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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비엔나 고전주의, 1770~1825년, 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 빈(비엔나), 합스부르크 왕가

Jobs 9 2025. 5. 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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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의 발달

 

빈(비엔나)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지가 중요한 역할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와 빈은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을 배출하고 키워냈다. 이들은 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다. 

 

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 발전의 주요 요인:

 

1.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와 빈의 문화적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음악 분야에서 큰 영향

왕가의 지원으로 인해 음악가들은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는 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의 성장에 기여

 

2. 빈(비엔나)의 위치:

빈은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음악가들이 모여 창작 활동 특히, 빈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발상지이자 활동 무대

 

3. 위대한 작곡가들의 활약: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빈에서 활동하며 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은 빈에서 혁신적인 음악적 스타일을 개발하고, 오스트리아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다.






 

비엔나 고전주의(약 1770 – 약 1825)를 고전주의 음악 시대의 특별한 표현으로 사용하는데, 비엔나에서 활동한 작곡가 Joseph Haydn, Wolfgang Amadeus Mozart 그리고 Ludwig van Beethoven 등의 주요 대표자들이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용어는 때때로 비엔나 고전주의 시대(„Zeit der Wiener Klassik“)라는 것을 의미하며, Antonio Salieri, Michael Haydn 또는 Carl Ditters von Dittersdorf 그리고 부분적으로 또한 Franz Schubert가 포함된다. 

 

 

 

음악의 특징

 

비엔나 고전주의에서 세 명의 위대한 대가는 형식적, 미학적 소질, 내용, 표현 능력에서 많은 다른 시대의 동료들의 작품을 능가하는 음악의 걸작을 만들어낸, 시대의 선도적인 작곡가로 여겨진다. 그들의 작품들은 가곡에서 대위법의 모방적인 기술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형식적으로 완성을 이루고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작곡 기법의 지배, 완벽함 그리고 미묘함을 결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화려하고 감성적인 스타일을 결합하고 다양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적 영향력을 장르의 다양함으로 이끈다. 비엔나 고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 하나는 만하임 악파의 작곡가들이다.



고전주의의 전형적 스타일(비엔나와 오스트리아 외에서도)은 밝은 장조와, 기본적인 경향에서 다소 밝고 쾌활한 음악을 선호하며, 부분적으로 극적이고 기념비적인 분출의 경향이 있고 강력한 대조가 살아있다. 바로크나 낭만주의에 비해 좀 더 합리적인 기본 톤은 예술의 계몽과 고전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 특히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은 종종 그들의 작품들의 큰 인기를 위해 농담과 유머로 특징지어진다. 또한 화성, 전조, 반음계를 가진, 눈에 띄게 판타지 넘치는 움직임이 오는데, 마치 현대 음악에서 통상적인 것처럼 표현을 깊게 하기 위해 단조성과 비교적 강한 관계를 갖는다  이것은 특히 1800년대 이전에도 적용된다. 

 

 

기쁨과 진지함, 가벼움, 그리고 지성이 특징적으로 다함께 혼합됨으로써, 음악은 그 시대의 언어적 공간에서 "알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두 매력적이게 된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디베르티멘토나 세레나데와 같은 몇 개의 전형적인 장르들이 즐거움에 더 많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반면, Joseph Haydn이 본래의 아버지이자 가장 위대한 대가로 여겨지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인 현악 4중주는 가장 지적인 장르라고 여겨지고 있다. 교향곡이나 협주곡들은 대략 중간에 있다.



비엔나 고전주의의 작곡 방식은 세 가지 방법이 특징이다: 의무적인 반주, 지속적인 스타일(durchbrochener Stil), 그리고 특히 동기적이고 테마적인 작업이다. 이러한 합성 방법은 Joseph Haydn에 의해 주로 실내 음악(현악4중주, 소나타 등) 같은 분야와 관현악곡(교향곡)에서 발전된 이후에  대부분의 장르에서 사용된다. 종교 음악이나 오페라에서도 그들은 작곡가의 악곡 형식을 결정한다. 이전의 갈란트시대와 전고전주의 음악과 달리 결정적인 특징은, 이전에 (교회의 음악 이외에서) 많이 유행했고 종종 바로크의 재수용으로 간주되는 대위법적이고 폴리포니적인 기술과 관계를 갖는 것이다.

 

 

특히 기악 음악은 비엔나 고전주의에서 독립된 예술의 평가를 받았다. 협주곡의 형식은 바로크 이후 알려진 3악장제가 특성으로, 순서에 따라 빠르게, 천천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교향곡과 4중주는 1760년대부터 4악장을 특징으로 삼았다. 대개 순서가 빠르고, 느리고, 메뉴엣, 빠르고이다. 하이든은 1770년대부터 때때로 느린 도입부(예를 들어, 교향곡 50번, 57번 등)를 사용해 왔다. 두 개의 중간 악장은 순서가 반대로 나타날 수 있으며, 하이든에서 메뉴엣은 내용과 속도 면에서 점점 더 스케르초 방향으로 발전하여 4중주 op. 30(1781)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다(이후 다시 메뉴엣). 비엔나 고전주의에서 특히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은, 많은  주요 악장으로서의 소나타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도식적이지 않았고, 환상적이고 개별적으로 적용되어 변증적이고, 주제별 작곡 방식의 틀로 작용했다. 최종 악장은 종종 론도 또는 소나타 형식과 론도의 혼합물이다. 또한 느린 악장(하이든의 경우 또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Nr. 15와 18)과 피날레 악장의(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Nr. 17 또는 24) 변주곡도 사랑받았다.




비엔나 고전 음악은 각 작곡가들 사이에서 스타일적으로 완전히 일관되거나 정적이지는 않지만, 초기 고전적이고 소위 "폭풍과 압박"의 경향(1770년대)부터 일종의 기념적인 음악적 제국(1800년대 전후)까지 그리고 베토벤이 이끈 초기 낭만적 느낌까지의 발전을 알려주고 있다. 슈베르트의 가장 성숙한 작품은 이미 초기 낭만주의에 속한다.

 

 

 

유명한 비엔나 고전 작곡가인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의 주요 오리지널 출판가는 음악인이며, 출판가이고, 그리고 정밀한 악보 출판의 발명가인 Heinrich Philipp Boßler가 있다. Joseph Hayden은 Speyer시에 있는 Boßler 출판사에서  우호적인 지위를 가졌다.




Bossler는 베토벤을 위해 초기 원본 작품을, 예를 들어, Kurfürsten 소나타(WoO 47)도 출판했다. Wolfgang Amadé Mozart는 Heinrich Philipp Bossler에 의해 1784년에 실루엣으로 그려져 넘겨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KV 492)과 Don Giovanni 서곡(KV 527)을 원본으로 출판했다. 모차르트는 유리하모니커(Glasharmonika)의 세계적 연주자인 Marianne Kirchgeßner를 위한 작품들을 작곡했고, 그녀는 다시 Bossler에 의해 예술적으로 신용을 받았다. 중요한 흥행자 Boßler는 모든 비엔나 클래식 음악가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음악 도시로서의 비엔나

 

 

이러한 발전을 위한 공간과 배경에는  합스부르크의 수도이자 제국 거주지로 자리매김해 온 비엔나가 있었는데 비엔나는 17세기부터 특별한 음악 애호가와 전문가가 있던 도시였다. 황제 Joseph 2세는 첼로와 키보드를 연주하고, 매일 선택된 음악가들과 실내 음악을 연주했으며, 푸가와 폴리포니 음악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의 할아버지 Karl 6세처럼). Rudolf 대공은 베토벤의 제자이면서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이었다. 궁중의 여러 귀족들은 하이든의 고용주인 Eszterházy 백작을 포함한 그들만의 궁중악단을 가졌었다.




비엔나는 18세기 후반에 특히 오페라 분야에서의 긴 전통을 돌아 보았으며 또한 다양한 음악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리, 파리, 런던과 더불어 유럽의 음악 도시들 중 하나였고 특히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던 북 이탈리아 (Mailand, Toskana)와 보헤미안 지역의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매력이었다. 

 

 

비엔나 고전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들 중에는 Georg Christoph Wagenseil와 Georg Matthias Monn이 포함되는데, 이 음악들은 세련된 전기 고전주의로 헤아려진다. 이것은 마치 하이든의 초기 작품에서 전기 고전주의를 보이는 것과 같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주요 비엔나 동료들 중에는 Johann Baptist Vanhal이나 Leopold Koželuh와 같은 몇 명의 보헤미안 작곡가들이 있었다. 오르가니스트이자 대성당의 악장인 Johann Georg Albrechtsberger는 베토벤의 스승이었다. 대략 비엔나 고전주의가 시작된 1771년에 음예술 협회가 설립되어 "공공"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주로 귀족들과 상류 비엔나 시민 사회의 사람들이 방문하였다.

 

 

1760년부터 1790년 사이에 황제의 궁정에서 주요 오페라 작곡가로서 Christoph Willibald Gluck, Florian Leopold Gassmann 그리고 Antonio Salieri 가 활동했다. 그와 동시에 Vincenzo Righini는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비엔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독일의 대부분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비엔나 궁중 오페라의 프로그램에서는 가장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곡가들이 정기적으로 공연했는데, 그중 일부는 Giovanni Paisiello, Domenico Cimarosa 또는 Vicente Martín y Soler와 같은 작곡가들인데 비엔나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후자는 1780년대에 모차르트의 각본 작가인 Lorenzo da Ponte와 함께 일했다. 살리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Opera buffa는,  특히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기악 음악에 대한 그들의 익살과 영감으로 인해 과소평가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특별한 성공이 있었다. 하이든은 1770년대와 1780년대에 Eszterháza에 있는 오페라 극장에서 자신의 오페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타 작곡가들의 수많은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에 Buffa 레퍼토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엔나에서는 Joseph 2세 황제가 직접 후원했다. 1776년부터 독일 국가가극(Nationalsingspiel)을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 모차르트는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를 썼다. 그러나, 황제의 가극 프로젝트는 관객들에게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몇 년 후에 마무리되어야 했다.



하이든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동안 비엔나에서 살았지만, 1761년부터 1790년까지 Fertöd와 Eisenstadt에 있는 Esterházy 거주지에 거의 끊임없이 살았다 그리고 1791년부터 1795년 사이에 런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런던 생활은 비엔나 음악생활의 경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많은 카피와 인쇄로 인해 그의 작품(특히 4중주와 교향곡)은 비엔나,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고, 하이든은 1770년대 이후까지 그의 영감 있는 음악의 뛰어난 특성 때문에 국제적인 음악 명성을 갖게 되었다. 1780년대 초부터 그를 런던에서 불렀고, 그는 파리(파리 교향곡)와 스페인(십자가상의 마지막 7단어)에서 작곡 위촉을 받았다. 그의 완벽하게 체계적이고 미적으로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기악 음악은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들, Eszterháza에서 하이든이 직접 연주한 교향곡을 작곡한 Joseph Martin Kraus같은 젊은 작곡가, Antonio Rosetti나 Adalbert Gyrowetz(그들 중의 교향곡 하나가 하이든의 이름으로 연주되었다)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이외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Ignaz Pleyel은 Haydn의 학생이었고 Mozart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완전히 다른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란 Luigi Boccherini는 당대의 중요한 실내음악 작곡가 중 하나로서 젊은 시절을 비엔나에서 몇년 보냈다.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을 했는데  그 역시 Haydn의 작품에서 자극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그의 어린 시절 여행에도 불구하고 작곡가로써 그러한 국제적인 명성을 거의 얻지 못했지만 그가 비엔나로 이사한 후 1781년까지는 지역적인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이른 죽음 후에야 그의 작품이 더 널리 보급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그를 찬양했다. 그는 (하이든과 같이) 이미 수준 있는 작품을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고전주의 체계에 결정적이게 된 것은 모차르트의 비엔나 정착이 몇 년 지난 후였다.  1781년 이후 어느 정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곡적 상호작용이 형성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하이든의 새로운 현악 4중주곡(op. 33, 1781)이며 그의 교향곡은 특히 젊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 후 하이든 자신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은 이미 본에서 Maximilian Franz 대공(조셉 2세의 형제)의 궁중음악가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일찍이 비엔나 고유의 레퍼토리와 접촉했다. 그는 1787년에 처음으로 비엔나로 단기 여행을 떠났고, 본에 돌아온 그는 1790년에 하이든으로부터 비엔나로 다시 돌아와 공부하도록 개인적으로 격려를 받았다. 베토벤은 그의 작품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통합하였다.  그의 후원자인 Ferdinand Ernst Gabriel von Waldstein 백작은 한 대화(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당신은 하이든의 손으로부터 모차르트의 정신을 얻을 수 있다.“




베토벤 시대에 비엔나 음악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했던 작곡가들은, 오페라 경력에서 종교 음악으로 전환한 (여전히)그의 스승인 Salieri와 모차르트의 제자이며 피아노 대가이며 작곡가였던 Johann Nepomuk Hummel이 있다. 다른 중요한 피아노 작곡가들은 Anton Diabelli 그리고 Joseph Czerny가 있다. 이탈리아 기타리스트인 Mauro Giuliani도 베토벤 시대에 몇 년 동안 비엔나 음악 생활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었다.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는 Joseph Weigl이었다.  



Peter von Winter도 18세기 초 비엔나 무대를 위해 몇몇 작품을 썼지만 계속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Giovanni Simone Mayr도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는데 비엔나 고전주의의 영예를 받았으며 그들로부터 그의 오페라의 기악법에 영향을 받았다. 1815년 후에 비엔나에서 Rossini의 작품도 연주되었는데, 비엔나 관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귀가 어두운 베토벤은 그것을 들어본 적이 없고 Rossini는 비엔나 고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하지만 Joseph Lanner와 Johann Strauss Vater의 Biedermeier 양식의 비엔나 무곡 음악에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엔나 외부로부터의 영향

 

 

비엔나 음악생활의 전반적으로 이미 풍부해진 영향 외에도, 세  비엔나 클래식커 모두 다른 롤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Haydn은 자신의 키보드 스타일에서 Carl Philipp Emanuel Bach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지적했으며, 그의 대위법적  실행은 Fux의 Gradus ad Parnassum에 대한 그의 연구가 두드러지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이든의 작곡 근원은 부분적으로 오스트리아 민속 요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특히 몇몇 4중주에서는 때때로 헝가리 민요 또는 집시 음악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이든은 상당히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작곡가로서, 그의 런던 시대에서는 60세 이상의 나이에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자극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Wolfgang Amadeus Mozart는 그의 아버지 Leopold Mozart의 Salzburg 환경 때문에 그의 기본 특성을 갖게 되었다. Salzburg에서도 하이든의 형제 Michael은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했고, 특히 그의 실내 음악과 종교 작품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형제인 Joseph Haydn도 그를 그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교회 음악 작곡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그의 여행에서 일찍부터 많은 작곡가들과 그들의 음악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은 완전히 국제적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미 Teodor de Wyzewa와 Georges de Saint-Foix는 그들의 작품(1936~1946)에서 그 다양한 흔적을 발견했다. 몇 명의 이탈리아 작곡가(Giovanni Battista Sammartini 그리고 Niccolò Piccinni)들이 언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보헤미안 Josef Mysliveček 그리고 만하임악파의 대가들이다. 모차르트 문헌에서는 특히 모차르트의 친밀한 관계와 종종 비엔나 고전주의에서 "아버지와 발명가"로 불리는 "런던 사람" Johann Christian Bach의 영향을 강조한다.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프랑스 동시대의 사람들과의 친밀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당시에 국제적으로 사랑받은 오페라 작곡가 André-Ernest-Modeste Grétry와 François-Joseph Gossec의 관현악 작품 또는 모차르트가 1778년 파리 여행에서 알게된 Chevalier de Saint-Georges이 친밀감의 보기이다.




 

모차르트는 1782 년에 남작 van Swieten을 통해 Johann Sebastian Bach의 푸가를 알게 되었다.  그 영향은 특히 모차르트의 소위 하이든-4중주와 몇몇 후기 피아노 소나타(KV 533 및 576)에서 두드러졌다. 하이든의 후기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4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van Swieten의 중개로 헨델의 오라토리오에도 영향을 끼쳤다(메시야 등). 



베토벤이 이 모든 것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통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 베토벤은 특히 프랑스 혁명음악과 소위 공포 오페라의 극적인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즉, Étienne-Nicolas Méhul와 Luigi Cherubini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서였다. 그는 후자를 직접적인 본보기로 칭송했다(교향곡과 오페라 피델리오). 또한 피아노 거장 Muzio Clementi도 Joseph 2세 황제의 초청으로 짧은 기간 동안 비엔나에 있었는데, 모차르트와 피아노 경합을 벌여야만 했던 그는 후에 베토벤의 피아노 스타일과 기술에 다소 영향을 주었다. 




그 외의 고전주의자

 

 

기본적으로 고전주의는 시대 스타일이며 비엔나 고전주의에 속할 수 없는, 또는 "3대 비엔나 고전주의자"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은 다른 지역의 다른 음악가들에 의해서도 유지되었다. 이들 작곡가들은 종종 음악적 형식과 구조에 관한 질문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았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중요한 작곡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시대에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또한 위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영향력이 있었다.




오페라

 

특히 이것은 고전 시대에 오페라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췄던 벨칸토 나라인 이탈리아에 적용된다. 그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은 특히 정교한 노래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Opera seria에서는 매우 뚜렷했다(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의 밤의 여왕이나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서의 Konstanze처럼). 오페라 부파에서는 훨씬 더 간단했다. 악기는 성악을 덮지 않게 하기 위해 비교적 후퇴했다. 관악기는 전통적으로 더 적게 사용되었고, 그 중심은 현악기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이탈리아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중요한 차이점이 놓여있지만 그의 독일식 오페레타(Singspiel)에서도 콜로라투아적인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악기법은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훨씬 풍부하고 복잡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체적인 인상도 전반적으로 더 명확해지고, 음악은 어느 정도 섬세하고 부드러워진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해외에서도 활동했고, 그 후 그들은 부분적으로 다른 영향을 받아들였다. 1800년부터 1810년까지는(로시니의 등장까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일종의 위기로 여겨졌다.

 

 

 

고전주의 작곡가들

 

앞서 언급한 후기 나폴리 오페라 작곡가 Paisiello, Cimarosa 그리고 Piccinni와 더불어, 이탈리아 고전주의 오페라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가들 중 하나는 Baldassare Galuppi (후기 작품), Giuseppe Sarti, Pasquale Anfossi, Niccolò Jommelli, Tommaso Traetta, Antonio Sacchini, Niccolò Zingarelli, Giuseppe Nicolini 등이다. 앞서 언급한 바이에른 출신의 Giovanni Simone Mayr는 1800년대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 중 하나였으며 모차르트와 하이든으로부터 악기법을 영향받았다. Gioachino Rossini도 그의 초기 작품에서 그 아류인  Mercadante, Pacini, Bellini, Donizetti 그리고 이탈리아적인 위상에 있었던 독일인 Giacomo Meyerbeer와 함께 후기 고전에 속한다. 로시니와 앞에 언급한 작곡가들은 이미 하이든과 모차르트 오페라의 작품들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고, 일부는 베토벤 교향곡도 알고 있었고, 특히 그들의 기악법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왔다. 이런 배경에서 로시니는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이탈리아인 Luigi Cherubini(베토벤 숭배자), Ferdinando Paer 그리고 Gaspare Spontini는 프랑스(또는 독일)에서 활동했으며 Gluck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프랑스 후기 고전주의 오페라의 주요 작곡가들 중 하나이다.




기악음악

 

 

기악 음악에서, 앞서 언급한 Luigi Boccherini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함께, 특히 실내악에서,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였다. 그는 스페인에서 활동했고, 그의 스타일은 뛰어난 부드러움, 음의 아름다움, 서정적인 목가가 특징이고, 비엔나 음악보다 더 유동적이고 감성적이면서도 고품질이다. 보케리니의 스타일과 유사한 것은 Giuseppe Cambini의 광범위한(하지만 거의 연주되지 않는) 실내음악 작품에서 보인다. 그는 파리의 종교 콘서트를 위해 만든 협주 교향곡의 주요 작곡가였다.

 

그 시대의 중요한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또한 교향곡을 작곡한 Gaetano Pugnani, 협주곡에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비엔나 고전주의와 다른 진로를 취한 Giovanni Battista Viotti였다. Viotti는 런던의 Haydn 콘서트에 참여했고 Mozart는 Viotti의 e-moll 협주곡 16번에 대한 몇 개의 추가 관악기 성부를 썼다. 그의 후기 작품들 중 일부는 매혹적으로 아름답고 일부는 초기 낭만주의 비극이 관통하고 있다(특히  22번, 가단조와 다른 단조 협주곡). Viotti는 프랑스의 바이올린 작곡가 Pierre Rode, Rodolphe Kreutzer, Pierre Baillot 그리고 Nicolò Paganini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후자는 이미 낭만주의에 속한다.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 Louis Spohr는 적어도 그의 초기 작품에서 여전히 후기 고전주의를 가지고 있다.

 

 

 

피아노 음악 분야에는 고전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비엔나적이지 않은 몇몇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곡가들이 있었다: Muzio Clementi, 보헤미안 Johann Ladislaus Dussek, John Field 등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고전주의부터 초기 낭만주의까지 다양하며, 그들은 모두 초기 낭만주의 피아노 스타일을 개발하는데 베토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덴마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Friedrich Kuhlau는 그의 아름다운 소나타로 유명하며 모차르트와 하이든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개념 논의

 

영어권의 음악학은 " 비엔나 클래식"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더 넓은 고전주의 개념을 유지하는 반면, 독일 음악학은 그것을 논쟁하고 있다. Ludwig Finscher는 1834년 Raphael Georg Kiesewetter의 생각을 따라 1781년에서 1803년 사이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제한하기를 원했다. Hans Heinrich Eggebrecht는 광범위한 음악적 세부 분석을 통해 Haydn, Mozart 및 Beethoven의 포괄적인 정의를 만들었다. 반면에 Carl Dahlhaus는  Friedrich Blume의 생각을 계승했으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고전-낭만주의의 공통 시대 개념을 형성했다. 비엔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변증적인 연결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비교에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Thrasybulos Georgiades는 슈베르트의 성악과 기악 음악 분석에서 그를 비엔나 클래식 3대 대가에 할당했으며 슈베르트는 고전주의적 작곡 방법을 특히 그의 가곡과 "미완성"에서 보여주었는데, 이미 정신적으로는 낭만적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했다.







역사와 음악이 숨쉬는 도시, 오스트리아 빈

 

 

 

도나우 강,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카라얀, 빈 소년 합창단, 쉔브룬 궁전, 알프스, 비엔나 왈츠, 비엔나 커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비엔나(Vienna)는 현지 언어인 독일어 ‘빈’의 영문 표기법으로, 유럽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인 빈에 대한 타국의 예우에 다름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까닭에 유럽 대륙의 많은 역사적 변천에 관계했고,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주변 열강들의 속국이나 작은 독립국으로 명맥을 이어나갔던 오스트리아는 10세기 말 바벤베르크 왕가가 집권하고 13세기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속령이 되면서 유럽사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면서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하여 중부 유럽을 지배하였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650년간 유지되어 오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멸망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국토는 전쟁 전의 1/4로 줄어들었다. 1938년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패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다가 1955년 주권을 회복해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하였고, 지금은 유럽에서도 ‘작지만’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숲과 푸른 도나우 강을 끼고 있는 빈은 아름다운 전원도시이자 155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후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중심지로 제국주의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중부 유럽의 강자로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영화를 누렸던 18~19세기에 도시가 완성된 만큼 도시 곳곳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중세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곳의 유명한 건물들 중의 하나인 슈테판 대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세워졌다가 화재로 손실되어 200년 후 재건되었는데, 빈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다른 중요한 중세기 건물로는 13세기 말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의 성(城)인 호프부르크(Hofburg)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이던 쉔브룬(Schonbrunn)이 있다.

 

 

13세기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살았던 호프부르크 궁전은 현재 대통령 집무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스페인 승마학교, 국제 회의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전 황제가 사용하던 방을 다음 황제가 사용하지 않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불문율이 있어 왕궁 내에 무려 2,600개의 방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빈 소년 합창단이 왕궁 내 성당에서 7∼8월을 제외한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에 공연을 하고 있다.

 

쉔브룬 궁전은 연간 67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명소. 합스부르크 왕가 집권 이래 최대의 번성기를 누렸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이후 왕실의 거주지로서 전통과 화려함을 잘 간직해,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중요한 문화적 기념물 중 하나이면서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등 그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 유일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명령하에 무려 6년에 걸쳐 건축됐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절대 통치의 힘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실이 계속 증축해 총 1,441개의 방을 각각 다른 실내 장식으로 만들었고, 현재는 이중 45개만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또한 빈에는 3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는데 자연사 박물관 (Naturhistorisches Museum)과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이 대표적이다. 1750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 보관 장소로 사용되었던 자연사 박물관에는 25,000년 전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 117kg의 거대한 토파즈 원석, 1,500여 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든 마리아 테레지아의 보석 부케 등 3만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사 박물관과 더불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시장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문을 연 미술사 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유럽의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7천여 점에 달하는 회화 작품과 40만여 점의 각종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이 많으며 라파엘로, 브뤼겔, 루벤스, 클림트, 렘브란트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빈은 건축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탄생했거나 활약했던 곳으로 서양 음악가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을 정도다.

 

 

오스트리아 숲 동북쪽에 위치한 카를렌베르크는 빈을 예술 창작의 고향으로 삼았던 음악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곳으로 도나우 강과 알프스의 끝자락이 여운처럼 끌리는 호젓한 분위기, 그리고 포도주 산지의 호이리게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또한 오스트리아 숲 입구에 위치한 하일리겐슈타트는 귓병이 악화된 베토벤이 휴양지로 선택할 만큼 기후가 온화하고 일조 시간도 길어서 옛날부터 귀족들과 음악가들이 선호하는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티롤 지방의 민속춤에서 파생된 왈츠는 빈을 음악의 도시로 이끄는 또 하나의 힘이다.

 

빈의 중심가이자 고급 쇼핑가인 케른트너 거리에도 음악의 도시답게 웅장한 오페라 하우스(Staatsoper)가 자리하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거의 전소되었다가 1955년에 베토벤의 피델로 공연을 시작으로 다시 개장한 오페라 하우스는 1977년 카라얀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제2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파리 오페라 극장,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과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매년 9월에 시즌이 시작되어 연간 300회 이상의 오페라와 뮤지컬이 공연된다.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실내 입장이 허용된다.

 

 

유럽의 다른 나라가 그러하듯이 빈 역시 카페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보행자 전용 거리인 케른트너 거리의 한쪽에 위치한 노천 카페촌은 단순히 커피만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는 곳이자 오스트리아의 정치인들이 모여 국정을 논하는 중요한 곳이다. ‘빈’ 하면 떠오르는 비엔나 커피는 사실 빈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대신 블랙 커피에 크림을 얹은 아인스페너(Einspanner)를 이곳, 빈에서만 맛볼 수 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시립공원(Stadtpark)은 빈을 둘러싸고 있는 오스트리아 숲과 함께 빈을 ‘전원의 도시’로 만들어주었다. 공원 내부에 세워진 요한 슈트라우스, 슈베르트 등 12명의 음악가들의 기념상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요한 슈트라우스의 연주회가 열렸던 쿠어살롱(Kursalon)에서 매일 밤 9시에 열리는 시범 왈츠에 참가할 수 있다. 시립공원 근처에 콘체르트 하우스와 메리어트 호텔, 래디슨 SAS 호텔 등이 있어 빈은 여행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도시이다.





클래식의 도시 비엔나…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

 

많은 사람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에 항상 꼽히는 곳, 그들만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혼재하며 또한 그것을 지켜 나가는 곳,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고딕양식의 성당, 아돌프 로스의 근현대적인 건물 등이 도시의 심장부에 함께 하는 곳. 

 

바로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Habsburg)가의 수도 ‘비엔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비엔나, 자국어인 독일어로는 ‘빈(Wein)’이라 불리는 이 도시의 매력은 관광 대도시답게 다양하다. 

 

빈의 어원은 ‘빈도보나(Vindobona)’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로마시대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도나우 강가 주변으로 형성된 국경도시 빈도보나는 갈리아어로 ‘하얀기지’를 뜻한다. 한마디로 로마군대의 군영이었다.

 

또한 ‘빈도보나(Vindobona)’의 ‘Vin’은 빈(Wien)으로, ‘dobona’는 도나우(Donau)강으로, ‘Donau’의 ‘au’는 동쪽이라는 뜻의 독일어 ‘Oester’에서 유래해 ‘Osterreich’ 즉 ‘Austria’가 됐다고 여러 학자들의 의해 추측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비엔나는 유럽문화 예술의 중심으로 자리잡았을까? 아마 합스부르크가가 살기 시작한 시점인 1440년대부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럽 여러 가문과의 혼맥으로 15세기 중반 신성로마제국의 패권을 거머쥔 합스부르크가가 빈을 실질적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비엔나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과 흑사병의 창궐, 나폴레옹의 침략 등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유럽의 문화, 예술, 과학, 인문 등 여러 분야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잃지 않았다. 

 

세계 1차대전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카를1세가 퇴위하며 가문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비엔나의 전통적이고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유지되고 있다. 이런 비엔나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무엇일까? 아마도 ‘클래식’이 아닐까 싶다.

 

 

클래식의 도시

 

고전을 뜻하는 단어 클래식은 영어로 ‘Classic’, 독일어로 ‘Klassik’으로 비슷한 발음이다. 비슷한 발음처럼 고전은 시대를 넘어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클래식은 무엇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구식은 모든 세대가 비웃지만, 클래식은 인류사와 함께 영속한다”고. 즉 클래식이란 단순히 고풍스럽고 오래된 고전이란 의미를 넘어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면에서 클래식이란 단어와 비엔나는 여러 속성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 도시를 관광한다는 것은 곧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변치 않는 가치를 느껴보는 것과도 같다. 

 

850여년 전에 축성된 비엔나의 랜드마크 슈테판 대성당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결혼식, 비발디와 모차르트의 장례식 등 많은 사건들과 함께 도시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또한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오래된 카페는 전통커피인 아인슈페너(Einspanner) 또는 멜랑쉬(Melange)를 한잔씩 마시며 100여년전 당시 분위기에 빠져보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한다. 

 

렘브란트와 루벤스를 비롯한 합스부르크가의 소장품부터 클림트와 쉴레, 코코슈카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소장품과 미술세계는 역사라는 시간예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엔나를 클래식의 도시답게 만드는 것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비엔나의 중심거리인 ‘케른트너 슈트라세(Karntner Strasse)’,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명동 또는 강남이라 할 수 있는 이 거리에는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허가 받은 몃몃 예술가들이 대중과 여행객들을 상대로 거리공연을 하는데 꽤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준다. 물론 꼭 클래식음악만 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거리 예술가들은 음대 학생이거나 프로 클래식 음악가들이다. 

 

또한 여름이면 시청 청사 앞에 커다란 스크린과 스피커를 설치하고 음악회를 보여주는 필름 페스티벌을 무료로 연다. 음악자체가 하나의 문화이고 도시의 상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중들에게 비엔나는 클래식 음악의 고장으로 각인된 것일까?   

 

 

도시의 음악가들

 

중세 르네상스 이후 서양 음악은 종교와 함께 발전되어 왔다. 투르베르(Trouvere), 투르바두르(Troubadour) 같은 음유시인들도 활동했지만 음악의 이론과 체계, 악기의 발전 등은 종교와 함께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종교는 국가와 가문을 결속시키고 서로의 유대감 강화를 통해 대중을 통치하는 수단이었다. 르네상스시절부터 바로크 시대까지 교회음악의 발전은 곧 대중음악의 발전으로 나타났는데 오페라나 협주곡 등이 서민들의 인기를 얻게 된 계기 역시 교회음악이라는 자양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구가 많은 곳은 큰 교회들이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한 합스부르크가의 수도였던 비엔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통해 많은 음악가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음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메디치(Medici) 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예술가들 또한 제국이 가진 힘의 균형 추에 따라 기회를 찾아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제이자 작곡가인 비발디 또한 그런 인물 중 하나로 그가 살았던 장소는 현재 오페라 극장 맞은편인 자허 호텔(Sacher Hotels) 근방이었으며 생애 또한 이곳에서 마무리했다. 

 

로마 카톨릭을 국교로 삼은 합스부르크가의 수도는 종교를 통한 행사 이외에도 황제와 귀족들의 사교 모임 또한 아주 중요했다. 몇몇 귀족가문들은 개인 악사를 고용하여 음악회를 즐겼으며, 자연스럽게 사교음악 또한 발전하였던 것이다. 

 

헝가리의 명문 귀족 에스터하지 가문은 하이든이라는 교향곡의 아버지를 만들어냈고,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래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 사교를 통한 자유로운 음악 활동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겪은 삶의 궤적을 통해 위대해 질 수 있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이 세 명의 음악가들이 비엔나를 음악의 도시라 불리게 만든 바탕이 되어 준 것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은 모두 비엔나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는 인연들이다. 그 중심에는 가장 선배인 하이든이 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24년정도의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우정을 나누었으며 베토벤과는 사제관계로 영향을 준 인물이다. 파파(아버지)라고 불리며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여러 음악가들에게 존경을 받은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높이 샀다. 

 

한번은 현악사중주에 깊은 애착이 있는 하이든이 모차르트가 자신에게 헌정한 현악 사중주작품을 연주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제1바이올린은 하이든이 연주하고, 2바이올린은 디터스도르프, 비올라는 모차르트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고 첼로는 반할이 연주하는 대단한 초연무대였다. 

 

자신에게 헌정된 모차르트 4중주 작품을 초연한 이후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모차르트는 내가 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감각이 뛰어나고 작곡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은 위대한 작곡가”라고 극찬했다. 

 

모차르트는 분명 선배작곡가인 하이든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하이든 역시 반음계적 화성과 불협화음이 등장한 모차르트의 전성기시절 음악을 연구하며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음악평론가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시프먼에 의하면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 혼돈을 나타내는 긴 서주는 모차르트의 현악사중주 19 C장조가 아니면 나오기 힘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베토벤 역시 하이든과 사제지간으로 초창기 작품은 하이든의 영향력이 드러난다. 물론 베토벤이 바쁜 스승 하이든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바쁜 하이든을 대신해 모차르트를 시기 질투했다고 알려진 (사실과 다르지만)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성악작곡법을 배우고 여러 유명 선생들에게 과외를 받은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신포니아나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의 주제를 바탕으로 4개악장의 음악적 프레임을 만들어나가서 발전시킨 부분, 정교한 선율의 전개기법 등은 베토벤이 하이든으로부터 받은 유산임에 틀림없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중 세곡을 스승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세계음악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만남이 한 시대 비엔나라는 도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도시가 갖는 매력은 충분하다. 

 

이들의 삶과 음악 그리고 만남이 한 도시 안에서 어우러지며 그들 음악을 더욱더 빛나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베토벤·클림트…빈은 600년간 '유럽 예술의 수도'였다

 

빈의 문화세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산물

 

1500년대 중반부터

주변 국가들 합병하고

유럽 최고 왕가로 부상

 

오스트리아 빈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쇤부른 궁과 호프부르크 궁이 있고,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 빈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최고 집산지’ 빈 미술사 박물관이 있다. 음악의 수도라는 별명답게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살았던 집들이 기념관으로 변모해 남아 있다. 벨베데레·레오폴트 미술관에는 ‘키스’를 비롯한 클림트와 실레의 걸작들이 가득하다.

 

빈을 잘 모르는 방문객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조그만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이렇게나 화려하단 말인가. 빈의 화려한 면면은 하나의 단어를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21세기인 현재까지도 바로크 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도시, 빈의 위용은 바로 ‘합스부르크’라는 한 가문에서 비롯됐다.

 

1273년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했다. 스위스의 평범한 백작 집안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자손이 신성 로마 제국(962~1806)의 황제로 선출된 것이다. 황제 선거권이 있던 일곱 선제후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고, 대립 끝에 별다른 배후 세력이 없었던 루돌프 합스부르크를 황제로 선택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기틀은 아직 미약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은 교황청과 독일어권 제후들 사이의 세력 판도에 따라 여기저기로 오갔다.

 

혼란의 와중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4세(1358~1365 재위)가 1359년, 자신이 일곱 선제후 위에 존재하는 ‘대공’이라는 거짓 문서를 들고 나타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허위 문서를 근거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세습할 자격을 얻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결혼을 통해 플랑드르(벨기에·네덜란드) 스페인 헝가리를 차례로 합병했다. 마침내 1500년대 중반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북이탈리아 보헤미아 플랑드르 스페인을 모두 통치하는 유럽 최고 왕가로 부상했다.

 

합스부르크는 1440년 이후 빈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아 왔다. 빈은 자연히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됐다. 황제의 수도이자 군사적인 요충지며 인접한 이슬람 국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에서 기독교 세계를 지켜야 하는 최전방이었다. 빈의 문화는 화려한 동시에 묘하게 보수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이런 분위기의 빈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빈 고전주의 음악가들이 활동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 영토 안에는 11개의 다른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언어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장려했고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황제의 궁정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빈으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도 있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1782년 빈으로 왔지만 소원하던 궁정 악장 자리를 끝내 얻지 못하고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반면 1792년 빈에 정착한 고전주의 음악의 최고봉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귀족들의 후원과 악보 출판으로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며 끝까지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아남았다.

 

클림트의 등장, 제국의 몰락

1850년대 이후에는 매일 저녁마다 빈 시내 곳곳에서 왈츠 무도회가 열렸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의 왈츠곡들은 발표하는 족족 큰 인기를 얻었다. 빈은 외부의 모든 변화를 굳건하게 외면하며 과거로 돌아가기를 꿈꿨다. 물론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빈은 1808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는 큰 굴욕을 겪었다. 이때 빈 구도심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다.

 

사실상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1848~1916 재위)는 성벽 자리에 도심을 원형으로 감싸는 환상 도로 링슈트라세(Ringstrasse)를 새로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계획의 중점은 환상 도로 주변에 장대한 바로크식 건물들을 대거 세워서 황제정의 위엄을 만방에 과시하는 데 있었다.

 

유럽 도시들이 도로를 넓히고 하수도와 도서관을 만들며 시민을 위한 도시를 한창 건설하고 있을 때 빈은 때아닌 바로크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시청사, 오페라 하우스, 미술사와 자연사 박물관, 빈 대학 본부, 부르크 극장 등등 도로를 둘러싼 웅장한 건물들이 1870~1890년대 줄줄이 완공됐다.

모차르트·베토벤·클림트…빈은 600년간 '유럽 예술의 수도'였다이미지 크게보기

빈의 해묵은 역사 지향적 분위기에 진보적인 빈 시민들, 특히 젊은 예술가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거대 박물관 같은 링슈트라세를 비판하면서 빈에도 새로운 예술의 분위기가 싹을 틔웠다. 1897년, 빈의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예술에서 자신을 분리하겠다는 의미의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연맹의 회장으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를 추대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과 제국의 위상은 20세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190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즉위 60주년을 맞았다. 제국의 영토는 더 넓어졌으며 황제의 영광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황제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대규모 미술 전시회 ‘쿤스트쇼’에 출품된 클림트의 작품 중 하나가 ‘키스’다. 한때 정면으로 제국의 보수주의에 저항하던 클림트는 타협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고답적이고 정교한 황금빛 장식 속에 싸여 있는 연인들의 모습은 오래된 도시 빈에 보내는 클림트의 항복 선언과도 같았다.

 

영원할 듯하던 제국은 눈 깜짝할 사이 파국에 맞닥뜨렸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됐다. 한 달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당사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는 물론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 전 유럽이 삽시간에 어둡고 긴 전쟁의 터널로 빨려들어갔다.

 

모차르트·베토벤·클림트…빈은 600년간 '유럽 예술의 수도'였다. 1차 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됐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들은 국외로 추방됐고 오스트리아는 제국 영토의 80%를 잃었다. 제국의 종말과 함께 빈에서 명멸하던 예술가들의 집단도 흩어졌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 분리파의 두 기수는 1918년 종전과 함께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이들이 살았던 ‘어제의 세계’ 빈에는 이제 황제도 제국의 영광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링슈트라세의 양편을 메운 장대한 건물들과 빈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들, 그리고 클림트와 실레의 번뜩이는 영감을 담은 작품들은 여전히 빈에 남아서 한때 화려했던 이 도시의 과거를 추억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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