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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중세, 서유럽과 중동 중계, 고트족, 훈족, 십자군 원정, 나폴레옹, 오스트리아 제국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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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과 식민지가 표시된 지도, 697년 ~ 1797년

국가
위치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일부
인구
1557년 2,150,000명
정치체제
국가원수
주요 도제
엔리코 단돌로
야코포 티에폴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이탈리아어, 베네토어, 라틴어
종족
베네치아인
통화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현재 국가

 

 

베네치아 공화국

 

이탈리아 반도 동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으로, 수도는 베네치아였다. 중세에 제노바 공화국과 함께 서유럽과 중동을 잇는 양대 해상 공화국으로 군림했던 나라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사자는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인 복음사가 마르코를 상징하는 '산 마르코의 사자'이다. 공화국의 국기는 이 산 마르코의 사자를 감싸는 6개의 테두리가 감싸져 있는 형태인데,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구역인 '세스티에레'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형태의 국기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

 

평상시에는 산마르코의 사자가 펼쳐져있는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의 국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시 상황에 돌입했을 경우, 사자가 성경을 왼발 밑에 내려놓고 대신 칼을 빼들고 있는 모습의 국기로 대체하여 사용했다. 성경에 적혀있는 문구인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

는 라틴어 문구로, <마르코의 복음서>에 적힌

"평화가 그대에게 있으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

라는 뜻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표어이자 역대 베네치아 라틴 총대주교의 표어였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행정구역인 베네토와 베네치아는 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에서 약간의 변형을 거쳐서 사용하고 있다.

 

 

역사

 

건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서 파도바,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로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섬에 정착한 흔적과 함께 동 시기에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늪 수준의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아예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 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육체 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 상임 통치 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럿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 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697년 ~ 717년)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는 동일 인물이었고, 이에 선출의 형식은 따랐으되 실제로는 아직 자치권을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 파괴령을 둘러싸고 동 • 서 교회간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 (726년 ~ 737년)였다. 그는 레온 3세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군인과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히파투스는 고대 로마 시대의 집정관(Consul)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므로 해당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칭호라고 보면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족은 결국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무너뜨렸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이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고,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현재 베네치아 섬 동쪽 끝에 위치한 San Pietro di Castello가 당시의 주교좌였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싸움의 일환으로 지금껏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시켜 배를 건조해 이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싸움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다툼으로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동로마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임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동로마에 넘겨졌고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라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서 다른 항구를 사용해서 외양으로 나간 해군의 공격을 받기 쉬우므로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군은 텅 빈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공략에 시간이 걸리면서 케팔리니아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불가르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과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으며 단서조항으로 로마 황제가 아닌 그냥 황제로만 인정하는 선에서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 (811년 ~ 827년)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 궁과 산 마르코 성당을 건설한다.

 

이렇듯 서로마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 ~ 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의 인프라와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즉,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런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의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패권 상실

 

동로마 제국의 지중해 패권 상실로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에 남은 유일한 동로마의 거점이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는 친(親) 동로마, 친(親) 프랑크, 친(親) 랑고바르드, 완전한 자주국으로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끊임 없이 경쟁하여 세습 왕조가 창건되는 것을 막았다.

 

베네치아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어촌에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로 탈바꿈 하였다. 조선업 또한 발전하여 후일 베네치아의 강력한 함대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810년 프랑크의 피핀 카를로만과 전투하여 승리한 이후 베네치아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9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상당히 강해졌고, 이를 이용하여 이스트라 반도도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 시기쯤 가면 베네치아 도제의 공식 명칭도 총독이나 공작에서 베네치아 도제로 공식화된다.

 

이후 10세기 말부터 내부분열이 완화되자,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1000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Pietro II Orseolo)는 크로아트 왕국과 아드리아 해에서 암약하는 슬라브 해적들을 때려잡으며 달마티아 일부를 차지한 이후 달마티아 공작(Dux Dalmatiae)를 칭했다. 1082년 베네치아는 동로마로부터 금인칙서를 받아내었고,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독립이 다른 북부 도시국가들에 비해 늦었던 이유는 아드리아 해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에도 있었다. 아드리아 해의 양안, 즉 발칸반도와 남이탈리아를 모두 영토로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가 약간이라도 반항할 낌새를 보이기만 하면 바로 해상 봉쇄를 시행하여 베네치아의 목줄을 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동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동로마 제국의 발등에 급한 불이 떨어지고 동시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이 남이탈리아를 장악하고 동쪽 그리스 본토를 넘보면서 베네치아에 신경 끌 여를이 없어지게 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리스를 침공한 로베르 기스카르를 몰아내는데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각종 무역 혜택과 함께 베네치아 도제를 명목상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베네치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십자군 전쟁

 

중세 성기에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했고 아드리아해 너머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여러 십자군들을 해로로 운송해주고 더 나아가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보급품이나 해군력을 제공해 줌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금전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2세기 동안에는 베네치아에 대규모의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제위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징벌하기 위해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앞장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미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 주둔해 있던 덕분에 어렵잖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정교회 국가들로부터 어그로가 끌리게 되었고 심지어는 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역이 많이 오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지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던 덕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 독점 국가로 등극하면서 동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 전략적 가치가 큰 영토들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이때 낙소스도 영향권에 두게 되었다. 1221년에는 몽골과도 무역 협정을 맺었다.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13세기 ~ 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1261년 라틴 제국이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미하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동로마 제국과 손을잡은 제노바 공화국이 빼앗으려고하자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와의 전쟁이었기에 때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왕국,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고 제노바군이 도시 외곽까지 돌입하는 등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물론 반격을 가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휴전을 조건으로 많은 영토들을 잃고 말았다. 특히 헝가리에게는 달마티아의 대부분을 잃었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겪은 후 베네치아는 섬 주위에 육상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술수를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진출해 1405년 파도바를 정복하는 등 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되었다. 1410년 베네치아의 함대는 3,300척 규모에 달했으며, 헝가리가 쇠퇴하면서 달마티아도 다시 회복했다.

 

한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기치 아래에서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서부로 들어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1299년에는 오스만 1세가 오스만 베이국을 세우고 동로마 제국의 잔여 아나톨리아 영토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

 

소아시아 북서부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던 오스만은 건국 이후 동로마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더니 발칸반도 일대가 내전과 계승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까지 진출하였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앞바다인 에게 해와 동지중해 일대의 헤게모니를 쥔 베네치아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이후 베네치아와 오스만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백년간 충돌하게 되었다.

 

물론 1396년 오스만이 십자군을 격파한 니코폴리스 전투 당시 베네치아는 대 오스만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413년부터 1419년까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일대에서 베네치아와 오스만 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이전에도 두 세력 간에 대결은 있어 왔다. 하지만 베네치아와 오스만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1423년 테살로니키 공성전부터였다. 1422년 오스만 제국군이 동로마령이었던 테살로니키를 포위하자 위기에 빠진 동로마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에 넘겼는데, 자신들이 포위하는 사이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 땅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오스만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와 베네치아가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수년간의 포위 끝에 1430년 베네치아는 테살로니키를 포기하게 되었고 테살로니키는 이때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술탄국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병주고 약주냐?. 그러나 교황령과의 협상 등이 발목을 잡은 데다 당시의 교황은 자기네들도 구원 함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국가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여 끝내 함대를 결성하지 못하는 상황이 터져버렸고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우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이후 베네치아 함대는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당시 오스만은 육상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연안해군 수준이었다. 차라리 당시 오스만 출신 해적들이 출전하는 게 나았을 정도였으므로 해전이 벌어지면 베네치아측의 승산은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오스만 술탄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3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1척 등 4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적시에 개입했다면 전쟁의 흐름을 바꿀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사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인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치고는 큰 영토를 이용해서 1만단위의 육상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 참가했다고 해서 베네치아 혼자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그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 가지고 있었고 수도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들은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였던 비참한 상태라서 오스만 술탄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다. 장기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막으려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했을 것인데 당시 서유럽은 동유럽에 눈을 돌릴 상황이 되지 못했으므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필연적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베네치아는 일단은 동로마 제국 시절의 무역특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이 특권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를 가지고도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 베네치아가 도시국가치고는 당시 유럽의 중소급 국민국가에 가까울 수준의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인구도 식민지와 본토 속령까지 다 합쳐서 1557년에는 215만 명에 도달하였으며 경제력과 도시화율도 높긴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오스만 제국과 정면승부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튀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 (1512년 ~ 1520년)에 오스만이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1463년 오스만 제국은 아테네의 튀르크인 지휘관에게 속해 있던 알바니아인 노예가 베네치아령으로 도망간 사건을 빌미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백양 왕조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에 대항하였으나, 육지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스만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알바니아 일대가 오스만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패배를 인정했다. 네그로폰테와 렘노스, 알바니고, 달마티아 일대를 오스만에게 넘긴 베네치아는 배상금과 연공까지 지불하기로 했다.

 

1499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걸었다. 케말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의 맹활약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1503년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의 거점인 두라초, 그리고 모레아 반도의 코론과 모돈을 오스만에게 할양하였다. 이렇게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 북부 진출

 

베네치아는 제노바와의 전쟁 이후 도제 미켈레 스테노의 정책아래 육상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 트레비소(1389년)를 시작으로, 베로나(1405년), 파도바(1405년),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1426년), 베르가모(1428년)까지 진출하여 밀라노 공국과 접하게되었으며, 16세기 이후 해상 영토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반도 내부로 돌려 베로나, 파도바 지역을 베네토로 칭하고 볼로냐 등 로마냐 지역에 베네치아 속령을 설치했다. 이런 식으로 형성된 영토를 본토 속령이라고 불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게 볼로냐 지역의 반환을 통보했으나 베네치아는 거절하였고 갈등이 촉발되었다. 1508년 12월에 교황이 주도하여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및 아라곤 왕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등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면서 베네치아를 압박했다.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이탈리아의 영토를 다 토해냈다.

 

그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대공국 등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은 베네치아는 1515년에 이르러 아냐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북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 못했다.

 

 

 

몰락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코스탄티니예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독점 패권을 잃게 되고,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간 베네치아가 독점해오던 향료가 포르투갈에 의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게 그 향료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향신료가 유럽에서 부와 패권을 좌지우지했던 시대에서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포르투갈에게 부와 패권을 도로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미쳤다고 자신들에게 온 부와 패권을 베네치아에게 넘겨줄리가 없고,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한 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를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았던 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이 있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여전히 매우 강했고, 갤리선이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다만 베네치아가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과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동지중해 무역도 네덜란드라는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채산성이 떨어지며 막을 내렸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영토면에서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하면서 레판토에서 오스만의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고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식량 확보 문제가 닥치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 왕국과의 사이도 틀어지는 것이 당연지사였지만 막상 당해보니 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갱신했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베네치아 대사는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앞서 말한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다는 비야냥까지 들었다.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굴욕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당연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잉글랜드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던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후 베네치아는 서서히 예전의 부와 힘을 잃었다.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만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격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치열하게 항쟁했다. 이때 베네치아측 사상자는 3 ~ 6만, 오스만측 사상자는 무려 12 ~ 24만에 달했다. 하지만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 (1619년 ~ 1694년)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으로 할양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자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자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모로시니는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자 복귀, 대튀르크 전쟁에서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으며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다.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모레아와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다.

 

그 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었지만 본토 속령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고,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결정타는 당시 불었던 태풍으로 오스만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퇴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후, 극강의 방어력을 보여준 코르푸 섬의 요새는 낙뢰가 화약고 위로 떨어져 대파되었으나 섬 자체는 계속 베네치아가 보유했다.

 

18세기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전기를 보면 비발디가 활약하던 당시의 베네치아는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17세기 이후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고아가 급증했고, 천주교 사제 시절 비발디의 주 업무가 이런 고아들을 돌보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멸망 후의 베네치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제가 된 루도비코 마닌은 오스트리아를 따라 대불동맹에 가담했다. 그러자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결국 베네치아의 이탈리아반도 쪽 영토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자, 마닌과 베네치아 정부가 항복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에 입성할 때,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 (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하지만 개인적 감상과는 별개로 베네치아에 대한 처분은 가혹했다.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강 서쪽의 신성 로마 제국 영토를 얻고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과 리구레 공화국을 세우는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 단,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중 브레시아는 치살피나 공화국에,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에게 할양되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멸망할 당시였던 1800년경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으로 과거보다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구였다.

 

이후 1805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박살내고 체결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다시 베네치아를 넘겨받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시켰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며 1848년에 다니엘레 마닌이 1848년 혁명을 기회 삼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마닌은 사후 베네치아 시에 동상이 세워졌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편에 가담했던 신생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양되었다.

 

 

 

 

멸망 후의 베네치아 해군

 

멸망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전성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서, 전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함선이라곤 갤리선 7척을 포함한 11척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이 압류한 함선이라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프리깃 2척이 전부였다. 이 프리깃 2척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으로 탈출할 때 사용한 선박이기도 하다.

 

남은 해군 인프라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고스란히 흡수하여 황제군 해군을 만드는 데 써먹었다. 황제군 해군은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되어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은 이름만 오스트리아 해군이었을 뿐, 절대 다수가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함선들과 베네치아인 장교, 베네치아인 선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링 제국을 주도한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헝가리 왕국 둘다 본래는 내륙국이었기 때문에8 그전까지 해군력은 미약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9

 

반면 오스트리아 해군과 경쟁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과거 베네치아와 경쟁하던 제노바 공화국 해군을 기반으로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815년 사르데냐 왕국(1713년까지는 사보이아 공국)이 빈 회의에서 구 제노바 공화국 영토인 리구리아를 집어먹고는 그 인프라로 피에몬테 해군10을 세웠고, 이탈리아 통일 때 양시칠리아 왕국 해군까지 흡수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창설되었다. 결국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라이벌 관계가 오스트리아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경쟁 관계로 계승된 셈이다.

 

제국 해군에 짙게 남았던 베네치아의 유산은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서 잠재적 위험요소인 이탈리아계에 대한 숙군과 독일화의 바람이 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했고, 1866년 이탈리아 왕국이 1859년에 할양받지 못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잔여 지역이었던 베네토 지역을 탈환할 때 같이 이탈리아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해군 내에는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와 달마티아 왕국 출신 이탈리아계 장병들이 상당히 많았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리사 해전 당시에도 제국 해군은 베네토어로 명령을 내리고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치 체제 및 조직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15~18세기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 조직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유력 인사들 간의 집단지도체제인 과두 공화정, 귀족 공화정이었다. 몇몇 가문들이 시민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뭉쳐 사실상 지들끼리 해먹는 시스템이었지만, 그들끼리도 정치적 파벌이 존재했기에 오늘날로 굳이 비유하자면 당내 민주주의 비슷한 체계는 돌아가던 시스템인 셈이었다. 중세판 민주집중제?

 

명색이 '공화국' 이라는 간판을 건 이상11, 베네치아는 이념적으로는 도시를 시민들의 공공재산으로 여겼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현실은 소수의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적 요소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념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 (최소한 당시의 기준으로는 '많은') 정부와 주권에 대한 참여를 지향하는 체제이긴 했다.

 

대공의회(Mazor Consegio)의 회원들이 투표를 통해 국가원수인 베네치아 도제를 선출했으며, 일단 선출된 도제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가의 최고 권력은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10인 위원회(Consejo de i Diexe)에 있었으며, 도제도 10인 위원회 내에서는 다른 위원들과 동등하게 단 1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제55대 도제인 마리노 팔리에로는 1355년 4월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10인 위원회에게 체포되어 도제 직을 박탈당하고 사형당했다. 이러한 정치형태로 인해 피렌체 공화국처럼 특정 가문이 사실상 도시 권력을 장악하는 유사 공화국이 출현했을 때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정을 유지했다.

 

시뇨리아(Serenissima Signoria) 역시 국가 권력의 중추를 담당했다. 오죽했으면 도제의 장례식날에서조차 공화국 시민들이 상복도 입지 않고 도제는 죽었지만 시뇨리아는 살아있다며 노래할 정도였다. 이 시뇨리아는 10인 위원회와는 별개로,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40인 위원회의 지도자 3인으로 구성되어 대평의회에서 10인 위원회의 위원 10명과 함께 총 20개의 권좌에 도제를 중심으로 앉아 대평의회를 주도했다.

 

베네치아 도제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8세기 ~ 9세기까지 베네치아는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위성 국가였으나, 9세기 이후 아랍과 노르만의 침입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동로마 거점들이 무너지자 베네치아는 명목상의 봉신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위는 베네치아가 서유럽 세력, 특히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 등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지키는 적당한 명분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상업을 통해 이룬 재력과 군사력 및 서유럽 최고의 외교력으로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 이외에도 공화국의 전성기 시절에는 도제가 사실상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세워진 명목 상의 동군연합 왕국인 칸디아 왕국의 국왕을 겸직했고, 역대 도제들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크레타를 영구히 상실하게 된 17세기 중엽까지 칸디아 국왕을 칭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 조직에는 위의 대공의회와 10인 위원회 및 시뇨리아 외에도 다양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행정조직들이 있었다. 여타 중세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조직들 또한 중세 중기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신설되기 시작했다.

 

 

영토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는 3가지로 구분된다.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커서 영토를 모두 합산하면 중세의 유럽 중간급 국가 수준의 영토를 자랑했던 베네치아 공화국 답게 도시국가의 특징과 국민국가의 특징이 섞인 것이 특징이다.

 

 

Dogado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 베네치아의 주요 지역과 석호 및 늪지대와 포강과 이손초강의 하구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예시

 

베네치아 정부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베네치아의 중심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은 포데스타(podestà)라고 불리는 총독과 비슷한 고위 직책을 가진 사람이 보통 16개월 정도의 임기를 가지고 부임해서 통치한다.

 

 

Stato da Mar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양 식민지.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베네치아령 알바니아, 이오니아 제도, 펠로폰네소스 반도, 크레타 섬, 키프로스 등을 포함하는 해양 거점이다. 예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아드리아해를 석권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동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쥘 때까지 항로와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로 점령한 지역이며 통치 방식은 다양했으나 보통은 베네치아 본토에서 파견된 총독 역할을 하는 고위 관료가 현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오스만 제국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빼앗기다가 베네치아 본토와 가까운 일부는 Domini di Terraferma 에 편입된다. 그래도 아드리아해 입구 근방의 작은 섬등을 비롯하여 예전의 동부 지중해 해양강국의 파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약간의 영토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시까지 잔존하였다.

 

 

Domini di Terraferma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탈리아반도 방면 영토. 주로 베네치아 주변의 베네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예시

 

보통 본토 속령이라는 뭔가 모순된 명칭으로 불린다. 베네치아와 베네토는 원래 같은 지방이었으며 중세 초기의 혼란 때문에 분리된 것에 가까워서 인종이나 언어가 동일하며 풍습도 비슷하므로 식민지라고 보기에는 곤란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본토는 Dogado만 해당되므로 속령이 맞기 때문에 (이탈리아)본토의 (베네치아)속령이라는 말을 줄여서 본토 속령이라고 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되는 등 혼란스런 중세 초기가 지나간 이후 베네치아 본토의 배후를 지키는 목적과 본토를 부양할 목적으로 주변 영토가 필요해서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 본토 속령의 본격적인 시발점이었다. 실제로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기간중에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치 방식은 베네치아의 직할 통치와 현지에 잔존한 원래 통치 조직의 결합이며 베네치아 정부의 명령을 따른다는 전제 아래서 현지의 통치 조직중 일부가 제한된 지방자치 방식으로 운영되며 현지의 관습법도 일부는 통용된다.

 

1289년부터 시작된 본토 속령은 1509년에 최대 영토를 기록하였으며 이탈리아 북동부의 대부분과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인구도 약 1,800,000명을 기록하여 당시 베네치아 본토의 인구였던 약 150,000명의 12배를 넘어갔으며 무역로와 제해권을 상실하기 시작한 베네치아 공화국 후반기의 중요한 경제 거점으로 자리잡는다.

 

이탈리아 반도의 싸움에 휘말려서 일부 잃기도 하고 Stato da Mar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베네토 지역 대부분은 멸망할 때까지 베네치아령이었다.

 

 

 

베네치아인

 

베네치아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이벌이었던 제노바 공화국이 쇠락하면서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에 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도시국가라는 특성과 결합하면서 도시국가 치고는 매우 넓은 영토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본토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개국 초기에 편입한 달마티아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리고 달마티아인을 차별하지 않은 이유도 개국 초기에 자다르를 비롯한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일찍 편입한데다 본토 속령인 베네토 주와 인접한 관계로 달마티아인들이 봉기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본토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달마티아에서 징발할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을 위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도 있었는데,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베네치아 본토인들이 자비롭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인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키프로스인이 몰래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에게 찾아가 키프로스를 정복해 달라 요청했고,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군을 환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키프로스만의 문제는 아니라서 Stato da Mar를 구성하는 현지 주민들은 크레타 섬이나 모레아 지역 같은 중요 지역만 따져본다고 해도 사실상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었다13. 베네치아 공화국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활용은 했지만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며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렸다.

 

이러한 차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베네치아 본토인 섬 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덕분에 본토 속령의 면적이 넓어지고 인구도 베네치아 본토의 10배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본토 속령의 인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심지어 본토 속령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후기에 가서는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와 속령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본토의 도시내에서도 차별이 심했는데, 도시 거주자중 실제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10%도 안되었고, 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였다. 그 위에는 주변 지역이나 외국에서 이주해온 상공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독일계 이민자들은 주로 베네치아의 모직 작업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 위에는 관료로 선출될 수 있는 소수의 시민권자들이 존재했다. 계급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베네치아의 핵심 가문들이 모여 만든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가 자리했으며, 이 대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일부 가문에 제한돼 상속되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인 소수였다. 악명높은 유대인 게토도 베네치아가 원조였다.

 

종합하자면 베네치아인들의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이점이 존재했으나 자부심에 따른 심각한 차별조치는 충분히 본토의 주민으로 융합될 수 있었던 본토 속령의 주민들까지 따로 놀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여 국민국가로 발전할 수준의 영토와 인구를 보유했지만 도시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14과 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가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를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 합니다."라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온라인 투표라서 실제 여론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이자 로마 제국 빠순이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고대 로마 제국 다음으로 편애하는 나라로,《바다의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공화국의 통사를 쓴 적도 있다. 또한 다른 중세 지중해 관련 책에서도 베네치아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비중이 상당히 높으며, 베네치아에 맞섰던 제노바 공화국이나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은 밑도 끝도 없이 까내려져 있다. 특히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도 아닌 주제에, 로마 제국 행세를 한다'는 식으로 까내리는데, 비잔티움 제국의 원래 이름이 로마 제국이고 익히 알려진 이름은 19세기에 고대 로마와의 구분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생각 이상으로 그녀의 역사 지식이 일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로마가 아니라는 근거라도 나름대로 갖추었다면 모를까 무지와 편견 외에는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읽다 보면 기가 차는 정도가 아니라 웃음도 안 나올 지경.

진지하게 베네치아사를 읽고 싶다면 존스홉킨스 대학의 F. C. Lane 교수가 쓴 《Venice: A Maritime Republic》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내용도 한 권에 베네치아사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흠이라면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과 페이퍼백판은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연표

 

425년

베네치아 건설

697년

건국 (베네치아 도제 선출)

742년

말라모코 천도

810년

프랑크 왕국 vs 동로마 제국

828년

성 마르코 유해 밀반입

887년

나렌테20에 패배, 아드리아 해 통행료 납부

996년

연공 납부 중단

1000년

나렌테 격파, 아드리아해 장악

1082년

알렉시오스 1세의 <금인칙서>, 무역특권

1099년

산 마르코 대성당 축성

1104년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베네치아의 무기고) 건설

1110년

십자군 전쟁 참전

1117년

헝가리 왕국에게 달마티아 상실

1171년

마누일 1세의 베네치아 상인 추방, 전쟁

11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인 학살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 자라 함락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11년

크레타 획득

1256년 ~ 1270년

1차 제노바 전쟁 (승리)

1271년

마르코 폴로의 여행 (~ 1295년)

1284년

두카트 금화 주조 시작, 2차 제노바 전쟁 (~ 1299년, 무승부)

1298년

쿠르촐라 해전

1310년

10인 위원회 발족

1348년

흑사병

1350년 ~ 1355년

3차 제노바 전쟁

1377년 ~ 1381년

4차 제노바 전쟁

1380년

키오자 해전

1386년

코르푸 획득

1405년

베로나, 비첸차, 파두아 획득

1409년

달마티아 획득

1420년

아퀼레이아, 두라초 획득

1426년

브레시아 획득

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

1454년

로디 평화조약

1463년 ~ 1479년

1차 튀르크 전쟁

1470년

네그로폰테(에우보이아) 상실

1489년

키프로스 획득

1495년

브린디시, 오트란토 등 아풀리아 해안 획득

1499년

크레모나 획득, 2차 튀르크 전쟁 (~ 1503년)

1509년

아그나델로 전투

1514년

리알토 대화재

1534년

프레베자 해전

1537년 ~ 1540년

3차 튀르크 전쟁

1569년

5개 은행 파산, 무기고 화재

1570년 ~ 1573년

4차 튀르크 전쟁

1571년

키프로스 상실, 레판토 해전

1575년 ~ 1577년

역병

1591년

리알토 다리 완공

1605년

성무중지령

1615년 ~ 1617년

우즈코키 해적과의 전쟁

1630년 ~ 1631년

역병

1645년 ~ 1669년

5차 튀르크 전쟁

1669년

크레타 상실

1684년 ~ 1699년

6차 튀르크 전쟁

1687년

모레아 재정복, 아테네 일시 점령

1714년 ~ 1718년

7차 튀르크 전쟁

1715년

모레아 상실

1785년 ~ 1786년

바르바리 해적 소탕전

1796년

비첸차 등 육지 영토 상실

1797년

나폴레옹의 진군, 멸망 (10/18)

 

 

 

 

 

 

Venezia

베네치아 / 베니스 / Città di Venezia

 

국가

이탈리아

베네토Regione

 

광역 인구

853,000명

인구

261,000명

 

면적

414.57km²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이 도시는 너무나 아름답다"

- 클로드 모네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의 중심 도시. 동시에 해당 도시를 수도로 삼던 과거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명이기도 했다.

 

흔히 베니스(Venice)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영어식 발음이다. 본토 이탈리아어 발음으로는 베네치아(Venezia)다. 프랑스어로는 브니즈(Venise), 독일어로는 페네디히(Venedig)라고 부른다. 일본어는 ヴェネツィア, ヴェネーツィア, ヴェネチア, ベネツィア, ベネチア 표기가 혼용된다. 가장 많이 쓰이는 표기는 ヴェネツィア. 인구는 2017년 기준 26만 명으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 중 대부분은 바다 위의 구도심이 아니라 육지 쪽의 신도시에 살고 있다. 신도시에 베네치아의 창구인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7이 있기도 하다. 현대 도시로서의 중심지는 신도시로 상당히 옮겨왔고, 구도심은 관광지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구도심 도시 전체에 수로가 뚫려 배를 타고 다닌다 해서 물의 도시로 유명하며, 현재도 베네치아 구도심 내부에는 자동차 도로가 하나도 없다. 구 도심 입구 쪽의 로마광장8에 시외버스와 차들이 돌아다니지만,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단 한 대의 차량도 볼 수 없다. 보행자도로도 좁은 다리나 계단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 오토바이조차 한 대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새벽에도 차량 소음 등은 전혀 없다. 거기에다가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벌금을 문다. 따라서 현재에도 구도심 내 이동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와 수상택시, 수상버스(바포레토) 뿐이다. 심지어 이들도 운행 시 발생하는 파도로 인한 도시 균열을 막기 위해 좁은 운하에서는 7km/h, 넓은 곳에서는 11km/h 정도로 속도 제한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무라노 섬이나 부라노 섬을 가지 않는 한 오히려 걷는 게 더 빠를 경우도 있다.

 

베네치아 신도시 지역의 도시철도인 베네치아 트램의 1호선의 남쪽 종점이 구도심의 베네치아 피아찰레 로마(Venezia Piazzale Roma)역이다. 또한 베네치아의 중앙역인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Venezia Santa Lucia)역도 구도심의 북쪽 끝에 있다. 인구 대부분이 신도시 지역에 사는 베네치아의 인구 구조를 볼 때 실질적인 중앙역은 신도시 지역에 있는 베네치아 메스트레(Venezia Mestre) 역으로 볼 수도 있다.

 

수많은 운하의 물길이 도로를 대신하는 특이한 도시구조 덕에 수상도시의 대명사가 되었고, 운하가 촘촘하게 들어찬 세계의 다른 도시들도 대부분 xx의 베네치아10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스웨덴의 스톡홀름은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며, 그 외에 독일의 함부르크와 밤베르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포르투갈의 아베이루, 중국의 쑤저우, 일본의 야나가와 등이 그러한 케이스이다. 대한민국의 김포시, 방글라데시도 아시아의 베네치아라고 한다. 도시보다는 규모가 작은 중국 저장성 퉁샹시에는 수향마을인 우전진이 있다.11 작은 운하가 있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리틀 베니스와 코츠월드의 영국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버튼 온 더 워터(Bourton-on-the-Water, 버턴 온 더 워터)가 있는데 둘 다 베네치아와 비교해서는 물의 수위가 낮은 편이다. 자매품으로는 xx의 암스테르담이 있다. 조금 생뚱맞지만 베네수엘라라는 국가 이름도 여기서 따 온 것이다. 베네수엘라 원주민들이 수상가옥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처음 본 유럽인 탐험가가 베네치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역사

 

본래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동북부에 거주하던 베네티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는 친절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베네티족의 준마는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그리스 본토나 식민도시에서도 말을 구하기 위해 베네티족에게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기원전 3세기경부터 고대 로마에게 동화되어 서서히 흡수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로마 시대에는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현재에도 이 지역에는 베네토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과거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에 속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점에는 '베네티아'가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해안가를 일컫는 말이 되어 도시 베네치아에 베네치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쨌든 고대부터 베네티아 해안가의 석호지대에는 어부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석호 거주민(incolae lacuna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본디 습지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미개발지에 가까웠으며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베네치아는 5세기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서 파두아,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이 석호의 섬들(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로 모였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으므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아예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 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육체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때 게르만족의 한 지파인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상임통치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럿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동로마 제국(주황)과 랑고바르드족(회색), 575년 이탈리아 반도

 

 

 

 

 

600년 동로마 제국령(분홍) 베네치아

 

 

본래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697-717)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는 동일인물이었고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파괴령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간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726-737)였다. 그는 레온 3세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군인과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로마 시대의 집정관Consul을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족은 결국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무너뜨렸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이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고,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싸움의 일환으로 지금껏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했고 아들 피핀을 시켜 배를 건조해 이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싸움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다툼으로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동로마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임시 휴전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동로마에 넘겨졌고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로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군은 텅 빈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시간이 끌리며 케팔리니아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불가르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과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1동맹을 채결했다.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811-827)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궁과 산마르코성당을 건설한다.

 

840년 베네치아

 

 

 

이후 꾸준히 난민들이 유입되고 주민 수가 늘어나는 동안 베네치아인들은 이 일대를 조금씩 간척해 나갔다. 이 간척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새만금이나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던 간척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바다를 막아 담수화시킨 후 매립하는 일반적인 간척과 달리 베네치아인들은 이 바다를 막을 수도 없었고 막아서도 안됐기 때문에 제방 없이 나무를 엮어 파도만 막을 수 있는 정도로 벽을 쌓고 거대한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 기초를 만들었다. 이 말뚝 위에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점차 도시가 성장하면서 갈수록 간척지도 넓어지고 더 튼튼하게 기초를 쌓게 되었다.

 

11세기~12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에 나섰고,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동 지중해에 영토를 가지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지역 패권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된다.

 

16세기는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 본격화되면서 지중해 항로의 중요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베네치아의 군사적·문화적 전성기는 오히려 이 시기였다. 로마가 사코 디 로마로 인해 쇠락하자 베네치아가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군사적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후 신대륙 무역으로 인해 동방 무역 독점이 깨지고 오스만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서서히 약해졌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떠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킨 후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을 했지만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베네치아를 합스부르크 제국에 넘겨주었다.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프랑스 제1제국에 빼앗기면서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인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1814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령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와 옛 밀라노 공국 영토였던 롬바르디아를 묶어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만들고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가 국왕을 겸하되 왕족을 총독을 보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배하였다. 1848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실각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이탈리아인 정치가 마닌을 대통령으로 하는 '산마르코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1년 만에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항복하여 도로 오스트리아 제국령이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벌어지면서 롬바르디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영토로 합병되었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언되었지만 베네토 지역과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프로이센 왕국과 손잡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고, 전쟁의 결과 베네토까지 합병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얼추 완수했다. 2015년 1월 1일을 기해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베네치아현에서 베네치아 광역시로 개편되었다.

 

2020년 7월 10일에 베네치아의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건설 중인 홍수 예방 시스템 '모세 프로젝트'가 첫 시험 가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코로나19 방역조치가 해체돼 관광객들이 많이 오면서 베네치아의 관광업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도시건설과 유지보수(베네치아 공학)

 

5세기경 베네치아 초기 정착민들은 토르첼로, 이에솔로, 말라모코 같은 섬에 살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습지대여서 땅이 진흙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8세기 후반, 랑고바르드족을 피하기 위한 피난민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정주인구가 늘어나자 도시 거주인구를 늘리기 위해 단단한 기초 위에 중층 건물을 세우고 도시면적 자체를 늘려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9세기 초반 프랑크군을 피해 말라모코를 포기한 베네치아인들은 이후 118개의 섬이 운하와 다리로 연결된 거대한 도시인 '베네치아'가 세워지게 될 리알토로 근거지를 옮겨 생활하기 시작하는데, 당시에는 그저 수 많은 작은 진흙 섬이 있던 곳이었다. 사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물 위로 살짝 드러난 퇴적층으로 바다 가운데 개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흔히들 베네치아의 건설을 간척이라고 표현하는데, 일반적인 간척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 베네치아인들은 석호의 개펄에 통나무를 촘촘히 깊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나무로 된 기단을 그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얹어 건물을 지었다.

 

 

 

이때 쓰인 나무가 바로 오리나무. 오리나무는 늪이나 습한곳에서 자라는 나무이다. 따라서 습기에 매우 강하며, 공기 중에 있을 때보다 물 속에서 더 단단해지는 특성이 있었으므로 당시 베네치아인들은 오리나무의 이런 특성을 활용하여 기반을 다진 것이다.

 

베네치아 건물의 건축과정이 자세히 알려진 것은 17세기에 이뤄진 연구에 의해서인데,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가 건설될 때는 1,106,657개의 나무 말뚝이 사용되었다. 나무 말뚝은 4미터 길이였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였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에서 나무를 실어왔다. 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기초를 만드는 데에만 무려 2년 2개월이 걸렸다.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이 육중한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말뚝 110만개가 쓰였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돌이나 시멘트 등에 비해 내구성이 약한 건축자재로 여겨진다. 잘 부러지고, 뒤틀리고, 부식된다. 하지만 개펄 속에 나무를 박아 넣으면서 공기와의 접촉이 없게 되면 곰팡이나 벌레가 끼지 않아 나무가 썩지 않는다. 초기 습지였던 한양(지금의 서울 지역)도 조선 초기에 같은 방식으로 나무를 박아 기초를 다져가며 도시를 건설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실 물이다. 사방이 마시면 큰일나는 바닷물인 데다 땅은 진흙이어서 지하수가 나오지도 않는다. 이에 베네치아인들은 빗물을 모아 우물을 만들게 된다. 아래 사진의 광장 지하 단면도에 구조가 나와 있다. 광장에는 하얀 돌로 빗물공(孔)이 있는 곳이 표시되어 있는데, 빗물은 이곳에서 경사진 바닥을 따라 모여 바닥으로 흘러 들어간다. 광장 지하에는 거꾸로 된 돔 모양으로 돌을 깔고 그 속을 자갈과 굵은 모래로 채워 빗물이 여과되어 지하에 물이 모이게 한다. 물론 과거에나 이랬다는 것이고, 산업혁명 이후에는 산성비로 인한 빗물 오염 문제 때문에, 현대에서는 그냥 정수 탱크를 이용하거나 섬 외부로부터 상수도를 들여온다.

현대에 필요한 전기, 수도, 통신, 가스 등의 도시 인프라는 물 속에 지을 수는 없기 때문에 길 바로 아래 얕은 지하에 건설하여 묻었다.

 

 

 

베네치아 운하에 면한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갈수록 약해진다. 조차에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운하에 면한 벽돌이 점점 침식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벽돌로 쌓은 벽 안의 진흙도 바닷물을 먹어 함께 쓸려 나가기도 한다. 현대에는 모터보트가 강한 물살을 일으켜 침식이 더욱 가속화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건물의 기초가 점점 약해져 위험한 순간이 닥칠 수도 있다. 또한 유속이 느린 운하에 진흙이 계속 퇴적되어 배가 다닐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를 유지보수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들이 활용된다. 우선 운하의 일정 구간을 나무로 된 임시 제방으로 막아 물을 뺀 후 운하에 쌓인 퇴적층을 준설하고, 건물의 기초를 강화시키기 위해 벽 속으로 시멘트를 주입시켜 굳히거나 오래된 벽돌을 바꾸기도 한다.

오늘날 보수공사하는 모습

 

 

 

 

곤돌라의 도시

 

곤돌라에 대해 설명하자면,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교통수단 중 하나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기능은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나 수상택시에게 내 주었다. 21세기에는 일정 구간을 순회하는 관광 상품일 뿐이다.

 

그러나 곤돌라가 그저 전통 유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곤돌라 뱃사공은 베네치아에서 최고의 인기 직업 중 하나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힘이 많이 필요하고 역사와 지형만 외우면 아무나 할 수 있는 3D 업종 같지만, 실제로는 관련 학교를 수료하고 적어도 4개 국어를 할 줄 알아야 하며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 주소를 둔 사람만이 가능한 조건에 굉장히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야 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런 만큼 상당한 고소득 직종에 속하는데 실제로 몇 년만 일하면 그동안 교육받기 위해 쓴 비용과 곤돌라 비용까지 수월하게 벌 수 있고 오히려 시 외곽의 고급 별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게 된다. 때문에 곤돌라 뱃사공이 되기 위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베네치아에서 아버지가 곤돌라 뱃사공이면 그의 아들이 특별히 꿈이나 이견이 없는 이상 다음 곤돌라 뱃사공으로 대를 이어 가는 게 일반적이다. 곤수저 아버지의 입장에선 곤돌라 뱃사공이라는 가업과 꿈의 일자리를 자식에게 쉽게 내어주고, 아들로서도 미래 걱정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비싼 곤돌라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곤돌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1대당 웬만한 고급 자동차 가격을 훌쩍 넘는다. 게다가 곤돌라 제조 장인들은 총 17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한사람이 완전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곤돌라 용골을 제작하는 장인이 있고 곤돌라 뱃머리를 만드는 장인이 있는 식으로 분업화 되어 있다.

 

현재 관광용으로만 쓰이는 곤돌라의 개수는 200척에서 300척 정도에 불과하지만 교통수단이 곤돌라밖에 없었던 전근대에는 만여척이 훌쩍 넘었다. 그 중 상당수가 불법으로 운영되는 곤돌라이고 그 색상 또한 다채로워서 문제가 생기자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곤돌라 뱃사공들의 반발로 공화국 시절 원로원에선 합법적으로 인정한 곤돌라는 무조건 검은색으로 칠할 것을 명령해, 다른 색깔로 칠해진 곤돌라는 불법으로 무조건 처벌했다. 게다가 곤돌라의 칸막이를 없앴는데, 그 이유는 칸막이가 쳐진 곤돌라에서 귀족남녀들이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 현재도 모든 곤돌라는 검은색이고, 칸막이가 없다.

 

전통적으로 곤돌라를 끄는 사람은 남성이었다. 배를 끌기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있고,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주도해온 이유도 있다. 이것에 대해 부당함을 느낀 한 여성이 소송을 걸었는데 승소하여 유일한 여성 곤돌리에의 타이틀을 얻었다. 딱 1척뿐인 여성 뱃사공(Giorgia Boscolo)이 다루는 곤돌라는 예약 없이는 탈 수 없을 정도로 인기다. 이후 현역 뱃사공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2호 여성 뱃사공(Alexandra Hai)이 되었다.

 

과거의 곤돌라 비용은 뱃사공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으나, 현재는 곤돌라 협회에서 지정한 요금을 받는다. 가격은 20분 당 80/10022유로. 그리고 곤돌라 뱃사공의 옷 색깔도 협회에서 지정했다. 혼자 타면 가격 부담이 꽤 되는 편이라 관광객끼리 모여 갹출하여 타는 광경도 흔하다.

 

 

 

 

베네치아 시민

 

관광도시라서 관광객들을 자주 반기는 사람도 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가게 주인이나 인포메이션에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잘 영어로 답해 준다.

 

하지만,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해 관광객 등쌀과 높은 물가, 거주의 불편 때문에 베네치아 구시가지를 떠나는 시민들이 계속 늘고 있기도 하다. 시내로의 화물운송이 쉽지 않으므로 물가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고, 육로로 수레를 끌고 과일 등을 운반할 경우 다리의 계단을 계속해서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과일들이 여기저기 멍들기 일쑤다. 게다가 바다 위의 도시라 습도가 높아 빨래가 잘 마르지 않고 늘 소금기 가득한 공기 때문에 부식도 빠른 편이다.

 

구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어 사소한 편의나 불편 해소를 위한 인테리어나 수리를 할 경우에도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탈리아 특유의 느긋한 문화와 결합해 최소 6개월은 걸려야 허락이 떨어진다. 때문에 구시가지의 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있는데 2016년 기준으로 55,000명 수준으로 1980년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친다. 다만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석호 위에 있는 구시가지의 인구로, 빠져나간 인구는 대부분 메스트레와 같은 베네치아시에 포함되어 있는 신시가지에 정착하기 때문에 도시 자체의 인구는 큰 감소폭을 보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베네치아 시에서는 이 미친듯한 속도의 구시가지에서의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석호 위에서의 호텔 추가 건설을 금지했다.

 

구시가지가 워낙 작고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정원을 보기도, 갖기도 힘들다. 정원이 있는 집은 정말로 부잣집. 현지인들은 정원을 가지는 게 소원일 정도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 도시의 노후화 문제로 매년 몇 cm씩 도시가 침수되고 있어서 007 카지노 로얄에 나온 것처럼 가라앉지 말라고 1층에 커다란 부표를 달아놓은 집들도 있다. 홍수 피해도 심각해서 폭우라도 오는 날에는 해수면이 급속히 상승해서 성 마르코 성당이고 뭐고 다 물에 잠긴다. 1993~2002년 동안 50차례나 침수를 겪었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이른바 '모세 프로젝트'를 계획, 준공하고 있다.

 

2019년 11월 15일에도 해수면 상승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침수되었다. 

 

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있지만 갖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구시가지에 살고 있는 베네치아 시민들의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한 편이다. 옛날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화와 오스만 제국의 동지중해 지배에 맞서 기독교의 방패라 활동했던 과거를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 공화국 시절부터 베네치아인들은 특유의 나라 사랑으로 여러 일화를 만들어낸 바 있다. 당시에 20세기 같이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경우다. 다만 이것은 일종의 미운 정이 박힌 나이 든 세대들의 얘기고 젊은 세대는 구시가지에서의 생활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토마스 만 같은 근대 소설가들의 책에서는 베네치아 구시가지에 사는 평범한 어부 같은 사람이 나오지만 최근에는 집값이 뛰어올라24 그런 사람들은 내륙에 있는 신시가지로 나가고, 부유층이 많이 거주한다. 특히 대운하 주변에 깔려있는 과거 거상들이 거주했던 저택들은 멋진 전경과 운치있는 분위기가 겹쳐져 가격이 굉장히 비싸다. 이런 부유층까지는 아니더라도 베네치아 구시가지에 집을 한 채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꽤나 안정적인 중상류층이라는 것이다.

 

 

 

오버투어리즘

 

유럽에서 바르셀로나와 함께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는 대표적인 도시다. 베네치아 인구는 갈수록 줄어 구시가지 인구는 약 4만 9천 명, 전체 인구는 26만 명 정도인 반면 연간 관광객 수가 무려 3천만 명에 달한다.

 

관광객들로 인해 소음 피해, 물가 증가, 사유지 침입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다 보니 주거지구에는 검문소까지 설치해서 관광객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해 분노한 시민들이 시장을 끌어내릴 뻔한 적도 있었다. 1989년 영국 출신의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가 베네치아에서 공연을 벌였는데, 이 당시 수많은 시민들과 문화재청 관계자, 종교인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고출력 사운드로 인해 문화유산들이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해 공연 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토니오 카셀라티(Antonio Casellati) 시장이 핑크 플로이드의 베네치아 공연을 허가하였고, 그 결과 인구가 5만 명이었던 베네치아에 20만 명의 팬들이 몰렸고, 해당 공연은 위성 중계로 1억 명이 시청하였다. 당연히 베네치아 전체 시민 인구보다 4배나 더 많았던 이 팬들을 감당하지 못해 도시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어 치안이 마비되고 길거리는 쓰레기로 넘쳐났다. 분노한 시민들이 시장 사퇴 시위를 벌였고, 시장은 결국 핑크 플로이드 공연을 주최한 것은 실수였다고 시민들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6월 3일 베네치아에서 대형 크루즈선이 유람선을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나 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베네치아에서는 크루즈 반대 시위(NO GRANDI NAVI)가 일어나기도 했다. 크루즈선이 사고를 야기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크루즈 여행객들은 돈도 별로 쓰지 않고 떠나기에 경제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유행으로 관광객이 대폭 줄어들었고, 2021년 3월 31일부터 대형 크루즈선의 석호 진입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백신 접종에 속도가 붙으면서 크루즈 운행이 재개되고, 마르게라 산업 항의 인프라 정비가 마무리되지 않아 달리 정박할 곳이 없어지자 또다시 크루즈선이 석호로 진입하게 되었고, 또다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2021년 7월 13일에 이탈리아 정부는 8월 1일부터 대형 크루즈선이 베네치아 석호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행정명령을 다시금 승인했다. 

 

 

 

도시 입장료 도입

 

베네치아 세계 최초 '도시 입장료'…'디즈니랜드냐' 조롱도

베네치아, 당일치기 관광객에 ‘입장료 5유로’ 부과

 

오버투어리즘에 칼 빼든 베네치아, 세계 최초로 ‘도시 입장료’ 걷는다

2024년 4월 25일부터 시범적으로 4월~7월사이 이탈리아의 공휴일과 주말을 중심으로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관광객 중 이곳 숙박시설에서 1박 이상을 머무르지 않는 사람은 도시 입장료 1인당 5유로(약 7천원)를 부과한다. 1박 이상 머무는 관광객에게는 무료 QR코드가 발급된다. 이는 한산한 평일에 관광을 유도해 인파 분산을 도모한 것이다.

 

베네치아 태생 시민25과 업무 출장·학교·의료 등 사유로 방문한 사람, 14세 미만 청소년과 장애인도 입장료 대상에서 제외된다.

 

산타루치아역 등 주요 길목에 검표원을 배치하여 관광객에 대해 무작위로 검표를 진행하며 입장료 미납부 적발 시 50~300유로(약 7만~44만원) 수준의 벌금이 부과된다. 다만 겨울철 비수기에는 입장료를 부과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뉴스 단체 안사(ANSA)는 베네치아에서 영화관이나 놀이공원처럼 입장료를 부과한다는 점에서 베네치아가 '디즈니랜드'가 됐다는 조롱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관광

 

베네치아는 다른 곳과는 달리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유상판매하며(3유로), 지도마저도 저작권 대상이다. 지도 없이는 헤매기 십상이므로 미리 유의해 두자. 거리나 광장 용어에도 차이가 있으니 더더욱 참고.

수상 이동: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베네치아는 그 특수성 때문에 일반적인 교통수단이 다닐 수 없어 주로 대운하를 통해 이동하며, 아래와 같은 종류가 있다. 위성사진 및 일반 지도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 육지인 베네치아 공항 역시 운하가 파여 있어 공항과 베네치아 시내를 오가는 수상 이동도 가능하다.

바포레토: 수상버스, 구 시가지 베네치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교통수단. 약간 큰 어선 크기만한 배가 평균 10~20분 간격으로 왔다갔다 한다. 운행은 Actv32와 사설 2가지로 나뉘므로 참고. 베네치아 본섬 자체는 아주 큰 편은 아니라 걸어서 이동해도 큰 문제는 없으나 바포레토를 타면서 운하구경하는 것도 나름 관광수단. 특히 야경 볼 때 편리하다.33 그래서 굳이 어딜 갈 일도 없으면서 대운하를 관통하여 한 바퀴 도는 4, 5번 바포레토에 타는 관광객들이 많다. 7번 바포레토는 산 마르코 광장 앞 선착장에서 무라노 섬까지 중간 정박 없이 최고 속력으로 운행한다.34

트라게토: 다리가 없는 수로구간을 건너갈 때 쓰이는 곤돌라스러운 교통수단. Actv통합권으로 이용이 가능하며, 기본요금은 50센트이다. 운행시간은 대략 1분 미만이라 그냥 곤돌라를 탄 기분만 느끼기 위한 용도 정도.

수상택시: 어지간하면 이용할 일이 없겠지만, 급할때 타는 이동수단. 모터보트로 움직인다. 곤돌라만큼은 아니지만 분위기도 없는 주제에 가격이 세니 참고.35 패키지 여행시 가이드가 잘아는 수상택시를 섭외하여 여러 관광구역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통행량이 많을 경우 간혹가다 기사끼리 말다툼도 하는데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곤돌라: 지금은 완전히 관광용이 된 교통수단. 좁은 수로쪽을 구경할 때 이용한다. 곤돌라를 타고 가며 보는 건물들의 풍경이 인기가 많다. 건물들이 물에 계속닿아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계단이 물에 잠겨있는 집도 있고 집 자체 입구가 띄워져있는 집도 있다. 물에 적응하기위해 만들어진 집의 디자인이 큰 관광자원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가격은 시간 대비 상당히 센 편이다. 20분에 80유로36인데 2019년 2월 기준으로 유로의 환율을 보면 80유로가 한국돈으로 10만 2천원이 조금 넘으니, 20분에 10만원이면 2분에 만원인 셈이다(...). 과거에는 흥정이 가능해서 대략적인 값만 추측할 수 있다고 했으나 현재는 20분에 80유로로 통일되었다. 2023년 60유로37 승선은 6명까지 가능하고 몇 명이 타든 가격은 같다. 이 곤돌리에들이 은근히 콧대가 높아서, 정해진 승선요금 외에도 팁으로 돈을 많이 줄 수록 당연히 서비스가 좋아진다. 뱃사공의 노래라도 듣고 싶다면 10~20유로 정도의 팁은 필수.

알리 라구나: 크기는 바포레토보다 조금 작고 모양은 평범하고 비싼 요트처럼 생겼다. 기능은 수상셔틀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루트라고 하면 주로 기차를 타고 본섬의 산타루치아역으로 가거나,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에서 알리 라구나를 타고 본섬으로 오는 경우이다. 공항에서 메스트레를 경유해 오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니 이용해보자 가격은 15유로이며 공항 출구에서 표를 판매한다. 공항을 나와서 15분 정도 걷다보면 굉장히 세련된 선착장이 나온다. 루트는 색상으로 구분 하며 3가지 루트가 있다. 보통 24시를 넘어서도 본섬으로 가는 배가 있으니 비행기 도착 시간이 늦더라도 부담없이 이용이 가능하다.

자가용: 자격증만 있다면 직접 모터보트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다. 일부 호텔에서 픽업시 이용하기도 한다. 신 시가지 지역인 메스트레와 로마 광장 근방, 리도 섬 내부에는 시내버스 노선도 있고, 멀쩡하게 차량이 다니고 있다.

대운하: 베네치아의 대운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부터 지어진 베네치아 부호층의 개인저택들이 대운하를 중점으로 양쪽으로 늘어서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 호텔로 쓰고 있다. 관람하고 싶다면 사전예약은 필수라고 들었다.

아쿠아 알타 (Acqua Alta): 높은 물이라는 뜻으로, 만조 시기가 되면 해수면이 베네치아 바닥을 뚫고 올라와(…) 침수되는 현상. 건기인 여름에는 일부가 살짝 물이 고이는 정도이나, 우기인 겨울엔 정강이까지 물이 차오르기도 해서 이때는 나무다리를 놓기도 한다. 침수되는 대표적인 장소로는 산 마르코 광장이 있는데, 광장 자체가 웅장하다 보니 야경을 찍으면 상당히 멋지게 나오므로 참고하자. 몸을 담그진 말자

산타 루치아 역: 베네치아 구 도심의 중앙역. 신도심의 중심역은 베네치아 메스트레 역이다. 두단식 승강장 형태의 역이다. 로마, 밀라노 등 이탈리아 국내선은 물론이고 제네바, 빈 등 유럽 각지에서 열차가 몰려온다. 바로 뒤쪽 다리 건너편에 버스정류장인 로마광장이 있다. 이곳 주변에 저렴한 음식점들이 종종 있으며, 중심부에서 이사 간 맥도날드도 근처에 있다. 버거킹은 역에 있지 않고 수상버스 터미널 옆의 다리를 건너 가야 있다. 이탈리아 국철 전광판에는 VENEZIA S.L. 로 표시된다.39 이 역에 딱 들어가면 있는 매표소는 이탈리아 국철 공식 매표소가 아닌 대행사다. 유레일 패스 좌석 예약할 때 추가 수수료를 떼 먹으니 자동판매기를 이용하도록 하자.

로마 광장: 베네치아의 차량 정류장 역할을 하는 곳. 행여나 베네치아의 메스트레 역을 이용해야 한다면 들르게 될 것이다. 로마 광장에서 메스트레 역까지는 약 20~25분이며, 배차간격은 10분이니 어지간하면 산타 루치아 역을 이용하자.

리알토 다리: 대운하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다리. 주변에 기념품 상가들이 많은데, 원래는 고기나 피혁제품들을 파는 상가들이 있었으며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공화국 시대에는 경제의 중심지였다. 오버워치의 전장 리알토는 여기서 따온거다.

산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최고로 유명한 광장. 대부분의 바포레토도 이곳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아침~낮에 서식하는 닭둘기들은 사람들과 친숙한 것으로 유명해 팔 위에 얹어 사진찍기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40 저녁~밤중에는 주변 카페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분위기에 취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성당에서 광장 안쪽을 바라봤을 때 왼편에 있는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41인데, 수백년 된 커피집인 만큼 이곳 커피값이 일반 카페의 5~6배나 되는 가격을 자랑한다.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실수로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기라도 하면 닭둘기들이 당신을 쫓아올 것이다! 그리고 닭둘기를 공격해서 쪼아먹는 갈매기도 볼 수 있다.

산 마르코 대성당: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설된 성당. 이슬람교도의 감시를 피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빼돌린 복음사가 마르코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성당 정면을 장식하는 청동 말 4기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한 전리품으로, 진품은 현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성당의 부속 건물인 종탑은 한때 베네치아 분리무장 단체가 점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산 마르코의 종탑: 12세기 말에 등대로 쓰기 위해 세운 탑이다. 중세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오늘날 보아도 종탑의 모습이 매력적이기만 하다. 종탑의 큰 윤곽은 평범하다. 사각기둥 위에 사각뿔 형태의 지붕이 있는데 매력적이고 묘한 신비감을 준다. 특히 산 마르코 광장의 빽빽한 하얀 기둥들과 함께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1609년, 갈릴레오는 배율이 9배인 망원경을 만들어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 종탑에 설치했는데, 당시의 공화국 원로들이 줄을 서서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 지금은 종탑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100m 높이의 전망대까지 단번에 올라가서 베네치아의 빨간 지붕들과 파란 바다를 한눈에 볼 수가 있고, 산 마르코 광장 바닥의 하얀 벽돌 장식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두칼레 궁전: 유럽 어디에도 비슷한 건축물을 볼 수 없는 독특한 보물이다. 베네치안 고딕의 진수라 불리는 핑크색의 이 우아한 건물은 밖에서 보면 단순한 큐빅 형태이다. 그 바탕 위에 레이스와 같은 화려한 꼭대기 장식들과 그 아래 신비롭고 아름다운 아치형 창들, 장식과 기둥들이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15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공국의 정치적 심장부 역할을 한 곳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크고 둥근 지붕의 바로크 양식 성당이다. 대운하 입구의 가장 돋보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베네치아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베네치아에 창궐했던 페스트가 사라진 것을 감사하기 위해 17세기에 건립된 성당으로, 대운하 옆에 줄지어 서 있는 건물들과 운하가 만들어 낸 풍경에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19세기 이전의 이탈리아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이다.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과 감옥 사이의 운하를 이어주는 근사한 다리가 있는데, 두칼레 궁전에서 형을 선고받은 죄인들이 다리를 건너 감옥에 가면서 다시는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신세 때문에 탄식했다 하여 ‘탄식의 다리’라고 불린다. 그 유명한 카사노바 역시 이 다리를 통해 투옥됐는데, 그는 이 감옥을 탈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어쨌거나 이 다리 밑으로 곤돌라가 지나가는 모습 또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베네치아 해군역사박물관: 산 마르코 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옛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 조선소이던 아르세날레 자리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동지중해를 한때 제패했던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의 역사와 그 후 이탈리아 왕국이 치른 이탈리아 독립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자료도 있다. 박물관 정문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적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테게토프급 전함 비리부스 우니티스 함과 테게토프 함의 닻이 전리품으로 전시되고 있으며 현대 이탈리아 해군의 퇴역 잠수함인 엔리코 단돌로 함이 전시되어 있다.

무라노 / 부라노 섬: 각각 유리공예(무라노, Murano)/레이스와 무지개색 집(부라노, Brano)으로 유명한 섬. 특히 무라노는 사비아라고 불리는 무라노 섬의 모래가 고품질의 유리를 만드는데 최적의 소재라는 걸 발견하게 되어,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비밀이 타국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강제로 유리공예 장인들을 집단거주하게 하여 유리공예가 발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수백년 전통의 유리 공방들이 성업중이고, 이 유리 공예가 발전해 안경, 렌즈, 현미경 등의 중요한 산업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섬이다. 의외로 멀어서 산 마르코 광장에서 무라노까지 가장 빠른 7번 바포레토로 25분, 부라노까지는 14번 바포레토로 65분 소요된다. 둘 다 배가 일찍 끊기는 노선이니 주의. 부라노는 2010년대 초 아이유의 곡 하루 끝의 영상42을 찍은 곳으로 유명하며, 베네치아보다 비교적 수질이 좋은 편이라 백조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리도 섬: 베네치아 본섬 남동쪽에 길게 늘어져 있는 섬으로, 근대부터 유럽의 여러 귀족들이 일광욕을 즐기던 해변 휴양지이다. 바닷물 수질이 유럽 해변중에서 가장 더러운 곳으로 손꼽힌다. 토마스 만이 이곳을 배경으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영하는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 일광욕하는 사람들이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바포레토로 영화제 가려면 리도 역이 아닌 리도 카지노 역에서 내리는 게 빠르니 참고. 제법 큰 섬이라 섬 내에는 시내버스가 운행하고 있다.

 

이 섬 옆에 포벨랴(Poveglia, 포베글리아)43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섬 전체가 유령도시다. 민간인 출입이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진입하려면 시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원래는 전염병 격리 병동, 이후에는 정신병원이 위치하던 곳인데 병원장이 환자들을 상대로 온갖 가혹행위와 전두엽 절제술을 자행했던 곳인지라 섬을 두고 흉악한 귀신이 출몰한다는 도시전설이 돌기도 했다. 출입금지된 가장 큰 원인은 해당 지역에 중세 흑사병 환자 유해가 16만명 이상 매장되어 있는 데다44 이마저도 아직 완벽하게 조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르첼로 섬: 오늘날의 베네치아 시 가운데에서도 주민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비잔티움 양식의 교회가 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나 베네치아 시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베네치아 구시가지 최남단(주테카 섬 제외)에 위치한 푼타 델라 도가나와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다. 도가나의 뜻이 '세관'. 처음에는 세관 창고로 쓰였다가 방치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부호 피노 회장의 재력과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의해 200만 유로를 들여 2009년 현대 예술 미술관으로 탈바꿈해, 베네치아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특히 도가나 미술관 동쪽 곶의 광경이 매우 아름답다는 평이 많은데, 거기에 영국 조각가 찰스 레이가 만든 '개구리를 든 소년'을 세워두어서 새로운 볼거리와 인증샷을 찍을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에 대해 말하자면, 1603년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창궐할 때 베네치아인들이 하느님에게 페스트를 물리쳐줄 것을 간절히 기도했고, 이윽고 페스트가 물러나자 베네치아의 도제(일종의 종신 통령)는 이를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해 성당을 세웠다 한다. 베네치아에서 몇 안되는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며 안에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가 그린 작품 등 볼거리가 많으니, 베네치아에 간다면 꼭 보도록 하자.

만약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을 통해 베네치아로 들어왔다면, 베네치아에만 너무 오래 있을 필요없이 근교의 파도바시에서 머무르며 느긋하게 구시가지를 산책하는 것도 괜찮다. 중세 베네치아인들이 많이 공부했던 파도바 대학을 중심으로 한 파도바 구시가지는 중세 도로의 회랑이 햇빛을 막아주는 구조로 되어 있어, 여름에 베네치아 구시가지의 하수구 냄새와 관광객 인파에 질린 사람들에게 힐링이 되어준다.갔다와보면 안다. 그리고 또 근교의 트레비소는 작은 베네치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구도심에 운하가 있어 베네치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대신 섬이 아니라 자동차로도 이동가능하다해수욕과 일광욕을 좋아하는 유럽인 관광객들의 경우 베네치아에서 버스로 리도 데 예솔로라는 해변 리조트 도시도 많이 들린다. 워터파크도 있어서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은 듯 하다. 리도 데 예솔로는 파도바, 비첸차, 베로나와 다르게 역사 유적이나 랜드마크가 별로 없어서 별로일 수가 있다.

 

 

여행 시 주의점

 

유명 여행지라면 의례적으로 그렇지만 정말 도둑이 많다. 근데, 다른 곳과는 비교가 안 되게 정말로 많다. 로마와 프라하 같은 곳과 더불어 유럽에서 손꼽히는 소매치기들의 소굴이다. 반 농담삼아 길가다가 보이는 조금 수상한 사람은 다 소매치기다. 수상하다 싶어서 지켜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 가방을 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켜보는 동안 내 뒤에 다른 도둑이 내 짐을 뒤져 가져간다.

 

특히나 주의할 점은 일단 베네치아가 좁은 동네라서 지나다니는 사람과 거리를 벌리기 힘들며, 관광지이므로 쇼윈도가 있는 상점이 꽤나 있는데 이 쇼윈도를 조금 보고 있으면 훔치기도 한다. 실제 팀을 이룬 2인조 도둑이, 한 명은 신문을 보는 척 펼쳐서 가리고 한 명은 훔치는 경우가 잦은 케이스.

 

위에서 말했듯 1인의 우발적인 생계형이라기보다도 다인의 계획적인 범죄가 많은 듯하다.

 

수상버스인 바포레토에서도 조심해야 하는데, 배 위라서 도망갈 곳도 없으므로 도둑이 많다. 물론 얘네가 강도는 아니라서 못 도망가는 걸 이용해서 달려드는 건 아니지만 경험 중에 4인조로 팀을 이뤄 한 명이 가리고 한 명이 훔치길래 알려줘야 하나 마나 보고 있는데 훔치는 사람이 다른데 어딘가 눈치를 보길래 자세히 보니 배의 앞과 뒤에 망보는 일행이 있는 경우까지 있었다.

 

지나가는 한국 관광객들과 말 한두 마디씩 해보면 지갑이나 핸드폰이 없어진 사람을 하루에 몇 팀은 보게 된다. 돈은 여행사 등에서 주는 복대 등에 넣어두고 지갑은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그자. 안주머니에 넣어뒀다고 안심하면 희한하게 그걸 또 가져간다.

 

수많은 관광객이 들고 다닌 바퀴 달린 캐리어의 소음공해에 시달리다가 2015년부터 바퀴달린 캐리어(wheelie suitcases)를 금지하고 500유로의 벌금을 물린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베네치아에서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가는 스파게티 한 접시 먹고 났더니 영수증에 50유로46 이상47이 찍히는 충격적인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으므로, 식사하러 식당 들어가기 전에 눈 앞에 보이는 식당 상호를 검색이라도 해 보고 들어갈지를 결정해야 한다. 다음은 그러한 식당들의 패턴이다.

 

1) 식당을 들어가서 메뉴를 고르려고 하면, 점원이 '다른 메뉴들에 비하여 싸지만 맛있다'면서 메뉴를 추천한다. 이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미끼로는 'seafood spaghetti'가 있다. 메뉴판을 대충 본다면 까르보나라와 같은 평범한 파스타도 10유로가 넘는데, 그 미끼 메뉴(예의 seafood spaghetti 등)은 고작 8유로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혹하게 된다. 더 막장인 경우는 메뉴판을 보여주고는 점원이 다짜고짜 이 메뉴를 추천한다고 하곤 제멋대로 그 메뉴로 주문을 넣어버리곤 메뉴판을 덮고 들어가 버린다.

 

2) 자의건 타의건 1에 의하여 해당 미끼 메뉴를 주문했을 시 분명히 1에서 메뉴를 소개할 때는 일행이서 먹기 충분할 정도의 양이라고 하지만,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 나오게 된다. 1인분이라는 스파게티에는 로브스터 한 마리가 통으로 들어가 있으며, 생선구이는 예상치 못한 대형 생선이 테이블에 올라오게 된다. 이것이 왜 문제이냐 하면, 점원이 추천한 그 미끼 메뉴는 100g 당으로 가격이 매겨지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즉, 점원이 8유로라고 이야기하면서 추천한 그 스파게티는 실제로는 100g당 8유로인 것으로, 덜컥 주문하고 나면 도무지 혼자서 다 먹지도 못할 분량의 스파게티를 1인분이라며 내 주고는 무게당 가격을 받는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100g당 8유로이니 5kg 로브스터의 경우 스파게티 1인분에 한화 50만원(400유로)에 가까운 아름다운 가격이 나오게 된다. 나중에 반박하려고 하면, 식당에서는 메뉴판 한 구석에 해당 메뉴는 무게당으로 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알만하게 적어 놓았단 것을 보여주면서, 고객에게 메뉴를 제대로 숙지하지 않고 주문했다는 책임을 물으며 계산서에 찍힌 그 바가지 금액을 다 내도록 강요할 것이다. 저런 미끼 메뉴만 안 시키면 그나마 괜찮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애초에 관광객 등쳐먹으려는 게 목적인 식당에서 요리 맛있게 할 리가 없다.

 

3) 계산서에 나오는 황당한 음식값도 음식값이지만, 거기다가 자리세와 터무니없는 명목의 세금을 동시에 물린다. 이탈리아 식당에서 자리세 받는 것은 정상이지만, 보통은 자리세만 받지 도시세(city tax)라는 식으로 세금을 별도로 물리진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 가게마다 1인당 정액으로 정해 놓은 자리세와는 달리, 음식값에 비례한 정률로 나온다는 것이다. 가령 1에서 바가지 메뉴로 100유로를 물었다면 이에 대한 도시세(라고 주장하는 것)은 12%로 12유로를 추가로 떼이게 되는 것. 상술한 400유로 짜리 스파게티를 먹었다면 그거 하나 먹고 한국 돈으로 52만원 정도의 가격을 내게 된다.48

 

그러나 여행 책자에 적힌 추천 식당들은 정상적이니 여행 책자를 챙기는 것이 정신 건강상 좋다. 베네치아에서 악명 높은 식당인 'Osteria da Luca'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일본인 학생 4명이 여기에서 먹었다가 1,100유로, 즉 한화로 150만원이라는 계산서를 받았다. 이들이 주문한 메뉴는 스테이크 3인분과 생선튀김, 와인 한병, 물이었다고. 분노한 학생들은 경찰에 신고했고 해당 가게는 2만 유로(한화 2550만원)의 벌금을 냈다. 벌금을 내긴 했다지만 영업 정지를 먹은건 아닌지, 아직도 멀쩡하게 영업하고 있고 현지 주민들과 가이드들 사이에서 절대 가지 말아야할 식당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구글 맵에서 검색해 보면 여길 들렀던 한국인들의 리뷰를 볼수 있는데, 5명이서 식사하고 397유로(한화 55만원)의 금액을 지불했다는 내용이 2019년에도 올라와 있다.

 

2019년에도 로마 시내에서 비슷한 사례가 뉴스로 보도되었다. 심지어 해당 식당은 뻔뻔하게 관광객에게 고소드립을 한다.

 

여름에 살인적인 더위로도 유명하다. 단, 남부 지역 같이 햇볕이 강한게 아니고 기온은 30도 초중반대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매우 습하다는 것이다. 정말 미친듯이 습하며 땀이 나다 못해 하루만에 옷에 소금기가 배인다. 본섬에서 물좀 사려하면 이게 또 엄청 비싸다. 구 시가지 들어가기 전에 신시가지에서 물을 사서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 기차역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있는지 편의점에 물을 아주 쌓아놓고 팔고있으며, 배낭여행족들은 아예 1.5리터들이 물통을 들고 다닌다.

 

 

 

운하와 환경 문제

 

물의 도시로 유명하며 운하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수질이 일본의 오다이바와 투톱을 달릴 정도로 최악이다. 쓰레기도 많이 보인다. 그나마 넓고 물흐름이 빠른 대운하 쪽은 낫지만 주택가 사이 작은 운하의 수질은 하수도 수준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수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운하가 하수도로 쓰인다. 16세기부터 사용한 gatolo라는 전통적인 하수관은 운하로 하수를 그대로 배출했고, 현재도 쓰이고 있다. 베네치아 시 전체로 보면 육지 쪽의 마르게라항(Porto Marghera)에 중앙 하수처리장을 1980년대 건설했으나 육지 쪽 신시가지의 하수를 처리하는 것이고 주데카(Giudecca), 산타마르타(Santa Marta), 무라노(Murano) 같은 일부 지역 신축 건물에 하수 처리 시설을 정비했으나 관광지로 유명한 베네치아 구 시가지 본섬은 현대적 하수 처리 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물론 완전히 방치한 것은 아니고, 수질정화를 위해 베네치아 내에 총 140개의 소규모 생화학처리시설과 6000개의 정화조를 보급했으나, 아직도 간단한 여과만 형식적으로 거친 후 그대로 배수하는 건물도 상당수이다. 게다가 구시가지가 세계유산이나 마찬가지라 현대적 하수처리 시설을 대규모로 건설하기도 어려워 해결책은 아득하다. 운하의 수질관리 위한 청소와 준설을 하지만, 사실상 1m 정도의 밀물과 썰물의 차에 따른 물갈이에 수질개선을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외해에 바로 접한 것이 아니라 석호로 둘러싸여있어 석호 내부로 갈수록 해수 순환이 느려서 수질이 더욱 안 좋다.

 

수질 문제로 기온이 올라가면 냄새가 더 심해지는 데다가 습기 문제까지 겹쳐 여름에는 상당히 고역이다. 모기가 번식하기 알맞은 조건은 덤. Venice smell로 유럽이나 북미에서 악명이 자자한 편이다. 작가 필립 클로델(Philippe Claudel)의 2014년 산문집 '향기'(Parfums)에는 하수 정화조에서 베네치아의 냄새를 맡았다(How many times, at the edge of my own Petit Canal, have I stopped by the waste watertanks and breathed in Venice.)는 표현이 있다. 물론 조수간만 차나 기온의 영향에 따라 냄새 정도가 달라서 악명에 비해 별로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는 경험담도 있다.

 

수질을 보면 별로 손발을 담그거나 수영하고 싶은 생각이 없겠지만 여행지의 낭만에 취해 관광객이 운하에 발을 담그는 모습이 보이거나 밀물 때인 아쿠아 알타 (Acqua Alta) 시기에 침수된 광장에서 수영을 하는 관광객도 있다.

 

 

이것을 보고 개방 하수(open sewer)에서 수영하는 짓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현지 주민들은 수영하는 관광객들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2017년 7월 24일에 외국인 청년들이 베네치아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결국 구속되었다.  2023년에는 3층에서 뛰어내려 운하에 다이빙한 주민의 영상도 논란이 되었다. 

 

미국 여행 사이트에서 안내하는 베네치아 여행 팁 중 하나가 여름에는 곤돌라 타지 말거나 아예 그냥 트라게토(traghetto) 타라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일시적이지만 수질이 좋아졌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베네치아시 당국은 곤돌라 등 보트 운행이 중단되면서 오염 물질이 운하 바닥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운하 수질 자체가 좋아진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다만 주민들의 이동 제한으로 증기선과 보트 운항이 평소보다 줄면서 대기의 질은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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