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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士(지식인), 大夫(관료), 주나라, 고려·조선 문관 관료

Jobs 9 2025. 6. 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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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士大夫

 

 

고대 중국에서 구분한 신분 질서로, 고려, 조선 시대 문관 관료의 총칭. 사대부란 사(士)(지식인)와 대부(大夫)(관료)의 합성어로서,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갖춘 학자적 관료를 일컫는다. 쉽게 말해서 지식인과 관료를 합친 명칭이다.

 

 

본래 대부(大夫)와 사(士)는 같은 계층이 아니다. 주나라 시대 기준으로 대부는 가(家)를 물려받는 세습 계층인데 주나라와 주나라 제도가 이어진 춘추전국시대까지 가(家)의 범위는 단순한 현대 4~5인 가족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수백 명의 속민들을 다스리는 단위로 보면된다. 반면 사(士)는 대부 처럼 가문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일신의 재능, 즉 문무를 겸비한 지식인 겸 무사 출사하는 실무자 이다.

 

후대 한반도와 중국 왕조에서 통일왕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시대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모하는데 중앙 귀족 기존의 천자- 제후- 대부- 사 분류는 사회의 변동에 따라 변했다.

 

따라서 주나라 시대의 성읍국가에서 진나라와 한나라 이후의 통일제국에서 제후는 천자의 같은 성을 쓰는 친척으로 제한되고, 중앙권력에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제한 순간 지방에서 중앙통제없이 권한을 행사하는 대부와 같은 존재는 사라졌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 아래 그저 지역유지나 토호 정도로 약화 되었기 때문에 진한시대 통일왕조 이후 굳이 대부에 해당하는 계층을 찾자면 천자의 조정에 출사하는 경대부들만이 유의미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는 지식인 계층인 사와 합쳐져서 문무 관료층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변모했는데 사(지식인 士)+대부(관료 大夫)로 합쳐져 사대부라 불리게 되었다.

 

중국의 경우 명청시대에 과거제도는 조선시대보다 더 촘촘하고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지방시험인 수재나 거인에 합격하면 대부로 취급해주었다. 대부로 취급 된다는 것은 조정관리에 무릎을 꿇지 않고 살인이나 강상죄가 아니면 형벌이 면제되는 특권이 있었다. 왜냐 하면 예는 밑으로 서민이 지킬 필요가 없는 대신, 형벌 역시 위로 대부에 미치지 않는다는 유교적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준으론 출사하기 전에 유교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라면 사, 조정관리로 임용되면 대부로 여겼다. 벼슬 품계로는 5품이상 자급부터 대부 명칭을 쓴다. 또한 한국에서는 사대부라 하면 고려~조선 시대의 문신을 의미한다. 








사대부

 

고려·조선시대 문관 관료의 총칭

 

고대 중국에서 천자나 제후에게 벼슬한 대부와 사에서 비롯된 명칭이지만 문관 관료 전체 또는 문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여 사대부라 한다. 송나라 이후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계층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 법제와 의식을 사대부 중심으로 바꿔가면서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 사대부층의 성리학은 13세기에 고려에 들어와 신흥사대부층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신흥사대부는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신왕조의 지배층이 되었고 향촌지배질서 확립에도 힘써 문관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를 실시했다.

 

 

 

 

사대부는 중국 고대 주(周)나라 시대에 천자(天子)나 제후(諸侯)에게 벼슬한 대부(大夫)와 사(士)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 때의 대부와 사는 하나의 계급이었으나 진한시대(秦漢時代) 이후에는 계급의 구별은 없어졌다. 단순한 문관(文官)의 관위(官位)로서 정착되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문관 관료로서 4품 이상을 대부, 5품 이하를 사(士)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는 때로는 문관 관료뿐 아니라 문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쓰였다.

 

중국이나 한국의 전근대사회에서 관리는 일종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관직에 있을 때뿐 아니라 관직을 그만둔 뒤에도 죽을 때까지 특권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죽은 뒤에도 그 관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과거 시험이나 채용 시험을 거쳐야만 하였다. 사대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관리가 된 사람이나 퇴직한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문관 관료군을 지칭하는 사대부들이 정치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중국의 송나라 이후였다. 그전까지 정치 권력은 주로 군왕(君王)이나 귀족들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밀려 양쯔강 유역으로 옮겨 강남(江南)지역의 비옥한 토지를 일구면서부터 사대부층은 새로운 지주층 · 지식인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농업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업 기술을 발달시켜 이른바 강남농법(江南農法)을 개발하였다.

 

수리 시설의 확충과 시비법(施肥法)주1의 개선을 통해 농업 경작에서 휴한법(休閑法)주2을 극복하고 연작법(連作法)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진신(縉紳) · 신사(紳士)라고도 불린 이들 사대부층은 옛 귀족세력과 밀착되어 있는 불교와 도교를 타파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론 무기로서 성리학을 주창하였다.

 

성리학은 실천윤리(實踐倫理)인 고대유교에 불교 · 도교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으로서 사대부층의 지배 이념이요 사회윤리 · 가족윤리였다. 사대부들은 이러한 성리학의 교양과 경전 해석을 체득한 독서인층(讀書人層)이었다.

 

또한 송나라의 사대부들은 여진족에게 중국 북부 지방을 빼앗긴 상황하에서 비록 힘에는 밀렸지만 중화(中華)의 정통(正統)은 건재하다는 명분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들이 정치나 사회 생활에서 정통과 명분을 중요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것은 성리학적 민족주의의 표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계층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법제나 의식을 사대부 중심으로 바꾸어 갔다. 송나라 때 이후로 과거 응시자격이나 관리 선발제도에서 귀족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면서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한 지식층의 문호를 크게 늘린 것이 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예법(禮法)에서 왕조례(王朝禮)를 사대부의 가례(家禮)에 통합시키려 한 것도 그 다른 예의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중국 사대부층의 성리학은 원나라가 고려를 통제하던 13세기에 고려에 흘러 들어왔다. 그 결과 고려 말에는 신흥사대부층을 중심으로 지배사상을 불교에서 주자학(성리학)으로 바꾸었다. 또한 농업 기술을 발달시키면서 관리의 양성 · 선발 제도를 개방하는 한편 고려 왕조를 대신해 조선 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로부터 신흥사대부들이 신왕조의 지배층으로 되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적인 이념 위에 국가의 제도, 의례를 바꾸고 국왕을 견제하면서 자신들의 계층적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여론정치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또한 정치의 중심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돌려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힘썼다. 유향소(留鄕所) · 경재소(京在所) · 향약(鄕約) · 향청(鄕廳) · 계(稧) · 향안(鄕案) · 향음주례(鄕飮酒禮) · 향사례(鄕射禮) · 서원 · 서당 등이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로써 세계에서 유례없는 문관 관료층의 문치주의(文治主義)가 실시되게 되었다. 이들은 문필(文筆)로써 무인(武人) · 여인(女人) · 이서(吏胥) · 환관(宦官)을 누르고 오랜 기간 동안 승평(昇平)주3을 누리는 세계의 유례없는 문관정치를 수행하였다.

 

그러다 보니 체제 유지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근대화가 늦고 문약에 흐른 흠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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