 부친 다음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천치메이를 도와 항저우 봉기의 결사대를 지휘해 이 공으로 2사단 5단(연대)장이 된다. 이후 천치메이의 후원으로 일본에서 군사학을 공부하며 독일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전제화에 반발하여 반년만에 귀국하게 된다.
한편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이었던 천치메이는 장제스에게 황진룽(황금영), 두웨성(두월생), 장소림(장샤오린), 장런제, 다이지타오, 천궈푸, 천리푸 등을 소개해 준다.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모두 상하이 암흑계의 3대 대부이며, 특히 두웨성은 청방의 수장이자 그의 비밀 후원자였다. 장징강은 상하이의 거부이자 국민당의 원로로 그가 당 총재가 되게끔 만들어 주었다. 다이촨셴은 장제스와 의형제를 맺어 훗날 중화민국 고시원장 직을 역임한다. 천궈푸와 천리푸는 천치메이의 조카들로 장제스의 충복이 되어 국민당 조직부, CC단, 중앙 조사 통계국(남의사(藍衣社)를 의미한다) 등의 수장이 되며, 중화민국 4대 가족인중 진씨(천씨) 일가를 이루게 된다.
개명(中正)과 호법전쟁
또한 1913년경에는 그동안 사용하던 이름 지청(志淸)을 버리고 이름을 중정(中正)으로 개명한다. 또한 필명으로 사용하던 개석(介石)은 자(字)라고 사용한다.
천치메이에 대한 장제스의 충성심은 대단히 높았고 천치메이의 정적인 타오청장(도성장)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병원에서 쏘아 죽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측근들은 타오청장이 장제스를 죽이려고 해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상식적으로 병원에 혼자 있는 사람이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 하겠는가... 여하튼 이후 장제스는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하자 천치메이와 함께 계축전쟁에 참여해 상하이 제조창을 공격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봉기했지만 실패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로 중화제국의 황제가 되려 하자 차이어, 량치차오가 봉기하면서 호국전쟁이 발발했고 천치메이와 함께 호국전쟁에 투신하여 위안스카이 타도에 나섰다. 이후 1916년 5월 천치메이가 위안스카이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자 좌절하여 3년 동안 상해 암흑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32세의 나이로 14세의 천제루를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였고 쑨원의 호법운동에도 참가하여 천중밍과 함께 호법전쟁에 참전했으나 천중밍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주변의 견제로 사직과 복귀를 반복하였다.
쑨원을 모시다
이후 1920년 쑨원(손문)이 2차 호법운동을 이끌며 광동에 자리를 잡자 장제스는 쑨원을 따라 광동으로 가며, 곧바로 쑨원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쑨원을 이상론자라고 비웃는 연성자치론자 천중밍과 노선 차이로 자주 마찰을 빚었고 또다시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22년 광동 군벌 천중밍(진형명)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총탄과 포화가 난무하던 시내를 뚫고 쑨원과 제2차 호법군 정부가 피신해 있던 군함 융펑에 승선하여 쑨원을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이 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류전환, 양시민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도움으로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를 다시 정복하여 정처 없이 떠돌던 국민당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차 국공합작 시기
천중밍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대본영 참모장을 위시로 여러 군사적 중책을 맡으면서 쑨원의 신임을 확고히 받게 된다. 장제스는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면서 혁명 사업에 투신했고 쑨원의 명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 레프 트로츠키와 만나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쑨원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해주지 않는다고 자주 불만을 표출하며 상하이나 고향인 시커우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자주 했고 이때마다 쑨원은 장제스를 달래야 했다. 이 시기 미하일 보로딘이 쑨원의 고문으로 국민당에 합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1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다.
이후 소련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황푸 군관 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국민당의 당군인 국민 혁명군 양성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제스는 점차 국민당의 실력자가 된다. 이후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상단군(商團軍) 제압과 천중밍의 군대 괴멸, 군민재정 통일선언에 반발한 전계군벌 양시민(楊希閔)과 계계군벌 유진환(劉震環)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들을 격파해 광주 위수 사령으로 임명, 광저우의 실력자가 된다.
쑨원의 사망
1925년, 쑨원이 죽었다.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쑨원의 후계자 자리를 쟁취했다. 쑨원에게 장제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측근 심복 정도의 위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동정을 지휘, 광저우를 탈환하려는 군벌 천중밍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장군으로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쑨커의 태자파, 왕징웨이와 후한민의 당권파, 국민당 원로들의 노동파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지지하며 당권파에 몸을 담고 있었다.
이후 양시민, 유전환 등이 중앙의 말을 듣지 않고 반기를 들자 대원수 대리 후한민이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이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듣지 않고 광저우를 점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장제스는 쉬충즈와 함께 이들을 토벌하여 이들의 패잔병과 무기들을 흡수하여 국민당의 병력을 통일시켰다. 이 시기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매우 심하였고 특히 소련의 지원을 입은 좌파가 강성하여 당내 우파는 물론, 주변의 군벌들과 열강 세력의 우려를 사고 있었다. 놀랍게도 장제스는 이 시기에 좌파에 속했다. 장제스는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특별위원회에 참가하여 암살 사건을 수사했고 월군사령관 겸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고 그의 군사력을 흡수하면서 최고의 군사실력자로 성장했다. 또한 국민당의 2차 동정을 통해 최후의 발악을 가하던 천중밍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왕징웨이, 보로딘을 이은 국민당의 3대 거물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정'을 통한 하이난 섬과 광둥 지역의 확보로 군사적인 업적도 드높아졌다. 이 시기 중국의 여러 청년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의 좌우 대립은 사그라들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 끓고 있었다.
왕징웨이 제거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밀월 관계이던 왕징웨이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의 커넥션을 의심했고 국민당 우파는 장제스를 좌파 똘마니로 보았다. 게다가 새 소련 고문인 쿠이비셰프가 장제스보다 왕징웨이를 지지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다시금 소련을 방문하여 이 위기를 타개하려다가 소련에 간 사이에 실각할 점을 두려워하여 취소하기도 했다. 장제스를 지지하던 보로딘이 펑위샹과 회동하러 자리를 뜨자 장제스는 보로딘이 자신이 아니라 펑위샹과 연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즉각 자신의 권력 기반인 황푸 군관 학교를 정비하며 선제적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3월 18일, 중산함 사건에서 국민당 좌파의 장제스 납치 음모(?)를 뒤엎으면서 국민당 정부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후한민(호한민), 왕징웨이(왕정위)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쑨원의 후계자이자 국민당군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소련, 친좌익 성향이었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저우언라이의 귀뜸도 무시하고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민족이 아니라 소련에 충성한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소련 고문들을 추방했다. 이로써 기존의 서산회의파와는 구분되는 신우익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국민혁명
1926년 7월 장제스와 국민당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페이푸, 장쭤린 등을 잇달아 격파하고 우한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4.12 정변
허나 국공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장제스가 자신을 공격하는 소련 고문 보로딘 해임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이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직후인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우한 국민정부와의 내전에 돌입할 뻔했으나 북양군벌과의 싸움 때문에 잠시 우한과 협력하여 북벌에 나섰다.
이후 우한 정부에서도 마일사변, 경제위기, 펑위샹의 분공요구, 코민테른의 5월 지시 등을 이유로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우한과 난징의 통합이 논의되었는데 우한에서는 통합의 조건으로 장제스 하야를 완강하게 요구했고 옛 동맹인 광서파가 이에 호응하자 장제스는 하야했다. 이후 우한과 난징의 통합인 영한합작이 이루어졌으나 당계전쟁,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 등의 내부 분열 끝에 장제스를 다시 추대하기에 이른다.
중국을 통일하다
장제스는 하야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하는 등 일본과의 합작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제루와 이혼, 쑨원의 처제이자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쑹메이링(송미령)과 결혼하였다. 한편 정략결혼을 위해 두 번째 아내 천제루를 버리고선 재결합을 약속하며 불단에 했다는 맹세의 말이 곱씸음직하다. 과연 인과응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장제스의 난징 정부가 정말로 산산조각 날 때 그가 이 맹세를 다시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제가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저의 난징 정부를 산산조각 내주십시오!
이후 탄옌카이 등 국민정부 요인들의 빗발치는 요청과 경쟁자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통해 1928년, 장제스는 드디어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한다. 1928년 행해진 2차 북벌에서 장제스는 장쭤린의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만주로 퇴각하던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합류한다.
편견회의 개최
북벌이 완료된 후 장제스는 경제개발과 내부 안정화를 위해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군벌들의 군사력 감축을 논하고 정치분회 폐지를 통해 권력을 중앙정부로 집중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펑위샹(풍옥상), 옌시산(염석산), 리쭝런(이종인) 등의 군벌 실력자들은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군사력 감축안에 마지못해 동의했으나 실행을 놓고 결국 반발하였다. 또한 장제스가 각 지방 정치분회를 폐지하여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려 하자 제일 먼저 계계군벌의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노척평을 무단해임하는 호남 사건을 일으키면서 중앙에 반기를 들었다.
장제스는 이를 온화하게 처리하려 했으나 결국 1차 장계전쟁으로 번졌고 1차 장계전쟁을 진압하자 이에 분노한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키는 식으로 반란은 계속 확대, 1930년 중원대전으로 발전했다. 장제스와 반장 측 모두의 러브콜을 받던 장쉐량은 결국 봉천군을 이끌고 장제스 편에 가담함으로 장제스의 우세를 확고히 해주었다. 장쉐량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는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1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탕산 사건과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2월, 후한민과의 의견충돌로 그를 감금하는 탕산 사건을 자행하고 7월, 제3차 초공작전에 나섰지만 광동파, 광서파, 개조파, 서산회의파의 합작으로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1차 양광사변이 발생했다. 이는 갓 통일된 중화민국의 남북내전으로 발전할 뻔했으나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의 요구에 따라 1931년 12월 하야했으나 후임인 쑨커가 한 달 만에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사퇴하면서 1932년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군사위원장으로 복직하였고 왕징웨이는 행정원장이 되어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2차 국공 합작과 중일전쟁
처참한 실패
군벌의 세를 꺾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이를 갈아오던 공산당 토벌을 위해 1930년 겨울 초공작전을 시작하지만 국민혁명군의 한계와 군벌들의 비협조로 오히려 공산당에게 막대한 무기 지원만 해주는 꼴이 되었다. 1930년 12월의 제1차 초공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장제스는 기존의 전략을 재고하는 한편 정치공작을 강화하고 한스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도로와 공장을 건설하여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력을 뒷받침했다. 이 때문에 초반의 지리멸렬한 패주와 달리 1932년 제4차 초공작전에서는 일부 소비에트의 분쇄에 성공하였으며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공산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근거지에 쫓겨난 공산당은 유명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고 한때 수십만에 달했던 홍군이 옌안에 겨우 새 근거지를 마련했을 때는 3만 명이 조금 넘는 수로 몰락한 후였다.
복건사변과 2차 양광사변
이 과정에서 독일 고문 오토 브라운, 28인의 볼셰비키, 장궈타오 등이 몰락하고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1인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이 '붉은 심장병'이라 불렀던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해 최후의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투입되었던 것이 만주 사변으로 본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과 토비 출신의 북방 군벌인 양후청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초공 작전은 공산당과 토벌과 더불어 군벌 세력 약화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앞세우는 한편 중앙군을 군벌 영지에 보내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군벌들이 이를 좋아할 리가 없었고 운남군벌 룽윈을 비롯한 많은 지방 군벌이 공산당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태업 행위를 한 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복건사변,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장쉐량의 배반과 시안 사건
만주 사변으로 인해 자신의 근거지에서 쫓겨나면서도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했던 장쉐량은 아예 초공 임무를 띠고 왔기 때문에 태업을 할 수도 없었고 태업을 하면 자신의 근거지와 더 먼 푸젠으로 쫓겨날 처지였기 때문에 대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장쉐량 등은 "빈대를 잡으려다가 군벌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날려먹는" 초공 작전에 반발하여 비밀리에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 접촉한다.
장쉐량은 101세로 죽을 때까지 시안 사변 직전에 공산당과 어떤 접촉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친국민당적 역사관을 가진 자들은 이 때 장쉐량이 공산당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본다.
마침내 1936년 12월 12일,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점검하러 시안으로 온 장제스를 장쉐량이 연금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그는 장쉐량의 "공산당과 화해하고 일본을 물리치라"는 요구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풀려난다.
시안 사건은 일종의 쿠데타였으며, 장쉐량은 본래 장제스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그가 죽으면 중국의 대일 항전 능력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발 빠른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자신의 요구 조건에 동의하자마자 그를 풀어주었다. 장제스는 풀려난 즉시 항명을 이유로 장쉐량을 체포하였고, 사형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10여 년간 공들인 초공작전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보복으로 장쉐량을 가택연금에 처했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뒤 대만으로 도망칠 때에도 장제스는 시안 사건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장쉐량을 대만으로 같이 끌고 갔고 장쉐량은 대만에서도 장제스가 죽고 나서도 10여 년이 지난 1993년까지 가택연금 신세를 당해야 했다.
2차 국공합작의 실현
어쨌든 내키지는 않지만 2차 국공합작은 실행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 독일 국방군 장군들을 초빙,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을 조직하는 한편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강력한 독일식 중앙군을 양성하고 이탈리아와 미국의 협조로 공군을 양성했으며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 난징 등을 공업화하여 비행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중국이 건실한 국가가 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장제스의 권력도 약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후한민 체포에 반발한 국민당의 광둥 파벌, 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한 19로군이라거나 광시 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광둥군벌 천지탕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일본의 침략
1931년 만주 사변을 획책하여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강탈한 일본은 러허 사변으로 만리장성 쪽으로 자꾸 영토를 확장하며 중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장제스는 힘이 부족하니 힘을 길러 나중에 맞서겠다는 방침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양측의 긴장은 노구교에서 폭발(노구교 사건),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일본의 주전파들이 폭주하면서 중일전쟁을 발발시키고야 만다. 결국 장제스는 기존의 방침을 포기하고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선포하였다.
장제스는 초반의 전략적인 실수로 화북과 동해안의 핵심 공업 지역을 모두 잃고 충칭(중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물자 부족과 왕징웨이를 비롯한 거물들의 배신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의 정신적 지주로 군림하면서 8년에 걸친 기나긴 항일 전쟁을 지도하여 마침내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이 대륙에서 붙잡아둔 일본군은 관동군을 합쳐 총합 250만여 명이다. 그러나 관동군과 만주군은 소련이 붙잡아둔거라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이 시기 장제스는 처형이자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송경령)과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장제스는 쑹칭링이 소련에 가 있는 도중에 소련에서 새 애인"들"을 만났다고 하는 등의 날조 기사를 퍼트리고 쑹칭링은 장제스가 5천만 달러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로 대응할 정도였다. 이유는 국공 합작을 지지한 쑨원의 노선에 대한 장제스의 반감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장제스를 푸른 수염 같은 자라고 부르며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결혼하려 할 때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쑹아이링, 쑹메이링의 뜻이 확고해 물러선 것이며, 더구나 쑹칭링은 그 당시 국민당의 독재 정책과 공산당 탄압에 반기를 들었다. 1935년 이후 쑹칭링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 신청을 하는 등 친공산당 행동을 보여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일본을 몰아낸 항일영웅
8년 간의 전쟁 끝에 장제스는 2300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침략자인 일본군을 물리치고 중일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중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 지위를 얻었으며,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의 점령지는 물론 그전에 빼앗긴 만주, 내몽골, 대만을 반환받았다. 그리고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찼다.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이 상임 이사국이었고, 국력에서도 일본은 중일전쟁 때 여러 면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이걸 다 뒤집어엎었다.
그랬기에 여러 삽질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 시점까지의 상황은 장제스에게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와 국민당 내부의 시기상조란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국공내전을 재개하여 만주 깊숙이 진군하여 하얼빈까지 공산당을 몰아붙이면서 통일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어정쩡한 공세와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이 그에게 화를 불러왔다.
만주 수복 시도
그가 미국의 마셜 장군의 사실상 강압적인 정전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계속하려 했던 것은 만주가 당시 중국 최고의 공업 지대였기에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장제스는 공산당과 화합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분노한 마셜과 트루먼은 만약 장제스가 진군을 멈추지 않으면 중국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5억 달러의 차관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물주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6월 7일 마셜의 개입으로 장제스가 진격을 정지하고 정전 명령을 내린 사건은, 그 역시 이후 자신 일생의 최대 실수라고 회고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바로 전날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의 포기를 건의할 정도로 중공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정전으로 인해 중화민국군 내부의 전력 이동 정지까지 겹친다.
하지만 국민당군은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중일전쟁 당시의 전투 의지는 사라진 상태였고 보급선과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고 너무 마구잡이로 진군하여 반격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붕괴되기 딱 좋은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탄탄히 다져놔야 할 후방 정리가 전혀 안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군벌들을 때려잡기 시작하면서 장제스의 중앙군을 제외한 군벌군의 대오들이 잇달아 붕괴되기 시작했다. 만주 일대의 주민들을 징병해 병력을 보충하고 소련군이 넘겨준 일본군 무기로 대거 무장을 하면서 오히려 전력이 강화된 공산당은 린뱌오군이 만주에서부터 반격을 개시했고, 이어 패퇴하면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던 펑더화이, 천이가 지휘하던 다른 방면군들도 일제히 반격을 하면서 전세를 뒤집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선양, 랴오양 등지에서 국민당군은 참패했고 쉬저우 전역에서는 정면 대결에서도 완전히 패주하고 말았다. 이에 고립된 부작의가 베이핑에서 항복하면서 공산군에게 막대한 인력과 무기를 넘겨주어 공산군 숫자를 4백만 명으로 늘리고 말았다.
총통 당선
장제스는 1948년 헌정을 실시,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총통에 당선되었으나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1949년 신년사에서 공산당에 화평을 제안하는 한편 1949년 1월 21일 총통 직을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을 총통 권한 대행으로 두었으나, 진짜 목적은 서남부 일대에서 대규모 징병을 할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공산당은 평화 협상에 앞서 "전범 장제스를 넘겨야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는데, 이는 국민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공산당은 4월 20일 장강 이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만약 국민당군이 장강을 중심으로 철통 같은 방어를 고수했다면 해군, 공군이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승산이 높았겠지만, 화북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전력의 손실이 너무 컸으며 장제스의 군벌 약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홍군이 진격을 재개하자 장강의 방어 병력들이 집단으로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허망하게 방어선이 무너졌다.
몰락의 징조
그리하여 공산당이 장강을 건너오자마자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국민당의 주요 도시는 모두 공산당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국민 정부는 임시 수도인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2일 내륙의 옛 임시 수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11월 29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청두로 다시 이동했으며, 12월 7일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장제스는 쓰창(西昌) 대본영을 순시하고 돌아온 후 12월 10일 타이베이로 떠났고, 이후 다시는 대륙 본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몰락의 책임
이렇게 당초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압도할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 것에는 내부적인 요인도,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물가 통제 실패였다. 8년 간의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고, 상당수의 지역이 황폐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재건이 필수였지만 장제스 본인은 당장 경제와 인프라를 재건하기보다는 공산당을 몰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내전을 재개한 이후로는 재건 작업은 뒷전이 되어버렸고 전비 충당을 위해 화폐발행을 남발하는 수를 썼다. 이러니 물가가 다시금 급속히 폭등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상황에서 실물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금융업으로 돈이 몰려들었는데, 이러한 기형적인 상황은 매점매석과 투매가 일상화되어 물자는 부족한데 돈만 넘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이는 물가상승을 더욱 부추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공무원들이나 노동자들은 월 단위가 아닌 일 단위나 심지어 현물로 봉급을 받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매우 궁핍해졌으며 이는 장제스에 대한 민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장제스 측도 초인플레이션의 심화로 민심이 악화되어 가자 물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8년에 화폐개혁을 시행했지만 이러한 화폐개혁도 필수과제인 물자의 충분한 공급이 필요했는데 이런 것이 불가능한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던지라 결국 실패로 돌아섰고 이는 국민당과 장제스의 지지기반 상실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이렇게 장제스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면서 중국 공산당으로 민심이 쏠려버렸고, 공산당군이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국민당군은 맥없이 패배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렇듯 장제스 본인에게도 경제기반 재건 대신에 섣불리 공산당을 제거하려는 쪽을 택하다가 경제난으로 지지기반이 산산조각 나면서 결국 패배한 것은 너무도 뼈아프게 다가온 경험이었고, 이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대만의 경제정책이 고금리 위주로 돌아갔던 것도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의 악몽 때문이었다.
국부천대와 대만 시절
대만 계엄령과 대만 이주
결국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대만 계엄령과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기반으로 본토 수복을 위한 철권통치에 들어간다. 그는 국공내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통에서 사퇴한 상태였지만 그 시기에도 실권자는 장제스였고, 결국 1950년 3월에 총통직에 복귀한다.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는 자신은 패배자이기 때문에 본토를 수복할 때까지 타이완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대한민국 진해에서 회담을 가진 이후 단 한 번도 해외 순방을 하지 않았고, 현재의 스린역 인근에 자신의 관저를 지었다.
실패에서 배우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의 패배 원인을 부정부패 척결 실패와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 정착 같은 사회정책의 부재, 3,000%대의 초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 물가상승 억제 실패에 있다고 보면서 중국 통치시절과는 다르게 대만 시절에는 사회정책과 부패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대륙 시절에는 부패가 매우 심해서 미국이 지원을 가망이 없다고 보면서 지원을 중단한 데다가,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 도입이 지지부진하여 문맹률은 1949년도에 80%에 달했고 결국 중공이 문맹퇴치를 위해서 간화자 도입을 단행해야 했던 데 반해, 대만 시절에는 토지개혁을 전격적으로 시행하고 복지예산과 교육예산도 어느 정도 확충시키면서 이미 1963년도에 9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시행했으며 고금리 정책과 쌀, 밀가루, 돼지고기, 닭고기 같은 기초 식료품 가격 안정조치로 물가상승률을 한자리 수로 안정화시켰고, 저축률도 늘렸으며 부정부패척결도 어느 정도 단행했다.
대만의 경험
또한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제계획정책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중소기업과 국영기업 중심으로 경제성장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큰 성과를 내면서 대만은 1950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연평균 8%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비교적 빠르게 향상되었으며, 빈부격차도 영미권이나 한국에 비해서 크게 낮아졌다. 이를 타이완의 기적(혹은 경험)이라고 불렸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 당시 중국이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경제/사회적인 혼란, 침체가 극심하여 대만과 중공은 큰 대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대만에서의 경제 발전은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이 국공내전 패퇴 후에도 2000년대 이전까지 본토의 공산정권에 대한 체제 우월성, 본토수복 노선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철저한 민주주의 탄압
하지만 장제스는 타이완 내부에서 제기되는 분리 독립, 민주화 요구 등의 주장을 모두 강경하게 탄압했고,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는 철저하게 거리가 먼 독재자였다. 1950년대에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만 4천명에 달했고, 호적상에는 있는데 행방불명되거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 14만 명이 넘었다. 또한 중화민국 실효 통치 지역 전역에서 10개의 정도의 강제 수용소가 존재하였으며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게임으로 반교 -Detention-이 있는데 마치 대한민국의 독재정권 시절 반정부 인사를 사회주의자로 몰아가 제거하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정적과 재야인사에 대한 탄압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장제스에 대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지만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도 있고 중국에 대한 견제도구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점도 있기에 미중수교 이전까지 타이완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다.
권토중래 시도
장제스는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잇달아 혼란을 겪고, 외교적으로도 중국과 소련간의 사이가 소원해지자 미국의 지원을 통해 권토중래를 노렸다. 실제로 중국 본토로 진공한다는 국광작전을 세우고 스파이들을 중공으로 보내봤지만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중공의 안보는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되려 반격만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장제스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물론 당대 중공의 민심을 보았을 때 비록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공산당에 대한 실망감이나 반감이 커지던 상황이라서 전면전을 벌일 때 대만에게도 일단 승산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장제스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출혈이 만만치 않았던 데다가, 미국이 중공이 아무리 혼란을 겪었다 한들 세계 최대의 인구대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막대한 인적자원과 예산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 중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나빠지는데 소련 견제용으로 중국에 접근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는 실용적인 일이었던지라 미국은 장제스가 중공과 전쟁을 벌이자고 할 때마다 이를 반려했다.
결국 미중회담이 성사되며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반면 대만은 상임이사국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UN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퇴당하는 굴욕을 겪었으며, 이후로 대만은 UN 가입을 시도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장제스는 권토중래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대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총통 취임과 사망
중화민국 정부가 UN에서 축출된 이듬해인 1972년 5월, 마지막으로 총통 취임식을 거행했다. 당시 취임식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는데, 장제스를 부총통 옌자간이 마주 보는 장면에서 "형님, 안됐습니다(大哥, 不好了)!"라는 자막이 등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방영되고 있던 대만의 TV 드라마에 나온 대사였고, 당연히 방송 사고였지만, 생방송 중에 나온 것이어서 불길한 장면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5년,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한편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중국을 구하라'로 말했다는 설이 있다. 공식적인 유언은 장제스가 사망하기 6일 전인 3월 29일 구술하고, 사망 직후에 발표된 "나는 상투를 자른 이래, 총리(쑨원)의 혁명을 쫓아 살아왔으며, 총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도로서 있지 않은 적이 한시도 없었다.", "나의 죽음에 실망하지 말고 삼민주의를 실천하고 대륙의 국토를 수복하라." 등의 내용인데, 이 유언은 중정기념당의 대형 장제스 동상 아래에도 조각되어 있다.
장례식
장제스의 장례식은 국부 쑨원을 모신 타이베이 국부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준비하던 미국은 장례식에 농무부 장관을 대표로 보내려다가 중화민국의 항의를 받고 넬슨 록펠러 부통령을 보냈다. 이후 불과 4년 뒤 미국은 대만과 단교하게 된다. 1972년 중국과 수교한 일본에서는 전임 수상인 사토 에이사쿠,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거물급 정치가들이 조문을 왔으나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우인 대표라는 애매한 명칭으로 참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장제스는 중화민국이 본토를 수복할 때 난징에 매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유언에 따라 장제스의 유해는 지하에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다.
장제스의 유해는 타오위안(桃園) 현의 츠후(慈湖)에 안치되었다. 츠후는 장제스가 생전에도 고향과 비슷한 경치라며 종종 방문했다고 전해진다.33 묘지는 중화민국 국군 의장대가 관리 중이다. 1988년 타계한 아들 장징궈 전 총통도 비슷한 형태로 안장되었고, 장제스의 유해와는 약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장제스, 평가
''장제스와 그의 시대는 공산당의 승리 이후의 악몽에 비하면 그 이하였고, 사명을 최후까지 이룩할 자원과 역량이 부족한 통치자와 체제 탓에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하기에는 그 이상이었다."
조너선 펜비
장제스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무능력하며 봉건적 사고를 답습한 군벌이라는 등의 부정적 평가가 주류였다. 이는 국공내전의 패배의 원인을 장제스에게 찾거나 장제스를 몰아낸 중국 공산당의 공산혁명 신화 만들기로 인한 영향이 크다. 그런 이유로 학계 및 민간에도 장제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등의 사건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의 신화가 파괴되었고 학계에서도 중화민국 시기의 사건은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관이 일본에서 대두되면서 1970년대부터 중화민국과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1996년 레이 황은 지적하길 장제스는 비윤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수단으로라도 근대 국가를 강제로 만들어냈어야 했다고 말했으며 2003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너선 펜비가 장제스 평전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장제스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 장제스의 단점들에 대해 혹독히 비판하면서도 장제스가 없었을 중국의 파멸적인 결과를 지적하고2 장제스의 정권이 결국 최초의 근대 국가의 기구들을 중국에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의 정권과 달리 최소한의 정상적인 정권이었다고 규정함으로 매우 전향적인 재평가를 시작했다. 국민 혁명군 장교 출신의 학자 레이 황, 영국 학자 라나 미터, 미국 외교관 출신의 제이 테일러 등의 연구자들이 장제스에 대해 매우 전향적인 재평가를 하게 되면서 "무능한 장제스" 사관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제스와 적대한 중국 조차도 장제스의 항일 일대기에 대해 재평가하며 장제스의 위상이 올라갔다. 다만 이러한 학설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매우 늦었기 때문에 긍정적 평가가 대중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상당히 최근이었다.
또한 시안 사건이 터지던 당시의 미국 대사인 넬슨 존슨은 장제스의 정적들조차 중국 전체를 규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은 장제스 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마지못해 지지를 보냈다고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물론 장제스의 정권과 치세는 수많은 한계와 비판의 요소가 많으나 청조 붕괴 이후의 시대적 상황이 마치 전적으로 그의 잘못인 양 덤터기를 쓴 비판이 많으며 장제스가 거둔 공에 대해선 사료 부족 내지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스틸웰이나 시어도어 화이트같이 중국 사정에 무지하고 인종차별적 관점으로 무장했던 관계자들의 편견에 찬 매도가 정설인 양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었다. 그리고 장제스가 독재자라고 비판함과 동시에 장제스가 철권통치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공존하는 기묘한 양상을 보인다. 장제스 문서의 평가 단락에서는 장제스와 장제스 정권의 공과 과에 대해서 될 수 있는 한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 분야
긍정적 평가
장제스가 중국과 중국 인민을 위해 신경쓰지 않았다고 의심할 근거는 없다. (중략) 만약 장제스가 독재자처럼 행동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군신관계를 제외하면 자신의 시스템을 계속 작동시킬 수 있는 다른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이 황
대외 업적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고 조계지를 회수했으며 중화민국을 4대 연합국의 하나로 인정받게 했고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자리를 획득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원에 앞장섰다.
중국 통일
일반적으로는 현대 중국 통일의 주역으로 언급되는 사람은 마오쩌둥이지만, 실제 그 형태를 미리 확립한 사람은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위안스카이 시절부터 남방에 대한 통치력은 행사도 못 해본 북양정부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안정적 정권을 유지했다. 안직전쟁이니 직봉전쟁이니 우두머리 자리부터 수두룩하게 갈려나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호국 전쟁이다, 호법 전쟁이다 하여 아예 중앙에 대한 독립을 선포해버리는 일에 거의 손놓고 협상이나 했던 북양 정부와 달리 장제스의 난징 국민 정부는 반장전쟁 마무리 이후에는 1931년 말의 하야 사태를 제외하면 장제스 + 기타 유력 인사들과의 합작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굴러갔고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 정부, 광동파의 광저우 국민 정부 등의 도전자는 물론, 차이팅카이의 푸젠 정부 같은 독립 세력들을 아주 간단히 물리쳤다.
물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난징 국민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던 군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장제스의 국민 정부 시절에도 성스차이가 지배하던 신장 지역 등에 대한 통제권은 없었고 장강 하류의 국민 정부 중심지에서 외곽으로 나갈수록 정부 통제력은 약해졌으므로 따로 노는 지역은 많긴 했다. 그러나 국민 정부 시대에는 산시성 먼로주의 운운한 옌시산이나 박쥐처럼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를 오간 성스차이, 잘 쳐서 3당 운운하며 독립 시도한 차이팅카이 등이 최고 수위지만 북양 정부 시대에 남방 군벌들은 중앙을 무시하고, 다들 독립 정권 세우고 연성 자치론 운운하며 최소한의 연결 고리도 없었다. 장제스 시대에는 다들 국민당 밑에 있다는 큰 틀은 유지했고 최대 위협인 반장 전쟁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리고 나라가 어떻게 되기나 말거나 자기들만 먹고살겠다고 백성들 쥐어짜서 전쟁질만 한 군벌들과 달리 장제스 시대엔 최초로 편견회의를 통한 군축과 군벌 통제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것에 반발한 결과가 반장 전쟁이지만 장제스는 반장 전쟁에서 이겼고 최대 경쟁자 펑위샹의 기반을 무너뜨렸으며 이후 초공작전 등을 빌미로 지속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일 전쟁에서 장제스가 기반 다 털리고 가장 적대적인 쓰촨, 윈난 군벌들과 동거를 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때 장제스의 권위가 그 어떠한 때보다 증대되었단 점에서 '군벌도 통제 못한 장제스'와 같은 담론은 당시 국민 정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마오쩌둥보단 유순했던 통치
장제스는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명은 올바르지 않다.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등과 합작의 방식을 추구했고 반란을 도모했던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국공내전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완전히 축출하지 못했으며 특히 북벌 완료 직후부터 반장 운동을 한 리쭝런은 부총통에 선출되기까지 이르었다. 루쉰, 라오서 등의 좌익 문필가, 지식인들은 장제스 정권 시절부터 비판을 쏟아냈지만 그들 대부분은 실질적인 처분을 받지 않았으며 덩옌다의 불법적인 처형만이 결국 장제스를 비판할 몇 안 되는 수단에 불과했다. 장제스에 대한 수많은 비난은 '그래도 되는' 사회 분위기 덕이었다.
한편 대중에 대한 장제스의 지지 역시 확고한 편이었으며, 항일의 영도자로서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일본군 점령 하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 등 대도시에서 다들 뛰쳐나와서 외친 구호는 '장제스 위원장 만세'였다. 국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1950년대까지도 유지되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장제스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면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예컨대 6.25 전쟁 중에 장제스가 미군과 호응하여 하이난을 점령하고 린뱌오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중국 전체가 요동쳤고 만주 지역에서 공산당기 소각, 마오쩌둥 초상화 파괴 등의 반공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공산당이 중국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문화재 보존
정치, 경제 분야에 가려서 그리 주목받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문화재 보존이다. 일찍이 중국 전통문화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는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 29만여 점과 자금성에 있던 사고전서 문연각본을 대만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으로 옮겼다. 또한, 중국 전역 각지에 소재한 유물들을 엄선하여 총 60만 8천여 점의 유물들을 국립고궁박물원으로 옮겼다.
이때 장제스가 대만으로 옮긴 중국 전통 문화재는 덕분에 중국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 때 홍위병들의 반달리즘을 피할 수 있었다. 1966년엔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 반달리즘에 대항하여 중화문화보존위원회를 만들었다.
부정적 평가
독재
아무리 장제스의 통치가 마오쩌둥보다 유순했다고 한들, 그 역시 독재자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마오쩌둥이 수천만에 이르는 인민들을 학살해서 장제스가 나아 보일 뿐이지 그도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부터 타이완 천도 이후에도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 괜히 대만인들이 일제의 지배보다 장제스의 지배에 치를 떨었던 게 아니다. 1929년 중국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대표 81.2%를 장제스의 당중앙이 일방적으로 뽑는 방식으로 진행해 반대파의 영향력을 애초에 차단해 버렸고, 그 덕에 왕징웨이와 천궁보를 위시한 개조파가 내세운 국민당 내 민주주의 요구가 제대로 먹혀들어가 민중들 사이에서 개조파의 인기가 치솟기도 했다. 북벌이 끝난 이후에도 장제스는 거의 10년간 훈정을 계속하며 민주화를 실현하지 않았고 국공내전기에 겨우 실시한 헌정 역시 민심을 돌리기 위한 술책일 뿐 실제로는 헌정이라는 이름의 훈정이 계속되었으며, 이마저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으로 무의미해졌다.
그리고 장제스는 일개 군 사령관에 불과했지만 정치에 간섭하여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을 분열시켜 북벌에 제동을 걸었고 북벌군끼리 총부리를 들이대기 직전까지 만들었으며, 이후 린썬 등을 바지사장으로 세우고 군사위원회 위원장 직위에서 국민정부의 모든 권력을 통제했다. 사실, 장제스가 국민정부의 실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신의 계파인 황포파를 위시한 군부의 지지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장제스가 이끈 국민정부는 당이 군을 이끄는 것이 아닌, 군이 당을 이끄는 것과 다름없어진 것. 또한 후한민, 왕징웨이와 합작했다지만, 장제스는 후한민이 그에게 반대 의견을 드러내자마자 감금시켜 버렸고, 왕징웨이에게는 그의 명망만 이용했을 뿐 실권을 주지 않은 것으로 두 합작 모두 명목상일 뿐임을 드러냈다.
공포정치
남의사, CC단 등이 기존의 통설처럼 중국판 게슈타포 같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런 친위대 성향의 단체들이 벌인 행각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제스는 반공의 기치 아래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중, 지식인, 예술가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며, 소위 반체제 인사라 칭해지는 인물들에 대한 고문과 폭력 등 반인륜적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 또한 장제스 정권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자신의 스승인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한다면서도 정작 국부천대 이후 죽는 날까지 계엄령을 수십 년간 펼쳐 실제론 쑨원이 추구한 삼민주의와 반대되는 행보를 걸었다. 이 동안 민주화 인사들을 향해 각종 백색테러(白色恐怖)가 벌어졌으며, 계엄 통치하에 3당 훈정을 표방해 청년당, 민주사회당 같은 관제 야당을 제외한 야당은 사실상 불인정되었다.
끝까지 본성인을 차별하고 핍박하여 사실상의 식민통치자로서 정국을 이끌어나가고 중화 민족주의를 더 중시하여 본성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사는 철저히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민주화 이후 대만 정치 양극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오죽하면 많은 본성인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장제스의 국민당 통치시기보다 대만일치시기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다.
대만인 학살
20세기 대만사 최악의 비극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한 2.28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학살 사건 일부도 장제스 집권 당시 벌어졌다. 중국국민당은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장제스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철저하게 부정한다.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으며, 당시 이 학살을 장제스가 조장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최소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도의적인 책임을 피할 길은 없다.
부패 방치, 민심 이반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 초기만 해도 압도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난 건, 당시 대륙 인민들을 착취하는 국민당 수하들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중의 민심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장제스는 정권 장악 능력도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제 분야
국민당 일당독재 하 南京國民政府(남경국민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관해서 평가가 다양한 데 비하면 경제적 성취에 관한 근래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한세 대학교 강명희 교수,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2006년).
세간의 통설과는 달리, 장제스 정권의 업적이라 평가되는 분야 중 하나다.
일각에서 황금 10년이라 부르기도 하는 1927년 ~ 1937년 시절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관세 자주화, 통화 일원화, 국내 통행세 철폐, 조세 개혁, 조계 회수 등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성공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의 공업화가 이루어졌으며, 저장을 비롯한 국민당 직할지의 농민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이 때문에 1936년 런던 채권 시장에서는 중국 국채의 이자가 일본 국채의 이자보다 더 저렴한 조건으로 발행되었었다. 이런 개혁들을 바탕으로 장제스의 난징 정권은 위안스카이의 중화제국 이래 가장 풍족한 재정을 보유했다.
다만 이 시기가 세계적으론 그 유명한 대공황 시기다 보니 한때는 이때 국민당이 한 것이라고 고작 '경제 불황을 유지시킨 것뿐'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나 제국주의 열강 침투의 주구였다는 공산당식 사관이 우세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오늘날 들어 국민당이 한계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건 했다는 재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국내의 경제정책 만으로 완전한 경제회복을 달성하는 것은 당시 세계의 어떤 정부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긍정적 평가
안정적인 농업 정책
국민당과 장제스 정권은 가난과 핍박에 허덕이는 농촌 문제가 중국의 불안정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고 농촌의 모순이 낳는 불만이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기여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서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토지 개혁을 비롯한, 농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대책을 강구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개혁이 추진된 20년대 ~ 30년대의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의 권력은 취약했다. 개혁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국민당 관리들을 군벌들이 추방하거나 해치는 일도 허다했으며, 장제스가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 곳은 난징, 상하이를 비롯한 동부 해안가 일부 대도시와 장시성 일대 정도였는데 그 장시성에서조차 지주들이 국민당 관리들을 저격하기도 했다.
그래도 국민당이 지배하던 장시성 지역에서만큼은 제한적이나마 몇몇 성공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소작료 납부를 제한한 감조 정책과 관습적인 소작농의 권리 보호 및 지주들의 불법적인 착취를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단속하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국민당의 개혁은 농민과 지주의 눈치를 동시에 보느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온건한 개혁이었으며 지주들의 편법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이를 고평가하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도 국민당의 감조 정책을 중일 전쟁 기간 중에 채택하여 그걸로 재미를 봤다.
또한 중앙에서 개혁을 하려 해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탁상공론에 그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1928년 현조직법을 발표하여 촌락의 행정 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근대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구장에 임명함으로써 농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이로 인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으며 지주 세력의 영향력도 상당히 축소되었다. 하지만 지주들은 구장 및의 향진장의 90%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며 여전히 농촌의 왕초로 군림하고 있었고 국민당이 임명한 현 관리들의 추진 사업에 번번이 딴지를 걸었고 토지 등기법이나 경찰 행정 등은 이들의 방해로 잘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농촌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보갑제까지 부활시켰으나 1937년까지도 국민당이 경찰도 파견하지 못하는 현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농촌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향진들이 국민당에 의해 통제되면서 농촌과 국가의 연결성 및 통제력이 매우 강화되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반장파들이 대거 실각한 1933년부턴 농촌 진흥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여러 합작사의 건설과 농업 기술자들을 투입하여 농촌에 근대적인 농업 기술을 보급하고 농촌의 생산성을 향상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농촌 금융, 합작사의 강화, 농산물 유통망 설립, 가연잡세 등의 폐지를 비롯한 비근본적인 개혁과 개량에 치중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고리 대금업에 허덕이던 농촌을 구제하기 위한 금융 기관의 설립과 합작사를 통한 상하이 자본가들의 농촌 투자를 촉진시킨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소모적인 곳에 활용되던 농촌 자금은 상하이 금융 자본의 개입과 국민당의 노력으로 농촌 생산성 재고로 흘러가게 되었고 근대적 금융 질서의 확립과 농촌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또한 종자 개량, 기술 개량 등으로 국민당 직할령의 고치 생산과 비단 품질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제사 공장 들이 들어섰으며 근대 품종 보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민당이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품 작물에 대한 통제를 시도함으로 인해 농민들의 손해를 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상당수 양잠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였다는 부작용 역시 존재했다.
1931년부턴 합작사 운동이 활발히 이뤄졌는데 농민의 생산 활동 원조와 이득 증진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합작사 운동은 국민당의 지배 영역 전체에 확산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으며 운영의 문제가 많아 상당한 양의 자금이 회수되지 못해 국가 재정에 타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합작사 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된 동부 해안가 농촌 지대는 중일 전쟁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개발살을 내버리면서 도루묵이 되고 만다.
흔히 장제스의 농업 정책은 공산당과 같은 급진적 토지 개혁을 하지 않아 폄하되지만, 1930년 6월 30일 제정된 장제스의 토지법은 소작농과 자영농을 보호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물건이다. 그리고 장제스의 농업 정책으로 부강해진 국민 정부는 초공 작전에서 공산당에 궤멸적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중국 지주들이 총칼로 땅을 넓힌 것도 아니고 펄 벅의 소설 대지에서 묘사되듯이 자수성가한 농민 출신들도 상당했다.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토지를 넓힌 것이다. 급진적 토지 개혁으로 지주들을 무작정 몰락시킨다고 그것이 농촌의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며 오히려 악화시킨다. 공산당의 무자비한 토지 개혁의 결과 중국의 농촌 생산량은 30% 폭락했고 합작사 이후 더 폭락했고 오히려 공산화 이후에 생산량과 영양 섭취량이 국민당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어졌다.
서구 학계에선 공산당의 토지 개혁이 민심을 얻기는 했으나 그 민심이 공산당 승리에 결정적 기여는 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초공 작전에서 국민당의 우세가 확정시되는 순간 농민들은 망설임 없이 국민당 지지로 선회해 버렸다는 것이다. 또 마오쩌둥은 옌안까지 후퇴한 다음에 공산당 급진파들에게 당신들이 급진적 토지 개혁을 했기 때문에 중농, 부농들의 지지를 상실하여 그들이 장제스에게 붙었다고 질타하며 장제스의 온건 토지 개혁을 벤치마킹했다.
획기적인 공업 정책
국민당의 공업 정책은 1919년, 쑨원이 발표한 건국방략의 실업 계획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건국 방략의 실업 계획에서 쑨원은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다음에 국가와 개인 경영의 절충안인 절제 자본이란 형식의 경제 개발을 내세운 바가 있다. 쑨원은 16곳의 항구와 15곳의 어업항, 내하, 연안 개항장 건설, 운하 건설, 철토 유통망 확립 등을 우선 과제로 보았으며 석탄 개발, 시멘트 공장 건설, 제철소 건설 등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총 6단계에 걸쳐 식품, 의복, 건축, 교통 기관, 인쇄 공업 등을 건설하여 중, 경공업을 망라한 다양한 공업을 활성화하고 철도와 도로를 확충하였으며 이를 위해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꽤나 선구적이었다. 장제스와 국민 정부도 쑨원의 구상을 계승하여 이에 입각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게 된다.
북벌로 형식적이나마 통일을 이룬 장제스는 공업화에 앞서 재정 금융 정상화를 비롯한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정부에 안정적 재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나 장제스 이전에 이걸 제대로 한 인물이 없는 게 중국이었다. 어쨌거나 1928년 전국 경제 회의, 전국 재정 회의가 개최되어 국민 정부는 전국 통계 위원회, 전국 예산 위원회, 국가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 통일 등에 착수했으며 국가와 지방의 재정 수입 획분, 관세 자주권 확보, 수입세 인상, 이금 철폐, 통세 개설, 군비 감축16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중화학 공업과 에너지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군대 현대화 계획도 이 시기에 잡혔다. 장제스가 처음으로 집중한 산업은 강철, 세사, 기계 제조, 화학 공업이었는데 이를 위해서 2억 위안이 필요했으나 당시 정부의 재정 규모가 4억 3천만 위안에 불과하여 도무지 조달할 수가 없었다. 1929년에 국민당의 경제 개발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반장 군벌들이나 국민당의 반장 계파들이 잇달아 패퇴하면서 점차 경제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1929년 국민당 제3차 전국 대표 대회의는 민생주의에 입각하여 전국의 재정 행정을 통일하고 국가 행정 경비와 성의 행정 경비를 확정, 국세와 지방세를 획분하고 폐제 통일 원칙을 제기하였으며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경제 개발을 하고 이를 중앙이 보조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사항들은 국민 정부에 의해 추진되게 된다. 또 이 시기의 <훈정시기경제건설실시강요방침안>은 이후 난징 십년의 청사진이 되었다. 여기서 국민당은 교통 개발 - 기본 공업 개발 - 치하, 개항, 수리, 관개, 간척, 이민을 국가의 물질 건설의 순서로 내세웠고 지방에선 지방 교통 사업 - 농림, 목축, 황무지 개간, 수리 - 도시 개량, 공용 위생 건설을 순서로 내세웠다. 또한 이를 위해 세수의 반을 물질 건설 비용으로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련의 계획들이 실행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우선 국민 정부는 수입의 절대다수를 내전과 외채 상환에 쏟아붓고 있어 공업화에 돈을 들일 여유가 전혀 없었고 대공황이 중국을 덮치면서 중국의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농촌의 재생산 구조가 붕괴되면서 경공업 기반의 중국의 공업까지 무너졌고 최대 공업 지대인 만주가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상하이 사변과 러허 사변 등의 일본의 침략 행위 때문에 중국의 타격은 막심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국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그야말로 중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기존 경제 세력들이 큰 타격을 입은 1930년대 역설적으로 국민 정부의 경제 통제 정책이 먹힐 절호의 기회였다. 대공황의 아수라장에 중국에선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환멸이 잇달았고 일본의 침략 행위 때문에 국방 경제 건설에 대한 요구가 드높았다. 국민당은 1935년 대공황 극복을 위한 은행 개혁에 착수했고 1935년 11월 폐재 개혁을 단행하여 개판이 된 물가를 안정화하고 개인 저축을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다. 폐재 개혁으로 국내 자본 유통이 정상화되면서 공업에 대한 투자도 재개되었다. 1936년에 가면 국민 정부의 채권의 신용이 회복되었고 이를 토대로 산업을 건설할 수 있었다.
흔히 난징 10년이라 불리던 시기인 1927~1937년까지 장제스는 온갖 군벌들,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면서도 중국이 트럭, 비행기 등 중공업품을 자체생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쿵샹시의 조언에 따라 양쯔강 수력발전소를 건립해 전력생산에 나서기도 했고, 전국 도로망과 철로를 꾸준히 건설해 사회간접자본을 발전시켰다.
장제스 정권은 내우외환 속에서도 중일전쟁 이전 10년의 기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 6%를 달성하며 꾸준히 산업화를 진행했다. 당시 미국 사절단이 "중국이 광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며 고평가 할 정도.
대만의 공업화
국부천대로 대만으로 도주한 이후에 대만을 공업화시켜 선진국으로의 성장으로 기틀을 닦았다.
한계
장제스가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나를 맞았다. 그리고 귀찮다는 의사가 분명한 표정으로 중국에는 식인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개가 사람을 뜯어먹는 사진을 보여주자 다리를 떨기 시작하더니 신경질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시어도어 화이트
분명 계획은 위대했고 성과도 엄청났으나 장제스의 능력만으로 정리하긴 상황이 너무 막장이었고 피땀 흘려 이룬 성과는 일본의 중일전쟁과 공산당의 국공내전으로 다 날려먹었다.
소위 황금 10년이라 불리는 중화민국 번영기를 구가했던 장제스였지만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부터 내려오던 기근과 피폐한 농촌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건 장제스의 방법론 문제인데 국민당을 지지하는 향신과 중산층 세력들을 척지고 무리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국민당의 기반을 크게 흔드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장제스가 내세웠던 것이 상품 작물 재배 및 농업 기술 발전, 인프라 개발을 비롯한 온건한 방법으로 농민 소득을 확충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토지 개혁과 달리 눈에 확 보이는 정책이 아니므로 쉽게 고평가 받을 수 없고 1931년의 대공황의 타격이 중화민국 전체의 상황인 것처럼 호도가 되면서 1936년 시점에서 중화민국 농촌 경제가 최고점을 찍었던 사실은 잊혀져 버렸다. 이쯤 되면 재수도 더럽게 없다. 게다가 장제스가 발전시켜 놓은 농촌과 도시는 일본군이 다 때려 부숴버림으로 장제스와 중국인들은 국공 내전 시기에 정책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거기에 장제스 자신이 패배의 원인을 민생에 신경 쓰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한탄하는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결국 장제스는 지주와 자본가 눈치를 보면서 농민들 삶을 등한시해버린 지도자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1980년대 이후로는 사료가 발굴되면서 재평가돼서 그런 단순한 평가는 사라지고 있다.
또한 공산당의 준동과 장제스의 전임 지도자들이 맘대로 빌려 쓴 빚과 사사건건 들고일어나는 군벌들이 방해물이 되었다. 1930년대엔 국가 수입의 70%를 채무 상환과 군사비에 쓰고 있었다. 빨리 경제 개발에 예산을 돌려도 모자랄 판에 엄청난 양의 돈이 공산당과 군벌 토벌에 들어갔으니 더 막장... 그렇다고 돈을 안 쓰면 얘들이 총 들고 장제스 잡겠다고 달려올 테니 거기 돈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장제스도 인간이므로 그가 완벽한 정책만 펼쳤을 리도 없고 실책도 있다. 재정과 행정력의 부재로 중국 곳곳의 자연재해와 기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예 정책 실패도 있는데 경제 대공황 시절의 쿵샹시 주도의 경제 정책은 엄청난 타격을 가져왔다.
중일전쟁 때 박살 난 경제를 제때 수습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 실책이며 이는 국공내전 패배의 단초를 가져왔다. 중일전쟁으로 장강 삼각주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당하면서 금은본위제가 붕괴된 마당에 재정 적자를 이유로 화폐를 마구 찍어냈는데, 1936년 화폐 발행량의 100여 배를 넘는 1,890억 원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찍어냈다. 그 바람에 일본군이 계획한 중국 법폐를 대량 위조하여 중국 내 경제 혼란을 일으키려 한 계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일본 위폐 작전 책임자는 중국은 실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나라다라는 비아냥급의 찬사를 남겼고, 일본의 계획은 쇼카쿠급 항공모함 1척의 건조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일단 중일전쟁 시기의 인플레이션은 훗날의 비난과 달리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주요 수입원과 물자 생산 라인이 죄다 파괴되거나 적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부양해야 하는 인구는 증가해 버려서, 문자 그대로 병사들 먹일 식량을 구할 수가 없어 전략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해진 중화민국에서 초인플레이션은 당연히 이건 해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 대혼란을 조기에 극복하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2차 내전의 포문을 열어버린 것은 결국 장제스 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방아쇠로 작용하고 말았다. 장제스는 전쟁이 빨라도 1946년 ~ 1947년까진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고 이기는 방식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이 차례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지 원자탄과 소련군을 콤보로 처맞은 일본이 영토를 한꺼번에 토해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국민당은 피점령지의 치안과 경제 회복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결국 혼란을 야기했는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행정력 복원과 경제재건이 필요했지만 장제스는 당명과제인 전후복구를 해서 지지기반을 먼저 다지는 대신 내전을 재개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초에 막강한 군사력으로 국공내전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였지만 중일전쟁으로 황폐화가 극심했던 중국 경제는 물가상승과 물자부족으로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는 지지층의 이반을 불러일으켜 결국 극도로 불안정했던 국민당 천하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다. 특히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실행한 금원권 개혁의 실패는 국공 내전에서 그의 패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국부천대 이후 뒤늦게 장제스는 공산당을 잡겠다고 토지개혁 및 물가 문제 등 경제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놓은 것을 후회하면서 대만에서의 경제성장에 주력했고 이는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지만, 대만섬 자체가 중국 본토와 비교하면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중공의 경제침체에도 권토중래를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국민당 정권의 부패는 심각했는데 특히 장제스의 인척인 공씨, 송씨 등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이들 4대 가족은 중국 공업력이 요단강 건넌 이후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한 공업력과 자본 확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이들의 세운 공도 많긴 하지만 이들이 너무도 부패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쿵샹시의 가문은 '양자공사'를 통해서 양쯔강을 통한 수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중일 전쟁 중에도 막대한 돈을 뿌리며 미국까지 자식들을 신혼여행 보내는 짓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쑹씨 가문은 미국의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막대한 치부를 했다. 또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점령지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경제 안정화를 위해 실시한 화폐 개혁에 있어서 이들이 끼어들어 환율 장사를 하는 바람에 만주와 중국 동해안 지역에 막대한 빈곤을 초래하였다.
채권 경제의 한계와 경제적 실패
장제스는 대공황시기 투자자들에게 채권을 팔아 재원을 조달했다. 하지만 1933년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서부 주들의 정치적인 요구에 의해 높은 가격에 은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존 화폐를 신뢰하지 않고 은을 보유하던 상하이의 자본가들은 국민당의 채권을 구매하지 않고도 미국에 은을 팔아 확실한 수입을 벌게 되었다. 그러자 1934년 1월부터 8월까지 1억 7천만 달러의 은이 중국을 빠져나가자 중국경제가 대참사에 빠지고 장제스의 군비증강도 둔화되었다.
군사 분야
북벌 시절
장제스는 훗날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쑨원 밑에서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소련군 군사 고문들과 혁명군을 이끌던 시점에서는 청렴하고 규율이 잘 잡힌 군대의 대명사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특히 광둥 군벌 천중밍과 대결하던 시점에선 농민과 노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국민당 군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철도 노동자들이 국민당 수송을 돕는 등 훗날의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국민당과는 가히 천지차이었다.
문제는 장제스가 소련 고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빠른 세력 확장과 중국 통일을 위해 군벌들을 급격히 흡수하면서 시작되었다. 바이충시, 리쭝런, 탕셩즈, 탄옌카이 등의 군벌들이 이때 국민당에 합류했는데 황푸 군관 학교에서 키운 병사들과 달리 이들의 기량이 영 좋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제스의 군사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은 이렇게 급속도로 확장시키면 군사들의 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질보다 양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의 우려는 무시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여러 군벌들과의 이합집산, 매수, 담판, 획책을 통해서 북벌을 수행했는데 당시 중국의 군벌들은 수많은 소규모 군벌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봉건제와 같은 형식으로 한 군벌이 약해질 것 같으면 그 휘하 군벌들이 우르르 상대방에 붙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장제스는 이러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하여 자신을 치려는 자들의 수족을 매수해 조지는 방법을 자주 취했다. 장제스와 맞섰던 천중밍, 장쭝창, 쑨촨팡, 우페이푸, 장쭤린, 장쉐량, 펑위샹, 옌시산, 차이팅카이, 천지탕, 바이충시, 리쭝런 등이 이런 장제스의 계략에 걸려서 하나같이 피를 봤다.
특히 광둥 군벌인 천지탕은 점쟁이에게 장제스와 싸우면 한쪽이 배신으로 날개가 꺾여서 망할 것이란 점괘를 듣고 신나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이 시작되자마자 그의 휘하의 공군 지휘관들이 전부 다 전투기를 몰고 난징으로 몰고 가서 장제스에게 붙었고 육군 지휘관들도 전부 다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홍콩으로 토셨다. 점괘에서 말한 날개가 꺾여 작살나는 건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천지탕은 홍콩으로 달아나야 했다.
930년대 초반
장제스는 이러한 계략을 통해 위안스카이 사후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을 마침내 통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으나...장제스가 빠른 통일을 위해 썼던 방법이 그의 목을 죄게 되었다.
통일 이후 300만에서 최대 1천만에 달했던 국민당군은 대다수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등 군벌 출신의 오합지졸들이었다. 1929년의 '편견 회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고 더불어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최되었다. 당연히 군벌들이 반발하여 회의는 흐지부지되었고 이 반발은 반장 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으로 번졌다.
반장 전쟁을 진압한 후에도 19로군, 천지탕, 리쭝런, 바이충시 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고 공산당의 대장정 중에도 지방 군벌들의 태업 행위가 장제스를 방해했으며 마침내는 시안 사건이라는 쿠데타까지 당했다. 이런 문제는 2차 국공 내전의 패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펑위샹, 왕징웨이 등은 장제스를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광시 군벌 리쭝런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옌시산(염석산, 閻錫山)은 "산시(山西)성 먼로주의"를 선포하고 반독립 정권을 구축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북벌 이후의 편견 회의로 군벌들을 정리하려 했고 초공 작전을 구실로 군벌군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군벌들을 약화시켰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지방 군벌들의 영역에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을 잡는다는 구실로 중앙군을 몰고 눌러앉아 지방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장제스는 이렇게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켰지만 이에 비례하여 군벌들은 장제스를 더욱 믿지 않게 되었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단 것이다. 이는 시안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백만 대군이 있다고 해서 이들이 현대식 무기로 잘 무장한 군대는 아니었고, 오히려 어제까지만 해도 비적질을 하던 도둑떼도 섞여 있고 제대로 된 무장도 못 갖춘 일이 허다했다. 중국의 공업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이들을 잘 무장시킬 수도 없고 훈련이나 규율은 개판이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헬게이트 상황을 타개할 좋은 청사진을 내놓아왔는데 군사 분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해 소련,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최신식 무기와 공장, 군사 고문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유럽식 중앙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플라잉 타이거즈로 대표되는 미국의 도움으로 그럴듯한 공군을 창설하는 데 성공했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과 히틀러의 지원으로 독일식 중앙 사단을 양성했으며 상하이 지역에 강력한 토치카 방어선을 꾸려서 중일 전쟁 이후 2차 상하이 전투의 우쑹 상륙 작전에서 일본군을 개발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도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뛰어난 고문을 파견하는 한편 막대한 차관과 무기를 제공하여 장제스를 도왔다.
외국의 도움을 활용한 장제스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고작 2년도 못되었다. 1935년이 되어서야 장제스는 군비를 증강할 수 있었는데 일본은 1937년에 쳐들어왔다.
중일전쟁
"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간 장제스는 20세기 역사에서 대단히 무능했던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를 좀 더 호의적인 시각으로 볼 이유가 있다.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나라를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분투한 유능한 지도자로 말이다. 최근의 전기 작가들, 특히 전직 미국 외교관 제이 테일러 같은 사람들은 장제스의 결점보다는 그의 훌륭한 자질을 강조하고 그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 특히 재앙에 가까운 일본의 침략 직후에 분투했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리처드 번스타인
독소전쟁 시기 소련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었다면, 중일전쟁 시기 중국에는 장제스가 있었다. 중일전쟁은 장제스가 눈부신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장제스의 실책은 전쟁 초반 중국군 주력을 상하이에서 날려버린 일 정도에 국한되어 있고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면서 항일 항전 의지를 불살랐다. 장제스의 라이벌이었던 왕징웨이 등이 일본에 붙어버리고 자신들의 기반을 고수하려는 이기적인 군벌들의 뒤통수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의 공이었다.
우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투력을 마련했던 것은 독일, 소련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의 군사 정책 덕분이었으며 만주를 거저 주워 먹듯이 했던 일본이 상하이에서 수 만 단위의 사상자를 내며 고전했던 것도 장제스가 항전 의지를 보이고 장제스가 미리 상하이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인 독일식 사단과 중앙군을 아낌없이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상하이 함락 이후 화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강요했을 때 주화파인 왕징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강경파 군벌들까지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낙담했을 때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침략자에 맞서 굴복하는 것은 인민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부하고 일본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장제스다.
상하이에서 장제스는 중국군의 주력 80만 명을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덕분에 중국 경제의 중핵인 중국 동해안과 화북, 화중을 날려야 했다. 그러나 충칭으로 정부를 옮기면서도 장제스는 중국군이 일본군에 포위 섬멸되어 털리는 일을 막아냈고 결국 충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항전을 지휘했다.
장제스가 중일전쟁에서 저평가를 받는 데에는 공산당과 일본뿐만 아니라 스틸웰의 모함도 큰 역할을 했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군벌만 내세우고 공산당 토벌에만 주력했으며 물자를 쌓아놓고 방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중국군은 밀리면서도 타이얼좡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창사에선 세 차례나 일본군 공세를 격퇴했다. 우한 점령 이후에는 바로 난징 등지에 반격을 시도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일본군이 충칭을 먹지 못한 이후는 중국군이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치열한 저항을 해서이지 중국군은 맛이 갔는데 일본군이 등신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한 점령 이후 중국 전선은 충칭, 뤄양 등지를 일본군이 찔러보고 중국군이 깊숙이 그들을 유인하여 기습하여 격퇴하는 일의 무한 반복이었다.
중일전쟁의 중국군에 해가 된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스틸웰이었다.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 이전에 일본군의 공세를 눈치채고 대비를 주장한 것도 장제스였고 허약한 일본군이 반격할리 없다고 그걸 씹고 장제스의 예비대를 버마로 보내버린 것이 스틸웰이다. 스틸웰의 훼방만 아니었어도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늦어도 1944년에 시작됐다. 이후 장제스는 마침내 베이징, 난징, 톈진, 상하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을 다시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중국이 세계 대전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UN 상임이사국 진출에 한몫했다.
다만, 독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장제스 또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이상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적지 않다. 이치고 작전쯤 가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장제스가 휘하 장병들에게 후퇴 없이 결사항전을 할 것을 명해서 피해를 키운 경우도 있었고 2차 국공내전에서 그의 판단은 이해가 안 갈 수준이다.
국공내전
"총사령관이 저지른 거대한 규모의 실패는 비슷한 규모의 성공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조너선 펜비
근대 중국의 국부이자,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장제스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면서 대륙을 날려먹었다.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UN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얻은 장제스는 이제 최후의 숙적인 공산당을 회치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장제스의 그동안의 문제점들의 포텐이 다 터졌다. 부정부패로 인한 경제 위기, 장제스가 그간 애용해 왔던 인생은 한방 전술에 따라 대책도 없이 공산당이 있던 만주를 쳤던 것이며 군벌들 간의 불화이며 기강이 형편없는 군사들이 당하면서 줄줄이 포위 섬멸되거나 마오쩌둥 편에 붙었다.
이로 인해 장제스는 대륙의 지배자에서 대만 섬으로 피눈물 흘리며 달아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장제스의 운이 없던 것도 없던 것이지만 장제스 본인이 지은 실책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평가
"장제스는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용기 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마오쩌둥
장제스와 적대했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당연히 악평 천국이었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했을 때,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장제스의 이름 앞에 "국민당 반동파의 두목이자 중국 인민의 공적(国民党反动派的头子、中国人民的公敌)"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으며, 대륙에서 만들어진 창작물들에선 대부분 악역으로 나온다.
물론 공산당 인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지 민간에서는 난징 10년의 번영을 기억한 탓인지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로 민생이 나락까지 떨어진 1950년대엔 장제스 정권이 나았다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와서 기겁한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벌여 지식인들을 때려잡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도 아닌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은 외국인들에게 난징 시절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향수를 떠들어 주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만약 일반 인민이 그딴 소리했다간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맞아 죽을 발언들이었다.
그래도 중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니만큼 알게 모르게 야심만만하고 비범한 기질을 지닌 당대의 호걸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국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기울어지고 나서는 역으로 장제스 재평가에 중공 정부로서도 큰 부담이 없어져서 지금에서는 공산당 역시 장제스를 재평가하고 있다. 예전에는 공산당의 정적이었던 장제스를 보았다면, 현재는 중국사의 정통성을 가진 정권의 입장에서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던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비단 장제스뿐만 아니라 국민당에 대한 평가가 역시 후한 편인데, 최근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국정제에서 검정제로 바뀌면서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중일 전쟁 단원을 가르칠 때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고, 과거 중국의 영화에서는 중일 전쟁에서 팔로군을 위시한 공산당의 역할만 강조되었다면 2010년에 나온 영화 첩혈고성이나 2011년에 개봉한 진링의 13소녀에선 용맹했던 국민당군의 중일전쟁 때의 활약도 조명되었다.
사실 장제스 집권기 동안 중국 국민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야당은 관제야당만 허용되는 등 대만이 정치제도로 본다면 중국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국가였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중국 내 고위인사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개혁개방 이후로 경제정책을 짜면서 대만과 싱가포르의 경제정책을 많이 참고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21세기 중국은 마오쩌둥이 꿈꾸던 중국보다는 오히려 장제스가 꿈꾸던 중국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
국부천대 전 수도였던 난징에는 지금도 총통부가 보존되어 있고 장제스의 집무실도 장제스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와 함께 멀끔히 전시되어 있다.
2차 대전 이후 중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후난성 즈장 항일 전쟁 기념관에서는 항일 전쟁 영웅으로 장제스의 사진과 청천백일기가 그럴듯하게 전시되고 있다. 덤으로 미국인이 주축이 되었던 플라잉 타이거즈 기념물도 있다.
중국(대륙)인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고 저장성 닝보에 있는 그의 생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31 사실 마오쩌둥에 맞섰던 인물이기에, 그를 높이면 그를 이겼던 마오쩌둥이 더 부각되는 효과도 있고. 장제스 평전의 저자인 조너선 펜비가 중국을 방문하여 장제스 생가의 안내인에게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대학원생이라던 안내인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던 중대한 사람"라고 대답하더니 머뭇거리다가 "마오 주석처럼요."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오늘날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보면 얼마나 장제스에 대한 전향적인 평가인지 생각해볼 만한 일화다.
한편 장제스가 재평가되는 데에는 대만의 범록연맹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존재한다. 90년대 이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이나 하나의 중국에는 동의했지만, 90년대 이후 중화민국이 민주화되고 대만에서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 연맹이 유력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공산당이 그토록 적대해왔던 중국국민당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국민당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인 장제스를 중국 대륙에서도 재평가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에 반대하는 범록연맹을 현재의 중국 국민당과 함께 견제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중국사에서는 새 왕조가 집권하면 전임 왕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장개석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북벌로 전복된 북양정부의 수장들에게 나중에 여러 가지 직위를 추증하거나 수여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중국 역시 현임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전임 정권에 향수를 품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만의 평가
"역사에서 결코 일시적인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난세의 효웅들 가운데도, 일찍이 승리한 적이 있고 일시적으로 세력을 얻기도 하였으나 국가와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안겨줌으로서 결국 만인의 욕을 듣는 결말을 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찍이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실패하기도 했지만, 심지어 그것이 심각한 실패라고 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도리어 국가를 위해 인민을 위해 진정한 공헌을 하고, 인민에게 환영받고 세상 사람들의 찬양을 받았다. 장제스는 의심할 바 없이 후자에 속한다."
랴오부더
대륙 통치기와 달리 대만 통치 시기에는 내전도 없고 타이완에 별 다른 세력도 없어 치안도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비교적 통치체제가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그래서 중국 대륙에 있을 때보다 더욱 강력한 철권통치가 시행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 장제스와 장징궈가 진두지휘한 총통부-국가 안전 회의(NSC)-국가안전국(NSB) - 국방부 군사정보국/법무부 조사국/내정부 경정서/국민당 총정치부 직통 체계는 반체제 세력에 대하여 미국의 CIA처럼 응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지도 않았고, 중공과 평화회담, 민주주의, 민생 등에 대해 요구하면 당장 투옥되었다.
아울러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국가에서 총력전을 명분으로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모조리 탄압했으며, '공비의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발효했다. 전국적인 총선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중화민국 사법원의 대법관들을 움직여서 헌법 재판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국회 격인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총선거를 중지했다. 당시의 중화민국 헌법에 따르면, 국민 대회에서 총통을 간접 선거로 선출했다. 1940년대에 중국 대륙의 선거구에서 남녀노소 인민들의 투표로 선출한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국회 의원들은 종신직으로 일했으니,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장제스는 한평생 총통을 할 수가 있었다. 당연히 중앙 정부의 선거 제도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보궐' 선거였다. 대만에 무협지가 많이 나왔던 이유도, 수많은 문인들이 독재에 염증을 느껴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무협지를 썼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본성인을 차별하고 본성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사는 철저히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민주화 이후 대만 정치 양극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중화 민족주의를 우선시한 결과 민주화 이후 범람연맹은 상당한 친중공 성향으로 기울었고, 민주화 운동 진영은 대만 독립 운동에 기울었다.
타이완에서는 그의 행적을 어느쪽에 관심을 보이냐에 대해서 달라진다. 경제 성장을 위시로 한 업적을 강조하는 쪽은 일제의 잔재를 뿌리치고 공산주의의 손에서 대만을 수호하며 경제를 활성화시켰다면서 치켜세우는 반면, 독재 정치의 폐해를 강조하는 쪽은 계엄령을 내리며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26년간이나 혼자서 다해먹은 독재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만 국공내전에서 패배당한 뼈아픈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토지개혁 등 분배정책은 철저하게 진행했고 국영기업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정책을 진행했는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 대만의 고도성장이 진행되면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만은 연 평균 8%대의 고도성장이 진행되었다. 다만 똑같이 경제성장을 지향했기는 했지만 장제스의 대만 경제 정책은 중소 기업 다수였던 특성도 있고, 대륙에서 물가통제에 실패한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대만통치 시에는 고금리 정책을 펴는 등 안정을 더 강조했다. 그래서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은 비슷하지만 비교적 안정 지향이었던 장제스, 비교적 성장 지향적이었던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차이가 있지만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던 점에서 많은 비교-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으로 쫓겨간 이후 이미 국력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정체성을 끝까지 무시하고 하나의 중국, 중화민국 정통론에 기반한 반공 외교를 밀어붙여 외교 관계가 줄줄이 소멸, 고립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계엄령 기간 동안의 대만이 항상 프리덤 하우스의 (측정기간 이후로) 자유에 관련된 수치에서 꾸준히 최하위 점수를 받은 점을 보면, 대륙보다야 상대적으로는 덜하다고 해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버린 철권통치였다는 점도 그가 비판받는 요지 중 하나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 대만에서 그의 위상은 전과 같지 않다. 2015년 2.28 유혈사태 추모일을 앞두고 중정 기념당에 세워진 장제스 동상에 계란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을 정도. 뭐 사실 계란을 던지는 정도는 양반이고, 관련 유적지에 대한 방화나 동상 파괴37까지 일어나고 있다. 급기야 2018년 2.28 추모일에는 아예 장제스 유해가 안치된 타오위안 묘지까지 난입해 그의 관에 페인트를 뿌리는 공개적 고인능욕을 저지르는 일마저 벌어졌다.
한편 장제스가 비판받는 현상에는 대만의 탈중국화 및 독자성 강화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과 대만을 별개로 생각한다면 장제스가 중국에서 이룬 업적38들은 사실 중국과는 구분되는 대만에서는 큰 의미가 없고, 대만에서 장제스가 이룬 업적으로 거론되는 것들, 예를 들어 대만의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 발전은 본성인을 공공연히 차별하고 학살한 '침략자'로서 달성했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유 때문에 양안관계에서 희한하게도 장제스는 현대 들어와선 오히려 대륙에서 더 높게 평가받고, 대만에선 격하되어가고 있다. 대륙에서야 냉전기의 살벌한 체제대립도 실질적으로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고, 그 시대 국공대립의 당사자들이 늙어 죽으면서 오히려 현대와서 민족주의, 경제성장, 항일 투쟁 같은 점은 갈수록 오히려 공산당이 은연중에 장제스의 계획이나 비전 등을 참조한 면도 부각되는 반면, 대만에서 장제스에 대한 추종은 전적으로 중화민국 정통사관에서 근거하는데 문제는 이 중화민국 정통사관 자체가 현대 대만에서는 급격하게 위축되어가고 있다. 대만과 중국이 완전히 별개라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 시대의 대만인들에게 있어서 장제스가 중국 본토에서 항일을 열심히 했네 이런것은 큰 의미도 없이 그냥 사람많이 죽인 독재자라는 것이다.
특히 장제스는 대만 계엄령을 내린 후 대만 내 본성인들과 원주민들 문화를 탄압하고 본토 중국화시킴으로써 원주민 문화와 토착 객가인(본성인) 문화가 말살되기도 하였고, 현재까지도 완전히 복원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학술적으로 '문화적 제노사이드'라고 하는데 비슷한 사례는 한반도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 탄압과 창씨개명도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분류된다. 일제의 대만 통치는 한반도보다 훨씬 온건한 반면, 냉전 시기 독재 강도는 대한민국 역대 독재정권보다 더 권위주의적이였기 때문에39 대만 본성인들 입장에서는 장제스가 되려 일제보다 더 폭압적인 식민자로 느껴질 수 있다. 장제스가 이러한 정책을 편 이유는 대륙수복에 대한 집착 때문이였는데, 그러려면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최대한 없애고 '중국인'(중화민국 국민)정체성을 강하게 심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국부천대 이전 여전히 대륙에 살던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공산당 치하 대륙을 해방과 수복의 대상으로 보던 세대는 실시간으로 늙어 죽어가는 반면 젊은 대만인은 엄연히 실질적인 '외국'으로 인식하고 자랐던 중국 대륙 본토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지기 힘들다. 현대 대만의 국민당도 이런 세대 변화에 따라서 젊은 당원들은 이런 시시콜콜하면서도 대중 유권자에겐 별로 와닿지도 않는 정통성 문제보다 당장의 경제문제나 상대 민진당의 실책 같은 점을 강조하는 편이다. 따라서 장제스의 현대 역사적 위상은 냉전 당시 장제스를 국부로 추앙하고 떠받들던 (혹은 그러도록 강요당했던) 대만인들은 중정기념당도 '민주주의 기념관'으로 뜯어고치는 등 오히려 갈수록 격하하는 반면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장제스를 부각하는 중국공산당이 긍정하는 희한한 변화를 겪고있는 중이다.
총평
공산당의 마오쩌둥에게 패했기 때문에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라는 오해를 샀지만 장제스와 그의 시대는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장제스가 중국을 운영했던 시기는 매우 험난한 시대였다. 안으로는 신해혁명 이래 군벌들의 난립으로 분리된 중국을 통합시키고 공산당의 도전을 격파해야했으며 바깥으로는 각국과의 외교 관계를 조율해 청나라 이후로 침체된 중국의 위상을 재정립시키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야만 했다. 흔히 장제스의 시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시 국민정부가 자신의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막아내기에도 벅찼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공산당의 공격에 맞서자마자 국민당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야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곧바로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냐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1937년 일본의 파상 공세 앞에서 중국이 어떤 길을 나아가야 하냐를 결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2차 상하이 사변, 허베이, 왕징웨이 괴뢰 정권, 버마 함락으로 인한 외부와의 고립, 엄청난 인플레이션, 공산당과의 불편한 협력 등의 난제가 있었고 그 난제들로 인한 혼란을 개선시키기도 전에 중일 전쟁에서 승리를 맞이하면서 공산당과의 관계를 청산해야만 했다. 이러한 난제를 결국에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결국 작은 섬에 웅거하는 결말을 맞았지만, 자본주의적으로 부강해진 중국이라는 청사진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40 21세기 중국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41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지도자라고도 할 수 있다.
장제스의 청사진은 결국 그걸 실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중단되었으나 그러한 청사진은 충칭에서 8년의 장기 항전을 이루고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할만한 고도의 경제 성장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장제스는 쑨원이 계획하던 혁명의 청사진을 완성함으로서 청나라를 대체할 새로운 국민 국가를 창설해냈으며 내셔널리즘을 통해 하나의 중국의 기원을 닦았고, 바깥으로는 중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만들고 일본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서 현대 중국의 개척자라는 표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이루었다.
오늘날 장제스가 비판받고 마오쩌둥이 여전히 신격화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상에서 그가 걸어간 길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체제의 차이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마오쩌둥이 레닌의 건국 역할과 스탈린의 대조국 전쟁 승전의 역할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이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반면 민주주의가 정착된 대만에서는 장제스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우며, 또한 장제스는 해석하기에 따라 대만에 기여한 게 별로 없이 학살과 탄압만 반복해온 독재자로도 볼 수 있다. 더불어 대만에서는 양안통일과 대만 독립이라는 정치적 난제까지 겹쳐, 장제스가 역사 속에서도 비판받고 있다.
물론 문제점도 뚜렷하다. 자신의 통치 대부분의 기간을 독재로 일관하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1937년 12월에 중화민국 헌법 반포를 준비하고 있었고 중일 전쟁 기간에도 각지의 의견을 모은 국민 참정회가 존재했으며 1947년의 입법원 선거는 전국에서 실시되었다는 점을 들어 장제스 개인이 민주주의에 무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옹호하는 시각도 있으나 2.28 사건, 백색 공포를 비롯해 국민과 반대파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학살한 과오는 결코 지울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중화민국의 탄생배경도 300년 가까이 청나라의 만주족들에게 억압당한 한족의 부흥을 위한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인해 생겨난건데 정작 장제스는 같은 한족인 대만 본성인들을 2.28사건과 계엄령으로 억압했다.
장제스와 타 정치인의 관계
천치메이
천치메이는 장제스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인물로 장제스의 형이자 사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장제스는 그를 위해서 그의 정적을 병원에서 쏘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맹렬히 추종했다. 천치메이도 장제스를 아꼈고 그에게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들과 인맥을 쌓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천치메이가 암살된 이후 장제스는 그야말로 한동안 폐인이 되어 상하이의 홍등가를 뒹굴고 다니면서 술과 여자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천치메이의 조카들인 천리푸와 천궈푸를 최측근으로 삼아 총애했다.
쑨원
장제스와 쑨원의 본격적인 인연은 장제스가 천중밍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구하면서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천중밍과 대립하던 처지라서 그와 연합하던 쑨원에게 크게 실망했고 쑨원도 장제스에게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로 장제스는 쑨원의 측근이 되었다.
쑨원은 천치메이가 죽은 이후 장제스가 복종한 마지막 인물로 장제스는 거의 병적으로 쑨원의 신임을 갈구했다. 소련행을 자처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고자 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왜 믿지 않냐고 거의 애원하기까지 했다. 장제스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들에 쑨원은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대처해야 했다. 이후 장제스는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을 맡는 등 국민당의 간부가 되었고 쑨원이 가장 믿는 심복 중 한명의 위치에까지 오르지만 쑨원의 정치적 후계자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쑨원이 죽은 이후 장제스는 쑨원의 처제인 쑹메이링과 결혼하는 등 자신과 쑨원의 연계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죽을 때까지 자신을 쑨원의 후계자로 자처했다.
왕징웨이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면 놀라겠지만 원래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친밀하여 국민당의 온건 좌익 성향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쑨원 사후 한동안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왕징웨이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후 쑨원의 비서이자 국민당의 대표적 좌익인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국민당 우파인 후한민과 쉬충즈를 모두 숙청하였다. 이렇듯 매우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 이것이 1차로 폭발한 것이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다는 구실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고문들과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다가 다시 풀어주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은 장제스가 단순한 왕징웨이의 똘마니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왕징웨이는 공직에서 사임하고 유럽으로 외유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우한과 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천도논쟁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반대파들에 의한 자신의 실각을 병적으로 겁내던 장제스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의 해임을 요구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끝내달라고 제안했으나,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채 장제스의 대립하던 우한으로 가버렸다. 결국 장제스는 결국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일단은 장제스에 협조하던 왕징웨이는 당연히 경악했고,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장제스가 세운 난징 국민정부와 대립했다.
국민정부가 둘로 나뉘었어도 북양군벌 장쭤린의 공격으로 둘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우한 정부는 난징 정부를 공격하러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난징 정부가 쑨촨팡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고 우한 정부도 국공결렬을 결정하여 대립할 이유가 없어지자 결국 왕징웨이와 장제스는 각자의 정부를 합치는 영한합작을 이루었지만 둘의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2
나중에도 장제스는 자신에게 부족한 정치적 명망을, 왕징웨이는 자신이 없는 군사력을 보완하려 몇 번이나 장왕합작을 이룩하였으나, 무력을 보유한 장제스의 지분과 영향력이 왕징웨이를 압도했고, 장제스는 이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왕징웨이를 견제했다.3 때문에 왕징웨이는 명목상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권한을 가질 수 없었고,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관계는 좋을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때 겪은 좌절과 실패가 추후 친일 행보를 불러왔다고 평가할 정도.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왕징웨이는 중국이 사는 길은 일본에 협력하는 것뿐이라 굳게 믿고 일본에 붙었고 자신의 무덤을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철옹성같이 만들었지만 장제스는 무덤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버렸다.
선통제
1928년 장제스는 2차 북벌로 베이징을 점령하고, 1931년 천진사변 이후 선통제가 만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자 11월 초, 청조 사학관 출신의 옛 유신인 고우당을 푸이에게 파견하였다. 고우당은 장제스로부터 1924년 펑위샹이 없애버린 청실우대조건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매년, 혹은 한꺼번에 우대비를 지급할 테니 원하는 액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주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어느 곳이던지 푸이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선통제는 동릉 도굴 사건 때문에 국민당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이미 일본인들이 부추긴 만주 황제가 될 꿈에 사로잡혀 있어 냉소하면서 이제서야 겨우 우대를 생각하느냐며 빈정댔다. 이 때 선통제의 장제스에 대한 평은 이러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완이 악랄하고 지독하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발처(髮妻)를 버리고 천하디천한 미국의 앞잡이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결혼한,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 일본이 두렵다 보니 나와 일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안달이다. 내가 장의 말을 수용하면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황제 칭호 주고, 나를 농락한 후 제거할 심산이다. 답변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선통제는 끝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주로 탈출,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둘은 장제스가 1920년대에 소련에 가던 때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장제스는 스탈린 대신에 레프 트로츠키를 만나긴 했지만 국민당과 소련의 협력 관계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 커넥션은 유지되었다. 친소파로 인식되던 장제스에게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스탈린은 한동안 공산당에 국민당과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며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상하이 쿠데타 이후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바꾸어 국민당 내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의 자체 무력을 갖추어 국민당을 장악할 것을 지시하여 왕징웨이 - 공산당 합작까지 깨고 만다. 한동안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을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악취가 가시지 않은 화장실 같은 곳이라고 디스해댔으며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모두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4
하지만 몇 년 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마오쩌둥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처럼 스탈린과 장제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는 1차 국공 내전과 대장정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이 소련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들을 모조리 숙청했기 때문이다.5이 우호 관계는 유지되었으며 국공내전으로 장제스가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굳이 따지자면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의 편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장제스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6 소련은 즉각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 연을 끊었다.
조지프 스틸웰
장제스와 미국에서 파견한 군사 고문이자 버마 - 중국 전역 연합국 총참모장7인 스틸웰 대장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스틸웰은 인종 차별주의자였으며8 서로가 독선적이라 의견 충돌이 잦았다. 이렇게 양측이 계속 반발하다가 1944년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군수 물자와 전략 예비대인 Y군의 파병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책임을 장제스에게 떠넘기면서 양측의 관계는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후 스틸웰은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이에 분노가 폭발한 장제스는 미국 정부에 스틸웰을 선택할 것이냐, 중국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최후 통첩을 날렸다. 결국 스틸웰은 해임되었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가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스틸웰은 유능한 장군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어 잘 한다는 이유로 미중 우호 관계를 상징하기 위해 보낸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고 처음으로 대규모 전선을 지휘해보자 자신의 능력 밖의 황당한 지시만 내렸다. 스틸웰의 본래 임무는 미중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에 국민당은 멍청하며 공산당 잡을 생각만 하고 비겁하다고 이간질했으며 전략적으로도 일본군 공세를 앞두고 중국군 예비대와 정예 부대를 빼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소모시키는 행동만 반복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야전에서의 승부를 노래 불렀고 장제스의 지연전,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을 미개하다고 비웃었는데 정작 그는 버마에서 자신이 그리 좋아하던 야전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남 탓만 했다.
마오쩌둥
유방 vs 항우, 조조 vs 유비, 주원장 vs 진우량에 못지 않을 역사적 라이벌 중의 하나다.
1차 국공 합작이 파기된 이후로 장제스는 평생 마오쩌둥을 잡아 죽이거나 국민당의 밑에 복종시키려 했고 한번도 그를 믿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차 국공 합작 시기에 마오쩌둥이 몇번 황포 군관 학교에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후일 장제스는 '씻지도 않는 놈이 경전은 줄줄 외운다'라고 하면서 불쾌해했다.
결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싸움이 계속되던 와중에 호남군벌 허젠이 1930년 리리싼의 지시로 창사 폭동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오쩌둥과 떨어져 지내던 첫 아내 양카이후이를 체포해 처형했다. 정강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마오쩌둥은 당시 허쯔전과 결혼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양카이후이의 처형 소식을 들었을 때 통곡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짓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가적으로 그녀를 추모하는 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 후에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이는 미국의 중재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평화 협상을 위해 만난 것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장 위원장(장제스를 지칭) 만세"를 삼창하고, 기자들에게는 자신은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제스를 존경하며 그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천명해 국공 양당의 휴전 합의를 이뤄내기도 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돌아가자마자 이 협정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 협정을 무효화했다. 결국 분노한 국민당 측은 공산당을 공격한다.
이후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감에 따라 둘의 관계는 끝장났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라이벌로 여기면서도 고평가했고, 이는 장제스가 권토중래를 꿈꾸면서도 마오쩌둥을 평할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원수처럼 지냈지만 동시에 서로를 인정한 것이다. 미중관계가 회복될 때 미국 기자에게 장제스를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용기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장제스가 죽었을 때는 충격을 받았는지 하루 종일 장송곡을 틀고 그 음악을 듣고 있기도 했다.
사실 마오쩌둥이 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은 장제스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공산당에는 마오쩌둥보다 더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고, 마오쩌둥은 거기에 명함도 못내미는 미미한 존재였는데,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400명의 공산당 엘리트를 사살했고, 대장정 당시 공산당을 추격하던 장제스가 유난히 마오쩌둥 스타일의 게릴라전에 취약한 지휘관이어서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을 키워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장제스는 하필 중국공산당 내에서 머리 좋은 자들만 골라 몰살시켰다. 다만 마오쩌둥도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엘리트였기도 했고, 지도력과 문장력, 정무감각은 매우 좋아, 이걸 바탕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장제스 덕뿐이라곤 할수는 없다. 두차례씩이나 나라를 말아먹어서 악평을 들을뿐이었다.
국공결렬 이후 둘은 원수로 지내기는 했지만, 중화주의자라는 면에서는 일치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각자 대만과 중국에서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현재 중국인들과 대만인들은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어서 언어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1974년에 남베트남이 서사군도를 점령하자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북경이 만약 개입하지 않으면 우리가 서사군도를 탈환하겠다"고 전문을 보내었고, 이를 받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해군육전대를 보내서 남베트남군을 축출하고 서사군도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중국 해군이 대만해협을 통과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14 사실 남중국해의 논쟁의 발단은 장제스가 1947년 그어놓은 8단선 때문이며, 장제스를 대륙에서 축출한 중공정부는 이것을 보완해서 9단선을 만들었으니, 이 문제만큼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입장이 일치하는 셈이다.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인연은 저우언라이 -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가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이었을 때 저우언라이는 학교 정치 주임이었다. 정치 주임은 학교에 배치된 정치장교. 둘은 매일 같이 아침을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고 저우언라이가 후에 밝힌 바 있다.16
이때는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 소속 정치 장교로서 국민당의 이념인 삼민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황포 군관 학교에서 국민당 일을 하면서도 장제스 모르게 비밀리에 학생들을 포섭하여 학교 내에 공산당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
어쨌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각별히 여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두려고 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성향을 눈치챈 저우언라이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둘이 틀어지게 된 계기는 중산함 사건18인데 저우언라이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장제스를 배신한다. 이후 둘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공산주의자의 거물로 장제스에게 상하이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저우언라이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국민당군에 한번 사로잡히는데 장제스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수였다. 다만 이 시기의 기록이 부정확해서 체포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해방구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시안 사건 때로 장제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타난 저우언라이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우린 적이지만 자네를 잊은 적이 없네,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일할 날이 오길 바라겠네."라고 말하였다. 이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장제스와 자주 회동했지만 국공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고 결국 둘은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결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으로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가게 된다.
장쉐량
장제스의 적이면서도 동지였던 인물이다. 국민당이 만주를 차지하는데 정통성을 부여했으며, 반장 전쟁 당시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HP 1 남은 마오쩌둥에 마지막 한 방만 날리면 되는 상황에서 취소시킨 주역이다.
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은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게 되지만 바로 다음 해 중일전쟁이 발발, 국민당의 천도가 계속되면서 장쉐량도 계속 거처지를 옮기게 된다. 어찌됐건 장쉐량은 만주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전쟁 때 장제스는 비록 전에는 적이었어도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나름 너그럽게 봐줬지만 장쉐량은 예외였으므로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시안 사건을 기점으로 완벽히 몰락하게 된다.
2차 대전 종전 후 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국부천대까지 이뤄졌지만 장쉐량은 감옥에서 수감 생활 하는 것에서 가택 연금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묶여있었고 오죽하면 1953년 장제스 생일에 장쉐량이 시계를 선물로 보내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는 메시지를 보낸 데 대해 장제스가 낚시대를 보내 암묵적으로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때워라."라는 답을 줬을 정도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가 죽기 직전에 아들 장징궈에게 남긴 말 중 하나가 "장쉐량을 절대 풀어주지 말 것"이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니 원한이 정말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장제스가 죽은 후 후계자였던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는 계엄 해제에 민주진보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줄 정도로 민주화에 힘썼지만 장쉐량은 예외였고 그대로 연금 생활이 지속되다가 장징궈도 죽은 후 후임 총통인 리덩후이 시기에서야 연금이 풀린다. 이때가 1993년으로, 1937년 부터 수감 및 연금 생활을 했으니 56년 동안 감옥과 가택연금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장쉐량은 반 세기동안 대륙, 그리고 대만에서도 갇힌 상태로 지내다 석방 후 10여 년 정도를 더 살고 2001년에 103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사망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처음엔 괜찮았다. 루즈벨트는 중국에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장제스를 지원하지 말자는 미 육군의 조언을 물리치고 대중 지원을 승인했으며 장제스에게 수차례 친전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를 만난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그동안 자신이 상상하던 카리스마나 패기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소통 부재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루즈벨트는 장제스가 항일 의사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스틸웰의 곡해가 중간에 개입되면서 더욱 틀어졌고 말년에는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일을 의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마지막까지 장제스를 지원했고 루즈벨트가 죽었단 소식에 장제스는 후임 지도자인 트루먼이 지원을 줄이거나 아예 그만두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특히 장제스가 우려한 것은 트루먼이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실수로 망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국부천대 직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에 맞서 만주 핵폭격 및 50만 국민당군 화남상륙을 계획했다. 장제스 에겐 대륙수복의 적기였지만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해 버렸고 이제는 누구도 대만이 대륙의 한자락 땅이라도 얻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고위층에도 대륙 출신이 줄어들고 대만 본성인이 늘어나는 현재에는 오히려 대만의 탈중화 가능성이 높아지는 중이다.
장제스 본인은 루즈벨트에 꽤 호감을 품은 모양으로 루즈벨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윈스턴 처칠
꽤 험악했지만 상대방이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했다. 윈스턴 처칠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자였고 장제스는 영국을 침략자들로 보아 매우 혐오했다. 이후 홍콩 문제나 조계지 문제로 영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협력 관계가 된 후에도 영국은 장제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할까봐 중국과 험악한 사이였다. 또한 전후 처리에(특히 일본의 식민지 처리)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장제스는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처칠은 이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이었고 장제스가 만주, 타이완의 회복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재점령' 야욕이라고 상당히 좋지 않게 보았다. 게다가 처칠은 끝까지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불러오는 것을 반대했으며22 불러온 다음에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자는 입장으로 중국을 우습게 봤고 결국 중영의 험악한 관계는 카이로 회담 내내 지속되었다. 그래도 처칠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하다고 평가했다. 또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난 것은 애석한 일이며 자신은 카이로에서 장제스, 쑹메이링과 촬영한 기념 사진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등 나름의 애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장제스도 처칠을 제국주의자 우두머리라고 욕하곤 했으며 카이로 회담 도중에는 이런 악감정이 더 심해져서 루스벨트와 동렬에 놓을 수 없으며 속이 좁고 교활하며 이기적이며 완고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 이후에는 처칠이 그래도 걸물이라고 인정했다.
이승만
장제스는 자신의 후원을 받던 김구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지지했고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47년 이승만이 난징을 방문하면서 이승만·장제스 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장제스는 이승만의 기백과 반공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49년 국부천대라는 상황 변화가 생기면서 이승만과 장제스의 관계도 바뀌어 나갔다. 장제스는 1949년 8월 대한민국을 최초로 방문한 외국의 정상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요청에 따라서 경상남도 진해에서 이승만과 장제스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차라리 마오쩌둥과 협상하겠다고 위협하여 장제스가 데꿀멍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2023년, 법원 판결을 통해 대만 국사관으로 반환된 장제스 일기를 보면 그러한 내용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장제스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자신을 극진히 대접했다면서 큰 호의를 표하고 있다.
이승만과 장제스는 반공노선을 지향하였고 각각 공산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데다 미국을 압박하여 지원을 이끌어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도로 좋아졌다.
진해회담 당시 장제스는 수도인 남경을 공산군에 내주고(1949년 4월) 광저우에 가 있을 때였는데, 대륙 수복을 위해 제주도에 중국의 해공군 기지를 세울 수 있을지를 문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국공내전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이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제스는 1949년 10월 1일 베이징(당시는 베이핑)에서 열리는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식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중화민국 국군의 전투기들의 행동반경이 짧았기 때문에 부산을 경유하여 베이징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부는 마찬가지의 이유로 거절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장제스는 즉시 이승만에게 전화를 걸어 위문하고 격려했으며 쑨리런이 지휘하는 최정예부대를 남한에 파견하려 했다. 맥아더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강경히 반대했고 장제스는 애치슨을 비열한 소인배라고 저주하였다. 이승만과의 연대는 계속 유지되어 이후 반공포로 석방사건이 있자 장제스는 크게 감격하여 이승만은 한반도의 유일한 혁명적 지도자라고 극찬하였다.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반공연맹, 집단안보체제 수립 구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으며 정치적 연대는 지속되었다.
김구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게 선택받은 독립운동가였다면 장제스가 손잡은 독립운동가는 김구였다고 할 수 있다. 훙커우 의거 이후 장제스는 김구의 최대 후원자였고 장제스는 김구가 죽은 이후에도 김구를 항일 동지라고 높였으며 김신을 집안 사람처럼 대우하는 등 김구와 자신의 인연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조직하자 1941년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만들어 국민당군의 통제하에 두려 하였는데 그 이유가 광복군이 일종의 군벌화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풀린 것은 1944년이다. 그러나 이건 장제스 입장까지 고려하면 일방적으로 비판하기도 애매한 게, 원래 국가지도자 입장에서 난민이란 존재 자체가 상당한 리스크고, 특히 일제 같이 팽창주의적 야욕이 강한 이웃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안그래도 자국 내에선 실질적으론 본인 통제가 안되는 무장집단이 많아서 골칫거리인 장제스 입장에선 항일이란 정치적 입장은 고려해도 또다른, 그것도 외국인 무장집단의 국내활동을 용인하는 거 자체가 상당한 위험요소였다.
개인적인 감정도 상당히 호감이 깊어서, 김구의 아들인 김신이 1963년 한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타이완에 쌀 5만 톤을 구하러 갔을 때 처음에는 대만 정부관리들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김구를 각별하게 생각한 장제스의 특별 지시에 의해 한방에 성사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박정희
국부천대 이후 대만(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이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에 맞서는 최일선이 되어버리자 양국의 실권자이던 장제스와 박정희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특히 이 시기 대한민국은 한참 경제발전 도상에 있어서 대만의 정치, 사회, 문화를 많이 참고했다. 장제스의 일생 중에서는 거의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타이베이의 중정기념당에 가 보면 박정희와 찍은 사진도 있다. 박정희와 장제스는 통치 스타일이 비슷했다. 둘 다 군인 출신으로 반공을 기치로 반대파를 억압하고 독재를 정당화하였으며, 각각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실존하는 위협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은 혈맹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나쁠래야 나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동원 장관에 따르면 장제스는 박정희가 대만에 귀빈으로 방문하면 직접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주며, 권력가의 힘이란 칼을 뽑을 때보다 칼이 꽂혀있는 자체의 권위가 힘이 있으며, 인재는 찾기 어려우니 인재 찾기에 힘쓰고,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지도자는 덕망을 갖추고 사생활도 깨끗해야한다..라는 본인의 시행착오에서 우러나오는 가르침을 손수 전수했다고 한다. 나이 차도 나이 차이지만 박정희 역시 장제스를 반공 진영의 큰 어른으로 존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도조 히데키 등의 일본 제국 지도자들
당연하지만 중일전쟁으로 인해 이쪽들과는 그냥 적이었다. 도조 히데키의 경우 1942년 홍콩과 싱가포르가 연달아 함락하자 제국의회에서 대놓고 고립무원상태에 놓여있는 중경정권24은 이제 무너질 일만 남았다고 자축하는 연설을 했을 정도.
호찌민
1942년 호찌민이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국민혁명군에 체포되어 18개월간 구금당한 적이 있다. 장제스는 호찌민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 대신 장제스는 베트남 국민당 등 비공산계열의 베트남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했다. 장제스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독립하자 태도를 바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25에게 호찌민과 협상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5년 중화민국이 베트남 공화국과 수교하며 다시 틀어져 버렸다.
그 외의 군벌들
리쭝런(이종인): 장제스의 가장 오래된 군벌 동지임과 동시에 최대 정적 중 하나. 반란을 거듭하다가 중일 전쟁 직전에 다시 한편이 되었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국공 내전 중에 장제스는 이 양반에게 총통 자리까지 잠시 내줘야 했다. 하지만 대만으로 망명한 후, 다시 오너가 자리를 잡자 리쭝런은 축출되어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서 생활고를 겪던 중 중공 측이 접근해 좋은 대우를 약속하자 대륙으로 귀환하여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바이충시(백숭희): 리쭝런과 함께 광시계 군벌로서, 장제스에 반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신용하지 않았다. 작은 제갈량이라 불리는 뛰어난 능력으로 여러 차례 중일 전쟁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런 반역 경력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라는 스틸웰의 제안을 거부하고, 심복 허잉친(하응흠)을 이 자리에 앉혔는데, 허잉친은 바이충시보다도 훨씬 역량이 뒤졌다. 그래도 바이충시는 반역 경험에 비하면 꽤 중용되어 5전구 참모장, 군훈 부장, 구이린 행영 주임을 전쟁 기간 동안 역임했고 전후엔 초대 군정 부장이 되었으며 동북 초비 사령관이 되어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했다. 장제스의 삽질로 국공 내전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화중에서 최후의 항전을 지휘하며 창사에서 린뱌오 군대를 개발살내는 등 공산당과의 전투에서도 여러차례 승전을 거두었지만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최후의 전역인 하이난 섬 방어에 실패하고 리쭝런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대만으로 갔으나 별 볼일 없이 지냈다.
옌시산(염석산): 역시나 장제스와는 반목과 동맹을 반복한 군벌 중 하나. 산시의 개인 왕국에서 떵떵거렸으나 처음에는 일본군,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결국 영지를 잃어버리고 장제스에게 달려갔다. 국부천대 이후에는 실권없는 자리에서 조용히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펑위샹(풍옥상): 장제스와 동맹과 반목을 반복했던 수많은 적들 중 하나. 국공 내전 후반기인 1948년에 소련 선박을 타고 귀국하다가 흑해에서 화재로 죽었다고 한다. 크리스천 제너럴, 즉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했으며26 군벌 중에선 도덕적이고 소탈한 사람이라서 누가 보면 대군벌이 아닌 노동자나 졸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한다. 장제스와 왕징웨이 사이를 저울질하다 장제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반장 전쟁에서 장제스와 반목했고 이후 다시 합쳤다. 국민당의 거물 중에서도 강경한 인물로 봉천파나 일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다.
천중밍(진형명): 장제스가 가장 싫어했던 군벌. 장제스의 절강성 사투리27 때문에 그는 늘 천중밍의 광둥 출신 참모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고 천중밍이 공공연하게 쑨원을 허풍선이라고 비방하는 통에 쑨원을 존경하던 장제스는 그때마다 반발했다. 쑨원은 장제스와 천중밍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지만 둘 다 거부했다. 장제스는 천중밍과의 관계를 끊으라 했고 천중밍은 반대로 저 무뢰배를 내쫓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천중밍이 선빵을 때리면서 쑨원과 천중밍의 관계는 틀어졌고28 이후 천중밍은 국민당의 첫번째 공격 목표가 되어 두들겨맞고 패망한다.
천지탕(진제당): 광둥의 군벌. 군벌 중에선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한 편이었으나 장제스 밑에 들어가고 나서도 장제스의 인형을 참수하며 장제스에게 노골적인 반항심을 드러낸 인물. 결국 미신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쫄딱 망했다.
장제스의 추종자 젭 부시 & 대미관계
의외로 장제스의 추종자 중에서 미국의 정치인 젭 부시가 있다. 젭 부시는 장제스를 전설의 신비로운 전사라고 표현하곤 한다. 2005년 당시 자신을 삼촌처럼 따르던 신참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에게 검을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이 장제스를 찬양했다.
“I told you that we were going to ‘unleash Chang’ on the election. And Marco, being a relatively young guy, didn’t know who Chang was. Chang was a mystical warrior. Chang is someone who believes in Conservative principles, believes in entrepreneurial capitalism, believes in moral values that underpin a free society. I rely on Chang with great regularity in my public life ... Chang, this mystical warrior, has never let me down. I’m going to bestow to you the sword of a great conservative warrior. I know that Chang won’t let you down, and you won’t let him down either.”
"나는 일찍이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장제스를 출정시킬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리고 마르코는 아직 상대적으로 젊어서 장제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장제스는 신비로운 전사였다. 장제스는 보수의 원칙을 믿고 자유 시장의 기업가적 정신을 믿고, 자유로운 사회의 버팀목이 될 도덕적 가치를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공직생활 동안 자주 장제스에게 의지했었다. 신비로운 전사 장제스는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나는 이제 자네에게 위대한 보수주의 전사의 칼을 수여하겠다. 나는 장제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며 자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훗날 젭 부시가 2016년 대권주자로 출마하면서 미국 정가에서 이 이벤트를 발굴해서 다시 주목은 했으나 별로 평은 좋지 않았다. 당장 젭 부시 항목 자체가 보여주듯 미국에선 본인부터 상대방인 민주당 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에서도 힘 빠지는(Low Energy) 놈이라고 평가받는데, 애초에 'Unleash Chang'이란 표현 자체가 아버지 부시가 국공내전 직후 중미간 외교관으로 일하던 시절 미국내 반공 매파들이 양안 사이에 분쟁 억제기로 있던 미국 7함대 걷어치우고 장제스가 맘대로 대륙수복 할 수 있게 미국측에서 걸어주던 브레이크를 빼라는 의미에서 종종 하던 말이었다. 이걸 인상 깊게 본 아버지 부시가 나중에 그냥 일상에서도 특정 상황에서 자제하고 있던 매파, 공격적인 또라이를 내보낸단 이유로 "장개석 출정 시킨다" 농담하며 다녔던 걸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어도 아니고 그냥 부시 가문 내부에서 그 시절 기억하던 사람들끼리 자기들끼리만 조크 비슷하게 쓰던 표현이다.
안그래도 젭 부시가 힘 딸리고 재미없는 꼰대 기성 정치인이란 기믹이 있는데, 애초에 외부인들은 알아먹지도 못하는 조크에 기반해 연출한 거 때문에 오히려 젭 부시의 찐따 샌님 기믹이 더 강해져버렸다. 그리고 그 조크도 애초에 아버지 부시 대(代)에는 장제스를 문자 그대로 칭송하는게 아니고, 그냥 특정 첨예한 상황에서 매파들이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걸 풍자하는 조크로 써먹은건데 이걸 말그대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어설프게 인싸 흉내 내듯이 장제스에 대한 칭찬으로 잘못 이해한거란 의혹도 강하다. 아니면 아예 장제스하곤 전혀 상관도 없는 표현을 젭 부시 혼자 잘못 이해하고 만들어낸 표현일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장제스를 출정시켜라'란 표현도 실제로 당시 미국 정치인들이 종종 했던 말이라면 그 자체도 문제 있는 게, 당장 악명높은 조지프 스틸웰을 기용한 것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국민정부를 전공하는 중국, 미국 양측 역사학자들은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중국 인식이 형편 없었으며 이런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미국의 중국 정책이 최악의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켜 중일전쟁 당시 협조의 난항, 임팔 작전 당시 중국 주력군의 버마행 재배치, 대륙타통작전, 종전 후 국공내전 재개, 공산당 격멸 실패 같은 일련의 장대한 몰락에 큰 일조를 했다."고 본다. 장제스 집권 시절부터 미국 정치인들은 장제스를 여전히 스틸웰같은 미국 군인 하나만 꽂아놓으면 맘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등 우습게 봤고, 미국 민간 사회에선 오히려 현대 와서야 논파된 혁명사관의 씨앗이 에드가 스노우 등 친공 외국발 좌익 저널리스트들의 활약으로 인해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이 표현 관련된 설명들이 사실이라면, 1950년대의 장제스는 국부천대 이후 진먼 포격전 같은 중공의 침략 시도를 겨우 막으며 정권 유지하기 바빴고, 본토귀환, 대륙 수복은 말그대로 정권 유지용 메세지였지 전혀 현실적으로 가능한 입장이 아니었다. 장제스가 진짜 외부의 본격적인 지원만 있었으면 국가 통제력을 굳힐 수 있던 국공내전 상황에선 도와주지도 않고 스틸웰 따위나 보내던 양반들이, 오히려 국공내전에서 패하고 좁은 대만으로 도망가 있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브레이크 풀어주고 도움만 주면 장제스는 일사천리로 본토상륙 이후 중공을 축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국의 중국 상황에 대한 숱한 무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마인드로 대아시아 정책 짠 양반들이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니 엉뚱한 자국 내 대중 전문가 싱크탱크들을 숙청하고 최소한의 현지 역사적, 정치적 문맥은 고려하지도 않고 설치다가 터뜨린 정점이 결국 훗날의 베트남 전쟁이다.
역사적 사실도 틀려먹은 게 애초에 장제스는 반공주의자긴 했지만 장제스 본인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면서도 여전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국민혁명을 추구하는 일종의 '혁명가'로 보았고, 특히 '기업가적 자본주의'를 믿는 젭 부시와 미국 공화당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는 전혀 아니었다. 기업과 자본가들 상대로 장제스는 오히려 줘패면 줘패고 내가 없으면 니들 전부 빨갱이 밥이다 겁을 줬지 영미 보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친시장, 친기업적 의미에서 '우파'하곤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반공과는 별개로 장제스의 내치에는 나름 좌파적인 성향도 종종 있었다.29 그리고 미국에서도 이런 일발성 정계에서 역사적 언급에 관심 가지고 일일이 설명할 만큼 역사와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 장제스는 무슨 영미권에서 말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