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소설가, 독립운동가,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김동인
염상섭
廉想涉
출생
1897년 8월 30일
한성부 북서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사망
1963년 3월 14일 (향년 65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학력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 (2학년 / 전학)
보성소학교 (졸업)
보성고등보통학교 (전학)
교토제2부속중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사학 / 중퇴)
종교
불교 →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
호
제월(霽月)·횡보(橫步)
병역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중령 (정훈병과)
대한민국의 소설가, 독립운동가. 본관은 파주(坡州), 본명은 염상섭(廉尙燮), 호는 횡보(橫步). 횡보란 호를 가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썰이 있다. 첫째는 항상 술에 취해 횡으로 걸어다녔기 때문이고, 둘째는 괴이한 행동들을 많이 해서 횡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을 현대문학으로서 승화시킨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가이자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가이다.
1897년 8월 30일 한성부 북서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서 아버지 염규환(廉圭桓)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6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염창섭(廉昌燮)·염명섭(廉明燮) 등 2명의 형과 아래로 염용섭(廉龍燮)·염충섭(廉忠燮)·염형섭(廉亨燮) 등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의 조부 염인식(廉仁湜)은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아버지 염규환(廉圭桓)은 구한말 군수였다.
11세 때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친일적인 학풍에 반발해 2년 만에 자퇴하고 보성소학교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191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염상섭은 서울의 개명한, 즉 신식 문물에 밝은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 당시엔 드물게도 조혼을 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결국 30대까지 총각이었다. 지금도 30대 중후반 넘어서까지 결혼을 못하면 그리 좋은 눈으로는 안 보는데, 그때 시각에서 보자면 천연기념물에 가깝다.
교토 제2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사학과에 전입하였으나, 1918년 병으로 자퇴한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주도한 도쿄 2.8 독립 선언 사건이 있은 뒤, 혼자서 오사카 텐노지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계획적으로 진행됐던 도쿄 독립선언서와는 달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발표한다. 물론 발표할 때에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노동자와 유학생이 모였었다. 특이하게 독립선언 명의를 재오사카 한국노동자대표로 했다.
결국 일본 제국 경찰에 잡히긴 하는데, 그 당시엔 독립선언을 불법으로 할 법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쓰레기(즉, 전단지) 불법투기를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았는데, 변호사를 대지 않고 직접 자기 변론을 하며 뛰어난 언변 실력을 보여 일본 판사가 염상섭을 꽤 귀여워했다고 한다. 재판정에 선 염상섭은 당시 일본치하에서 조선의 비참함과 현실을 호소했는데 방청객과 판사가 꽤나 감격했고, 이때 판사가 염상섭에게 변호사가 되기를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간수도 그를 귀여워해서, 출옥할 때 간수와 기념사진도 찍었다고 한다. 그 기록은 일본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그런 일이 이슈가 되어 귀국하고 동아일보 1기 특채 정치부 기자로 일한다. 월급도 후했고 전용 인력거까지 제공받았다고 한다. 그 후 동아일보 기자와 작가 생활을 하였고 1920년대 초반에는 홍기문과 격렬한 키배를 뜨기도 했다. 일제 말엽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절필하고 만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한다.
광복 후 <신민일보>를 중심으로 남북협상운동의 여론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미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구금되기도 하였다. 해방후 만주의 재산을 정리해서 돌아왔는데, 당시 문학 단체에서 일한 경력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 생활을 하였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취우>. 말 그대로 전쟁도 한때의 소나기라는 이야기. 전쟁 자체의 묘사보다 점령지에서의 일상 생활을 밀도 있게 그렸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해군 정훈병과 소령으로 임관하고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전후 1954년에는 예술원회원에 선임되고,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3월 14일 아침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다. 종로 교보문고 광화문점 앞에는 그를 기념하는 등신대 동상이 있다. 본래 이 동상은 종묘 앞에 위치해 있었으나 종묘 성역화 사업으로 삼청공원에 이전하였다가, 2014년 4월 1일에 다시 이전하였다.
창작 경향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성좌로 불릴 정도로, 당대 시대상을 이 작가만큼 세밀하게 다룬 작가는 드물다.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은 박태원 정도밖에 없다. 아무튼 이후 황석영으로 이어질 리얼리즘 소설의 한 계열을 열어젖힌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지금도 평단의 보수적 인사가 현실 천착 소설 부족을 평할 때 그렇지 않은 전범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 대개 이 작가이다.
또한 드물게도 서울 출신이어서, 염상섭의 작품에는 당대의 서울 사투리가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언어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 하지만 이 작품은 청개구리 해부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집필한 것이라 고증이 어긋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청개구리 해부는 서술자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장면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염상섭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삼대는 한국 현대 소설 중에서 최초의 가정 소설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고전소설로 가면 삼대와 구성이 같은 가정 소설이 완월회맹연이나 명주보월빙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으로 치면 막장 드라마급이라는 것이 문제이지만.
또한, 광복 이후에는 광복의 기쁨과 감격을 그린 소설 해방의 아들을 발표하였으며 영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양과자갑, 인공치하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취우 3편 연작이 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서민들에게서 일본의 존재를 대신한 미국을 나타낸 얼룩진 시대 풍경이라는 작품을 썼다.
또한, 현실을 상당히 잘 담아내는 동시에 지나치게 어두운 작품들을 많이 썼다. 밝은 분위기의 작품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염상섭의 작품 대부분이 한없이 어둡기만 한 이유에는, 그가 특정한 독자층을 노리고 그런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무튼 문학계에서는 여러 가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지나치게 어둡고 내용도 어렵다는 특징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독자들도 여럿 있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문학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것이 중론.
친일 의혹
일제 말엽에서 절필한 것을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친일 의혹이 있다. 개연성 수준까지 가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염상섭은 만몽일보와 이후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합쳐져서 발행된 신문 만선일보의 편집자 겸 주필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는데, 만몽일보는 일본이 만주 지역에서 대조선인용으로 찍어낸 기관지였다. 이때 같이 이름을 올린 인물이 이 시기에는 이미 1급 친일파 소리를 듣고 있던 육당 최남선, 카프 활동으로 유명한 홍양명, 1910년대에는 잡지 학지광을 통해서 총독부가 감찰을 하였으나 1920년대에는 총독부가 끼니 걱정까지 해줄 정도로 자금 지원을 받은 진학문 등이다. 이에 대해서는 만주에서 한국어로 문학 활동 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 운운하는 이들까지 존재했지만, 그 실체는 만주국 설치 과정에서 만주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에서 자본금까지 출자한 명실상부한 어용지이다.
또한 염상섭은 진학문이 최남선과 손잡으면서 창건한 잡지 동명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동명이나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총독부의 강요와 그로 인한 자금 압박으로 무너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편집부에 일본인들이나 확실한 친일파들이 참여하였고 진국문과 당시 총독부 사이에서 자금 지원이 오간 기록, 최남선이 사이토 총독 측근인 아베에게 보낸 편지 등이 남아있는 등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이것 역시 만선일보와 함께 명백한 친일의 증거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친일 개연성이기 때문에 여기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모두 친일 의혹이 존재한다.
대표작
삼대: 1947년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만세전 : 192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두 파산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4년 출간된 <견우화>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집을 구성하는 세 작품 <암야>, <표본실의 청개구리>, <제야>는 삼부작으로 엮여서 평가받는다.
기타 작품
무화과
백구: 삼대, 무화과를 잇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염상섭의 세계관을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는 3부작이지만 삼대에 가려져 무화과와 함께 아는 사람이 적다. 당장 이 문서에서도 두 작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해방의 아들
취우
효풍
양과자갑
얼룩진 시대 풍경
전화
암야
제야
짖지 않는 개
채석장의 소년: 의외로 저연령층을 상대로 한 소설이다. 6.25 전쟁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임종
말년에 이마 한쪽에 자두만 한 큰 혹이 생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혹이 당시 유명해서였는지, 대부분 과거 학습서나 교과서에 실린 염상섭 사진이나 그림은 혹이 난 채로 환하게 웃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많이 실려 있다.참조사진 종양으로 보이긴 하나 건강에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가족들이 "의사양반에게 찾아가 수술이라도 받아 보라"고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병원 갈 필요 없다"며 그냥 넘겼다는 말도 있다. 생전 술을 좋아해서인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이마에 혹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본래는 불자였으나 18세 쯤에 천주교로 개종했으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주당에 골초이기도 해서 하루에 담배를 피우는 데만 라이터 2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다만 그 당시의 라이터가 기술적으로 조잡하여 빨리 망가지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문란한 성생활로 얻은 성병으로 성불구자가 되고 결혼 뒤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자식을 얻게 되는 주인공의 모델이다. 염상섭의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김동인을 모델로 집안 몰락하고, 아내가 가출하자 미쳐버린 김창억이란 인물을 등장시키자 이에 맞대응하려고 쓴 소설이 이것.
나혜석과 친하게 지냈는데, 한때 나혜석을 흠모해서 그녀를 모델로 한 중편소설 <해바라기>(1923)를 쓰기도 했다.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유년 시절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6.25 전쟁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좀 어려웠다고 한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누구든 그랬다는 경우가 흔했다는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어쨌든 가난 탓에 죽을 때까지 월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염상섭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소설가들 중에서, 장편소설로서 성공한 경우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무정, 흙, 사랑 등을 남긴 이광수는 국문학의 선구자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문학적 완성도에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김동인은 '젊은 그들'이나 '운현궁의 봄' 등 역사소설들로 인기를 얻었지만, 장르적 재미와 별개로 문제작으로서의 성격은 약한 편이다. 현진건은 일제의 압력으로 제대로 연재를 못해서 '무영탑'을 제외하면 주목받는 장편소설이 없다. 이태준이나 이효석은 장편을 여러 편 썼지만, 서사를 묵직하게 끌고가는 능력이 부족해서 단편에서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유정과 이상은 요절했다.('12월 12일'을 이상의 장편이라 볼 수 있겠으나 대표작은 아니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계용묵은 과작 성향이라 집필 속도가 느렸고, 특히 장편은 거의 안 썼다. 계용묵은 장편소설을 딱 하나 쓰긴 했으나, 원고를 분실하여 발표하지 못했다.
염상섭을 제외하고 장편소설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일제강점기 소설가는 태평천하와 탁류를 남긴 채만식, 고향의 이기영, <천변풍경>의 박태원 정도다.
1948년에는 만필의 만화시비라는 수필에서 활자를 사용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만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만화를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고 활자나 문학만을 우월한 것으로 취급하는 풍조는 그 뿐만 아니라 문인들에게서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풍조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官立師範附屬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반일 학생으로 지목되어 중퇴하였다.
1912년 보성소 · 중학교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교토[京都] 부립제2중학을 졸업하고 1918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오사카[大阪]에서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금고형을 받고 학교는 중퇴한 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기자가 되어 1920년 귀국하였다.
한때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지만, 이후 줄곧 신문 · 잡지 편집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설 · 평론에 전념하였다.
문예전문지 『폐허(廢墟)』의 동인 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청산하고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중편소설 「만세전」(1922)을 집필, 연재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현실 인식이 확인되었으며,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저항적 반일감정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갔으나 별 성과 없이 귀국하여 1929년 결혼을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장편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표작 「삼대(三代)」를 비롯하여 「무화과(無花果)」 · 「백구(白鳩)」 등과 「사랑과 죄」 · 「이심(二心)」 · 「모란꽃 필 때」 등 우수한 장편을 쓰기도 하였다.
단편 역시 초기에는 암울,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으나 사회 전반을 다루는 경향으로 나가면서부터는 보다 치밀한 관찰과 객관적 기술을 보임으로써 명실공히 리얼리즘적 경향을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제야(除夜)」 · 「해바라기」 · 「금반지」 · 「고독」 · 「조그만 일」 · 「두 출발」 · 「남충서(南忠緖)」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말기 10여 년(1936∼1945)은 만주 · 신경에 살면서 『만선일보』 편집국장 · 회사 홍보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절필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다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6 · 25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반공 전선에 나가 휴전이 되는 해까지 정훈일을 보았다.
제대 후 한때 서라벌예술대학장으로 있기도 하였지만, 창작에 정진하여 병중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삼팔선」 · 「임종」 · 「두파산」 · 「굴레」 등 단편과 「효풍」 · 「난류」 · 「취우」 · 「새울림」 · 「미망인」 등의 장편은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1963년 3월 직장암으로 작고할 때까지 완성된 본격 장편 20여 편, 단편 150편, 평론 100여 편 이외에 기타 수필 등 잡문 200여 편의 글을 남기었다.
그 삶과 문학의 특징은 민족적이었고 전통적이었으며 야인적이었다. 식민지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하였다. 또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문학의 골격으로 삼았고 서구 근대 물질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윤리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더욱이,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하고 식민지적 현실을 부정하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점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