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怨歌), 향가, 10구체, 주술적, 신충
원가(怨歌)
해설
신라 때의 승려 신충(信忠)이 737년(효성왕 1)에 지은 8구체 향가(鄕歌). 원래는 10구체 형식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후구(後句)가 없는 8구체로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5 ‘신충괘관(信忠掛冠)’에 실려 전해지는 유래는 다음과 같다.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기 전에 작자는 그와 함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었는데, 후일 임금이 되어도 신충을 잊지 않겠다고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였다. 후에 그가 임금이 되었으나 그 약속을 잊고 돌보지 않자, 작자가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는 시들어 버렸다. 이에 임금이 약속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신충을 불러들여 벼슬을 내리자 나무는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는 곧 향가의 주력(呪力)을 나타내는 대목이라 하겠다.
개관
- 작자 : 신충
- 연대 : 효성왕 1년(737)
- 형식 : 향가, 10구체이나 2구는 전하지 않음. 향찰 표기
- 성격 : 주술적, 원망적
- 형식 : 10구체
- 주제 :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원망함, 신의를 저 버린 임을 원망함
-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신충괘관(信忠掛冠)’
배경 설화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현명한 신하 신충과 궁중 뜰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며 말하였다. "다음 날 내가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을 이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리다." 하니 신충은 일어나 절을 했다. 몇 달이 지나 왕이 즉위하고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줄 때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못했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잣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되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나무에서 노래를 찾아내어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일이 너무 복잡하고 바빠서 공신을 잊었구나."하고 불러서 벼슬을 주었다.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로부터 두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어가 두 번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바치겠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틀린다. 그러나 신문왕 때와 계산하면 경덕왕과는 이미 백여 년의 거리가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 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두 기록을 다 두어 의아한 점을 덜고자 한다. 찬을 하자면,
공명은 끝이 없고 귀밑머리 희어지니
임금의 사랑 많다 해도 평생에 바쁘구나
언덕 너머 산 그림자 꿈에 자주 그려
향화를 받들어 우리 임금 축복한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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