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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운동, Boxer Rebellion, 반외국인, 반기독교 운동, 부청멸양

Jobs 9 2025. 4. 28.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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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er Rebellion"은 영어로 "의화단 운동" 또는 "의화단의 난"이라고 번역되며, 중국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무술 집단의 반란을 지칭

"의화단 운동"은 중국의 외세 배척 운동으로, 특히 반외국인, 반기독교 운동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청나라에서 발생한 반외국인, 반기독교 운동

Boxer Rebellion:

의화단 운동을 영어로 부르는 명칭입니다. 의화단의 무술 스타일이 복싱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Boxer"라는 단어가 사용

의화단:

의화단 운동을 주도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 무술과 체조를 중요시

반외국인, 반기독교 운동:

의화단은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의 확산을 반대

청나라 말기:

19세기 말 청나라의 혼란한 시기에 의화단 운동이 발생

 

 

 

 

의화단

義和團 / 义和团Yìhétuán

Yihetuan / Boxers

 

扶淸滅洋(부청멸양: 청을 도와 서양놈을 멸하자.)

의화단 운동 당시 의화단의 구호

 

청나라에서 개화를 반대하던 무술집단. 

원래는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집단이었다. 대도회(大刀會)라는 민간 결사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원래는 청 조정과 관련이 없고 오히려 중앙에서는 눈엣가시로 보았던 집단이었으나, 개항 이후에는 청 왕조를 받들어 외세를 물리친다는 뜻의 부청멸양(扶淸滅洋)이라는 이름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식민제국 열강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온갖 잔혹행위와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저지른 끝에 8개국 연합군에게 진압당했다. 당초에는 전형적인 반청복명 계통의 비밀결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도층이 청나라 황족에게 포섭되면서 친청으로 방향이 선회된 것으로 보인다. 백련교의 한 분파라는 설도 있다.

 

 

무술, 종교적 요소가 강하게 포함되었는데 의화권을 익히면 금강불괴 도검불침의 몸이 되어 총을 맞아도 문제가 없다고 선전하고 다녔다. 식민국가나 반식민국가의 반란군들이나 개화 반대파 세력들이 이런 주술적, 미신적 요소가 근대식 화기도 이기게 해준다는 믿음을 막 퍼뜨리고 다니면서 소속원들을 독려한 전적이 많다. 물론 결과는 몰살되었다.

 

의화단은 대중 앞에서 총알을 막아내는 일종의 차력쇼 같은 걸 선보였지만 일부러 총에 총알을 안 넣고 화약만 넣거나 온갖 페이크를 썼다.

 

 

그들은 통일된 조직도, 권법도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스스로를 권민(拳民)이라고 부르면서 기독교를 믿는 교민(敎民)에 대적하며 누런 베, 황포로 머리를 감싸고, 배는 붉은 색으로 가리고 양권을 하여 신령을 몸으로 부르고 큰 칼로 배를 내보여서 자르는 시늉을 한다든지, 인후로 창 끝을 버티는 차력쇼를 벌였다는 것이다. 의화단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여기에 대해서도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다. 의화단원들이 중국 시골에서 전해지는 무당들의 굿 하는 모습에 의거한 트랜스 상태에 빠져서 저런 일이 가능했다거나 일시적으로 신체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흥분제를 복용하고 날뛰었다는 증언도 있다. 권법을 배우면 '도창불입(刀槍不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직역하면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는다", 즉 칼과 창, 더 나아가 무기로도 소용 없어지는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민족도 한족, 만주족 등 다양했고 연령대도 10대부터 노인까지 골고루 분포되었다. 《삼국지》, 《수호전》 등에 나오는 오호대장군 같은 영웅호걸들을 신봉하였으며 의화권의 미신적 힘과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 신천지로 나아가자는 환상이 민중에게 급하게 확산되었다. 구시대 질서를 옹호하던 향촌의 신사들도 이들의 물주가 되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청나라 말엽에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이전까지의 직업이 쓸모가 없어지자 쫓겨나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 예로 의화단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장덕성(張德成)은 원래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에서 뱃사공으로 일했으나 서양에서 들어온 증기선 때문에 운하 관련 일이 사양 산업이 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외에도 서양에서 들어온 철도가 중국에 놓이자 이전까지 대운하에서 운송 물류 사업인 짐꾼이나 뱃사공으로 일하던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새로운 운송 수단인 철도에 밀려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의화단에 참가한 수많은 중국인들은 철도를 보는 족족 망치나 도끼로 파괴했는데 철도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겨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의화단 참가자들이 철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탈하는 도구라고 여겨 미워한 탓도 있었다. 이렇듯 서양 물건에 의해 실업자가 된 장덕성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서양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생계를 잃었다고 여겨서 서양과 서양인들을 증오했고, 그래서 서양을 중국에서 몰아낸다는 의화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의화단에는 부녀자들로만 구성된 집단들도 존재하였는데 비교적 나이가 어린 10대 이상 여성들의 집단인 홍등조(紅燈照), 중장년 부녀자들의 집단 남등조(藍燈照), 과부들로 구성된 흑등조(黑燈照) 또는 사과조(砂鍋照) 등이 있었다.

 

 

 

행적

 

의화단의 등장은 그동안 진행된 태평천국 운동까지를 포함한 기독교 문화 및 기독교인들의 행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토지를 강탈하는 행위가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상황에서 청나라 정부는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에 의해 그런 선교사들에게 마치 관리와 유사한 권리와 지위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권리를 얻은 선교사들은 세력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중국인들은 중국이 기독교화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중국인들에게 기독교의 예배(미사)와 고해성사 문화는 "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는 고아원을 영아 유괴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포교는 불평등 조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허락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기독교에 영 호의적이지 않았던 관료들의 시각이 가세했다. 여기에 백성들이 이런 중상 및 토지 약탈로 기독교인들을 소송하면 관리들은 항상 일을 시끄럽게 했다며 문초하면서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청나라 정부에 의해 관리의 권리를 얻은 종교인들도 있어서3 기독교인들을 다루기도 어려웠다. 이러다 보니 "관리들이 정당하지 못하게 기독교인들을 편들고 있다"는 오해가 더욱 퍼졌다. 이는 청 조정과 일부 지방정부, 신사들이 반서방 감정을 부추기는 데도 잘 이용되었다.

 

일부 백련교의 잔당도 이들에 합류했다. 의화단들은 부청멸양의 기치를 내걸고 반서양 반외세 감정을 품고 봉기해 서양 문물을 공격, 파괴했다. 청나라의 비호 하에 외국인들이나 기독교 친서양 현지인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살육, 약탈이나 강간을 일삼는 제노포비아적인 행각을 벌였다.

 

 

의화단 운동

 

의화단이 1899년에 반기독교 운동을 벌여 교회를 불태우면서 소란을 일으키자 청 왕조는 위안스카이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으나 오히려 운동은 거세져 주변으로 파급되었으며 철도5 등을 파괴하면서 베이징까지 확산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이들을 부추겨 자멸을 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성격이 반기독교 운동에서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세우는 반외세운동으로 달라졌고 청 정부가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투에서 8개국 연합군은 톈진에서 청 정부와 의화단의 연합 군대를 개박살내 버렸다. 당연히 의화단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의화권은 연합군의 총알을 막는 데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으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했으며 신축조약을 체결하여 청을 사실상 반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간인 살상과 더불어 주로 청조 황실 및 귀족과 민간인 및 재산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 파괴, 방화가 자행되었다.

 

 

몰락과 계승

 

결국 의화단은 1900년 8월 14일부터 개입해 베이징을 함락한 8개국 연합군과 서구 세력에 항복한 청나라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고 그 중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철도망 보호를 이유로 만주와 요동까지 점령하면서 그 세력이 멸살되었다. 그러나 의화단 운동이 민중들에게 남긴 영향은 적지 않아서 교리나 정신론적인 수양법은 알음알음 백련교 신도에 의해 전해지다가 파룬궁을 비롯한 여러 민간종교, 비밀결사, 흑사회 집단들로 계승되었다.

 

 

평가

 

당시 열강들은 물론 멸만흥한을 외치던 한족들도 부청멸양이나 외치는 이들을 한간이라고 경멸 했으며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물론 이들의 잔당도 계속 같은 한족들에게도 약탈, 방화, 학살들을 자행한 탓에 주변 시선이 좋지 않았으며 그 당시 의화단 대원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는 한족들도 있었다. 이들의 만행은 청에 호의적이던 일부 한족들도 청에 등을 돌리게 했고, 급작스러운 해프닝에 불과했던 우창봉기가 신해혁명으로 이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영어로는 의화단 운동을 'Boxer Rebellion', 직역하면 '권투선수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이 무술과 체조를 중요시하는 걸 보고 "권투선수(Boxer)들 같다"고 평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Rebellion, '난'이란 이름은 당시 의화단을 조장해서 서양과 맞붙은 청이 대판 깨지고 그 책임을 자신이 아닌 의화단에게 돌리기 위해 붙여 준 이름에 가까우니 종전 후 청이 이들을 토사구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름으로도 보여준다. 그 때문에 백련교나 태평천국 같이 혁명적인 가치를 가진 반청 종교결사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장 중국공산당도 그렇게 인식하여 의화단을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의화단 파벌 중 일부는 반청 활동으로 이어갔으나 많은 파벌이 황실 권력에 복종한 채 꼭두각시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청 황실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부당한 목적에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최후는 정해져 있었다.

 

 

의열단과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영화 《황비홍 2》에도 백련교주가 나온다. 의화권을 익혀서 총에 맞아도 안 죽었지만 알고 보니…옷 속에 두툼한 철판을 숨겨서 총에 맞아도 안 죽었던 것. 그러나 황비홍의 발차기에 맞고 날아가 뾰족한 곳에 등이 뚫려 죽는다.

영화 《황비홍 4편》에 홍등조가 등장한다. 홍등조의 지도자 격인 황련성모(黃蓮聖母) 린헤이얼(林黑兒)이 독일 제국군의 총격을 받고 참수되어 사망하면서 단원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영화판의 각색으로 린하이얼은 8개국 연합군에 체포된 후 발가벗겨진 채로 이들에게 온갖 능욕을 당했고 결국 살해되었는데 더 안타까운 것은 연합군이 그녀의 시신을 포르말린에 담궈서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유럽 박물관에 전시하였고 그 시신은 영국 모 박물관에 수장된 채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과학기술로는 시신을 온전하게 포르말린으로 표본 처리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린하이얼이 표본이 되었다는 것은 낭설이고 실제로는 연합군에 잡히지 않고 산둥성으로 복귀하여 백련성모로 호칭을 바꾸고 활동했다는 설도 나도는 등 린하이얼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성룡과 오웬 윌슨 주연 2003년 작 상하이 나이츠에 악의 세력으로 나온다. 다만 청나라의 옥새를 훔치는 영국 왕족을 돕는다는 등 실제와 정반대로 표현됐다.

대체역사소설 사도세자는 편하게 살고 싶다에서는 유럽에서 의화단을 조직한다. 개변된 역사 항목에서 이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의화단의 잔혹행위를 묘사한 그림.

 

 

의화단 운동

義和團 運動

Boxer Rebellion

 

 

 

병력

연합군: 71,920명

청군: 300,000명

 

피해

사상자: 33,000명 ↑

- 군인: 757명

- 중국 내 그리스도교인: 32,000여 명

- 서양인 선교사: 200여 명

사상자: 100,000명 ↑

 

결과

8개국 연합의 승리

 

영향

신축조약 체결

 

 

扶淸滅洋 (부청멸양: 청을 도와 서양을 멸하자.)

당시 의화단의 구호

 

 

신(神)이 의화단을 돕는 이유는 도깨비 같은 놈들이 중국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놈들은 기독교를 선전하고 다니면서 하늘을 모독하고 부처를 경배하지 않으며 조상을 돌보지 않는다. 철도를 부수고, 전선을 끊고, 커다란 기선을 파괴하자. 그렇게 하면 프랑스는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고, 영국과 러시아는 조용해질 것이다. 도깨비 같은 놈들을 모두 죽여서 청나라의 평화를 축하하자.

의화단 선전물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1899년 ~ 1901년 약 2년에 걸쳐 청나라와 의화단(義和團)이 일본 제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미국의 열강 8개국 연합군과 벌인 국제전쟁이다. 청나라와 의화단은 8개국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1901년 신축조약을 통해 종결되었다. 이를 통해 외국 군대가 중국에 주둔하게 허가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수도 베이징까지 유린당했다.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이 운동의 폭력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고 도리어 의화단을 앞세워 유럽에 도전한 청이 패배한 후 전쟁의 책임을 의화단에 떠넘겨 버리기 위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즉 실상은 청나라가 이끈 전쟁이지만 “의화단이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서양인을 죽인 거에요 청나라는 몰라요”한 셈. 실제로 이 전쟁의 화평조약인 신축조약에서 의화단을 부르는 이름은 권비(拳匪)고 그들의 행동은 권비창란(拳匪倡亂)이라고 일컫는데 영어 명칭인 Boxer Rebellion은 의화권이 권투 같다고4 하여 당시의 스타일로 직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화권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학계에서는 반외세 운동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어 의화단 운동(義和團 運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근데 의화단이 전투에서 외세군을 물리친 수보다 자국민을 학살한 수가 많기 때문에 운동이라는 용어가 퇴색되는 지칭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에서는 이 이름을 따서 권비(拳匪)의 난이라고도 불렀다. 꽤 알려진 명칭인지,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권비'라는 표현이 보인다. 5

 

옛 표현으로는 의화단사변(義和團事變)이 있다. 조금 마이너하지만 북청사변(北淸事變)6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

 

청나라는 아편전쟁의 패배와 영국,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불평등 조약 체결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동치 연간의 양무운동의 전개로 이러한 내리막길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어 다시 몰락을 시작한다. 이런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유럽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유교 등의 동양사상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마음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침략하는 앞잡이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반외세, 반서양 감정이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는 서양 선교사들의 문제도 있었는데 이들이 중국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중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원래부터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이던 청나라 조정과 지방 정부도 반서양, 반그리스도교 정서를 부추겼으며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국이 그리스도교의 나라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의화단의 봉기와 만행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이었다. 소규모 지반이었던 이들은 무술을 기반으로 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백련교 세력과 결합하면서 큰 무리가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강경한 진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의 세력은 계속해서 번져나갔고 이들은 마침 서양 세력에 원한이 있던 단군왕 아이신기오로 자이이의 부추김을 받아8 '청을 돕고 함께 양인들을 물리치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와 공사관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폭행과 함께 무참히 희생되었고 45,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 그리스도교인들마저 살해되었다.

 

당시 의화단은 극심한 잔혹 행위를 자행했는데 학살과 고문 외에도 서양 여성과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국민 여성을 붙잡으면 곧바로 옷을 벗기고 돌아가면서 윤간한 뒤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였다. 특히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던 의화단은 서양 여성은 좌용(锉舂)이라고 하여 무참히 윤간한 후 가슴과 음부를 짓뭉개는 등 각종 끔찍한 고문을 하고 죽였다. 이후 외국 공관이 의화단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했던 서양 여성들은 이미 의화단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자살을 준비할 정도였다.

 

더구나 양인 여자 1명을 죽이면 은 50냥을, 양인 아이 1명을 죽이면 30냥을 상금으로 주었는데 이런 상금을 받기 위해 기존 의화단 단원뿐만 아니라 비의화단 중국인들까지 도처에서 살인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서양제 성냥이나 연필을 쓴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据记载,义和团之杀教民毛子也,备诸酷虐,锉舂,烧磨,活埋,炮烹,支解,腰杀,殆难尽述。京西天主堂坟地,悉遭发掘,若利玛窦,庞迪我,汤若望,南怀仁诸名公遗骨,无一免者。保定属有张登者,多教民,团匪得其妇女,则挖坑倒置,填土露其下体,以为笑乐.”

 

당시 의화단의 자행한 살해 방식으로는 서양 남녀를 벗겨서 남성의 성기를 자르거나 여성의 음부를 짓뭉개는 좌용(锉舂),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굽는 소마(烧磨), 물속에 넣고 삶아서 익혀 썰어먹는 포팽(炮烹) 등이 벌어졌으며 사람을 산채로 묻어 죽이는 활매(活埋), 팔과 다리 각을 뜨는 지해(支解), 칼이나 작두로 머리나 허리를 양단해 버리는 요살(腰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의 선전포고

 

의화단의 무차별적인 잔학행위에 자국민까지 피해를 입자 서구열강은 청 조정에 의화단의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단군왕 등 일부 황족 세력은 오히려 이들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결국 청나라의 태도와 의화단의 만행을 보다못한 열강들은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군을 동원해 이들이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태후가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9 이 때 광서제는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실권 없는 허수아비였다. 

 

청나라 조정은 1900년 6월 21일 서양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선전포고의 양식이 결정된 것은 1907년 개전에 관한 협약 이후이고 이전에는 관습법상 국내건 국외건 전쟁을 벌이는 포고 행위만으로도 선전포고로 간주되었다. 1900년 6월 21일에 내려진 선전조서는 국제법상 de facto declaration of war에 해당하며 국제법상으로는 이것도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광서제는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의화단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했다. 독일 제국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는 이에 항의하려고 외출했다가 만주족인 엔 하이10가 지휘하는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는데, 엔 하이는 케텔러 공사의 가죽을 벗기고 그의 심장을 먹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사관 경비대인 독일 제국 해군 병력이 청나라 외무아문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공무원들을 잡아 단체로 린치를 가했다. 또한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도 의화단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한편 베이징에서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고 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외국인 지구로 도망쳐 약 4,000여명이 외국인 지구에 갇히게 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로 호위해서 톈진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으나 안전을 우려한 외국인 지구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 등 기본물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외국인 지구로 피신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

 

 

 

8개국 연합군 결성

 

당시에는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는 그레이트 게임(영국 ↔ 러시아 제국)과 비스마르크 체제(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파쇼다 사건(영국 ↔ 프랑스 제3공화국) 같은 경쟁 대립 구도, 혹은 적대 구도가 있었다.11 그러나 이러한 서구열강들과 여기에 가세한 일본 제국은 의화단에 의해 자국민이 학살당하고, 자신들의 이권이 침탈당할 상황이 되자 연합군을 조직해 청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의 규모는 지상 병력만 약 50,000명에 달했다. 이 중 주력은 일본군(육전대 포함 21,000명)과 러시아군(수병연대 포함 13,000명), 그리고 영국군(해병대 포함 12,000명)이었다. 여기에 프랑스군과 미군이 각각 3,000명, 독일 제국군이 육군과 해군 보병 900명, 이탈리아 왕국군은 해군 함정과 육군의 베르살리에리 연대12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해군 함정만 파견하고 각 함정의 육상병력을 모아 중대 이하 규모로 명목상의 지상군을 편성해서 독일군 또는 영국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갔다.

 

원정군 사령관은 병력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고위급 외교관이 피살된 독일 제국에서 맡아 총사령관으로는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 참모총장을 지낸 독일 육군 제3군 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 육군 원수가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도 하기 전에 청 정부는 연합군에 굴복했으나, 이후 1년간 중국에 주둔하면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그가 사실상의 전제군주인 독일 황제(카이저)의 신하이며 백작 작위를 소유한 귀족13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화국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은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한편 동남지방의 청나라 원로 관료들은 <동남자보선언>으로 의화단 세력의 확대를 저지했다. 청 조정의 입장과 달리 이홍장, 위안스카이 등의 청의 군벌들과 지도층 대부분은 의화단을 진압해야 할 도적떼로 여겼다. 이것 때문에 의화단과 손을 잡으라는 서태후의 명령을 소식을 못들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태후 폐하가 내린 명령은 의화단이나 그들과 손잡은 간신배들의 수작이니 조작된 것이거나 감언이설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내린 명령임이 분명하므로 따를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의화단을 진압했다.

 

후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연합군은 군사력을 집중하여 빠르게 텐진을 함락시키고, 곧장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8개국 연합군 내에서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때 만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는 등 세력 확장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영국 등 다른 열강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특히 러시아에 팽창에 맞서 '그레이트 게임'을 치르던 영국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연합군을 상대하게 된 청군과 의화단은 무장이나 조직력이 형편없었고 계속해서 패배했다. 의화단의 실체는 깡패와 도적, 사회하류층이 섞여있는 폭도에 불과했고, 청군은 청나라 기득권층의 방해로 제대로된 개혁을 이룩하지 못해 전근대적인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가지고 전세계에서 정복활동을 해오던 서구열강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연합군의 베이징 함락과 보복

 

결국 선전포고한지 2개월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4일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 이는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두 번째 함락이었다.

 

서태후는 수도에 남아 강화를 맺으려는 광서제를 반강제로 대동한 채 8월 15일에 베이징에서 간신히 달아났다. 그리고 천춘쉬안의 보좌를 받아 서안(장안=시안)으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광서제가 총애한 후궁인 진비 타타라씨가 죽었다. 전후 조정의 공식 입장은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운 다급한 상황에서 정절을 위협받은 진비가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태감과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술정변 이후 유폐되었던 진비가 서태후 앞으로 끌려왔을 때 황제가 "피난하지 말고 연합군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격노한 서태후가 태감 최옥귀에게 명령해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었다. 상황이 다급해서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웠다는 조정의 입장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서안 피난길에 대동한 여성 중 진비의 자매이자 광서제의 후궁인 근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국민이 의화단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대노한 8개국 연합군들의 피의 복수는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황제가 떠난 베이징을 점령한 8개국 연합군은 3일간 자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는 경사(京師)의 변(變)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연합군들은 베이징 시내 거리와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중국인들을 폭행하거나 납치, 강간하는 등의 보복을 자행했다. 납치당한 중국인들은 강제노역을 하거나 강제로 서양인들의 첩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청나라인의 특징인 변발된 머리가죽을 뜯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외인부대>라는 책자에 의하면 프랑스 외인부대도 이 전쟁에 참전하여 의화단 반군을 죽이고 변발이 붙은 머리가죽을 트로피처럼 가지고 다니거나 부대를 장식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렇게 장식하다가 현재는 말꼬리로 바꾸었다고 서술하며 말꼬리를 장식한 외인부대 행사 사진을 싣기도 했다.

 

가장 심하게 약탈을 자행한 군대는 독일군이었다. 공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은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크게 분노하여 중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독일 제국군 장병들에게 "옛날 훈족의 아틸라가 그랬듯이, 중국을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마음껏 저질러서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라."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잔혹한 보복의 결과 의화단은 궤멸되었고 의화단이 아닌 수많은 일개 민간인들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의화단이 아닌 중국인들조차 상금을 탐내고 외국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으니 순수한 피해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화로 나중에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했을 때 이탈리아군의 베르살리에리 연대는 언제나 걷지 않고 뛴다는 관습에 따라 구보로 입성했다고 한다. 이때 베르살리에리 소속 나팔수들도 뛰면서 나팔을 불었다. <북경의 55일>에서도 이에 대해 묘사되어 있다. 

 

 

 

전쟁의 종결

 

전쟁에서 크게 패한 청 정부는 화친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배상할 것과 의화단과 의화단과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의화단을 묵인하고 지원해 준 산동순무 육현(毓賢)은 처형되었으며 의화단을 지지했던 재의(아이신기오로 자이의)는 황족임을 고려하여 아들 부준과 함께 서북 신강으로 추방되었다. 특히, 독일의 외교관이 사망한 것 때문에 광서제의 이복동생으로 훗날 선통제의 생부가 되는 순친왕이 직접 독일까지 가서 빌헬름 2세에게 사죄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이 황족인 재풍에게 고두를 요구했다는 것은 당시 유럽 언론에 실린 헛소문으로, 이런 보도가 나오면서 독일은 전쟁 이겼다고 눈에 뵈는게 없는 깡패들로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어서 독일 측은 엄청나게 당혹스러워했다. 실상은 독일이 재풍의 수행원들에게 고두를 하라고 요구한 것인데, 청나라 측이 이를 로비를 쓰는 대신에 정치적 책략을 써서 회피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독일 훈장을 받은 음창을 통역관으로 배치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사작위와 훈장을 받은 고위 인물들을 수행원들로 보내어 독일 황제가 영국과 프랑스의 기사와 훈작사들에게 동양식 이교도 군신관계의 예를 요구하는 매우 곤란한 구도를 만들어버림으로써 독일이 고두 요구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재풍을 접견하면서 재풍과 음창 두 사람만 입장하게 했고 수행원들은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정리했으며 음창도 고두를 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청나라와 열강은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했다. 당시 양무운동의 실패로 실각한 이홍장이 청나라측 전권대사로 참여했다. 조약의 결과로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받아냈고 서태후는 의화단에게 패배의 책임을 다 뒤집어 씌우고 숙청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잡음이 있었다. 이전부터 러시아의 계속된 세력 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동안에도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병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0,000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일본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 신축조약의 청나라측 전권대사 이홍장과 청황실이 러시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을 사실상 묵인했다. 더 나아가서 연해주처럼 헤이룽장성 및 하얼빈의 북만주, 위구르, 내외몽골을 전부 병탄하여 송화강-고비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 로 삼으려고 했으며 이는 러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푸젠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샤먼 침공 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나 서양 열강들이 단칼에 거절함으로 인해서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실패했지만 당시 일본의 실력을 눈여겨 본 영국과 1901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서양 열강의 주구, 극동의 헌병,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은 푸젠성 대신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종결 이후

 

청나라는 이 전쟁의 패전으로 국격이 완전히 절단난 것이나 다름없는 지경에 놓였으며, 열강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다.

 

특히 신축조약의 결과로 사건에 관여한 열강 11개국25에게 백은 9억 8,000만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액을 지급하게 되었다. 4억 5,000만 냥에 연이율 4%로 39년 분납 조건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11년치 재정과 맞먹는다. 현 가치로는 300억 정도며 이후 북양정부, 국민정부 모두 이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조건으로 상환을 잠시 유예받았으며, 이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야 탕감받았다.

 

더불어 베이징을 지키는 최종 방어선인 톈진 대고구의 포대를 해체하고 코앞 베이징~산해관까지 연합군 군대가 주둔하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는 청나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조치였는데, 이곳은 제1차, 2차 아편전쟁에서 활약했던 포대였다. 특히 2차에서는 당시 최강이었던 서양 함대를 박살낸 전력이 있는 대단한 포대였는데 이를 해체했으니 수도 베이징 방어가 부실해져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인천광역시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해안포를 모조리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비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특히 '주술로 총을 막으려고 한' 의화단의 이미지는 중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며 서양 열강의 조롱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 '덩치만 큰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겨지던 풍조가 이때 완전히 고착되었다. 그나마 중국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점은 러시아를 제외한 열강들은 경제적 이득을 노렸지 영토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령 인도는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영국의 인도 지배는 100년 이상 원래 동인도 회사가 벵골 태수를 얼굴마담으로 삼다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무늬만 남았던 무굴 제국을 해체하고 수십 개 인도 번왕국을 병립시켜 영국령이 아닌 인도 제국령으로 간접통치했다. 평상시 영국군 정규군과 관료들의 숫자는 수천이 넘지 않았다. 즉 대부분의 식민지 주둔군은 현지 병력이었다.

 

미국은 식민지 확보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가령 스페인과의 전쟁 후 전리품으로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필리핀을 얻었지만 쿠바와 필리핀은 즉시 독립시키겠다고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경우 공화당 내 인종차별적인 고립주의자들이 야만인들을 자국의 세금으로 먹여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포기할 것을 종용할 정도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열강들과 달리 미국은 본토에도 미개척지가 상당부분 남아 있을 정도로 가진 영토가 많았다. 때문에 해외 영토 개척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광활한 영토에는 세계 최대 매장량과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애팔래치아의 탄전, 20세기 초반에 전세계 생산량 50% 이상을 차지한 텍사스의 유전, 캘리포니아의 금광산, 오대호 지방의 엄청난 수자원과 대륙 중부 대평원의 농업지대가 있었다. 이미 미국은 자원부국이었고 20세기 초반 식민지 없이도 미국의 경제력은 최대의 식민제국 영국을 두 배 이상 추월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의 영토와 자원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1840년대 아편전쟁 이전부터 임칙서 같은 인물들이 구미 열강들이 영토보다는 교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홍장도 1870년대 조선 조정에 영미는 교역이익만 추구해서 위험하지 않으니 이들과 수교하여 러시아를 견제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직접적으로 일리 지방에서 충돌하여 신강 지역을 일부 가져갔고 2차 아편전쟁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통째로 할양받았다. 그리고 만주 몽골 횡단 철도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가져가고 뤼순항을 조차하는 등 만주와 몽골 전체를 영향권 하에 넣기 위해 노골적으로 청 조정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미가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하는 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작전을 폈다.

 

한편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지식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잡았다. 지식층은 서구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한편 사실상 서구 제국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린 만주족의 청 조정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커졌다. 이 시기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는 밑바탕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참전

 

의화단 운동은 바로 옆의 대한제국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던 중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당시 대한제국군은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과 청군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의화단과 청군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월경하여 약탈하자 점차 대한제국군을 강화시켰고 1901년에는 예산의 41%를 국방비에 편성하여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다.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이들과 교전하였으며 이후 연합군이 유리해지자 고종이 참전 의사를 밝혔지만 그 때는 이미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이후였고, 결국 참전은 무산되었다.

 

 

후방지원

 

(仁川은 通信中央)北京信息이 載斷고 世界列强이 天津太沽에 今方注力야 兵艦陸軍이 益益湊集야 全世界와 通信線을 切要 遼東滿洲電線은 不通이 已久고 燕台上海間電線은 山東沙河에셔 載斷얏슬더러 今日支那內地 何處던지 安穩을 望키 難다야 津沽聯合軍이 議定고 仁川을 中央通信地를아 商船이던지 兵艦을 仁沽間頻數往來케터인 仁川으로셔 日人所設韓國內電線을 經由야 釜山에셔 日本에 到야 歐美列國에 達기로 在韓日本電信局에셔 執務太繁지라 京仁釜山間電線은 複線이 必要다야 本月十三日붓터 日本人이 京釜兩地의 複線架設에 着手얏다고 朝鮮新報에 記얏스니 韓國境內에 韓廷所設電線이 本無지 曾有되 列國이 視之若無지 當局者 或此에 念及지

 

번역

⊙ (인천은 통신의 중심지)

베이징 정보는 끊겼고, 세계 열강이 톈진과 다구(大沽)에 이제 막 힘을 집중하여 군함과 육군이 점점 더 집결하고 있으므로 전 세계와의 통신선을 절실히 요구하는 바인데,

 

요동(遼東)·만주(滿洲) 간 전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불통이며, 연대(燕台)와28 상하이 사이의 전신선도 산둥의 사하(沙河)에서 끊어졌을 뿐 아니라, 오늘날 중국 내륙 어느 곳도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톈진·다구 연합군이 협의하여 인천을 중심 통신기지로 삼고, 상선이든 군함이든 인천과 다구 사이를 자주 왕래하게 하기로 하였는데,

 

인천에서는 일본이 설치한 한국 내 전신선을 경유하여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나아가 서양 열국에까지 도달하도록 하였으므로,

 

현재 한국 내의 일본 전신국은 업무가 매우 과중한 상태라, 경인·부산 간 전신선을 **복선(複線)**으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 하여 금월 13일부터 일본인이 서울과 부산 두 지역 간 복선 공사에 착수하였다고 『조선신보』에 보도되었다.

 

한국 국경 안에는 한국 정부가 설치한 전신선이 본래 존재하지 않거나, 혹 존재했어도 열강이 이를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당국자는 이 점을 혹여나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1900년 7월 17일 황성신문29

 

그러나 참전과는 별개로 당시 청과 가까운 대한제국이 물자를 보급받기 좋은 요지였고, 일본 제국을 제외한 연합군,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의 군수물자 보급을 맡아 인력30과 자원31을 수출하여 2년간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수출액이 1.9배 증가했으며 많은 외국 군함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이때 얻은 경제적 이득은 광무개혁의 주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외에 인천은 연합군의 통신기지로 활용되어 외국함선들이 많이 방문하였다. 한편 황제 고종이 연합군 측에 오인탁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어 위문품을 전달했다. 이에 연합군 사령부는 한국의 사절단을 환대하고 답례로 감사장을 전달했다. 당시 고종이 보낸 물품은 백미 1,000 석, 밀가루 1,500 포대, 그리고 잎담배 2,000 갑이었다. 톈진을 오가는 데 사용한 선박은 정부 관유함선인 창룡호였다.

 

 

영향

 

만주 지역을 러시아군이 점령하는 등 만주의 정세가 급변한 틈을 타 간도로 진출하기도 했다. 좋은 영향만 끼친 건 아니었는데, 의화단과 러시아군의 약탈로 인해 의주의 한국인들이 대량으로 도망가는 등 국경 지대와 간도의 한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패잔병, 선교사, 난민 등 수많은 외국인들이 대한제국으로 피난을 오자 이를 빌미로 한 열강들의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한 의화단 운동에 영향을 받은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대부분 대한제국군에게 진압당했다.

 

 

오스만 제국의 참전

 

당대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도 전쟁에 관여하여 오스만 제국군 장교단을 중국에 보냈는데 오스만이 칼리파의 권위를 내세워 무슬림들인 청나라 회족 부대를 분열시키길 원했던 독일 제국의 제안 때문이었다.

 

 

국가별 주요 참전자

 

독일 제국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발더제: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중위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육군 소위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대령 안톤 하우스34: SMS 마리아 테레지아함 함장

해군 사관후보생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중국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인 칭화대학의 설립 배경도 의화단 운동이랑 관련이 있다. 신축조약으로 배상금을 타낸 미국이 중국의 교육 발전에 쓰라고 배상금 일부를 반환했는데 이 자금을 가지고 도미유학생 양성을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 바로 칭화대학의 전신인 칭화학당이다. 





The Boxer Rebellion, also known as the Boxer Uprising, was an anti-foreign, anti-imperialist, and anti-Christian uprising in North China between 1899 and 1901. Led by the Society of Righteous and Harmonious Fists, the Boxers sought to expel foreign influence, particularly targeting Christian missionaries and Western technology. The rebellion culminated in a siege of Beijing's foreign legations, eventually quelled by an international force.  

 

Anti-Foreign Sentiment:

The rebellion was fueled by a growing resentment towards Western influence in China, including economic exploitation, political interference, and the spread of Christianity. 

Secret Society Leadership:

The Society of Righteous and Harmonious Fists, also known as the Boxers, organized the uprising. They practiced martial arts and believed in their own invulnerability, drawing support from the rural poor and unemployed. 

Targeting Foreigners and Chinese Christians:

The Boxers targeted foreigners, particularly Christian missionaries, and Chinese Christians who had converted to the religion. 

Siege of Beijing:

In 1900, the rebellion reached its peak as Boxers marched on Beijing, besieging the foreign legations in the city's diplomatic district. 

International Intervention:

An international force, including troops from the United States, responded to the siege, eventually relieving the foreign legations and suppressing the rebellion. 

Boxer Protocol:

The rebellion ended with the Boxer Protocol in 1901, which imposed heavy reparations on China and granted further concessions to foreign powers. 

Weakening of the Qing Dynasty:

The Boxer Rebellion and its aftermath significantly weakened the Qing dynasty, contributing to its eventual collapse and the establishment of a republic in China in 1912. 

In essence, the Boxer Rebellion was a complex event driven by anti-foreign sentiments, internal social unrest, and the perceived threat of Western imperialism in China. 






Boxer Rebellion

 

 

Date: 1900 - September 1901

Location: China

Participants: Boxer China Qing dynasty

Major Events: Siege of the International Legations

Key People: Adna R. Chaffee Erich von Falkenhayn Liu Kunyi Cixi Yamagata Aritomo

 

 

Boxer Rebellion, officially supported peasant uprising of 1900 that attempted to drive all foreigners from China. “Boxers” was a name that foreigners gave to a Chinese secret society known as the Yihequan (“Righteous and Harmonious Fists”). The group practiced certain boxing and calisthenic rituals in the belief that this made them invulnerable. It was thought to be an offshoot of the Eight Trigrams Society (Baguajiao), which had fomented rebellions against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18th and early 19th centuries. Their original aim was the destruction of the dynasty and also of the Westerners who had a privileged position in China. 



In the late 19th century, because of growing economic impoverishment, a series of unfortunate natural calamities, and unbridled foreign aggression in the area, the Boxers began to increase their strength in the provinces of North China. In 1898 conservative, antiforeign forces won control of the Chinese government and persuaded the Boxers to drop their opposition to the Qing dynasty and unite with it in destroying the foreigners. The governor of the province of Shandong began to enroll Boxer bands as local militia groups, changing their name from Yihequan to Yihetuan (“Righteous and Harmonious Militia”), which sounded semiofficial. Many of the Qing officials at this time apparently began to believe that Boxer rituals actually did make them impervious to bullets, and, in spite of protests by the Western powers, they and Cixi, the ruling empress dowager, continued to encourage the group. 



Boxer Rebellion

Boxer RebellionChristians in China being tortured and murdered during the Boxer Rebellion (1900).

Christian missionary activities helped provoke the Boxers; Christian converts flouted traditional Chinese ceremonies and family relations; and missionaries pressured local officials to side with Christian converts—who were often from the lower classes of Chinese society—in local lawsuits and property disputes. By late 1899 the Boxers were openly attacking Chinese Christians and Western missionaries. By May 1900, Boxer bands were roaming the countryside around the capital at Beijing. Finally, in early June an international relief force of some 2,100 men was dispatched from the northern port of Tianjin to Beijing. On June 13 the empress dowager ordered imperial forces to block the advance of the foreign troops, and the small relief column was turned back. Meanwhile, in Beijing the Boxers burned churches and foreign residences and killed suspected Chinese Christians on sight. On June 17 the foreign powers seized the Dagu forts on the coast in order to restore access from Beijing to Tianjin. The next day the empress dowager ordered that all foreigners be killed. The German minister was murdered, and the other foreign ministers and their families and staff, together with hundreds of Chinese Christians, were besieged in their legation quarters and in the Roman Catholic cathedral in Beijing. 



 

Imperial viceroys in the central Yangtze River (Chang Jiang) valley and in South China ignored government orders and suppressed antiforeign outbreaks in their jurisdiction. They thus helped establish the myth that the war was not the policy of the Chinese government but was a result of a native uprising in the northeast, the area to which the disorders were mainly confined.



Boxer Rebellion

Boxer RebellionInternational forces advancing toward Boxer soldiers outside the Imperial Palace in Beijing during the Boxer Rebellion; chromolithograph by Kasai Torajirō, 1900.

An international force of some 19,000 troops was assembled, most of the soldiers coming from Japan and Russia but many also from Britain, the United States, France, Austria-Hungary, and Italy. On August 14, 1900, that force finally captured Beijing, relieving the foreigners and Christians besieged there since June 20. While foreign troops looted the capital, the empress dowager and her court fled westward to Xi’an in Shaanxi province, leaving behind a few imperial princes to conduct the negotiations. After extensive discussions, a protocol was finally signed in September 1901, ending the hostilities and providing for reparations to be made to the foreign powers. 



Perhaps a total of up to 100,000 or more people died in the conflict, although estimates on casualties have varied widely. The great majority of those killed were civilians, including thousands of Chinese Christians and approximately 200 to 250 foreign nationals (mostly Christian missionaries). Some estimates cite about 3,000 military personnel killed in combat, the great bulk of them being Boxers and other Chinese figh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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