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르스트뢰밍, 시큼한 청어 요리, 세계 최악 악취 음식, 스웨덴 통조림, 대서양 청어
수르스트뢰밍
수르스트뢰밍(Surströmming)은 스웨덴의 통조림 식품으로, 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요리이자 그와 동시에 세계 최악의 악취 음식이라고 알려진 요리이다.
이름의 유래는 스웨덴어로 '시큼하다'를 뜻하는 수르(Sur)와 북유럽 지역에서 청어를 칭하는 표현인 스트룀밍(Strömming)의 합성어다. 일반적인 대서양 청어는 실(Sill, Sild)이라고 부르며 보통 식초절임으로 먹는다. 직역하면 '시큼한 청어 요리'이다. 핀란드어로는 하판실라카라고 하는데 뜻은 비슷하다.
참고로 같은 청어를(Sprat종) 삭히지 않고 그냥 훈제만 해서 만든 평범한 맛의 훈제 청어 통조림도 존재하고, 사실은 이쪽이 청어 통조림의 주류이며 수르스트뢰밍은 스웨덴 한정 특산품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물건으로 비유하자면 일반 참치캔이 아니라 일부러 푹 삭힌 참치를 넣은 참치캔이 수르스트뢰밍인 것.
설명
생선을 절이는 문화는 9000년 전 스웨덴 남부에서 확인되었지만 현대의 수르스트뢰밍이 본격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16세기부터라고 한다.
KBS 다큐 슈퍼피시에 의하면 추운 겨울을 대비한 염장 생선에서 출발한 음식이라고 한다. 보통 염장이라면 당연히 소금을 써야겠지만 암염 지대가 없어 육지에서도 소금을 공급하지 못하고 날씨가 추워 해수로 소금을 만들기도 어려운 사정상 발트해의 밍밍한 물로 대충 염장하는 시늉밖에 하지 못해서 살균이 제대로 되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 보관되는 동안 할란아에로비움(Halanaerobium)이라는 고균이 청어를 발효시킨 것이다.7여기에 수르스트뢰밍에 쓸 청어도 비교적 기름기가 적다. 스웨덴어로는 발트해 청어와 북해 청어를 다르게 부른다.
제조 과정은 정말 간단한데 청어에 소금을 뿌리고 한국의 젓갈통처럼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된 통에 넣어 발효시킨 다음 밀봉하면 끝이다. 통조림이라도 예외적으로 열처리 같은 별도의 멸균 처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발효가 계속되면서 산소는 줄어들고 이산화탄소와 황화 수소, 카복시산 산물 등이 늘어나서 자연적으로 살균된다. 그 가스들이 통조림을 개봉하는 순간에 몽땅 튀어나오면서 특유의 그 악취를 온 사방에 퍼뜨린다. 물론 염장 농도에 따라 악취는 조금씩 달라진다.
흉악한 악취
이 음식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로, 한국에서도 악취를 가져서 진입장벽이 높은 음식으로 유명한 홍어보다도 한 술 더 아니, 여러 술 더 뜨는 악취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위의 영국남자 영상에서도 냄새는 비교도 안 된다고 했는데 실제 수치상으로도 홍어보다 독한 음식이다. 단, 홍어회는 특유의 암모니아 성분으로 인하여 코를 찌르는 느낌과 입천장을 자극하는 느낌, 그리고 지린내가 나지만 수르스트뢰밍은 냄새 자체는 자극적이지는 않은 대신 사람의 똥냄새 및 하수구 냄새에 가까운 구린 냄새가 아주 심하게 난다.
실제로 야외에서 캔을 따는 영상에서 똥냄새에 가까운 악취 때문에 동네 파리들이 모조리 다 몰려드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덤으로 캔 내부에서 발효되며 가스가 차 있기 때문에 캔을 따면 그 방향으로 액체가 분출하게 된다. 멋모르고 그대로 땄다가 액체를 뒤집어쓰는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 주의. 시식을 하고 싶다면 여러 겹의 비닐로 감싼 후에 고무장갑을 끼고 딴 뒤 먹고 나서 통째로 꽉꽉 묶어서 처분하는 것을 추천한다.
1981년 독일에서는 입주자가 아파트 안에서 수르스트뢰밍을 까서 악취가 풍겼다고 집주인이 아무 통보 없이 그 입주자를 바로 강제 퇴거시켜 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당사자들이 재판장에 섰을 때, 입주자가 집주인이 너무하다고 항변하고 판사와 변호사도 너무 심한 짓 아닌가해서 물어보니 집주인이 재판정에서 직접 겪어보게끔 직접 수르스트뢰밍의 뚜껑을 따자 충격적인 악취에 판사와 변호사도 경악하여 "아, 알았으니까 빨리 치워요!"라고 외치며 결국 집주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일은 세입자 보호가 잘 보장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집주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수르스트뢰밍이 지독한 악취를 가졌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스웨덴 아파트에서도 절대 까지 말라고 공지하는 판이다. 하나만 까도 아파트 전 세대에 냄새가 퍼진다고 한다. 위 영상에서도 나왔듯 학생들이 환풍구 같은 곳에 저걸 놓아두는 장난을 치자 악취 때문에 학교 문을 닫는 사건까지 발생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2006년 4월 에어 프랑스와 영국항공 등 유럽의 몇몇 메이저 항공사들은 이 음식이 압축된 캔이 폭발할 가능성을 이유로 들어 반입을 금지했다. 이후 스톡홀름 알란다 국제공항에서 수르스트뢰밍 캔의 판매가 급락했다. 수르스트뢰밍 제조사는 항공사의 이 같은 결정을 문화적 문맹이라고 비난하며 생선 통조림의 폭발 가능성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폭발은 둘째치고서라도 밀폐 상태에서 삭아 있기 때문에 탄산음료를 흔들고 개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깡통에 구멍이 나는 순간 화산이 폭발하듯 맹렬히 분출된다. 캔따개로 딸 때 팍 튀는 이유가 여기 있다.
2014년 5월 2일,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발효 중이던 1000여 개의 통조림이 폭발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는데 다행히도 종업원들은 미리 대피해서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KBS2의 스펀지와 MBC every1의 이경규의 복불복쇼에서 나온 후 대한민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이전까지는 요리에 대해 흥미 있는 사람들 외엔 잘 알려지진 않았고 이런저런 일본 만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해 그쪽으로 먼저 접한 오덕들도 많을 것이다. 일본의 쇼프로에는 단골 음식으로 등장한다. 모야시몬에도 나왔다. 이쪽 표현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심한 음식, 8070AU라는 경이적인 냄새 수치를 지녔다. 하루 종일 신고 다니다 갓 벗은 남성 구두 냄새가 187AU, 경기를 마친 야구 선수의 운동 양말이 420AU이다. 2위는 6230AU인 삭힌 홍어회이다. 참고로 해당 수치는 일본의 발효식품 전문가인 '고이즈미 다케오'가 2012년에 저술하여 출간된 '醱酵食品學(발효식품학)'이란 저서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해당 서적은 한국어판으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스펀지 2.0 세계의 악취 음식 편에서 나왔을 때는 다른 음식은 멀쩡하게 세팅한 것과는 대조되게 개봉하지도 않은 따다 만 통조림인 채로 시식단인 이휘재와 한 요리 연구가에게 그대로 줬다. 왜 이렇게 주냐는 이휘재의 질문에 '세팅을 담당한 스태프가 냄새 때문에 도저히 개봉을 못 하겠다며 도망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휘재가 직접 개봉했는데 더도 덜도 말고 딱 대변 냄새라고 증언했다. 이후 나온 실험진들도 이 엄청난 악취에 경악하여 서둘러 도망가기 바빴다.
이경규의 복불복 쇼에 나온 바로는 완전 개봉 후에 접시에 붓자 멀리서 보던 출연진과 촬영진조차 냄새에 질색했고 시식자인 이병진도 흰색 보호복을 착용했을 정도였다. 집 안에서 열면 적어도 1주일 이상은 냄새가 가시질 않기 때문에 스웨덴인들도 되도록 야외에서 개봉하거나 물을 받아 놓은 싱크대 안에서 따는 등 최대한 냄새를 안 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방송도 스튜디오 촬영을 진행하다가 촬영장 옥상으로 올라와서 개봉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좀 과장된 것이 이경규의 복불복 쇼에서 나온 수르스트뢰밍은 정말 오래 삭아서 아예 죽처럼 청어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실제 스웨덴에서는 그것보다 발효가 덜 되어 청어의 형태가 남아 있는 수르스트뢰밍을 주로 먹는다. 물론 청어의 형태가 남아있는 수르스트뢰밍도 냄새는 최강급이지만. 스펀지에서 이 통조림을 가지고 촬영을 하다가 냄새로 인하여 방청객들이 촬영을 거부했다.
2012년 5월 14일,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후각이 마비되어 고통받는 남자' 고민 사연에 이 음식이 소개된 적 있다.
2014년 노르웨이의 잉게 하우센이라는 사람이 1990년에 산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을 자신의 산장에 놓고 깜빡하다가 발견했는데 이걸 보자마자 바로 폭발물 처리반에 신고했다.15 연락을 받은 노르웨이군은 인근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스웨덴 수르스트뢰밍 학회의 루벤 메드손이라는 사람을 연결해 주었는데 이 사람은 이걸 먹었다. 노르웨이의 방송인 NRK가 이 장면을 중계했는데 살이 하나도 남지 않아서 마치 죽 같이 보인다. 시식한 루벤 메드손은 보존 상태가 나쁜 통조림이라 수르스트뢰밍 본연의 맛이 나지 않았다고 시식 소감을 밝혔다. 고작 상한 통조림 하나 때문에 망설임 없이 주민들이 도망가고 군대, 그 중에서도 정예부대인 폭발물 처리반이 출동한 것도 모자라서 장난신고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응했다는 것 자체가 생화학무기에 준하는 이 음식의 악명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번역된 일본인 여행가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러 가던 책자인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에서도 언급되는데 여행가도 냄새에 기겁했는데 그래도 두 숟가락은 퍼먹었더니 주변에 있던 스웨덴 사람들이 정말 잘 먹는 거라고 감탄했을 정도다. 딱 한 사람만 좋아한다며 신나게 퍼먹었지만 주변의 다른 스웨덴 사람들은 코 막고 일절 건드리지 않았으니 니시카와와 그 스웨덴인 두 사람만 먹은 셈이다. 현지인들도 대중적으로 먹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책에서 그 스웨덴인은 이걸 다 먹고 애인에게 키스하려다가 애인이 미쳤냐고 기겁하며 밀쳐서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고 한다.
2015년 5월 서울 고려대학교 인문 캠퍼스 학생회관에서 이걸 먹다 말고 복도 휴지통에 버린 사건이 있었다.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의 말로는 궁금해서 여행 다녀오는 후배에게 부탁해서 받아서 뜯었는데 생각보다 충격이 크지 않았지만 먹기 좋은 맛도 아니기에 버렸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서 이걸 무책임하게 버린 사람을 찾는다며 성토하는 글이 올라오고 유명해지자 그렇게 버린 게 자기라면서 해당 학생회관에 있는 동아리에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다녔다. 특별히 테러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 생각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구조의 건물이더라도 한 개 층은 통곡하게 만들었을 텐데 하필 학생회관이라는 건물의 중앙부가 2층부터 최상층까지 뻥 뚫려 채광을 받도록 되어 있었던 탓에 그 구역으로 빛뿐만 아니라 수르수트뢰밍의 냄새가 퍼져 며칠 간 학생회관에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유튜버 우마도 수르스트뢰밍 리뷰를 했는데, 이 쪽은 아예 급이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식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데, 우마만 혼자 땅 속에 파묻히고 화생방 훈련하듯 상자 안에서 수르스트뢰밍과 단둘이 고통받았다.
맛상무도 2017년 6월 직접 캔을 구매해 시식한 영상을 올렸는데 제작한 지 아직 1년 정도밖에 안 된 캔이라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악취가 심하진 않고 취두부 정도였다고 평했다. 당연히 실외에서 촬영했는데 캔을 따자마자 파리들이 바글바글 모이는 것이 백미.
네이버 웹툰 닥터앤닥터 육아일기의 작가인 닥터베르도 2020년 5월 수르스트뢰밍에 도전했는데 장소 섭외19, 안전장치와 곁들일 음식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온 모양이다. 맛상무와 달리 유통기한에서 2년 더 삭은 수르스트뢰밍이라는 데서 난도가 높았던 듯하다.20 베르 왈, 가장 가까운 냄새는 '냉장고에서 발견한 썩은 양파 냄새'. 맛은 '화장실을 먹는 맛'이라며 두리안과 달리 수르스트뢰밍은 냄새와 맛의 반전 매력이 없다고 혹평했다. 함께한 닥터 안다는 갈치속젓 맛에 가깝다고 평했다.
왜냐맨 외전 5화에서는 냄새 테러를 목적으로 수르스트뢰밍을 사용했고 촬영 이후 유키카와 장민철이 보복을 위해 김하늘 PD의 집을 테러했다. 촬영 이후 냄새 때문에 1주일 동안 촬영장을 폐쇄해야 했고 테러당한 김하늘 PD의 집은 1주일이 지나도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상호확증파괴
2022년 5월 2일, 주 핀란드 러시아 대사관에 누군가가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을 열어서 투척하는 테러를 저질렀다고 하는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스웨덴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식량에 수르스트뢰밍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누리꾼들은 왜 생화학 무기를 식량으로 보내냐거나 저거 포탄이나 미사일에 넣어서 대 러시아군용 생화학무기로 쓰면 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뚜껑을 따고 냄새를 맡자마자 표정이 구겨지더니 수르스트뢰밍을 상자째로 던져 버리는 우크라이나군 병사가 백미.
비슷한 음식
낫토
도죠즈시 - 냄새로는 수르스트뢰밍 이상이라는 말도 있다.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만 안다는 초밥. 시가현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만 수백여 년 동안 매해 먹는 초밥인데 여뀌와 미꾸라지를 삭혀 만든다. 슈퍼 피쉬라는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이걸 취재했는데 일본인들도 냄새에 구역질 내고 코 막고 기겁했으며 딱 1명만 좋아라 먹고 나머지 일본인들은 '일본 스시에 이런 게 있단 말이야?',' 구역질 나네' 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두리안 - 엄청난 악취로 유명한 과일. 싱가포르에서는 대중교통이나 호텔 반입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맹모닝 - 김치 코울슬로 + 꽁치 샌드위치
빠솜 - 라오스에서 생선을 쌀밥과 두고 삭힌 것이다.
식해 - 식혜와는 전혀 다르다. 양념 무침과 젓갈의 요리법을 섞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그나마 고춧가루 등으로 매운 양념을 하기 때문에 매운 냄새에 악취가 좀 가려진다.
젓갈 - 수르스트뢰밍의 냄새가 젓갈과 매우 유사해서 한국인은 젓갈을 좋아한다면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젓갈 좋아한다는 사람들도 수르스트뢰밍 냄새를 못 버티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냄새는 유사할지언정 더욱 강한 듯 하다.
청국장 - 일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정겹게 느껴지겠지만 외국인이나 청국장을 좋아하지 않는 자국민들 입장에선 고약하게 생각한다. 열에 아홉은 시체 썩는 냄새나 발냄새가 난다고 평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이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악취로 유명한 스컹크의 방귀냄새가 청국장과 비슷하다는 점인데 그래서 그 악명을 듣고 체험하러 갔다가 의외로 안 독해서 놀라는 한국인들도 꽤 많다고 한다.
취두부
쿠사야
키비악
프라훅 - 캄보디아에서 물고기를 삭힌 것. 빠솜과 달리 물고기만 삭혀서 먹는데 냄새는 지독해 지옥의 냄새, 천국의 맛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우카르틀
하링 - 네덜란드에서 먹는 청어절임으로 한국의 순대처럼 길거리 음식이나 술안주로 즐겨 먹으며 삭혀 먹지는 않는다. 비린내나 타 자극적인 냄새가 그렇게 나지 않으며 굴과 같은 강한 식감을 지닌 식재료를 못 먹는 사람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래도 비리다면 빵과 다진 양파를 얹어서 먹기도 한다.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다진 양파를 묻힌 청어를 꼬리만 잡고 고개를 젖힌 뒤에 몸통부터 입에 넣어 꼬리만 남기는 거다.
삭힌 홍어 - 수르스트뢰밍 바로 다음으로 냄새나는 음식
단, 여기 서술된 음식들은 모두 수르스트뢰밍처럼 악취가 심하게 퍼져나가지는 않는다. 악취나 맛이 더 심할 수는 있어도 통조림에서 압축되어 있다가 까는 순간 퍼져나가 온 곳에 베어나가는 수르스트뢰밍과 달리 이들은 물기가 있는 음식이 아니면 심히 퍼져나가지는 않는 데다 수르스트뢰밍보다 멀리 퍼지지도 않는다. 물론 이건 수르스트뢰밍이 통조림 음식이라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먹는 법
먹을 때는 적당히 삭은 청어를 꺼내서 물로 한번 씻어 악취와 염분을 어느 정도 뺀 후 뼈를 발라내고 툰브뢰드(tunnbröd, 스웨덴식 플랫 브레드)에 버터, 붉은 양파, 감자와 싸서 먹고 때때로 스웨덴식 치즈의 일종인 베스테르보텐(Västerbotten) 치즈를 곁들인다. 스웨덴 남부에서는 붉은 양파와 사워크림 또는 크렘 프레슈, 차이브, 토마토, 딜과 함께 먹는다. 곁들이는 음료로는 보드카 같은 증류주나 맥주, 우유를 마신다. 맵거나 냄새가 많은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유는 그 자체도 음료인 데다 다른 음식의 자극적인 냄새와 맛을 어느 정도 덮어주는데 이렇게 먹는 것을 '클로마(klämma)'라고 부른다. 냄새가 심한 음식을 다른 음식과 함께 곁들여 먹는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홍어 삼합과 비슷하다. 청어삼합
버터를 바른 플랫 브래드에 토마토, 양파, 감자, 딜, 사워 크림, 수르스트뢰밍을 올려서 오픈 샌드위치도 만들어 먹는다.
- 레시피
재료: 플랫 브레드21, 버터, 수르스트뢰밍, 삶은 감자, 붉은 양파, 토마토, 딜
1. 실온에 두어 부드럽게 한 버터를 플랫 브레드에 바른다.
2. 감자를 삶은 뒤 따뜻할 때 저민 후 버터를 바른 빵 위에 올려 버터를 녹인다.
3. 수르스트뢰밍의 살 부분을 작게 자른 후 감자 위에 뿌린다. 수르스트뢰밍 중 뼈를 제거하고 통조림 안에 넣은 filleted herring 제품이 있으니 그걸 쓰면 좋다.
4. 수르스트뢰밍 위에 토마토, 잘게 썬 양파, 신선한 딜을 올려준다.
5. 베스테르보텐 치즈를 곁들이거나, 아니면 사워크림을 곁들여 내면 완성.
원래 스웨덴 북부 지방의 음식이라서 남부 지방 사람들은 거의 안 먹고 북부에서도 젊은 층보다는 40~50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더 선호하며 실질적으로 소비되는 양의 70%가 1년 중 8월 셋째 주 목요일을 포함한 특별한 기념일에만 소비된다. 하지만 공급은 상당히 잘 되는 편이다. 이까, 리들, 윌리드, 쿱 등의 대형 마트를 가보면 어디나 한 박스 이상씩 쌓여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스웨덴인이라도 먹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스펀지에서 수르스트뢰밍을 소개했을 때 나온 스웨덴 출신의 배우이자 과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단골 출연진으로 유명한 비욘(Bbjorn Sven Erik Viden)은 "어우 뭐예요 이게? 못 먹겠어요.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죽을 거 같아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스웨덴 사람이라고 모두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며 스웨덴에서도 먹는 사람만 즐겨먹는 음식임을 보여준다.
냄새가 지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수르스트뢰밍은 캔을 까서 생으로 집어 먹는 음식이 절대로 아니다! 저렇게 싸서 먹어야 먹을 만하다. 실제로 수르수트뢰밍 딱 하나만 먹으니 토하고 난리가 나는 거다. 예를 들어 김치에 들어가는 까나리 액젓을 숟가락으로 맛있게 떠먹는다고 생각해 보자.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스웨덴 현지인도 마찬가지로 생으로 먹으면 못 먹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제대로 씻고 소스와 기타 음식들을 곁들어 먹을 경우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다. 유럽에서 길거리에서도 흔히 파는 절인 청어와 비슷한 식감과 발효 식품 특유의 매우 진한 맛이 난다. 대표적인 악취가 심한 음식 중 하나인 홍어회와 비교한다면 암모니아 성분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먹기 더 편하다. 문제는 악취이지만 말이다.
절임류 음식답게 굉장히 짜다.
스웨덴의 유명 유튜브 게임 업로더 Robbaz는 크툴루의 부름 코멘터리에서 썩은 생선이 담긴 통조림을 보자 "수르스트뢰밍이다!"를 외친 뒤 "맛이 끔찍하긴 끔찍한데 먹다 보면 맛있어요. 똥 냄새가 나지만."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맛상무가 먹은 제조 과정 1년 정도밖에 안 된 수르스트뢰밍은 의외로 식감이랑 맛이 한국의 젓갈과 비슷하다고 하며 내장도 크래커에 올려 먹으니 어울리는 맛이라고 한다.
구매할 수 있는 곳
당연히 스웨덴에 가면 구매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삭힌 홍어회를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고 중국에서는 취두부를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스웨덴이라고 아무 데서나 막 파는 것은 아니고 보통 지하철 몇 정거장마다 있는 대형 마트를 찾아가서 해산물 코너를 잘 찾으면 튼튼하게 생긴 강철 캔에 포장되어 있는 수르스트뢰밍을 구입할 수 있다.
현지 가격은 원화로 몇 천원 정도로, 그냥 일반적인 생선 한 캔 가격 정도다.
하지만 수르스트뢰밍 한 캔 사자고 스웨덴까지 날아가기 힘든 거의 대부분은 아마도 해외 직구로 구매해야 할 것이다. 일본 방송에서 벌칙용으로 쓰인 탓인지, 일본 아마존에서 검색해 보면 나올 때도 있다. 이베이에서 검색하면 더욱 다양하게 나오니 흥미 있으면 한번 구해보자. 그외에 쿠팡, G마켓등에서 구매대행으로 판매하는데 대행이다보니 배송기간이 길며, 업체 별로 가격 편차가 큰편으로 보통 최소 2~3만원부터 시작한다.
단, 일본 아마존 기준으로 1캔에 5000엔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 발목을 잡는다. 아마존 환율+수수료+배송료까지 더하면 통조림 한 캔에 8만 원이 넘는 고가를 지불해야 먹을 수 있는 한국에서는 한우보다 더 비싼 고가의 음식. 만약 이 통조림을 운 좋게 구했다면 가격 때문이라도 다 먹고 싶을 수 있다.
이케아
이케아 광명점 식품 코너에서 팔린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정으로 풀렸는지 확인해 본 결과 품절되었다고 한다.23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산 손님들이 지옥을 겪고 환불해 달라고 엄청 반발을 해서라고 한다. 이후 다시 풀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 때문에 악취를 많이 줄인 어레인지 버전이 팔리고 있어서 이케아에서 산 걸 먹으면 '예상보다 독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2017년 기준으로 풀렸다 단종되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주로 소수의 매니아층이 사가기 때문인지 진열해 놓고 있지 않으며 직원에게 물어보면 창고에서 꺼내주었다.
이후 이케아 광명점 푸드마켓 직원에게 문의해 본 결과 더 이상 수입되지 않으며 병조림 형태의 청어절임만 판매 중이다. 이 병조림은 이케아 초창기부터 팔았고 맛도 무척 약한 편이라 먹기 쉽다. 그러나 2022년 기준으로 병조림마저 단종되어 오프라인 매장에선 더 이상 판매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가인 스웨덴을 비롯하여 각 유럽 국가들 소재의 이케아와 일본 이케아에선 판매한다.
네덜란드 일으킨 염장 청어의 힘
‘기니의 영주, 정복왕, 항해왕, 에티오피아·아라비아·페르시아·인도의 무역왕.’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가 1499년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직후 유럽의 왕들에게 보낸 서한에 표기한 공식 칭호다. 포르투갈이 이슬람 상인들을 건너뛰고 인도에서 향신료를 직수입(이라 쓰고 수탈이라 읽는다)하는 데 성공한 것은 유럽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이 아득히 먼 인도의 식민지를 완벽히 통제하는 데는 그다지 철저하지도, 강력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감시망을 피해 새어나오는 향신료 물량이 정식 루트를 통한 것보다 더 많았다. 설상가상 포르투갈은 왕가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며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와 그 주변 해역에 대한 지배력은 더욱 약화된다.
200년 넘게 유럽 서민의 식탁 책임진 ‘염장 청어’
이 틈을 타서 향신료 무역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게 네덜란드다. 이 지역은 원래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신성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제후국과 주교령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15세기 들어 지금의 네덜란드 영토에 해당하는 저지대(주변 지역보다 고도가 낮아 이렇게 불렸다) 17개 지역의 작위가 하나로 합쳐지며 영토 개념이 생겨났다. 이렇게 탄생한 저지대 영토의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스페인 왕실이었다. 16세기 중반, 펠리페 2세가 즉위하며 세금을 가혹하게 매기고 민중을 수탈할 뿐만 아니라 가톨릭을 강요하자 북부의 7개 주는 오라녜 공 빌럼 1세를 중심으로 뭉쳐 독립을 선언한다. 원래부터 상업이 발달해 도시별로 주민자치에 익숙했고, 칼뱅파 개신교를 믿는 인구가 다수였기에 펠리페 2세의 막무가내식 철권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은 새롭게 탄생한 네덜란드와의 모든 무역을 금지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 유럽에 유통되는 청어 무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축적한 자본과 조선술,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탄생시킨, 최신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있었다. 북해를 끼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 네덜란드산 염장 청어는 생필품이나 마찬가지였다. 14세기에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 살던 한 어부가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렇게 처리된 청어는 1년간 보관이 가능했다. 당시 유럽의 서민들에게 염장 청어는 ‘바다의 밀’이라 불릴 정도로 저렴하면서도 영양이 풍부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200년 넘게 유럽 서민들의 식탁을 책임졌으니, 그에 따른 자본의 축적 역시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어업과 발을 맞춰 조선술도 발달해 당시 유럽에서는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선박 생산공정을 표준화해 생산비를 대폭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과 비교해 한 척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기술혁신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함대로, 네덜란드는 유럽 해운업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왕실을 상대로 독립 전쟁이라는 모험을 시도할 때에는, 그만한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왕실의 네덜란드에 대한 무역금지령에 맞서, 이들은 북해에서 스페인 해군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포르투갈 소유로 되어 있던 인도에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유럽인 최초로 향신료의 원산지를 차지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이베리아의 가톨릭교도들이, 냉철하고 합리적인 신교도들의 최신식 무기 앞에 내던져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작은, 돈에 눈이 멀어 극비 정보를 팔아넘긴 타락한 귀족의 배신행위였다.
청어 뼈 위에 건설된 암스테르담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네덜란드 염장 청어가 인기인 이유
청어는 지방질이 많아 빨리 상했다. 그래서 상하기 전에 염장 처리하려면 만선이 안되더라도 빨리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네덜란드 어부들은 14세기 중엽부터 청어를 배 위에서 작은 칼로 내장과 가시를 처리하여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염장하는 ‘선상 염장’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항구에 자주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주변 경쟁국들을 따돌리고 청어 어획고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함수로 염장한 청어는 소금에 절인 청어에 비해 짜지 않아 생선 식감이 훨씬 좋았다. 함수로 염장한 청어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생청어’(Dutch Herring)이다. 여기에 식초를 부어 절이면 ‘식초 절임 청어’, 연기에 말리면 ‘훈제 청어’, 소금으로 2차 염장하면 1년 이상 유통할 수 있는 ‘염장 청어’가 된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맛이 좋은 네덜란드 염장 청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청어 산업은 국가 산업이 되었다.
청어잡이 배의 진화
이제 네덜란드 어부들은 북해 앞 바다뿐 아니라 청어 떼를 쫓아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작은 고기잡이배로서는 원양 항해가 무리였다. 그래서 15세기 중반부터 청어잡이 전용 선박 ‘헤링버스’(Herring Buss)가 개발되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원주민들은 8~11세기에 이주한 바이킹 후손들이 많았다. 바이킹 배는 길쭉하고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청어잡이 배를 기동성 좋은 바이킹 롱쉽(long-ship)을 토대로 선상 작업에 편리한 형태로 개량했다. 우선 선상에서 청어 내장과 가시를 처리한 후 통에 담는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갑판 넓이를 라운드쉽(round-ship) 모양으로 키웠다.
그리고 어업 방식도 진화했다. 청어잡이 배가 항구로 회항하는 대신 보급선들이 식량과 함수, 소금을 싣고 와서 청어를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청어 잡는 어부들이 바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어잡이 배 또한 더 많은 청어와 소금, 그리고 더 많은 선원들을 태워야 했기에 헤링버스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져 16세기 말에는 140~200톤 규모에 달했다. 이렇게 커진 배는 청어잡이 시즌(5~9월)이 끝나면 청어 관련 무역선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배 만드는 기술을 비밀에 부쳐 설계도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금했다.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몰려든 시기는 크게 3차례이다. 1차 이주는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된 1492년과 포르투갈에서마저 추방된 1497년, 2차 이주는 앤트워프 학살 사건에서 탈출한 1567년, 3차 이주는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정복당한 1585년이었다.
유대인들이 1차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던 1514년의 암스테르담 인구는 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 뒤 2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의 이주가 더 이루어져 암스테르담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음에도 1590년 암스테르담 인구는 4만 명 남짓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을 정비하고,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이고, 운하를 파서 세계적인 항구로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 1670년에 20만 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가 유대인이었다.
청어 산업 호황이 조선업 발전을 이끌다
1차 이주 때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몰려온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정착하면서 스페인 천일염을 수입해 소금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한자 상인들을 몰아내고 자연스레 청어 산업과 조선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표준화와 분업화’로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 배가 많이 필요했다. 이는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발트해 무역이 네덜란드 무역의 어머니
조선업이 발달하니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다. 100톤이 넘는 청어잡이 배를 대량 건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목재가 필요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대형 선박 한 척 건조하는데 약 2,000그루의 참나무가 필요했다. 6만 평 숲에서 100년 동안 키워야 확보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저지대는 소금기가 남아 있어 큰 나무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라인강을 이용해 강 주변의 독일 내륙 숲에서 자른 통나무들로 뗏목을 만들어 암스테르담까지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유대 무역상들은 삼림이 풍부한 스칸디나비아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배로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경로를 개척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통나무를 대량 수입해 목재 제재소와 조선소를 확장했다. 1497년부터 1503년 사이에 발트해를 드나들면서 통관세를 지불한 선박의 70%가 네덜란드 배였으며 그중 78%가 유대인이 많이 사는 홀란트 주의 배들이었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더욱 조선업 발전을 촉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목재 수입을 위해 빈 배로 발트해까지 갈 수는 없어 배에 뭐라도 실어야 했다. 그들은 소금과 절임 청어 그리고 플랑드르 모직물, 프랑스 포도주, 독일 아마와 맥주 등을 발트해 지역에 수출하고 목재와 곡물 그리고 조선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수입했다. 이 중 일부를 자체 소비하고 나머지를 서유럽과 지중해 도시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정제되지 않은 소금과 기타 제조업 제품들을 수입하는 중계무역을 발전시켰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청어 절임에 필요한 질 좋은 소금을 추출하는 정제업이 크게 발전했다.
발트해 무역의 백미는 곡물 중계무역이었다. 16세기에 유럽 인구가 크게 늘어나 식량이 모자랐다. 1500년경 8,1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600년경에 1억 400만 명으로 28%나 늘어났다. 식량 생산성이 낮았던 근세에 인구가 크게 느니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지중해 도시들이 기근에 허덕였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당시 유럽 최대의 곡창 폴란드에서 수입한 식량은 중계무역을 통해 지중해 지역에 비싸게 수출했다. 특히 1550~1650년까지 폴란드 곡물은 서유럽인과 지중해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량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발트해 무역이 지중해까지 삼켜버린 셈이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지중해 곳곳에 진출했다.
앤트워프 반란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16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의 약진은 놀라웠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 제국의 향신료 중계무역을 독점한 앤트워프의 성장에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 무렵 앤트워프가 유럽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의 외항 역할에 불과했다. 단적인 예로, 1543~1545년 암스테르담은 저지대 수출의 4%에 불과했고 앤트워프는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567년 앤트워프 용병 반란으로 시민 7천 명이 학살당하면서 유대 무역상들이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오면서 두 도시의 상황은 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앤트워프의 무역 네트워크가 고스란히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앤트워프 학살 사건을 계기로 1568년 스페인 지배를 거부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곧 ‘8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 곳곳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자본을 끌어들여 전쟁 채권시장을 발전시켰다.
유대인, 동방 상품의 유통과 설탕 산업으로 부를 일구다
네덜란드는 청어 산업 호황과 더불어 한자 상인을 물리치고 이렇게 북유럽과 발트해의 무역 주도권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 덕분에 베네치아로부터 포르투갈 그리로 앤트워프로 이어졌던 동방 상품의 유럽 유통권을 인계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네덜란드 시대가 전개된다.
그 무렵 소금도 비쌌지만 그 보다 더 비싼 것이 설탕이었다. 유대인이 떠난 앤트워프의 설탕 정제산업도 1585년 이후 자연스럽게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다. 암스테르담이 앤트워프를 대신하여 브라질,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서 온 원당의 집산지가 되었다. 당시로선 설탕 산업이 가장 돈 많이 버는 첨단산업이었다. 이로써 암스테르담이 당대 최대의 상업 도시가 된다. 나중에는 중상층까지 값비싼 설탕을 애호하자 암스테르담 시정부는 1602년 ‘사치품 사용 제한령’을 내려 설탕의 국내 소비를 막았다.
해상무역 증대와 비례해 커지는 상선들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그 과정을 보자. 13세기 삼각돛을 활용해 맞바람을 이겨내는 ‘자이빙’이라는 기술이 개발되자 종래 인간 근육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선은 그 역사를 마감하고 범선에 자리를 내주었다. 1450년경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범의 장점을 혼용해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캐랙선이 등장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배가 바로 캐랙선이다. 그 뒤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캐랙선의 크기는 점차 늘어나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이후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자 16세기에 등장한 군선이 갤리온선이다. 캐랙선과 갤리온선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갤리온선은 처음부터 군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배로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 16세기 말엽의 갤리온선은 크기가 더 커졌다. 보통 1,000톤에서 2,000톤 규모로 거대한 몸집에 비해 길이를 늘리고 폭을 줄여,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옆으로 대포를 일렬로 장착하고도 속도가 빨랐다. 또한 적재 용량을 늘리기 위해 선체의 폭이 수면 부근에서 넓어지는 둥근 형태를 취하는 동시에 높이는 줄여 안정성을 향상시켰다. 빠르고 강한 갤리온선의 등장은 해상무역을 확산시켰고 많은 식민지에 유대인 커뮤니티인 디아스포라들을 탄생시켰다.
원래 유대인들은 중세 해양국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때부터 선박 제조와 항해에 대한 남다른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 기술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해져 대항해 시대를 여는 원천기술이 된다. 이후 사각돛과 삼각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갤리온선의 덕을 톡톡히 본 곳은 네덜란드였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유대인들 덕분에 해상무역뿐 아니라 조선업 경쟁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네덜란드 국가경쟁력, 대형 수송선의 대량 건조기술
해상무역이 급증하면서 조선업은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부터 조선업은 유대인들의 주도로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 배들이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울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게다가 조선 기술자들에 의해 조선소용 밧줄, 목재 제재용 톱과 조선소용 기중기와 같은 첨단 장비와 기계가 발명되어 근대식 조선소가 탄생했다. 이로써 네덜란드에서는 가볍고 표준화된 ‘보급품 수송함’의 대량 건조기술이 1570년에 개발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중간 돛대(topmast)가 사용되어 수직으로 두 개의 돛을 연속 끌어내려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돛대에 장착된 ‘복합도르래’로 인해 이전에 만들어진 배에 비해 5분의 1 정도의 인원만으로 돛 관리가 가능해졌다. 한마디로 선박의 속도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관리 인원은 최소화되었다. 이는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게다가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곧 화물 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화물 운송 운임을 경쟁국 대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조선업은 당대의 최고 산업이 된다. 또한 네덜란드가 진출한 해외 항구에서도 네덜란드식 선박 기자재 표준화가 정착되어 네덜란드 선박의 수리는 해외에서도 손쉽게 처리되었다.
훗날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를 빠르게 하기로 유명한 ‘자르담’ 조선소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100여 명의 사절단에 끼어서 목수로 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대서양청어
大西洋靑魚 | Atlantic herring
청어과 청어속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북대서양에 분포하며, 최대길이와 몸무게는 각각 43cm, 680g이다.
난생이다. 보통 거대한 무리로 다니는데, 약 100만 마리 이상 모이면 무리 전체 길이가 27km가 된다.
매년 초 노르웨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간단히 알아볼까요? 먼저, 플랑크톤 대증식이 발생하여 영양이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청어 떼가 몰려든 후 노르웨이 피오르드 깊숙이 내려가 산란장소를 물색합니다. 이어서 대구, 대서양 대구, 참치, 광어, 고래와 같은 큰 물고기들이 청어사냥에 나섭니다. 심지어 바닷새와 곰들마저 청어와 청어알을 만찬으로 즐기러 모여듭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청어는 대서양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 노르웨이 수산물 위원회의 대서양 청어 생태에 대한 설명.
태평양청어처럼 이쪽도 해양 생태계의 중요한 어류다.
매일 상하 수직으로 이동하는데, 낮에는 바닷속 바닥에 있고 밤에는 표층으로 올라와서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원린이 계속 새 것으로 바뀌는 게 특징이다.
대서양청어와 인간
물 반 청어 반이다 싶은 어마어마한 개체 수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서양의 바닷가에서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 등이 대서양청어를 이용한 대표적인 보존 식품이다. 또한 청어 어업이 창출한 거대한 규모의 경제는 한 지역과 국가의 흥망이 청어의 어획량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서양대구와 함께 대서양청어를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라고 부르기도 했다.
청어를 잡는 기술, 청어를 연기에 그을려(청어를 팔기 위해서는 훈증을 했다) 제대로 처리한 뒤 상인들과 행상인들에게 넘기기까지 수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중략) 청어는 목수, 배 대목, 낚싯줄, 밧줄, 케이블 제조인, 대마 일꾼, 방적공과 그물-직조공 등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소금집이 세워지고, 소금 위에 소금을 쌓고 (중략) 통 제조업자, 맥주 제조업자, 제빵사들도 청어 때문에 소득을 올렸던 사람들이며, 그 외에도 청어 아가미를 제거하고 난 뒤 씻어 포장하여, 옮기고, 옮긴 것을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 토머스 내쉬의 기록. 데이비드 커비 및 멜루자-리자 힌카넨의 저서 <발트해와 북해> 제8장 '어업'에서 발췌함.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식재료였다. 일명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 중세 유럽에서는 금육일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소비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였다. 게다가 비타민 D 함량이 많은 음식 중 하나라서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적인 북유럽에서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은 청어가 유럽 식문화에서 밀과 감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고까지 설명한다.
유럽에서도, 청어 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몰락에 청어 서식지의 변경이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으며,1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 어획고가 감소하자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대구와 함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청어는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유럽에서도 청어를 지칭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목록은 아래와 같다.
헤링(Herring)
일반적인 청어를 지칭한다.
브리슬링(brisling)
작은 청어를 지칭한다.
스트뢰밍(strömming)
발트 지역 북쪽의 유난히 작은 청어를 지칭한다.
마트예스(maatje)
산란을 마쳐 체내에 알도 정자도 없는 성체 청어를 지칭한다.
북유럽과 한자동맹
유럽에서 청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9세기경이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리로 인해 사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육류의 취식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은 반드시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는 곧 종교적 제한에 걸리지 않는 청어와 대구 가공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되었던 곳은 발트해 연안, 그 중에서도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방이었다. 스코네 어시장(덴: Skånemarkedet/스: Skånemarknaden)은 청어 어업의 핵심적인 장소로, 덴마크 정부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가 주도하였으나 곧 북해와 발트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도시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청어 가공의 중심지는 독일 북부의 뤼겐 섬. 이 지역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일대에서 캐낸 암염을 조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령 스코네와 보른홀름, 에스토니아 등에서 잡힌 청어는 뤼겐 섬으로 모여 뤼네부르크산 암염으로 염장된 후 한자동맹 상인들을 거쳐 독일 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의 상회들로 이동했고, 여기서 다시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이는 물론 덴마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발트 해의 도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패권국이었던 덴마크는 한자동맹이 자신들의 영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을 좌시하지 않았고, 한자로부터 청어 산업의 주도권을 방어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온갖 규제와 통제가 도입되었고, 한자 상인들은 스코네 어시장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1109년에 아예 뤼겐 섬을 공격해 점령하여 지역의 청어 거래 시스템을 아예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이 결과로 덴마크는 스코네 어시장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주요 자금줄 하나를 지켜냈다. 전 북유럽에서 상인들과 어부들이 스코네로 몰려들어 청어를 거래했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약 3500명에서 5000명에 달하는 이들이 청어 어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일했다. 외레순 해협 일대에서 조업하는 선원들은 2만 5천 가량이었다.
하지만 스코네 외에도 발트해 남부의 여타 지역들 역시 청어 거래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했다. 독일 북부의 뤼베크로 중심지가 이동한 후 동유럽 슬라브 계통의 가맹도시 출신 상인들은 꾸준히 청어를 실어 뤼베크로 가져왔고, 이를 가공한 한자동맹의 청어 어업은 계속 번창했다. 1370년 한자동맹은 아예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슈트랄준트 조약을 맺어 발트 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어업을 할 권한을 덴마크로부터 받아내면서 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자동맹과 발트 해 청어 어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청어의 주 산지인 발트 해에서 한자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자 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내었고, 이는 곧 청어 어업의 무대가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청어 어업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한자동맹이 몰락하는 반면에 이들 국가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며 청어 어업에서 한자의 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때마침 16세기에 청어들이 이동하여 발트 해에서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독점
네덜란드가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던 주된 이유는 혁신적인 어업 지원 시스템 덕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통, 어선 규격, 건조 방식 등에 대한 엄격한 품질 관리 조항들을 규정하였다. 정부 요원들, 그리고 '대형어업감독협회'의 직원들이 생산과 유통을 일일히 감시했으며 저질의 상품을 납품하는 이들은 처벌받았다.
동시에 약 9000 길더의 가격으로 건조할 수 있던 네덜란드 청어 어선인 '하링부이스'는 유망을4 사용하고 선체 중앙부 어창에 활어를 보존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했으며 이후 북해 일대 각국의 표준 청어잡이 어선으로 채택된다. 다만 하링부이스는 3번의 조업을 나간 후에는 배 전체를 폐기해야 했다. 1년에 3번 조업을 나갔으니 대략 1년마다 한번씩 배를 갈아타야 했던 셈. 이 때문에 네덜란드 업자들은 여럿이 자금을 모아 배를 구매하곤 했다.
그 외에도 이러한 주도권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영어로는 윌리엄 버클스(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였다. 그는 1380~1386년 시기에 갓 잡은 청어의 간5과 이리6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 대신 함수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했다. 옛날부터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고 비싼 필수품이었고,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은 기후 탓에 바다에서 소금을 만들기 어려웠던 북유럽과 서유럽은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이 때문에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소금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을 수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소금 대신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날려 굉장히 짜게 만든 소금물(함수)을 소금 대신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완전히 증발시켜 고체를 만들거나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해야 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함수는 그저 바닷물을 끓이기만 하면 얻을 수 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거기다 네덜란드는 발전한 자국의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원양어선 하링부이스 선단을 구성하여 북해의 청어를 쓸어담았고, 강대한 네덜란드 해군 함대는 이들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이 방법으로 청어를 기존보다 수십 배나 많이 생산했고, 기존의 노르웨이, 스웨덴, 한자동맹 등 경쟁 세력들을 밀어내고 대성공하였다. 당대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했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청어절임은 지금도 여전히 먹고 있는데 그것이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하링(Haring)이다.
다만 이후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영국인들이 청어의 주 어장인 영국 연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무너뜨리면서 점차 쇠락했다. 청어 어획고의 감소는 타격을 가속화하였다. 동시에 새로 등장한 유럽의 보호무역 풍조로 인해 잡은 청어의 80%를 수출하던 네덜란드인들은 각국의 높은 관세와 부닥쳐야만 했다. 청어는 유럽 서민들의 주요 식단이었기에 낮은 가격을 유지해야만 했으나 관세가 높아지면서 네덜란드산 청어 수입은 바로 경쟁력을 상실한 것.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주도자들이었던 북유럽 국가들과 새 경쟁자인 영국이 네덜란드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왕실이 출자하고 노르웨이인 요훔 룬드가 관리하던 '덴마크 왕실 청어 회사'는 네덜란드의 시스템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넘어 기존 발트 해 어장을 벗어나 아이슬란드와 오크니 일대까지 규모를 확장했다.7 그물 역시 무거운 대마 그물을 가벼운 면 그물로 대체하였으며 이는 어획량이 높은 후릿그물 사용을 가능케 했다. 아이슬란드 일대 선단 역시 네덜란드식 유망 어업과 같은 신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영국 역시 '영국청어어업협의회'를 설립하여 추격에 나섰다. 이 결과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이후 유럽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인들의 청어 어업 기법을 배우고 강대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의 주도권 장악
알프레드 스태너드(Alfred Stannard)의 1841년 작품, <노퍽의 야머스 부두(Yarmouth Jetty, Norfolk)>. 해안에서 출항 준비를 하는 소형 어선의 모습을 담았다. 스태너드는 노퍽 지역의 향토 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주로 어민들과 바다를 그렸다. 본 작품은 오늘날 노퍽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유럽 대서양 청어의 주된 어장은 북해, 그중에서도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연안과 북해 중앙의 거대한 모래톱인 도거 뱅크이다. 이 해역은 수온이 낮고 템스 강 및 라인 강에서 흘러드는 영양 염류가 풍부하며, 수심도 매우 얕아 청어의 중요한 산란지이다. 특히 잉글랜드 동남부 노퍽 주의 그레이트야머스(Great Yarmouth), 일명 야머스 시의 앞바다가 가장 경제성 있는 청어 어장이었다. 야머스 앞바다에는 해저에 헤이즈버러 사주(Haisborough Sands) 등의 길다란 모래톱이 곳곳에 분포하여 여러 해양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8
덕분에 중세 이래로 야머스의 어민들은 백사장에서 보트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청어로 만선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썩기 전에 바로 가공된 후, 야머스 시내를 지나는9 야레 강(River Yare)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노리치에 도달했다. 노리치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2의 도시였고, 그 이후에도 이스트 앵글리아의 중심지였기에 전국의 많은 상인들이 모였다. 야머스산 청어도 여기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부터 야머스의 청어 산업은 확장된 철도망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량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이전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는 야머스였다고 할 정도였다.
19세기에는 영국에서 흰살 생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갈수록 뻗어나가는 철도는 내륙으로의 수산물 운송을 용이하게 하면서 어업의 번창에 기여했다. 동시에 동력선과 저인망의10 도입은 보다 많은 어획고를 올리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전통적인 무동력선 위주의 어업을 하던 영세 어부들이 몰락하고 비싼 동력선을 장비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회사들 위주로 어업 체계가 개편됨을 의미하기도 했다.11 또한 유럽 내부에서도 철도가 깔리면서 덴마크와 독일 제국 등지에서 청어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외국 상인들이 영국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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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야머스 부둣가. 빽빽하게 몰려든 어선들 전부가 청어잡이 어선이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스코틀랜드 선단으로, 그들은 상업적 어업 회사 외에도 협동조합과 가족노동이 결합된 형태를 띄기도 했다. 청어잡이 시즌이 되면 어부들은 동업자들 및 가족들과 함께 유망어선을 타고 청어를 쫓아 영국 동부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건조업자들과 내장제거 업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노포크가 최종 목적지였다.
청어잡이 시즌만 되면 수백 대의 스코틀랜드 어선이 야머스와 남쪽 로웨스토프에 몰려들었고, 유망 또는 저인망을 이용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청어를 잡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청어 가공 공장에서 날마다 청어를 가공,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완제품을 납품했다.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그리고 폴란드에서도 많이 수입해갔지만, 주된 고객은 남유럽 국가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남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앤초비 젓갈 등으로 익숙해서 그런지 청어 절임을 많이 수입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이들이 있다면 바로 '피셔 걸(Fisher girl)'이라 불린 이들이다. 야머스의 향토사 박물관인 Time and Tide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피셔 걸들은 부둣가에서 어선들이 잡아온 청어의 내장을 손질하던 스코틀랜드인 여성 계절노동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걸(girl)로 불렸다. 또는 영상에서처럼 피셔 래시즈(Fisher Lasses)나 스코티시 래시즈(Scottish Lasses), 또는 헤링 래시즈(Herring Lasses)라 불리기도 했다. Lass는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방언으로, 젊은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는데, 두 명이 내장을 제거하면 남은 한 명이 이를 받아 나무 통에 담는 방식이었다. 현지에서는 이를 스카치 큐어(Scotch Cure) 방식이라 하는데, 사실 빌럼 뵈컬손이 개발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위 영상에서 그들의 작업 방식을 잘 볼 수 있다. 작업 시간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였으며, 주로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고된 작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거대했던 그레이트야머스의 청어 어업은 1950년대까지 성업하였으나,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과13 1953년의 대홍수로 시내가 파괴되면서 주춤하기 시작했다.1415 결정타는 바로 청어 어획량의 감소였다. 남획과 청어의 서식지 이동으로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1960년의 청어 어획량은 전성기인 1913년의 2~3%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야머스 항의 마지막 유망(Drifter) 어선 역시 1963년에 팔려나갔고, 청어 조업은 1968년 가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한때 야머스 항구를 가득 채웠던 피셔 걸들 역시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동시에 영국 국민들은 흰살생선을 선호하였지 청어는 별로 익숙해 하지 않았으며 이는 국내 판로 개척에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 전후복구기에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이 증가하고 기존에 청어를 소비하던 각국의 노동자 계층마저도 청어를 외면하면서 영국의 청어 어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청어는 시장에 나오는 대신 동물 사료 공장으로 직행하였으며 이는 남획으로 이어지다 결국 1977년 북해 청어 어업 금지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렇게 어업이 쇠퇴한 대신, 석유 시추 산업이 성장했다. 오늘날의 야머스는 소규모 석유 정제 및 물류 기점이자 국내 관광도시로 재개발되었다. 한때 성업했던 청어 어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 뿐이다. 시내 인근에 정박해 있는 야머스의 마지막 유망 어선인 YH 89 리디아 에바(Lydia Eva) 호,16 그리고 실제 청어 건조장을17 개조한 시간과 조류(Time and Tide) 박물관이 바로 그곳. 리디아 에바 호는 남쪽 로웨스토프의 마지막 트롤어선인 LT 412 민카를로(Mincarlo) 호와 함께 한데 묶여 '리디아 에바와 민카를로'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종종 항해도 한다. 한편 Time and Tide 박물관은 야머스의 어업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역사까지 총망라하는18 향토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으로
오늘날 청어 어업의 주도권은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 국가들에게 돌아왔다. 북유럽은 19세기 인구가 폭증하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스웨덴 서부 해안 지대에까지 마을들이 들어섰다. 새로 개척된 지역들은 농업에는 매우 부적합하였다. 동시에 철도의 발달로 국제적인 어류 수요가 늘어나면서 스칸디나비아의 농민들은 살기 위해 부업으로 어부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반농반어 문화와 이에 수반된 청어 건조 산업 등이 발트 해 연안을 따라 확산되었다. 1870년대에 보후스 지방에 청어들이 되돌아오면서 청어잡이가 활기를 띄기 시작함에 따라 북유럽의 영세 어업도 점차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소형 동력선과 1인 그물이 보급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어업의 개인화가 진전되었다.
3.5. 2020년대
2020년대 시점에는 네덜란드가 전 세계 청어 어획량의 36% 가량을 공급하여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인 노르웨이가 24% 가량을 공급한다. 노르웨이에서는 노르웨이 수산물 위원회가 청어 생산을 철저하게 감독하고 있다. 이 두 국가가 청어 생산의 쌍벽이다.
3위인 미국은19 9%를 차지한다. 그 뒤로 독일, 대한민국,20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이어진다. 한때 독보적 1위였던 영국은 고작 1~2%를 생산하여 9위이다.21
음식
영국
영국에서는 훈제 청어들을 즐겨 먹는다. 특히 내장을 제거하고 반 갈라 훈연한 키퍼(Kipper)는 전통적인 아침식사 메뉴다. 주로 팬에 버터를 두르고 구운 뒤22, 토스트와 삶은 계란 또는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먹는다. 마트에서 반조리 된 상태로 시판되는 것은 전자레인지로 익히기도 한다. 다만 아무래도 생선구이다보니 신세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구이 요리도 발달했다. 위 영상은 1940년 영국 식품부가 배포한 청어구이 조리 및 취식 방법 교육영상이다.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를 발라낸 뒤, 소금과 파슬리, 그리고 후추로 양념하여 오븐에 구워낸다. 진미로 취급받는 알집이나 이리는 따로 잠시 빼 두었다가 양념하기 직전에 청어에 도로 집어넣어 함께 조리한다. 과거에는 블로터(Bloater)도 비슷한 방식으로 먹었으나 현재 블로터는 거의 사라졌다.
영국인들 역시 독일식 청어 피클인 롤몹스(Rollmops)를 즐겨 먹으나, 유럽 대륙 국가들만큼 자주 먹지는 않는다. 보통은 키퍼를 먹거나, 상술한 튀김 또는 구이의 형태로 소비하는 편.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는 하링(Haring)23이라고 부르며,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잡히는 청어를 머리와 꼬리를 떼고 내장을 빼낸 뒤 소금에 절여서 보관한다. 소금에 절인 청어는 잘게 다진 양파나 오이피클(augurk)을 청어로 싸서 함께 먹는다. 그리고 꼬리를 집어 올린 다음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젖혀 통째로 먹는 특이한 방식24이 보편적이다. 현대에는 전통적인 방법 외에도 핫도그빵에 끼거나 썰어서 이쑤시개로 찍어서 먹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통조림으로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대개 토마토 소스에 조린 것을 담아서 판다.
발트해 연안
네덜란드에서 발트 해로 이어지는 동북유럽 국가들은 유사한 청어요리들, 특히 청어 피클을 즐겨 먹는다. 이들은 청어에 보통 양파, 감자나 호밀빵, 사워크림, 오이 피클, 딜을 조합한다.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유사한 레시피를 공유한다.
독일
독일인들은 술을 마시고 난 뒤 해장 겸 아침식사(Katerfrühstück)로 청어를 즐겨 먹는다. 독일에서 청어 피클은 '롤몹스(Rollmops)', 또는 '비스마르크 헤링(Bismarckhering)'라고 불린다. 롤몹스는 말 그대로 한입에 먹기 좋게 동그랗게 말아 놓은 청어 피클 요리이고, 비스마르크는 그냥 필렛을 펴 놓은 것이다. 딜과 오이 피클, 양파, 빵이나 감자와 함께 즐긴다. 작은 아침식사용 빵인 브뢰첸(Brötchen)을 갈라 그 사이에 양파, 양상추와 함께 끼워넣은 피시브뢰첸은 독일 북부에서 즐겨 먹는 간단한 식사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함부르크 등지에서는 이웃한 네덜란드식 하링을 마티예스(Matjes)란 이름으로 부르며 자주 먹는다.
열훈법으로 만든 뷔클링(Bückling) 또한 먹는다. 이건 영국의 버클링과 같은 음식. 다만 영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훈제 청어보다는 절인 청어를 주로 소비한다.
북유럽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와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 더불어 청어를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들이다. 이들은 유사하면서도 다양한 청어요리 문화를 공유한다.
이 지역에서는 청어 피클을 실(Sill, Sild)이라고 하는데 맛은 피클 비스무리하면서도 살짝 달달하고, 고소하면서도 생선 살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좋다. 위의 사진은 스웨덴에서 미드솜마르 기간 동안 즐겨먹는 취식법으로, 청어 초절임에 삶은 감자, 삶은 계란과 차이브를 썰어넣은 사워크림 소스를 곁들인다. 여기에 생 양파를 추가하기도 하며, 넓은 노르웨이식 감자빵(Lefse)이나 딱딱한 호밀빵(Knäckebröd)에 올려 일종의 오픈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 샌드위치는 스웨덴에서는 실마카(Sillmacka), 덴마크에서는 실데스뫼레브뢰드(Sildesmørbrød)라 부른다. 또는 생 청어를 가시를 잘 바른 뒤 튀겨서 으깬 감자와 월귤잼을 곁들이기도 한다. 청어 튀김은 특히 핀란드에서 많이 소비되며, 호밀 가루를 묻혀 튀기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 스웨덴 북부에서는 수르스트뢰밍이라는, 극한까지 발효된 청어 통조림을 즐겨 먹는다. 이 역시 취식 방법은 일반적인 실과 유사하다. 다만 냄새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뿐. 그리고 스웨덴 남부 고틀란드와 덴마크 보른홀름에서는 지역 특산물로 훈제 청어를 만든다. 스웨덴에서는 뵈클링(Böckling)이라고 하며, 영국의 버클링이나 독일의 뷔클링과 기원이 같다.
러시아와 발트 3국
해당 지역에서도 훈제 청어를 즐겨 먹는다. 특히 발트 3국은 열훈법으로 훈제 청어를 만드는 법을 최초로 개발한 지역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대상 수입식품점에서 통조림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같은 발트해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및 독일과 유사한 청어 피클 요리들도 즐겨 먹으며, 특히 청어 샐러드가 유명하다. 감자, 양파, 비트, 그리고 청어를 이용해 만드는데, 에스토니아에서는 로솔리예(Rossolje), 러시아에서는 셀료드카 포드 슈보이(Сельдь под шубой)라고 부른다. 위의 사진이 바로 러시아식 청어 샐러드로, 켜켜이 층을 쌓아 만들었다. 한편 에스토니아와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처럼 쌓지 않고 한데 섞어버린다.
폴란드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청어 피클과 청어 샐러드를 비롯한 다양한 청어 요리를 소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슬레지예 볼레유(Śledź w Oleju)라 불리는 요리가 유명한데, 기름에 담근 청어라는 뜻이다. 뼈를 바른 청어 필렛을 썬 생양파와 함께 식물성 기름에 재워 만든다. 기름은 요즘은 보통 남유럽산 올리브 오일을 쓰는 편.
북미
북미에서도 청어 피클은 쉽게 구해 먹을 수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고등어 초밥이 먹고 싶은데 고등어 초절임을 구하기 마땅치 않을 때 대용으로 사용해 만들어 먹어도 좋다. 사실 위의 하링도 보통은 피클 형태로 먹는 것이 일반적인 편. 위키백과의 초절임 청어 항목
미국 토착원주민 중에는 청어의 산란기 습성을 이용해 솔송나무가지를 물에 넣어서 청어알을 채집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청어가 아닌 청어 알을 먹기 위해 그물을 설치한다고도 한다.
스페인
청어 살에 첨가물을 넣고 오징어 먹물을 입혀 까맣게 만들어 가공해 파는 것을 '아브루가'라고 하는데, 캐비어와 비슷한 외형 때문에 캐비어의 대용품으로도 쓰인다. 물론 가격도 훨씬 싸고 알도 아니다., 오세트라 캐비어가 15g에 7만~9만 원을 왔다갔다 하는데, 아브루가는 50g에 1만 원 후반 ~ 2만 원 초반이다.
4.1. 주요 가공품
유럽의 주요 청어 가공품은 다음과 같다.
청어포
청어를 말린 것으로, 한국의 과메기와 사실상 동일하다. 유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주로 만들어 먹었다. 다만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춥고 습한 기후와 청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인해 청어가 잘 마르질 않아, 나중에는 다른 방식들이 대세가 되었다.
청어 피클(Pickled herring)
독일의 롤몹스, 포메른 지방의 비스마르크와 네덜란드의 홀란처 니우어(일명 하링) 등, 식초나 소금에 절여 만든 청어 가공품 전반. 독일의 롤몹스와 비스마르크는 청어 필레와 썰어놓은 양파를 후추와 겨자씨를 비롯한 향신료, 조금의 소금과 오이 또는 당근과 함께 화이트와인 식초에 절여서 만든다. 네덜란드의 하링도 비슷하지만 소금물을 쓰기도 하며, 어린 청어를 사용해 크기가작은 것이 특징이다. 그 외 과거 한자동맹에 청어 가공품을 내다 파는 어시장이었던 스웨덴의 스코네 지방에서도 여전히 생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트니아 만의 묽은 바닷물로 인해 발효가 된 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수르스트뢰밍이다.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스카치 큐어(Scotch Cure)라고 하는 방식이 유명하다. 1860년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당대 세계 최대 청어 어장인 그레이트야머스에 도입되었다. 위 영상에서처럼, 청어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내장을 바로 제거한 뒤 나무통에 굵은소금과 함께 빼곡하게 담는다. 그러면 소금이 청어에서 흘러나온 물에 녹아 섞이면서 함수가 되어 청어를 절이게 된다. 이 방식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에 수출되는 물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영국에서는 하술할 블로터와 키퍼의 명성이 더 높았다.
Buckling(버클링)
훈제 청어. 그 중에서도 열훈법으로 바싹 훈연한 청어를 의미한다. 과거 발트해 지역에서 기원했는데 강한 불을 피워 빠르게 청어를 보존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술할 영국의 레드 헤링과 다른 점은 강한 열에 빠르게 훈연한다는 것이다. 발트 3국 말고도 독일에서도 즐겨 먹었다. 덴마크 보른홀름 지역에서도 즐겨 먹으며, 여기서는 생선의 내장을 따고 잠시 절였다가 바싹 훈연하는 식으로 만든다.
Bloater(블로터)
1836년, 영국 노퍽주 그레이트야머스의 비숍이라는 염장업자가 개발한 방식. 야머스 블로터(Yarmouth Bloater)로도 불린다. 어원은 '담그다' 라는 뜻의 스웨덴어 blöta. 청어들의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로 함수 수조에 넣어 일주일 간 절인다. 이후 20마리씩 눈을 막대기에 꿰어 탑 형태의 훈연실 천장과 벽에 빼곡히 걸고 6시간에서 8시간 가량 잠깐 냉훈법으로 훈연하면 완성된다. 주로 생산되던 시기는 8월에서 11월 사이였다.
동앵글리아 지역의 청어가 기름기가 적어 적합했다고 하며, 주로 이탈리아로 수출되었다. 한때는 청어 가공품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통과메기와 비슷한 이유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드 헤링에서 블로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제품은 따로 실버 헤링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더 오랫동안 절이고 더 짧게 훈연했기 때문에 차라리 날생선에 가깝다.
Red Herring(레드 헤링)
영국의 훈제 청어. 염장법이 개발된 16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가장 기본적인 청어 가공품. 가장 이른 기록이 13세기일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이다. 청어를 적갈색이 될 때까지 몇 주간 바싹 훈연한 것이다. 덜 훈연한 것은 은은한 황금색을 띄어 골든 헤링이라 하는데 이건 현재도 영국에서 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이다. 한편 몇 달간 훈연해서 시꺼멓게 변한 청어는 블랙 헤링이라 부르며, 끝내주게 좋은 보존성을 자랑했다. 이건 주로 카리브 및 아프리카 식민지에 노예들의 식량으로 수출하는 상품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현재는 생산되지 않는다.
냄새가 매우 심해서, 근세 범죄소설에서는 범인이 이걸 마치 현대 전투기가 미사일 회피용 플레어를 뿌리듯 자신을 뒤쫓는 경찰견들에게 던져서 후각을 교란하는 묘사를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영어에서 레드 헤링이라 하면 논점일탈의 오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Kipper(키퍼)
영국의 훈제 청어. 내장을 제거한 청어를 세로로 반으로 갈라 편 다음 소금을 뿌려 몇 시간가량 염장한 후, 막대기에 스무 마리씩 눈을 꿰어 훈연탑에 건 뒤 훈제한 것. 영국에서 현재도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는 해산물 식단이다. 그레이트야머스의 염장업자 존 우저(John Woodger)가 1846년에 개발했다. 한국의 과메기와 거의 같다. 1918년부터는 천연색소를 첨가했는데, 참나무 연기의 검은색을 내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으로는 훈연하면서 청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싹 훈연하면 위의 레드 헤링이 된다. 최대 생산지는 맨 섬이다.
알래스카 근처의 한 대서양청어 산란지는 산란철에 원양어선들이 어획그물(주로 설치형)을 치면, 위험을 느낀 대서양청어들이 알과 정소를 뿌려대는데 정액 때문에 물 색깔이 희뿌옇게 변할 정도이다. 수정된 알들은 그물에 달라붙으면서 어장이 망가지기도 하는데, 문제는 수정된 알은 끈기가 엄청 강해서25 그물에서 제거하기 매우 힘들다고.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 먼 옛날 침몰한 노르웨이배에 장기 숙성된 청어, 그러니까 이 대서양청어를 발견한 펭귄들이 리코 빼고 다 먹고 물고기 중독증26이라는 병에 걸려 맛탱이가 훼까닥 가버린 에피소드가 있다. 그외에도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가장 흔한 물고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