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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어원, 侍, 모실 시, 일본 봉건시대, 귀족을 모시는 무사 계급, 사족(士族), 센고쿠 시대, さむらい. 유럽의 기사(knight, 騎士)

Jobs 9 2025. 6. 1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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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말기 사무라이들의 모습

 

사무라이

侍(さむらい、サムライ)

 

侍는 '모실 시'라는 한자로, '모시다', '시중(侍中)
뜻을 나타내는 人(사람 인)과 소리를 나타내는 寺(절 사)가 합쳐진 형성자
일본에서는 さむらい라고 읽어 사무라이를 뜻

 

일본 봉건시대 때 귀족을 모시는 무사 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군인이자 행정관이기도 했기에 시대에 따라 사족(士族)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 일컫는 범위와 위상을 생각하자면 유럽의 기사(knight, 騎士)와 유사하다. 일본도와 화려하게 장식된 일본 갑주 및 뿔 장식이 달린 투구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며 현재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무사의 상징으로 외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타케미츠의 모습

 

사무라이는 양민보다 높은 신분으로서 칼을 차고 다닐 권리가 있는 특권계급이었다. 또한 본래는 전쟁에서 활약하는 부시(무사, 모노노후)와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었으며, 이 때문에 문관도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칼을 차고 다녔다. 다만 아무데서나 함부로 칼싸움을 했다간 당사자 모두 참수형인지라, 그냥 칼날 부분을 통째로 대나무를 깎아 만든 칼날로 교체해서 다니는 경우도 잦았다. 이를 다케미츠(たけみつ)라 한다. 진검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지라, 딱히 전쟁이 없던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도 이 다케미츠를 종종 들고 다녔다. 아무튼 이런 면에서 부시(武士)와 사무라이(侍)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무사 계급이 나타난 것은 헤이안 시대이며, 이들이 귀족을 경호해주면서 사무라이(그 당시에는 사부라히/사부라이, 라는 말이 생겼지만,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이 되었다. 그런데 센고쿠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들 무사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하급 계층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면서 다수의 지역 토호들이나 하급 군인(사무라이)들이 새로이 무사 계급('센고쿠 다이묘')이 되었다. 이렇듯이 신분 체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관리들을 칭하는 용어가 사무라이가 되었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관들은 모노노후로 불리게 되었다. 사무라이가 문관과 무관의 총칭이 된 것이 센고쿠 시대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전쟁을 업으로 삼는 부시, 모노노후는 의미가 없어지고 평민을 다스리는 지배계급 사무라이만 남게 된다. 

 

훗날 메이지 유신 이후 사민평등을 실현한다는 가치 아래(사실은 구 무사계급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칼을 빼앗는 "폐도령"이 내려졌고, 칼과 신분을 잃은 구 무사계급은 대부분 "향사"가 되어 아무런 특권이 없는 평민이 되었고 유신때 공을 세웠거나 다이묘 출신, 상급 사무라이들인 경우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어원

 

사무라이라는 말의 등장은 헤이안 시대이다. 귀족들을 경호해주는 사람을 사무라이라고 부른 것이 시작인데, 구체적으로는 '시중들다'를 의미하는 옛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 당시 표기로는 さぶらふ)에서 유래했다. 구체적으로는 사모라우(さもらふ)라고 썼던 것이 말이 변해 사부라우가 된 것인데, '사부라우'의 명사형이 사부라이(さぶらひ)이고 이것이 다시 변형되어 사무라이(さむらひ)가 되었다. 그리고 1946년 정서법 개정에 따라 さむらい라고 쓰게 되었다.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가면서 한국말 싸울아비에서 파생돼서 사무라이라는 어휘가 생겼다는 유언비어가 1990~2000년대 국내에서 꽤 크게 퍼졌던 적도 있는데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실제로 싸울아비란 말이 문헌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제강점기에 이광수(소설가)가 쓴 소설이고 그 무렵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어휘가 1400년 전 백제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다. 이 오해를 널리 퍼트린 요인 중 하나가 진 사무라이 스피리츠 하오마루 지옥변의 국내판인 진 싸울아비 투혼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역사

 

초기

 

사무라이의 기원은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을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천황의 황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해이해져 갔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집권 질서가 무너지자 중앙기관은 더 이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쇠약해진 중앙 기관은 지방의 세력가들인 '고쿠시'들에게 중앙기관을 대신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주었다. 이들 고쿠시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위해서 유력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사업을 맡겼는데, 이들을 '다토'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토들이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경작지를 만들고는 스스로를 영주라고 자처하면서 다토와 고쿠시 간에 권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고쿠시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미약했던 다토들은 중앙권력자에게 자신의 땅을 바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번져갔다. 다토들은 싸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력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무력집단의 일부가 중앙귀족의 눈에 들어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시종(侍從)이 되는데, 이 시종에서 나온 것이 사무라이(侍)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는 귀족의 경호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무사들까지 통틀어 이르는 말로 변질되었다.

 

 

전성기

 

이후 12세기에 겐페이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무사 계급은 귀족(공가)들을 제치고 실제로 일본을 통치하는 지배층 위치로 올라 더욱 발달하였다. 각 지방을 다스리는 사무라이인 다이묘들 중에서도 으뜸격인 쇼군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고 천황과 귀족(공가)을 대신하여 일본을 통치하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사무라이들의 격이 좀 더 높아졌다. 또한 일본이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자 사무라이들이 더욱 날뛰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무라이 문화가 형성된 시기는 흔히 말하는 센고쿠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그나마 중앙의 질서를 유지하던 무로마치 막부의 힘마저 유명무실해져서 일본 각지의 다이묘(영주)들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들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로부터 보호받고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에 다이묘들을 주군으로 섬기며 그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병력을 고용해서 전쟁에 나가 싸웠다.

 

바로 이 시기에 일명 '무사도'가 생겨났으며, 사무라이들 역시 단순한 무사에서 영지를 받고 싸우는 준귀족 계층으로 신분이 상승함에 따라 사무라이 특유의 문화도 더욱 발달하였다.

 

 

 

 

말기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 시기에 들어서도 사무라이들은 일본의 지배계급으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다만 사무라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센고쿠 시대의 지방 분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무라이들의 문화도 중앙 집권 체제에 맞도록 변질되어 갔다. 또한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 전쟁이 거의 사라지고 일본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민 계층의 쵸닌 문화가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 그 위세가 크게 줄었다. 더군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의 농업 종사를 금지시킨 이후로, 주군 가문의 가이에키 등으로 봉토가 없는 사무라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죠닌들의 밑에서 막노동을 한다든지 상인들을 호위하는 일을 하기도 했으며, 대만, 마카오, 필리핀의 루손 등의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태국에서 전쟁에 참전한 사무라이들도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에도 막부 초기의 모험가인 야마다 나가마사가 있다.

 

 

몰락

 

사무라이들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종결되었다. 사무라이들의 계급을 유지시켜주었던 에도 막부가 보신전쟁으로 무너지고, 토지 개혁 정책에 따라 사무라이들에게 지급되던 영지가 사라지자 당연히 큰 반발이 일어났다. 정부는 그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고 사족이라는 신분을 부여하였으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사족들은 메이지 유신에 반발하여 정부 고위 관료 암살 등을 일으켰고 사가, 구마모토, 조슈 등지의 사족 반란을 일으켰으며, 사쓰마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세이난 전쟁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부가 보낸 신식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실패하였다. 결국 세이난 전쟁을 마지막으로 1870년대에 들어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는 거의 소멸했고 현재는 과거의 명문가들 정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이라고 해서 영화에 나온 것마냥 신식 군대에게 갑주 입고 칼을 휘두르며 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사무라이는 칼에 특화된 게 아니라 단지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이었고, 그들 역시 신식 군대처럼 총과 대포 같은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몇 년 사용법 교육받는 평민과는 다르게 10년 이상 사격술을 갈고 닦고, 그 시대 총기사용에 가장 중요한 대열과 사기에서도 굉장히 뛰어났다. 정부에서 무기 입수를 방해하지 않는 한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서 유럽 무기를 들여와 군대를 무장시키는 일도 많았다. 즉, 이들은 단지 구체제인 막부체제와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이였다.

 

 

 

사무라이 계급

 

일본의 무사 계급을 도식화 해보면 아시가루 < 고케닌/카치 < 키바 < 하타모토 < 다이묘 순이 된다. 흔히 알고 있는 사무라이는 엄밀히 따지면 전쟁에 나갈 때 말을 타고 나갈 자격이 있는 중급 무사인 '키바(騎馬, 기마) 사무라이'를 뜻했고, 이들 밑에는 하급 무사에 해당되는 '고케닌', '카치(徒, 도보) 사무라이'가 있었다. 사무라이 다음 계급은 다른나라의 보병에 해당하는 '아시가루'가 있는데, 출판물에 따라 최하급 사무라이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무라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시가루는 농민과는 엄연히 신분이 다른 무사의 일종이다. 아시가루처럼 걸어다니지만 제대로 된 무장과 투구다운 것을 쓰고 있으면 카치 사무라이, 말을 타고 있으면 키바 사무라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키바, 카치, 아시가루들을 여럿 거느리는 상급 무사인 하타모토와 다이묘가 있다.

 

키바 미만 계급인 고케닌, 아시가루 등은 신분상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는데, 이는 봉건제 사회였던 일본의 특성상 말을 타는 계층이 엄격히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마상 작전은 키바 이상의 사무라이가 직접 말을 타고 수행했는데, 이를 두고 사무라이를 "영주 휘하의 기병 부대"같은 부류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사무라이는 어디까지나 영주의 가신, 즉 지휘관에 해당되는 직책이었지 병사(兵)가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일정 계급 이상이 아니고서는 말을 타는 것이 금기시 됐던 사회 분위기 탓에 일본은 1862년 이전까지 다른 나라처럼 전문적으로 훈련된 "기병 부대"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사무라이는 병사가 아니었기에 "사무라이 부대"란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사무라이들은 코쿠다카(石高, こくだか)라고 하여 영지를 지급받았다. 하타모토는 고쿠다카가 200석13에서 9,000석인 하타모토까지 다양했다. 고쿠다카가 1만석이 넘어가면 여기서부터 다이묘라고 불렀다.

 

일본식 쌀 생산량 계산에 따르면 1석이 1,000홉이고, 인간이 1년 365일동안 1홉씩 3끼를 먹으니 대략 코쿠다카 1석당 1명은 인간을 부양할 수 있다고 봤다. 즉, 고쿠다카가 1만석짜리 땅이면 1만명의 영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이 고쿠다카 생산량 중 70%를 다이묘가 가져갔다. 다만 대부분의 고케닌급은 영지가 아니라 고쿠다카에 해당하는 봉록을 받았다. 그리고 이 코쿠다카를 바탕으로 각자 군역(軍役)이 정해져 있어 전시에 정해져 있는 병사를 데리고 집합하여야 한다. 시대별로 변하지만 대충 200석은 5명, 1,000석은 25명, 10,000석은 250명씩이다. 그러나 고쿠다카 200석 사무라이라고 해서 각자 병사 5명이나 짐꾼 5명씩 데려오면 되는 것은 아니고, 고쿠다카에 따라 병종 비율이 정해져 있어 각자가 소규모 부대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이 관습, 지역에 따라 제각각이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야 통일성을 갖춘 동원기준이 마련된다.

 

 

 

※ 사무라이 계급

 

다이묘(大名)

전국시대에는 고쿠다카가 1만석 이상은 다이묘, 그 이하는 쇼묘(小名)라고도 했었다. 전국시대에는 영지가 큰 다이묘의 경우 휘하에 다이묘를 여럿 거느리기도 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지번'이라는 형태로 다이묘 휘하에 다이묘가 존재하였다. 또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대충 1만석당 병력 250명씩을 동원해야 했는데, 임진왜란의 경우 장거리 원정의 한계상 보급부담, 농사 일손 부족 등의 문제로 그 1/2이나 1/3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임진왜란 시기의 쓰시마 섬처럼 전장에서 가까운 지역은 오히려 1만석 당 병력 500명 가까이를 동원하는 바람에 영지 내 젊은 남자들의 씨가 말라버려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수의 절반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에도 시대의 1만석 다이묘는 1인당 235명16, 10만석 다이묘는 1인당 2,155명17의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당시에는 260여명의 다이묘가 총 1,600만석의 영지를 갖고 있었다.

 

하타모토(旗本)

원칙적으로는 다이묘와 대등한 독립영주이며, 가문의 격 자체는 약소 다이묘들보다 오히려 높은 하타모토들도 있었다. 다이묘들과는 원칙적으로 서로 '도노(殿)'19 또는 '도노사마'라고 존칭하는 관계였고 바쿠후의 실질적 재상직인 로쥬(老中)을 맡는다든지, 축성이라든지 교토 조정 칙사의 대접이라든지 조선통신사의 대접 등과 같은 막부의 일을 맡길 때 다이묘가 하타모토 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타모토의 경우 전국시대에는 주군의 군기를 지키는 무사단으로 시작해 일종의 근위부대였고, 에도 시대에 들어가며 쇼군 직속의 고쿠다카 10,000석 미만의 무사를 뜻하게 되었다. 1704년 기준으로 약 5,300명이 있었고, 각자 부하들을 거느린 부하들 총합이 67,500명이었다.20 또한 하타모토는 아무리 고쿠다카가 적더라도 다이묘와 동등한 '도노사마'라는 극존칭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는 존재였다. 영지는 쇼군의 700만 석중 400만 석을 고쿠다카에 맞춰 나누어 받았다.21 보통 하타모토는 봉록을 쌀로 직접 받지만 500석 이상은 지행지를 받은 후 이를 다이칸에게 맡겨 간접 수취 했고, 3,000석 이상은 지행지를 아예 직접 경영하였다. 고쿠다카가 5,000석만 되어도 동원 병력 125명22을 거느리는 '작은 다이묘'였다. 그러나 이런 큰 규모의 하타모토는 적었고23, 대부분이 1,000석24 ~ 500석25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하타모토의 하한선에 가까운 200석의 경우 부하로 꼴랑 카치 1명, 아시가루 1명, 짐꾼 3명26 뿐이었고, 심지어 최하 50석 하타모토까지 존재했다.27 그래도 어딜가나 벼슬아치라고 대접 받긴 하는데 말단 관료 생활만 할 수 있고 태생적으로 중신까지는 오를 수 없었다.28 그러나 에도 시대 평화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군역은 명목만 남아서 막부 말기에 가면 사츠마/조슈 번의 반란에 몇 만석의 다이묘들이 각자 몇백 명씩 동원하는 게 전부였고 어디까지나 칼을 찬 관료라는 신분으로서만 남았다. 평민 출신으로 공을 세워 하타모토가 된 인물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존 만지로, 곤도 이사미가 있다. 키바는 다이묘들의 하타모토격으로 역시 각자 코쿠다카를 받았으며 군역이 부과되었다. 키바의 경우도 고쿠다카 200석 이상이지만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가이 다케다 가문에서는 105석 이상, 사이고쿠에서는 500석 이상이 기준이었다. 3,000석급 이상의 하타모토도 예하에 키바를 두고 부릴 수 있었다. 이런 키바도 각자 200석급 무사라 예하에 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고케닌(御家人), 도보 사무라이(카치)

하급무사. 수는 제일 많으나 인지도 0의 존재. 1704년 기준 무려 1만7천여 명이다. 각종 일본소설의 번역에서 하급무사라고 나오는 것이 바로 이들 도보 사무라이로, 도보는 일본말로 카치로 '카치 사무라이'라고 한다.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서열이 '다이묘>고케닌>하타모토'였는데 에도 시대로 오며 역전되어 '쇼군을 알현할 수 있으면 하타모토, 없으면 고케닌'으로 신분이 하락하였다. 그냥 걸어다니는 무사들로 칼을 쓰기도 하고, 총을 쓰기도 하는 등 경력 있는 말단 보병 역할이었다. 쇼군의 직속 고케닌이 약 1만 7천명에 달했으며, 전국시대까지는 이러한 고케닌도 1명씩 종자를 거느리기도 하였는데 에도 시대에는 키바 자체가 도저히 군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짐과 마찬가지로 카치 역시 종자를 거느리는 경우가 없어졌다.29 신분상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다. 가록은 30~80석이 보통이었으며 많게는 200석이 넘는 자들도 있었으나 최대 400석 이하였다. 가록에 맞쳐서 쌀을 받았으나 200석 이상자 중에서는 드물게 지행지를 가진자도 있었다. 그러나 에도시대 중기 이후 지행지를 가진 자는 하타모토로 승진함에 따라 더이상 지행지를 가진 고케닌은 없어졌다. 또한 능력이 있는 자는 하타모토로 승격하기도 했는데, 하타모토 격의 직위를 3대에 걸쳐서 역임하게 되면 자동으로 신분 승격이 이루어졌다. 돈많은 농민들이 이러한 고케닌의 양자로 들어가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하기도 했다. 분명 두 자루에 칼을 차고 성씨를 사용하는 사무라이지만, 워낙 보잘것없는 존재들이라 메이지 시대 이후 하타모토들 처럼 '사족'으로 인정 못받고 그냥 평민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었다. 카치 사무라이는 그냥 뚜벅이 무사. 하타모토나 기마 사무라이들이 몇십명씩 거느린다. 이들 역시 사무라이의 일종이라 고쿠다카를 받는데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 집안은 고쿠다카가 겨우 10석이었다.

 

 

※ 기타 계급

 

쇼군(將軍)

일본 내 모든 무사들의 정점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줄임말이다. 좀 어려운 개념인데 쇼군은 가장 높은 다이묘로 '무사'이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사무라이는 아니다. 사무라이는 이름대로 높으신 분을 '섬기는' 직책인데 쇼군은 높으신 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군을 '무가의 동량(武家の棟梁)'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에도 시대 중기 기준으로 쇼군 아래로 260명 내외의 다이묘가 있고 다시 쇼군 직속으로 8만여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아시가루(足軽)

대부분의 일본소설에서 아시가루를 '최하급 무사'라고 번역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무라이가 아니다. 센고쿠 시대에는 평상시 농민이었으나 전시에 동원되는 병사들을 아시가루라고 하였는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로 접어들며 하나의 계급화가 되었다. 고케닌과 마찬가지로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는 신분이다. 메이지 시대 다이묘와 공경귀족들을 재편성해 '화족'이라 하고, 화족에 편입되지 못한 그 이하 사무라이들을 '사족'이라고 하였는데 아시가루는 그도 아닌 '족졸'이었다. 화족이 아닌 한 사족조차 법령상 평민이었으니, 어디까지나 그냥 평민이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세력의 아시가루였던 집안에서는 출세는 하지 못했어도 예전에 차고 다니던 우치카타나 한 자루 정도는 가보로 모셔와 일반 농민들과는 다른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가보의 경우 별 일이 없었다면 지금도 각 가정에서 소장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그 중 일부는 옛날에 사무라이 계급이었다고 허풍치는 경우도 물론 있다. 고쿠다카를 받는 사무라이와 달리 아시가루들은 녹봉을 받았다. 아시가루를 지휘하는 아시가루 코가시라(足軽小頭)가 승진 한계선이었다. 여러 아시가루 코가시라를 거느리는 아시가루 다이쇼(足軽大將)는 하급 사무라이가 담당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시가루 집안 출신으로 잡병에서 시작해 태정대신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고, 막부 말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아시가루 집안 출신. 에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병력동원 자체가 없어지니 아시가루 계급이 유명무실해졌고, 사무라이들이 관료화되자 아시가루들은 그 아래 포졸이나 소방관 정도의 역할을 맡아 평민으로 동화되었다.

 

부케보코닌(武家奉公人)

보통 잡병으로 번역한다. 무가사회의 구성원이긴 하나 무사는 아닌 신분이다. 사무라이에 딸린 하인 와카토(若党), 전투에도 참가하고 평시에는 잡일을 하는 츄겐(中間), 무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하인 코자(小者) 등이 있었다.

 

 

 

문화

 

서양의 기사 문화의 발전사처럼, 최초의 사무라이들은 대개 싸움을 잘하는 무사들을 모아 귀족들을 경호하는 수준에 그치는 단순한 무사 집단 정도였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접어들어 다이묘 정권이 들어서고 400년 넘게 거의 서양의 기사와 가까운 계급으로 뛰어오르게 되면서 문화 수준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그 오랜 기간 동안 이들이 이끌어온 일본의 문화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교양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는 단순한 전사 집단이었지만, 무로마치와 전국을 거치면서 에도 막부 시기에는 일종의 사대부가 되었다. 도쿠가와 치세에 사무라이들은 유학과 병법 외에 난학(蘭学)이라 하여 서양 문물도 수학하였을 정도다. 실제로 대다수가 관료와 학자 등으로 활약하였다.32 각각 오오카 타다스케나 오규 소라이 등이 대표적이다.33 에도 막부말기에는 약 200년 이상의 평화 끝에 완전히 관료화 되어버린 사무라이 계급은 명, 청, 조선에서 들어온 주자학, 양명학 계열의 유학을 접하고 그것을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유교나 불교 같은 외래 종교의 반감으로 신토를 중시하는 국학(国学)이라는 학문을 만드는 등 사무라이의 문화적 깊이는 더욱 깊어갔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문관화는 몰락한 일부 공경귀족의 독자적 헤이안 문화와 결부되는 등 변화를 겪었으며, 에도 막부 말기 흑선내항과 더불어 발생하는 여러 체제혼란 속에서 근대 일본의 존황양이 사상을 확립하고, 메이지 유신의 기반이 되었다.

 

사무라이들의 교양의 수평은 지방별로 큰 격차가 있었으며34 어떤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언어를 필두로 하는 외국어 서적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 정도의 교양이 있었던 반면, 어떤 사무라이들은 한자로 제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제도를 위시한 유교가 조선만큼 보편화되지 못한 대신에 경제력과 군사력의 치중에 중요시한 점도 있었다. 애초에 일괄적으로 사무라이라고 해도 10,000석 이상의 다이묘와 다이묘의 시종이나 다름없는 하급 사무라이들 간에는 큰 격차가 존재했고 다이묘들끼리도 가문의 위세나 성향에 따라서 큰 격차가 있었으니 일괄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일부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혹은 권력다툼에 패하여 할 일이 없어서, 혹은 그냥 취미생활로 교양을 쌓았으며 이 과정에서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차문화와 독특한 화풍 등을 활발하게 발달시키기도 하는 등 제법 높은 교양과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명 하이쿠라 불리는 시문학도 이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와 유교의 이론에 깊이 감화된 사무라이들이 일부 늘어나면서 그 전성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말 극도로 꺼리는 왠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사무라이들도 늘어났다. 사무라이들이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례도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은퇴의 형식으로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반대로 일부 승려는 직접 나기나타같은 무기를 들고 난폭하게 설쳐대거나, 무뢰배들을 모아 승병을 만들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승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이묘를 축출하기도 했다. 종파끼리 교리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기분이 상했다며 승병을 동원하며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운 시건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 역시 이런 난폭한 승병 조직들을 경계하여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물론 그런 쪽하고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는 종파도 있었다.

 

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던 모양인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에 로마에 보냈던 보고서엔 대학 비슷한 교육시설도 있었던 모양이며 사무라이의 자제는 8살부터 19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져 온다. 치열한 센고쿠 시대에도 이랬으니 에도 시대쯤 되면 더욱 사무라이에게는 단순한 전투력이 아니라 정치력, 지력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의리와 무사도

 

각종 픽션에서는 주군에 대한 충과 의를 다하는 것처럼 묘사되며 실제로 그런 사무라이들도 있었지만, 사무라이도 엄밀히 사람이었기에 많은 경우 주군이 함부로 행동하거나 가진 영토에 비해 군주로서 다스릴 능력이 미약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립하거나 주군을 배신하며 동맹을 공격하는 등 배신을 일삼는 사무라이들도 많았다.

 

충과 의를 중시하는 무사도는 후에 에도 시대에 중앙집권적인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강조된 것이고 전국시대에는 적 앞에서 방심하면 등 뒤에서 찌른다거나 배신을 하거나 동맹을 깨거나 하는 일도 몹시 흔한 편이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무사도에는 유교 사상의35 영향이 크다.

 

그 전이라고 무사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다만 에도시대 이전의 무사도는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희한한 형태로 지켜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은혜를 갚거나 원한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난데없이 튀어나온 사람이 '내 은인!' 혹은 '내 원수!' 하면서 일이 터지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 또, 혼란스러웠던 센고쿠 시대엔 한 가지 개념으로 딱 떨어지지 않고 다이묘의 수만큼 무사도가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개념으로 존재했다.

 

현대에 알려진 무사도의 개념은 옛날을 동경하던 에도 시대 공무원 사무라이들이 유학사상과 버무려낸 통치계급적 내용에서 직접 유래했고, 메이지 시대의 니토베 이나조가 유학 중 서양의 기사도에 영향을 받아 역사적인 사실에 국뽕을 적절히 버무린 <무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라는 그의 저서에서 작성한 내용도 있으며, 그걸 가장 잘 나타내는 희곡 <충신장>이 결정타를 쳤다. 문제는 이 내용이 죽음을 개의치 않는 정신 운운하는 것이었고, 일본 제국과 일본군이 절대의 국시이자 이데올로기로 삼아버렸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국주의 시절의 맹목적이고 부정적인 무사도 숭배로 악용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사무라이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무사도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 나노리 라는 관습이 있었다.

 

 

 

생계

 

실제 센고쿠 시대와 에도시대의 무사들은 현대의 인상과 달리 엄밀히 말해 철따라 조건 따라 직장을 옮기는 샐러리맨에 가까웠다. 보통 이들은 전공을 세우면 적극적으로 주군에게 보고했고, 주군은 칸죠라고 불리는 "감사장"으로 보답했다. 이 감사장에는 해당 무사의 무공이 적혀 있어, 이를 타 가문에 임관할 때 군충장(사무라이의 이력서)의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는 "나는 도쿠가와 가의 귀신이 될 것인데,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쓰이는 감사장이 무슨 소용인가?"하고 감사장을 대놓고 거부했다고 한다.

 

또한 현재 사무라이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울긋불긋한 갑옷과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이 달린 투구 또한 단순한 허세템이 아니라 어떻게든 혼란스러운 전쟁터에서도 주군, 또는 미래에 주군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전공을 세워도 주군의 눈에 띄지 못하면 그대로 묻히기 때문에 고안된 방안인 셈.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후세의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해진 이유는 녹봉과 대우 등에 따라 주군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주가에 대해 전설로 남을 만한 의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당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오랜 가신들은 원로 대접을 받으며 후다이라고 불렸고 중용되었다.

 

사무라이 중에 10% 가량은 영주가 가진 영지의 일부를 위임받아서 직접 농민으로부터 쌀과 농산물 등 세금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 80% 는 1년에 3회 (2월, 4월, 10월) 영주의 쌀 창고에서 직접 은급을 쌀섬으로 수령해 집에 보관하거나 고향집에 보내거나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봉급을 받았다. 일부 10%-20%의 하급 무사는 쌀 대신 금화 등 현금으로 지급받았다.

 

섬기는 주군이 없으면 사무라이는 로닌40이 된다. 이들은 보통 주군의 가문이 망하거나 처벌을 받거나 해서 규모가 쪼그라들어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자 내쳐진 일종의 실직자인데, 출세를 위해서 전쟁에 목이 말라 있는 호전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암적 존재이기도 했고, 가끔 충성스러운 로닌들은 떠돌아 다니며 주가의 복수를 하기도 했다.

 

사무라이는 급에 따라 주군부터 쌀로 급여를 지급받았는데, 상인들은 사무라이들이 급여를 지급받는 날을 노려 쌀을 풀어 쌀가격을 떨어트리고 사무라이들이 외상을 쌀로 갚는 것을 방해하여 일부러 그들을 빈곤하게 만든 후, 친절한 척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많은 사무라이들이 막대한 빚더미에 앉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에도 시대 후기~말기에는 많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전락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근세 일본에선 다이묘를 제외하고 토지를 보유할 수 없었고 이는 다이묘가 아니고 다이묘를 섬기는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단 전국시대에는 에도시대와 달리 쌀이 아닌 토지로 봉급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였음으로(이를 은급(恩給)이라 한다) 이 원칙이 성립된 시기에는 작은 텃밭부터 대장원(荘園)에 이르기까지 땅을 가진 사무라이가 너무 많아 일일이 이를 회수할 수가 없었고, 만약에 그딴 짓을 강행 했다가는 전국에서 땅을 뺏긴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가 신규로 땅을 하사하는 것은 그만뒀다지만 에도시대에도 평민부터 사무라이로 등용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 중에는 영주의 감시가 닿지 않는 깡촌을 감독시키기 위해 마을 촌장이나 그 주변 부농한테 칼 두자루 채워주고 사무라이 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사무라이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논밭이 있었으며 오히려 일반적인 사무라이와는 달리 봉급도 못받고 그냥 벼슬시켜줄테니 니 밭에서 나온 거 주워먹으면서 세금이나 잘 걷어라 식으로 방치되는 일도 많았다. 또한 땅을 가진 사무라이의 증가는 당시 일본의 상속법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에도시대의 상속법에 따르면 부모의 일(=벼슬)과 지위는 장남에게 모두 상속되며 당연히 먹고 살아가기 위한 봉급은 일을 해야만 얻을수 있음으로 차남 이하의 자손들에게는 자급자족을 시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일과 지위는 장남에게 물려주고, 차남 이하는 농지를 쪼개받아서 이름만 사무라이인 농민이 되는 식의 상속이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에도 시대 후기에 가면 갈수록 땅을 가진, 그러나 정작 사무라이다운 일은 하지않는 가난한 사무라이가 엄청나게 늘어나버리게 되었다.

 

 

 

 

부업

 

본래 사무라이는 관리, 군인 등의 공무원처럼 계급에 맞는 본업을 제외한 부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에도 시대 하위권 사무라이들은 가난하여 먹고 살기 어렵다보니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상층부도 뻔히 다 알고 있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 묵인했다.

 

사무라이의 부업으로는 우산제작이 대표적이고 그외 대나무 바구니 짜기, 벌레기르기가 크게 유행해 새나 벌레를 사육하는 초롱, 조명용 등롱 등을 제작해 팔기도 하고 학식이 있는 사무라이는 평민이나 상인들의 자식을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중에 전문적인 직인, 장인 계급으로 발전하였다.

 

단, 일본도 명백히 계급 의식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체면 차릴수 있는 부업이라고 하면 무술이나 학문을 활용할 수 있는 도장 or 서당(일본에서는 데라코야라고 불렸다) 선생, 또는 학자 정도로 쳤고 조상 대대로 받아내려온 밭을 가꾸어 목에 풀칠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보았다. 취미로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 대장간이나 공방에서 장인으로 일하는 것은 남에게는 말 못할 부끄러운 일로서, 그 중에서도 최하급으로 친 것은 바로 상업. 가게를 차린다거나 상회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은 거의 사무라이는 이제 때려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주군부터 녹을 받아 먹으면서 한편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같은 사무라이 사이에서는 도저히 상종 못할 인간 말종 취급을 받았다. 예로 에도 시대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던 하급 관리인 도신(同心)은 업무 성격상 고요키키(御用聞き)라고 불리는 평민 출신 조사원들을 대량으로 고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막부부터 받는 봉급과는 별개로 하사 받은 부동산을 활용하여 상업 활동을 병행했는데, 평민들 사이에서는 일상에서 자주 볼일이 많은 사무라이 계급인 것도 있어서 인기가 많았으나 같은 사무라이 사이에서는 거의 평민과 같은 취급을 받고 멸시 당했다. 전국 시대에는 상업과 사무라이 일을 병행한 인물도 많은 것을 보면, 이는 에도 시대에 들어 사무라이와 상인 계급 간에 마찰이 표면화 됨에 따라 나타난 경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메이지 유신 이후 직업에 대한 제한이 풀어져 사무라이들도 장사를 대놓고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초기에는 오히려 손님인 평민들이 장사를 하는 사무라이들에게 굽신거리며 마치 하사를 받는듯한 자세로 물건을 구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부레이우치

 

평민에 대한 살인 면허.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きりすてごめん)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사무라이계급에게 허용되었던 특권의 하나로 자주 행해진 것은 아니다.

 

 

 

무예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위의 기록처럼 보통 검에 죽고 검에 산다는 이미지는 전쟁양상이 바뀌는 전국시대가 돼서야 정립되었다.

 

일반적인 사무라이 이미지는 전신 갑옷을 입고 일본도를 휘두르며 싸우는 보병이지만, 초창기 사무라이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수로 활동했다. 기원전 2~3세기 때 한반도를 통해 전해진 난부우마(南部馬, なんぶうま), 기소우마(木曽馬, きそうま) 등을 군마로 육성해 타고 다니며 헤이안 시대부터 활약했다. 무로마치 막부 이전까지의 사무라이는 2.2m의 장궁을 들고 적진을 누비며 지속적으로 사격하는 것을 중시했다. 소위 말하는 일기토도 본래는 서로 말 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 사무라이를 '궁수(유미토리)'라고도 표현하며, 사무라이의 무력을 궁술로 비유하기도 했다. 활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칼을 쓰기도 했지만 당시 사무라이의 주 무기는 4.5m 정도 되는 창이었다.

 

여러모로 기마궁수에서 그 기원이 시작됐지만, 어디까지나 사무라이는 말을 탈 자격이 있는 신분을 뜻하는 것이지 영주 직속의 일반 병사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돈 많은 부유층'임은 물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를 뜻했다. 사무라이는 이런 사회 안에서 고위층을 모시는 시종의 역할 즉, 군대로 치면 장교에 해당되는 나름 고급 인력들이었다. 전장에 나간 사무라이의 주된 업무는 대장인 영주의 지휘체계를 따르며 휘하 무사계급들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시대가 흘러 전국시대가 되면 사무라이들은 국가나 영주에 종속된 부대원이 아닌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행동하는 가신이 되었기에, 이때부터는 영주가 사무라이를 일반 병사마냥 부리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졌다. 무엇보다 작전 중 사무라이가 사망하면 그가 지휘하던 휘하 병사들의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사무라이들을 모아 별도의 부대로 편성하는 건 영주에게 있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전국시대에 기마부대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 이런 뿌리깊은 사회적 통념 때문에 일본은 1862년 분큐의 군제개혁(文久の軍制改革)으로 서양식 군대 제도인 삼병(三兵-보병, 기병, 포병) 전술체제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기병 부대'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말을 타는 것이 허락된 신분이었음에도 대규모 기마부대로 편성할 수 없었던 또다른 이유는 바로 '군마 문제' 때문이다. 유사 이래 유목민족이 아니고서는 군마를 육성하는 데엔 꽤나 큰 재화가 필요 했고, 일본은 열도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군마의 품종 개량 및 육성 난이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몇 배는 더 높았다.50 때문에 전쟁 중 마상작전은 말을 타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운 영주 휘하 고위급 사무라이들 만이 참여 가능했고, 이마저도 다른 나라의 전문적인 기병부대만큼 수가 많거나 훈련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소규모 전투에서 대규모 전투로 전쟁 양상이 바뀌는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더욱 심화되었고, 전국시대가 되자 군마 수급 문제, 전술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적게나마 마상작전을 수행하던 사무라이들까지 대부분 보병화되었다. 선조 실록 93권 (1597년) 10월 20일,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군의 시종노릇을 하던 '김응려'란 사람이 탈출해 말하기를, "칼을 쓰는 것은 그들의 장기이지만 말을 타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린 후에야 싸움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키바 사무라이는 씨가 마르게 된다.

 

에도 막부가 되자 사무라이는 모두 관료화되어 지니고 있는 칼 자체도 정장의 소품화가 되어버렸다. 전쟁할 일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는 사무라이들의 범죄를 막기 위해 강력한 규제를 단행했다. 함부로 칼뽑고 살인했다가는 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지며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신분이 강등 당하기도 했다. 때문에 에도 막부 때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일평생 칼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예 칼을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은 시대가 지날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성 하나에 제대로 실전 경험이 있는 이는 외부에서 고용해온 검술 사범 딱 한 명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전 분위기만이라도 맛보겠다는 중2병스러운 발상으로 츠지기리나 도장 깨기 등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사무라이들도 나왔을 정도면 에도시대의 일반 무사들이 얼마나 전투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거친 무사들의 풍습이었던 할복도 진짜 배를 가르는 것에서 에도 막부에서는 귀찮았는지 그냥 참수형에 처해 버린 다음 보고만 할복으로 처리해버리는 사례도 많았다. 어차피 할복은 배따고 죽을 때까지 방치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배를 스스로 갈랐다면 뒤에서 참수를 담당한 이가 목을 쳐 확인사살 겸 안락사를 시켜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기에 목이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근본은 무인이었기 때문에 문인화가 이루어진 에도 시대 이후에도 교양으로써 무예를 익히는 풍조는 유지되었으며 검도, 궁도와 같은 일본의 전통무예를 발전시켰다.

 

 

 

 

이들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는 추신구라(忠臣藏)와 하가쿠레(葉隱) 이야기가 대내외적으로 특히 유명하다.

국내에서 선비란 말이 씹선비로 유행한 것과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란 말이 꼰대 기질을 보이는 일본인을 조롱할 때 쓰이기도 한다.

 

서양인이 진짜 다이묘에게서 이름과 검을 하사받고 사무라이가 된 경우도 있다. 16세기의 영국인 선원 윌리엄 애덤스와 그의 동료 독일인 로뎀슈타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정식으로 이름과 영지를 받고 사무라이가 된다. 도쿄역 야에스 출구 일대가 그곳으로, 이것은 로뎀슈타인의 일본식 이름 야요우스를 잘못 읽은 것이다. 이 사람의 일대기에 영향을 받은 소설이 쇼군. 사실 이전에도 오다 노부나가가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에게 야스케란 이름을 주고 부하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이다 보니 일본에서는 자국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많이 사용한다. '사무라이 본드'는 일본 자본 시장에서 외국 기관이 발행하는 채권을, '사무라이 자본'은 일본계 자본을 부르는 말이며 '사무라이 재팬'55이나 '사무라이 블루'56와 같이 일본 스포츠 국가대표팀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내 자동차 브랜드들 중에서는 자사의 모델을 해외에 수출할때 여기서 이름을 차용해 판매하며, 그러한 사례 중 하나가 스즈키 사무라이다.

 

일본어의 표준어는 도쿄 야마노테 지역에서 살던 사무라이들이 사용하던 말을 모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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