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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8세기~11세기, 북게르만계 노르드인,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

Jobs 9 2025. 3. 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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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455년) 로마를 약탈하는 게르만족

 

 

바이킹

 

793년~1066년

 

스칸디나비아반도, 브리튼 제도, 유럽 해안 일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동유럽, 러시아

 

고대 노르드어

 

룬 문자

 

고대 노르드 신화, 가톨릭(10세기 이후)

 

793년 린디스판 수도원 습격

795년 아일랜드 수도원 약탈

808년 카롤루스 대제의 데인 전쟁(~811년)

839년 스코틀랜드 포트리우 공략

849년 군도 왕국 건국

851년 애설울프의 아클레아 전투 승리

853년 올라프의 더블린 왕국 건국

860년 해스테인의 이탈리아 북부 루나 약탈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 공국 건국

864년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죽음

865년 이교도 대군세의 잉글랜드 침공

871년 애설레드 1세의 애쉬다운 전투 승리

874년 아이슬란드 정착

875년 할프단 라그나르손의 요르비크 왕국 건국

878년 알프레드 대왕의 에딩턴 전투 승리

882년 올레그의 키예프 루스 건국

884년 림버트의 노르디티 전투 승리

885년 외드의 파리 공성전 승리(~886년)

911년 흐롤프(롤로)의 루앙 백국 건국

954년 요르비크 왕국 최종 멸망

966년 리스본 공격

985년 그린란드 정착

988년 바실리오스 2세의 바랑인 친위대 창설

1000년 빈란드 발견

1014년 브리안 보루마의 클론타프 전투 승리

1028년 크누트 대왕의 북해 제국 확립

1030년 올라프 2세의 스티클스타드 전투 패배

1042년 북해 제국 붕괴

1066년 하랄 3세 하르드라다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패배

1079년 구드뢰드 크로반의 군도 왕국 정복

1164년 군도 왕국의 남북 분열

1171년 더블린 왕국의 최종 멸망

1266년 노르웨이의 군도 지배권 포기. 군도 왕국의 멸망

 

 

바이킹은 8세기~11세기 배를 타고 무역이나 약탈로 살아가던 북게르만계 노르드인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틀란트반도에 한정되어 살고 있었던 노르드인들은 8세기 말부터 바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발트해와 북해는 물론이고 지중해와 흑해 심지어 카스피해 등 바닷가라면 유럽 어디든지 배를 타고 나아갔으며, 브리튼 제도, 프랑스, 이베리아반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권과 유럽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전성기 시절에는 잉글랜드의 칠왕국들을 죄다 멸망시킬 뻔 했으며, 서프랑크 왕국의 수도 파리를 함락하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바이킹을 신의 진노라고 불렀으며 자연재해와 동일한 취급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이킹들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 더이상 치고 빠지는 전술이 통하지 않을 만큼 해안 방비가 강화되었고, 말을 타는 기사들의 등장으로 보병 위주의 바이킹들의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노르망디 공국처럼 아예 현지에 정착해 완벽히 동화되어버린 바이킹들이 되려 제 땅을 지키기 위해 다른 바이킹들을 쫓아내게 되면서 바이킹들은 더욱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결정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기독교화와 중앙집권화가 치명타를 입혔다. 같은 그리스도교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걸 금지한 교리 때문에 바이킹들이 가장 큰 이익을 봤던 노예무역이 더이상 불가능해졌으며, 스칸디나비아반도 내에도 왕국들이 세워지면서 자국민들이 함부로 타국을 약탈함을 엄격히 금지시킨 것이다. 결국 1066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계 바이킹 군대가 패배하면서 바이킹들은 더이상 타국을 침략할 여력을 잃어버렸고, 학계에선 이를 '바이킹 시대'의 종말로 본다.

 

야만스러운 해적으로서 바이킹의 인상이 깊게 남아서 '거대한 도끼를 들고 뿔투구를 쓴 잔인하고 마초적인 바바리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탁월한 항해사이자 탐험가, 상인이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편견과 달리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다. 자유민들은 매년 의회(alþingi, 알팅기)를 소집하여 법을 제정하거나 분쟁을 해결했다. 이러한 의회 문화는 영국에도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아이슬란드의 의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이기도 하다.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는 물론이고 캐나다 동부와 뉴펀들랜드까지 진출하여 빈란드라 이름붙이고 식민지인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를 건설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00년 일찍 북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업적이었다. 물론 원주민들과의 마찰과 기후의 변화로 결국 그린란드로 돌아가야 했으나 그 모험성과 발견은 분명 무시 못할 성취였다.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 외에도 키예프, 콘스탄티노폴리스, 심지어 저멀리 바그다드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유럽과 러시아로 진출했다. 이때 바이킹 류리크와 그 후계자들은 현대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루스 카간국을 세우기도 했다. 어찌보면 러시아의 기원에 바이킹이 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의외로 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민족이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집트 신화와 함께 세계 3대 신화로 꼽히고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그 비극성과 장엄함으로 전세계에 영감을 뿌렸다. 조금 더 현대로 오면 《반지의 제왕》의 작가 J. R. R. 톨킨은 북유럽 신화에서 상당 요소를 차용했고, 판타지물에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오크, 드워프, 엘프도 모두 북유럽에서 기원했다. 《마블 코믹스》의 작가 스탠 리는 토르라는, 대중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히어로를 만들어냈으며 바이킹들은 게임, 미디어, 영화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이 덕분에 북유럽과 바이킹들의 문화적 영향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원

 

'viking'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들이 존재한다. 한 가설은 라틴어로 마을을 의미하는 'vicus'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다른 가설은 개울, 입구, 작은 만(灣)을 의미하는 단어 'vik'에서 왔다는 가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노르웨이의 지명 'vikin'에서 따왔을 거라는 말도 있다. vikin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viking'이라고 불렀다는 설인데, 이미 vikin 지방의 사람들은 vikverir라고 따로 부르기에 별다른 설득력은 없다.

 

21세기 들어서 가장 주목받는 이론은 고대 노르드어 vika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 어근은 원래 '교대로 노를 젓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어근 weik나 wik에서 유래했다. 게르만조어 wikan이 '물러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바이킹들은 장거리 항해를 하면서 어마어마하게 노를 저으며 다녔고, 절대 다수는 근력이 더 강한 남자였다. 선원들은 2교대로 돌아가면서 노를 저었는데, 젓던 사람이 휴식을 취하던 사람에게 노를 넘겨줄 때 옆으로 피해서 거리를 두고 돌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vika'라는 어근이 사용되었고, 이게 확장되면서 'viking'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는 학설이다. 이 이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해적이나 약탈자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칸디나비아 선원들을 모두 일컫는 용어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잔인한 전사들을 일컫는 대명사가 된 것은 후대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서 그렇다.

 

이후 중근세 시절까지만 해도 '바이킹'이라고 하면 야만적이고 피에 미친 악귀들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단어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영웅주의가 득세하던 18세기,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재인식되기 시작하면서 바이킹의 이미지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바이킹에게 '고귀한 야만인' 혹은 '용맹한 전사'의 이미지를 부여했고 점차 현대적인 바이킹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 덕분에 '바이킹 건축', '바이킹 예술', '바이킹 문화', '바이킹 시대'처럼 바이킹이 붙은 단어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기도 했다.

 

 

역사

 

선사시대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워낙에 위도가 높고 추운 지방이라 사실상 북극이나 다를 바가 없어 인류의 활동은 오랫동안 중부 유럽의 사냥꾼들이 간간이 사냥오는 수준에 그쳤다. 영구적인 부락민들이 스칸디나비아에 완전히 정착한 때는 기원전 1만 2천 년 무렵이었고, 그마저도 빙하기가 기원전 1만 1700년쯤에 간신히 끝날 만큼 추운 날씨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농경 부족이 아니라 수렵채집 부족이었다.

 

그러나 빙하기가 확실히 물러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얼음벌판이 광대한 초원으로 변함에 따라 풀을 먹는 순록이 유입되었고, 자작나무와 일부 마가목만 있었던 동토에서 서서히 타이가 숲들이 자라나면서 기원전 1만 1400년 무렵 스칸디나비아 구석기 문화의 시작인 브롬 문화권이 생겨났다. 다만 스칸디나비아 일대의 기후가 아직 인류가 견딜 수 있는 한계선에 가까웠기 때문에 기후가 조금만 오락가락해도 수많은 문화권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기원전 1만 500년쯤에 기후 재냉각이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순록 유목에 의존하는 아렌스부르크 문화권이 일어났다. 약 천 년 후에 잠시 온난한 기후가 나타나자 아렌스부르크 문화는 스칸디나비아 북부까지 뻗어나갔다. 다만 기원전 9천 년부터는 다시 아한대 기후가 몰아닥치며 인류의 정착이 약간 늦춰졌다고 한다.

 

약 2천 년에 걸친 아한대 기후가 끝나고 기원전 7천 년 무렵에는 대서양 기후로 바뀌면서 훨씬 온난해졌다.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마글레모제 문화, 노르웨이와 스웨덴 서부 해안가의 포스나-헨스바카 문화 같은 중석기 시대 문화들이 번성했다. 아직도 겨울은 너무 매서웠기 때문에 겨울에는 덴마크 등 남부로 이동했다가 여름이 되면 그때서야 다시 위로 북상하는 철새 느낌의 이동 생활을 했다. 기원전 6천 년쯤에는 훨씬 기후가 따뜻하고 습해지며 바다표범, 순록, 무어, 사슴 등을 사냥해 먹고 살 수 있었고, 사람들은 광활한 활엽수림에서 채집을 하기도 했다.

 

사람이 살만한 땅이 되자 콩게모세 문화권이 등장했다. 주로 순록이나 사슴, 유럽들소 같은 거대 동물들을 사냥하며 먹고 살았고 얕은 바다에서 낚시를 하기도 했다. 콩게모세 문화권의 일부는 포스나-헨스바카 문화권과 합쳐지면서 리훌트 문화권을 형성하기도 했다. 기원전 6천 년대 말 경에는 해수면 상승과 기후 온난화의 영향으로 콩게모세 문화권이 에르테볼레 문화권으로 대체되었다. 에르테볼레 문화권은 남쪽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농경을 처음으로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신석기 문화권의 시대를 알렸다. 기원전 4천년쯤 들어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신석기 시대가 개막하면서, 푼넬비커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청동기와 철기의 유입

 

기원전 4천 년에는 중부 유럽의 깔때기-항아리 문화권이 스칸디나비아로 유입되면서 에르테볼레 문화 및 푼넬비커 문화와 합쳐졌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중부 유럽의 농경 문화를 배워와 농사를 지었다. 점차 조그마한 마을과 촌락들이 세워지면서 전형적인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후 기원전 2천 년 경에는 마침내 청동기가 스칸디나비아로 전래되었다. 북유럽인들은 호박 같은 보석들을 팔아서 미케네 문명, 중부 유럽 등지에서 청동기를 사왔다. 다만 자체적으로 청동기를 제조하는 기술은 무려 200년이 지난 기원전 1750년이 되어서야 겨우 배워왔다고 한다. 이 시기를 북유럽 청동기 시대라고 부르며 게르만족의 기원으로 본다.

 

1500년 동안 지속된 북유럽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 말에 종결되었다. 모종의 이유로 북유럽과 지중해 문명권 간의 교역 네트워크가 끊어졌고, 이 때문에 청동기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았다. 금속에 환장하던 북유럽인들에게 청동기를 더 이상 들여올 수 없음은 치명적인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자구책을 찾아내야만 했는데,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철이었다. 철은 스칸디나비아에 풍부하게 널려 있었다. 풍부한 자원에 중부 유럽의 켈트족에게 전수받은 철기 제조법이 합쳐지면서 북유럽 철기 시대가 개막했다. 다만 이 시기의 스칸디나비아는 아직 로마 제국을 포함한 지중해권과는 단절되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와 로마 제국 둘 다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문화적으로도 별 접점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게르만족의 남하

 

 

철기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서서히 남하했다. 기원전 750년 이전까지만 해도 덴마크와 스웨덴 일대에 머물렀다면 기원전 500년에는 독일 북부로, 기원전 250년에는 독일 중부와 네덜란드까지, 기원전 1년에는 로마 제국 국경 바로 위까지 접근했다. 그리스와 로마 같은 지중해권 문명들은 이들을 '게르만족'이라고 불렀고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싸움에 능했다고 기록에 남겼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로마 제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게르만인들이 마침내 로마 제국 국경 바로 북쪽까지 남하했기에 그때서야 교류가 시작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인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지만 스칸디나비아와 게르만족들은 선진적인 로마의 문물들을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문화가 크게 뒤바뀌었다. 동전, 그릇, 청동상, 유리컵, 에나멜 버클, 무기 등 로마의 발달된 문화가 북유럽으로 쏟아져들어왔던 것이다. 이 시기를 로마 철기 시대라고 따로 부르며 북유럽이 처음으로 로마-지중해 문명권과 접촉한 시대로 본다.

 

 

 

초기에는 로마 제국과 교역하면서 근근히 물건들을 수입해오는 정도에 그쳤지만, 5세기에 들어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쇠퇴하면서 북유럽인들이 로마 제국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수많은 게르만계 친척들이 제국을 침략해 막대한 금과 은을 약탈해오는 것을 보고 혹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친척들을 따라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북부 국경을 넘나들며 엄청난 부를 뜯어왔고, 결과적으로 상당량의 금이 북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게르만인들이 로마 제국을 마음껏 약탈하던 시대를 게르만 철기 시대라고 부른다. 게르만 철기 시대는 800년대까지 약 400년 동안 이어졌다. 게르만 철기 시대 이후 서부 및 중부 유럽에서는 게르만계 왕국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게르만의 고향 스칸디나비아에 남아 있었던 북게르만족들은 본격적인 바이킹 시대를 열어젖혔다.






바이킹 시대의 개막

바이킹들의 등장 원인



스칸디나비아인들이 8세기부터 '바이킹'이라는 형태로 유럽 곳곳에서 약탈을 시작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통설은 인구와 경제, 이념과 정치 모두가 합쳐졌다고 본다.

 

 

 

첫 번째는 인구 문제였다. 8세기 이후, 유럽은 점진적인 농업 기술의 발달과 함께 Medieval Warm Period라고 불리는 따뜻한 기후에 힘입어 인구가 급증했다. 이는 북유럽도 예외는 아니어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인구는 유례없이 크게 늘어났지만, 한정된 자원을 넘어서까지 계속 늘어나는 인구를 제어할 수는 없었기에 농업만으로는 불어난 인구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고자 하는 이들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제 문제였다. 이슬람 세계와 유럽 세계의 동반 성장 덕분에 유럽은 갈수록 부유해졌고, 자연스레 무역량도 늘어났다. 무역로는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었으며 8세기 경에는 심지어 브리튼 제도도 무시못할 수준의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북쪽에 자리해 아직 그만큼의 부를 획득하지 못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입장에서 서유럽의 재화는 그럴듯한 먹잇감이었고, 결국 이들의 부를 강제로 빼앗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바이킹들은 잉글랜드와 서유럽 해안가에서 해적질을 벌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저멀리 동유럽과 중동까지 가서 해적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 번째가 바로 정치 문제였다. 특히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체계적인 방비체계가 없는 상황이었다. 돈은 그득그득 쌓아놨는데 정작 그걸 지킬 만한 무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바이킹들이 이를 가만 놔둘 리 없었고, 브리튼섬은 바이킹들의 최우선 공격 목표가 되었다. 반대로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본토에서는 점차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왕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왕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토착 유력자들을 억압했고, 정치싸움에서 밀려난 지방 유력자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브리튼 제도나 서유럽을 약탈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당연히 바이킹 시대 이전에도 발트해 유역에 해적은 존재했지만 바이킹만큼 대대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8세기에 들어 갑자기 바이킹들이 증가한 원인은 기술적인 진전의 이유도 있었다. 더 거대한 돛의 도입, 태킹, 24시간 항해와 같은 더 발달된 항해술이 도입되었고, 배도 이전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이념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도교 전파였다. 카롤루스 대제의 주도로 그리스도교가 점차 스칸디나비아 일대에 전파되면서 기존의 노르드 신앙을 믿던 사람들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일대에 혼란이 발생했고, 제대로 통제가 되지 못하면서 바이킹이 날뛰었다는 설명이다.






바이킹의 대침공




브리튼 제도




잉글랜드




서기 793년, 올해 노섬브리아의 땅에 끔찍한 경고가 날아들었고, 사람들을 가장 비참하고 두렵게 했다. 이것은 공기를 꿰찢고 돌진하는 거대한 빛이요, 회오리바람, 궁창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불의 용이었다. 이 엄청난 징표 후에 기근이 뒤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1월 6일 전 이방인들의 가혹한 침입이 성스러운 섬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를 강간과 학살로 덮쳤다...

 

- 《앵글로색슨 연대기》




브리튼섬은 스칸디나비아반도와 가까웠고, 아직 중앙집권화가 덜 이루어진 상태였기에 바이킹들이 노리는 제1순위 먹잇감이었다. 이때문에 바이킹 시대를 알리는 첫 번째 사건 역시 브리튼 섬에서 발생했는데, 바로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이었다. 793년 6월 8일 바이킹들은 함선 3척을 이끌고 노섬브리아 왕국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침략했다. 아무 방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수도원은 무력하게 약탈당했고, 바이킹들은 수도사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거나 바다에 던져 익사시킨 다음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 참혹한 사건 이후 바이킹들은 본격적으로 브리튼 제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린디스판 수도원은 이후에도 약 80여 년 동안이나 약탈에 시달리다가 버티지 못하고 875년에 도망치듯이 린디스판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바이킹들은 끊임없이 브리튼 섬을 공략하면서 당시 브리튼 섬의 지배자였던 앵글로색슨인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공격은 865년 동앵글리아에 상륙한 덴마크 바이킹(데인)들의 공격이었다. 당시 바이킹들은 851년 웨식스의 군주였던 애설울프와 싸운 아클레아 전투에서 패퇴한 뒤 약 14년 동안 소강 상태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설적인 바이킹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노섬브리아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이에 격분한 그의 아들들이 대규모로 브리튼 섬을 침공했던 것이다. 라그나르의 아들 '이바르 라그나르손'과 할프단 라그나르손이 이 바이킹들을 이끌었으며 브리튼인들은 이들을 이교도 대군세라고 불렀다. 이전의 바이킹들이 그냥 약탈만 하고 바로 떠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아예 노섬브리아 내륙까지 깊숙이 밀고들어와 노섬브리아의 수도였던 요크를 점령하고 아예 눌러앉아버렸다.

 

 

 

바이킹들의 대침공에 브리튼 토착 앵글로색슨계 왕국이었던 동앵글리아, 웨식스, 노섬브리아, 머시아 등은 바이킹들을 쫓아내기 위해 총력을 다했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노섬브리아는 바이킹의 괴뢰국이 되어버렸고, 머시아는 수도인 노팅엄을 빼앗기자 간신히 배상금을 내고 되돌려받는 굴욕을 당했다. 동앵글리아 왕국 역시 바이킹과 체결했던 평화조약을 깨고 바이킹들을 급습하려고 했지만 되려 역기습을 당하여 아예 왕국이 멸망해버렸다. 바이킹들이 승승장구하자 그들을 막을 만한 세력은 웨식스 왕국 밖에 없었는데, 웨식스 왕국은 다른 왕국들과는 다르게 기반이 탄탄했던 덕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웨식스의 애설레드 1세는 871년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지원군이었던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했고, 애설레드 1세가 승하하자 그 유명한 앨프레드 대왕이 즉위하면서 대바이킹 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애설레드 1세가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했다고는 해도 바이킹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바이킹들은 878년 치픈햄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앨프레드 대왕을 습격했고 웨식스 왕국마저 멸망 직전의 위기로 몰고 갔다. 당시 바이킹 군대를 이끌던 구트룸은 웨식스 왕국의 왕위요구자들을 꼬드겨 서로를 분열시켜뒀고, 이 덕분에 손쉽게 웨식스 왕국의 대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구트룸은 이를 기반으로 웨식스 왕국의 괴뢰국화를 시도했지만, 수년간 전쟁을 치르며 웨식스인들은 바이킹을 원수로 여겼기 때문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웨식스를 점령한 바이킹들은 고립되었고, 간신히 도망쳤던 앨프레드 대왕은 군대를 규합해 반격에 나섰다. 결국 두 세력은 에딩턴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는데, 이 전투에서 앨프레드 대왕이 대승을 거두면서 웨식스에서 바이킹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미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머시아 등지는 여전히 바이킹 통치하에 있었는데, 886년에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바이킹들의 영유권이 인정되면서 완전한 바이킹들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브리튼 섬에 자리잡은 바이킹들의 세력을 데인로라고 부른다.25

 

 

 

앨프레드 대왕과 바이킹 사이의 평화조약으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지만 서로 간에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만 바이킹들의 데인로는 갈갈이 분열되어 있었던 반면, 웨식스 왕국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서 점차 웨식스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892년에는 또 다른 바이킹 세력들이 이끌고 온 함대 250여 척이, 나중에 또 80여 척이 추가로 도착하여 웨식스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앨프레드 대왕의 격렬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나 기존 바이킹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동앵글리아, 노섬브리아,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일대로 후퇴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들을 극도로 싫어했고 이같은 기조는 대 에드워드 시대까지 이어졌다. 924년 대 에드워드가 승하하자 애설스탠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는데, 애설스탠은 바이킹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요크를 탈환하면서 바이킹 개척지들을 죄다 뿌리 뽑은 뒤, 앵글로색슨 전체를 아우르는 첫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래서 이때부터를 웨식스 왕국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으로 본다.

 

 

 

애설스탠이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1세와 이드리드가 연달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노섬브리아는 939년 애설스탠이 승하하자마자 바이킹계 아일랜드 왕국의 침공으로 바로 바이킹의 치하로 돌아가버렸고, 이러한 바이킹들의 통치는 94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944년에 다시 웨식스의 왕이 탈환했으나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를 왕으로 삼아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에이리크 1세는 요크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 다시 또다른 바이킹 세력인 더블린 왕국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노심브리아는 952년에 에이리크 1세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954년 이드리드가 에이리크 1세를 완전히 끝장내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잉글랜드 최후의 바이킹 왕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섬브리아가 칠왕국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왕국에 복속되었다.

 

 

 

노섬브리아가 복속된 이후, 잉글랜드 왕국은 평화왕 에드거 1세를 거치면서 훨씬 안정화되었다. 하지만 순교왕 에드워드와 애설레드 2세를 거치면서 잉글랜드의 왕권이 다시 흔들리자 바이킹들은 잉글랜드에 눈독을 들였다. 980년에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재침공했고 이들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 잉글랜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막대한 배상금을 퍼주어야만 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결국 1002년 애설레드 2세가 잉글랜드 내부의 바이킹들에 대한 대학살을 벌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잉글랜드가 덴마크인들을 학살하자 격노한 스벤 트베스케그 왕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와 햄프샤이어 등 수많은 도시들을 불질러버렸다. 이후로도 잉글랜드의 굴욕은 계속되어 토르켈이 1009년에 연달아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1013년에 되돌아온 스벤 트베스케그는 아예 애설레드 2세를 쫓아내버리고 자신의 영토로 삼아버렸다. 스벤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 잉글랜드와 덴마크를 물려받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크누트 대왕이었다. 이때의 잉글랜드와 덴마크 왕국을 북해 제국이라고 부르는데, 안타깝게도 크누트 대왕이 40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오래가진 못했고, 그의 아들이었던 하레크누드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역시 즉위한지 2년만인 1042년에 승하했다. 이후 덴마크의 왕위는 망누스 1세28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는 참회왕 에드워드에게 넘어가면서 바이킹의 잉글랜드 통치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후 1066년에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해럴드 2세의 동생인 토스티그의 사주를 받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재진입을 시도했지만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해럴드 2세에게 패배해 전사하면서 무산되었고, 이 시도가 바이킹의 마지막 잉글랜드 진출 시도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못지않게 바이킹들의 영향력이 컸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브리튼 섬 북부 스코틀랜드 지방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달리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서 당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좀 많은데, 가장 큰 이유는 스코틀랜드 지방의 수도원들을 바이킹들이 싸그리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아이오나 수도원은 849년 바이킹의 침략을 피해 철거되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적 자원인 수도사들이 사라지자 역사를 기록할 사람들조차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바이킹들이 스코틀랜드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선 대부분 노르웨이나 덴마크, 잉글랜드쪽의 사료에 의존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스코틀랜드인들 중에서도 게일인과 픽트인들은 이미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스칸디나비아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와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개발도가 떨어졌고, 약탈할 것도 별로 없어서 침략 빈도도 적었다. 그렇다고 아예 침공을 안 하지는 않았다. 839년 대규모 노르웨이 함대가 테이강과 언강으로 들어와 픽트 왕국의 수도인 포트리우를 공략했고, 870년에는 클라이드 만의 요새를 공격해 막대한 물자를 탈취해갔다.

 

 

 

참고로 바이킹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상당히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데, 일단 스코틀랜드의 핵심인 스코틀랜드 저지대가 원래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영토로, 즉 앵글로색슨족의 땅이었다. 그러나 바이킹이 노섬브리아를 멸망시켜버리고, 앵글로색슨족을 학살하면서 이 영토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는 훗날 스코틀랜드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바이킹들은 무려 300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는데, 원주민인 픽트인이나 게일인, 앵글로색슨인 등이 바이킹을 막기 위해 하나로 뭉치도록 만드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결국 덕분에 스코틀랜드 최초의 제대로 된 왕국인 알바 왕국이 등장했고, 알바 왕국은 훗날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바이킹 시대는 약 100년 후에 종결되었지만 바이킹과 스칸디나비아의 영향력은 바이킹 시대가 끝나고도 400년 후인 13세기, 최후의 스코틀랜드 바이킹 국가인 군도 왕국이 스코틀랜드에 복속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었다.

 

 

 

아일랜드

바이킹들이 세운 1000년경의 더블린 모습

 

 

795년 경에 소규모의 바이킹 무리들이 처음으로 아일랜드 해안가를 따라 수도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굳이 수도원들을 약탈했던 이유는 그 주변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 바로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821년에는 호우스를 약탈하고, 수많은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840년부터는 아예 요새화된 숙영지를 지어놓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아일랜드 내에서 더욱 체계적인 약탈 행위를 했다. 이때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더블린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지만 바이킹이 모두 불태웠으며, 교역의 번영지로 떠오름은 바이킹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은 이후부터였다.

 

 

 

아예 터를 잡은 바이킹들은 거대한 함대를 조직하고 대규모로 약탈을 저질렀다. 바이킹들은 내륙으로 쳐들어가 더 거대한 수도원을 공격하거나 고대 아일랜드 왕들의 능을 도굴했다. 853년에는 바이킹 올라프가 더블린의 초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수십여 년 동안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원주민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더 이상 바이킹들이 일방적인 약탈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아 아일랜드 토착세력들과 끊임없이 합종과 연횡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바이킹이 항상 승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866년에 아일랜드 북부에 있는 모든 바이킹 정착지들이 불태워지고 약탈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902년에는 최대의 중심지였던 더블린에서 강제로 쫒겨났다.

 

 

 

하지만 아일랜드 바이킹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 이바르 가문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914년 아일랜드로 돌아와 8년 동안 전쟁을 벌였고, 결국 더블린을 회복했다. 바이킹들은 파괴만 했었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리머릭 등이 이 때 건설되었다. 더블린은 아일랜드 최초의 대도시로 부상했고 서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노예 항구라는 웃지 못할 타이틀을 짊어지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날이 갈수록 아일랜드의 토착 게일인들과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노르드-게일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더블린의 바이킹 왕들은 문화를 진흥한다는 명목으로 아일랜드 최초의 조폐국을 설립했고, 심지어 가톨릭교회를 후원해주기까지 했다. 현대 바이킹들에 대한 인식이 그냥 쳐죽이는 야만인인 것에 비하면 놀라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게일인 출신인 미데 왕국의 '말 세크날 막 돔날' 왕이 더블린을 정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게일인 출신의 브라이언 보루가 아일랜드 전역을 정복하고 아일랜드의 '하이 킹'으로 올라서면서 바이킹의 세력은 더욱 쇠약해졌다.30 물론 정복당한 바이킹들은 게일인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진압당했고, 1014년 이후로는 제대로 된 반란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약소세력으로 전락했다. 이후 바이킹들은 자연스럽게 아일랜드 문화권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프랑크 왕국

 

잉글랜드가 바이킹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뻔했다면 프랑크 왕국 및 분열 이후 독일이 되는 동프랑크 왕국, 프랑스가 되는 서프랑크 왕국도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침략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바이킹들은 잉글랜드보다도 더 부유한 프랑스 지방을 허구헌날 약탈하러 쳐들어왔는데, 지명인 '노르망디'가 애초에 북쪽 사람들을 의미하는 '노르만'에서 유래한 단어일 정도였다. 바이킹들은 790년에서 800년 사이에 처음으로 프랑스 약탈을 시작했으며 주 약탈지는 프랑스 서부와 북부 해안가였다. 바이킹들이 주로 겨울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조용히 보냈기 때문에 약탈은 여름에 이루어졌다.

 

 

 

일부 바이킹들은 아예 노르망디 해안가에 숙영지를 짓고 알박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로마 제국 시절부터 행정력이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던 프랑스 지방은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만큼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바이킹들은 프랑크 왕국의 막대한 부를 놓칠 수 없었고, 결국 남부 가스코뉴 지방에 첫 번째 정착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바이킹들은 주로 부유하지만 방어력은 거의 없는 수도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루앙과 쥬미에쥬 지방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845년에는 센강을 타고 올라가 파리를 공격할 정도였다. 당시 프랑크의 국왕 대머리왕 샤를 2세는 은화 7천 파운드를 지불하고서야 바이킹의 파리 포위를 풀 수 있었는데 이 일로 샤를 2세의 권위는 치명타를 입었다.

 

885년 바이킹들의 파리 공성전

 

 

 

바이킹들의 파리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856년에 바이킹들은 또다시 센강을 거슬러올라가 센강과 루아르강 사이의 모든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약탈했지만 샤를 2세는 역시나 제대로 된 방책을 내놓지 못했다. 샤를 2세의 무능에 치를 떨던 파리 시민들이 대신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자신들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였다. 샤를 2세는 센강 주변에 요새와 다리들을 설치해서 바이킹들의 전함을 막으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후 루이 2세,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가 연달아 왕위에 올랐고 이들 모두 바이킹들을 퇴치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소년왕이자 어린 나이에 바이킹들을 물리쳤던 루이 3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더욱 안타까운 부분이다.

 

 

 

바이킹들의 공세는 886년에 일어난 파리 공성전에서 정점을 찍었다. 885년 11월 바이킹들은 수백여 척의 함선과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해 조공을 요구했고, 당시 파리를 수비하던 외드 백작은 이를 거절했다. 외드 백작은 불과 병사 수백여 명을 이끌고 수만 명에 달하는 바이킹들을 상대로 분전했고, 결국 바이킹들은 파리 성벽을 넘을 수 없었다. 886년 10월에 카를 3세가 파리를 돕겠답시고 지원병을 이끌고 도착했는데 바이킹들을 쫓아내기는커녕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부르고뉴 지방을 처벌하기 위해 바이킹들을 일부러 그쪽으로 몰아넣으면서 엄청나게 욕을 들어먹었다. 결국 이 일로 프랑스에서 카롤링거 왕조는 상당히 신망을 잃었으며, 끝까지 파리를 수호한 외드가 새 서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하여 카페 왕조의 선조가 되었다.

 

 

 

외드는 파리를 지켜낸 공로로 왕에 즉위했지만33 카롤링거 왕조의 정통성이 워낙 압도적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자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카롤링거 가문의 샤를 3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911년 노르웨이계 바이킹인 흐롤프34가 샤르트르를 습격했는데, 당시 권신이었던 외드의 동생 로베르에게 대패했다. 한편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베르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단순왕 샤를 3세는 흐롤프를 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샤를 3세는 바이킹이 주춤한 틈을 타 흐롤프에게 루앙과 노르망디 북부를 봉토로 주고 루앙 백작위를 제안했다. 흐롤프는 이에 동의했고, 루앙 백작위를 받는 대신 세례를 받은 후 다른 바이킹들의 침략으로부터 서프랑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 911년 7월) 이후 흐롤프, 즉 롤로는 루앙 백작으로 분봉받아 바이킹들의 침략을 잘 막아냈고, 훗날 루앙 백작에서 승격된 노르망디 공작들은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귀족으로 성장했다.

 

 

 

812년부터 바이킹이 프리지아 지방도 공격하기 시작하자, 826년 루도비쿠스 1세는 바이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덴마크 왕에게 프리지아 지방의 일부를 떼주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프리지아 지방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834년부터 바이킹의 리더인 도레슈타트의 로리크와 덴마크 왕의 조카였던 해럴드가 프리지아 지방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841년 루도비쿠스 1세의 붕어 이후 즉위한 로타르 1세는 프리지아 지방을 노리는 자신의 형제들과 바이킹의 침공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앞서 말했던 바이킹들의 수장인 해럴드와 로리크에게 영지를 일부 지급했으나 이 지역에 대한 바이킹의 침공이 매우 잦아들고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형제들간의 영토 분쟁도 안정화되자 로타르 1세는 이들을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846년, 이들은 반역죄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혔다. 이후 해럴드는 옥사했고, 로리크는 동프랑크 왕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850년 도레스타트와 위트레흐트 등 프리지아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결국 로타르 1세는 로리크를 이 지역의 지배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867년에 일어난 봉기로 로리크는 쫓겨났고, 결국 프랑크 왕국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873년에 해럴드의 아들이었던 루돌프가 아버지가 옥사하기 전에 다스리던 영역을 수복하기 위해 침공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전사했다. 884년 가을 덴마크계 바이킹들의 병력이 독일 북해 해안에서 벌어진 노르디티 전투에서 함부르크의 대주교 림버트가 이끄는 프리슬란트인 군대에게 패배했는데 이 노르디티에서의 패전 이후, 바이킹들의 프리지아 침략은 확 줄어들었고, 882년 로타링기아를 약탈하다가 카를 3세에 의해 프리지아 공작이 되었던 바이킹 수장 고드프리드 역시 노르디티 전투 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다가, 889년에 암살당하면서 프리지아 지역의 바이킹 지배도 끝을 맺었다.

 

 

 

 

남유럽

 

바이킹들은 장거리 항해도 즐겨했다. 보통 바이킹이 얼음이 가득하고 추운 바다에서만 활동했다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방은 물론 심지어 지중해 안까지 들어와서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860년에는 비요른과 해스테인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도시인 루나를 쳐들어와 약탈한 다음, 60마일 떨어진 토스카나 지방으로 이동해 피사를 약탈했다. 심지어는 아르노강을 타고 그대로 따라 올라가 피렌체 인근도 약탈했다. 바이킹들이 가장 즐겨 털었던 지방은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서부 해안가, 그리고 시칠리아섬과 북아프리카 지방이었다. 특히 이탈리아가 몇백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덕에 워낙 많은 부가 쌓여있어서 바이킹들이 군침을 흘리던 먹이였다고 한다.

 

 

 

이베리아반도에서 바이킹은 상대적으로 늦게, 9세기 초중반부터 활동했다. 기록들이 워낙 중구난방이라 확실하지는 않으나 확실한건 당시 바이킹들이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를 습격한 뒤 리스본과 세비야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이베리아인들조차도 바이킹의 침략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다만 바이킹들은 갈리시아 왕국과 후우마이야 왕조가 워낙 방비를 잘 갖춘 덕에 큰 성과는 내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859년에는 3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지만 실패했고 966년에 함대 28척이 리스본을 공격했으나 역시 격퇴당했다. 바이킹들의 공격 자체는 11세기까지 쭉 이어졌지만 어디까지나 무역선 습격이나 소규모 기습에 그쳤고, 잉글랜드나 프랑스처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싸움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또한 노르망디 출신 모험자들은 시칠리아 토후국이 지배하던 시칠리아 섬과 동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칼라브리아38 등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은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토후국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이때 동로마 제국은 노르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싸우도록 했다. 그러나 시칠리아 섬의 비옥함을 두 눈으로 확인한 노르만인들이 스스로 시칠리아 섬을 집어삼킬 야심을 품었던 것이다. 결국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노르만계 오트빌 가문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서방 교회에 간섭하던 동방 교회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중세 내내 노르만인 기사들은 동지중해의 십자군 전쟁이나 이베리아반도에서 벌어진 레콩키스타, 그리고 그 외의 각종 전쟁에서 뛰어난 용병으로 활약했다.

 

 

 

중동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은 9~10세기 경에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동쪽이나 남쪽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따로 바랑인이라고 불렀으며, 대부분은 스웨덴 출신이었다. 주로 무역이나 용병업 등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았는데 심지어 흑해를 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나 페르시아(이란), 아랍과도 교역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은 다시 서유럽과의 거래에 활용되었다.40 바랑인들은 현지인과 결합하여 루스족의 정체성을 형성했고, 이들은 튀르크계 국가인 하자르 칸국을 격파한 후 북유럽과 흑해 그리고 중동을 잇는 광활한 무역로를 장악했다. 특히 전설적인 바이킹 지도자였던 류리크는 기존의 슬라브족들을 통합하고, 862년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는데, 그의 후손들인 류리코비치 가문이 통치한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의 기원이 되었다.

 

 

 

882년 류리크의 후계자였던 올레그는 아시아계 유목민들로부터 키이우를 정복하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비록 이후 슬라브족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일단 우크라이나 역사의 기원으로 평가되는 키예프 공국을 류리크의 후손들이 세웠다. 훗날 몽골 제국에게 키이우가 갈려나간 뒤 러시아의 중심지로 대두한 모스크바 공국 역시 류리크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였다. 분할 상속 전통 탓에 영토가 쪼개져서 군소 국가군이 난립하기는 했지만, 류리크의 후손들이 통치한 영지를 합치면 대충 유럽 러시아 중심부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가 나온다. 어떻게 보면 바이킹이 러시아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다만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 바이킹들의 문화가 상당히 남아 있었던 것과는 대조되게 러시아에서는 11세기 무렵에 바랑인 지배계급이 역으로 슬라브화되었다.

 

 

 

또한 류리크 가문 자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이킹이라는 정체성은 잃어버렸지만 1598년 뇌제 이반 4세의 삽질로 단절되기까지 700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했다. 류리크 왕조가 단절된 이후 러시아가 혼란 시대로 빠져든 원인 자체가 '류리크 가문의 직계가 아닌 이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어서'였다. 혼란시대를 거쳐 탄생한 독일계 로마노프 왕조 역시 류리크 가문과 혼인했음을 근거로 차르위를 요구했을 정도로 바이킹 왕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Pyccкий' 즉 루스인이다. 한편 이들 본토 스웨덴 출신의 바랑인은 9~10세기에 동로마 제국군에서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했다. 반란과 배신이 판을 치던 난세에 용병으로서는 보기 드문 충성심, 그리고 바랑인 특유의 무자비함과 용맹성을 발휘하면서 동로마 제국 최정예 근위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라는 2개의 거대한 섬을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페로 제도의 첫 번째 정착민의 일원이자 바이킹이었던 나도드(Naddodd)가 노르웨이에서 페로 제도로 항해하던 중 길을 잃고 우연히 한 거대한 섬의 동부 해안가로 표류했다. 아이슬란드라고 불리게 될 섬이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한 스웨덴 선원이 아이슬란드 해안으로 표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아이슬란드를 찾아간 사람은 '흐라프나플로키 빌게르다르손'이었다. 그가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었고, 거대한 피요르드 사이에서 떠다니는 유빙을 보고 현재의 이름인 아이슬란드를 붙였다.

 

 

 

아이슬란드에는 870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심지어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의 이름도 남아있는데, 잉골프 아르나르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 족장으로 아내인 할베이그 프로데스다테르와 함께 아이슬란드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잉골프는 아이슬란드가 가까워지자 배 밖으로 나무기둥 2개를 던지고는, 그 기둥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정착하겠노라 맹세했다. 그는 나무기둥이 닿은 곳에 닻을 내렸고, 땅에서 증기가 솟아오르는 따뜻한 곳에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바로 레이캬비크다.

 

 

 

한편 아이슬란드보다도 한참 멀고, 북쪽에 떨어진 그린란드는 한참 후에야 발견되었다. 985년 전설적인 탐험가였던 에이리크 힌 라우디가 3년 전 살인 혐의로 본국에서 쫒겨난 이후 바다를 이곳저곳 떠돌다가 그린란드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그린란드를 발견한 에이리크는 986년의 탐험에서 14척의 배들을 가지고 귀환했다. 에이리크는 이때 그린란드에서 그나마 살만한 남서부 해안가를 식민화했다. 그러나 그린란드가 하도 북쪽에 있어서 짧은 여름에만 겨우 호밀과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고, 양과 소 정도를 키우며 근근히 연명하는 정도였다. 그린란드의 특산품은 바다코끼리 상아였으며, 현지에서 생산할 수 없었던 철 및 생필품들과 거래해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린란드는 1261년 노르웨이 국왕의 속령이 되었다. 하지만 무려 3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인구는 크게 증가하지 못해서 그 넓은 땅에 고작 5천 명도 안 되는 인구만이 살았다. 그린란드는 크게 동부 식민지와 서부 식민지로 나뉘었는데, 이 식민지 커뮤니티는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농장 약 250여 곳, 성당 14곳, 대성당 한 곳이 있었다. 그린란드의 가톨릭 교구는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교구 관할이었고, 주교도 있었지만 절대다수의 주교들은 그 먼 그린란드로 떠나기 싫어해서 대부분 니다로스에 머물렀다. 그러나 1300년대에 소빙하기가 몰아닥치고, 이누이트의 공격을 받자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그린란드 식민지는 점차 쇠퇴했다. 1450년까지는 아예 노르웨이 본국과 연락이 끊길 지경이었고, 그린란드는 아예 스칸디나비아 전설에나 등장하는 신비의 섬 수준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힐 뻔한 적도 있었다.

 

 

 

북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이른바 '발견'이라고 하면 흔히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1492년 산타마리아 호의 아메리카 상륙을 떠올리지만41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유라시아의 인물은 바이킹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42 986년 뱌르니 헤룔프손이라는 아이슬란드인 탐험가가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본토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콜럼버스보다 무려 600년도 일찍 아메리카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뱌르니 헤룔프손은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향하던 중 실수로 표류해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아이슬란드 출신 탐험가였던 레이프 에이릭손이 북미 대륙에 연달아 상륙하며 배를 건조하기에 적합한 품질 좋은 나무들을 여럿 베어갔다. 이 덕분에 그린란드 바이킹들의 활동범위는 그린란드를 넘어 캐나다 최북단 섬까지 확장되었고, 심지어 이누이트들과 물건을 교역하기까지 했다. 특히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는 짧게나마 최초의 바이킹 식민지가 건설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콜럼버스와 비교하면 500년 가까이 이른 시점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무력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바이킹들을 괴롭혔고, 도저히 살 땅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이킹은 어쩔수 없이 그린란드로 철수해야만 했다.

 

 

 

레이프 에이릭손은 그린란드로 가는 길에 북미로 표류했고, 야생 포도, 야생 밀, 단풍나무를 발견했다. 에이릭손은 새롭게 발견한 신품종들을 배로 실은 다음 다시 동쪽으로 향해 중간에서 난파자들을 구하고 그린란드에 도착했다. 당대에 난파하면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사람들은 표류에서 살아남은 레이프 에이릭손을 '행운아'라고 불렀다. 다른 판본도 있는데 레이프 에이릭손이 앞서 북미 대륙을 발견한 뱌르니 헤룔프손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생겨 북미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는 포도와 덩굴이 널려있는 비옥한 땅을 발견했고, 작은 정착지를 건설했다. 에이릭손은 그곳에서 온화한 기후와 넘쳐나는 연어들을 발견하고 겨울을 보냈으며, 겨울이 지나가자 마찬가지로 그린란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판본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레이프 에이릭손이 현대의 캐나다 북부지방을 탐험하고 그린란드로 돌아왔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새롭게 발견한 땅을 빈란드라고 불렀다.44 빈란드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킹들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화 시도가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캐나다 본토뿐만 아니라 스발바르 제도나 아조레스 제도와 같이 북아메리카 대륙 최북단의 섬들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이킹들은 스발바르를 '차가운 해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도 얼음만 꽁꽁 어는 땅이라 바이킹들은 별 경제성을 찾지 못했고 결국 바이킹들은 500년 일찍 신대륙을 발견할 기회를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북아메리카를 탐험한 바이킹이라고 하면 레이프 에이릭손만 유명하지만 사실 그 외에도 토르발드, 토르핀 칼세프니 등 꽤 많은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토르발드는 원주민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되려 반격을 당해서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 '용감한 칼세프니'라는 별명이 있었던 토르핀 칼세프니는 가축과 160여 명의 남녀를 실은 배 3척을 거느리고 북미로 향했다. 북미에 정착한 칼세프니는 상대적으로 원주민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유와 붉은 천을 물물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칼세프니 소유의 황소가 갑자기 흥분해 날뛰면서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원주민들이 돌을 쏘아대면서 바이킹들을 쫓아낸 것이다. 수적 열세였던 바이킹들은 원주민들에 밀려 쫒겨났다.

 

 

 

북아메리카의 가장 대표적인 바이킹 유적은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다. 약 990년 경에 지어진 바이킹 식민지 마을 유적으로, 1960년에 발견되어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에 왔었다는 전설을 실제로 드러나게 만든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마을에서 발견된 목재들을 탄소연대로 추정해본 결과 평균적으로 목재들은 1014년에 베어졌고, 대략 인구 30~16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 척박한 그린란드 식민지의 10%도 안되는 인구로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굉장히 규모가 작았음을 의미한다. 건물들은 대략 8개가 발견되었는데 개중에는 대장간, 거주 가옥, 배 수리용 건물, 목공 작업장들도 있었다. 또한 석유 램프, 숫돌, 청동 핀, 뼈로 만든 뜨개질 바늘, 물레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물레가 발견되었음이 중요하다. 즉 여자들도 이곳에 머물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란세오메도스가 단순한 전사들의 초소가 아니라 정식 정착지였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바이킹들이 그린란드를 떠난 이유를 찾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바이킹의 식단을 분석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그린란드의 바이킹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의 치아 동위원소를 분석했으며, 분석 결과 그린란드에 도착한 초기, 바이킹 식단에서 해산물의 비중은 20% 정도였다. 그런데 바이킹이 그린란드를 떠나는 14~15세기 유골에서는 식단에서 해산물의 비중이 80%까지 올라갔다. 그린란드에 정착해 농사와 목축을 했을 텐데도 곡식과 고기의 비중이 줄어든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결과를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바이킹이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바이킹들의 쇠퇴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전 유럽을 휩쓸던 바이킹이었으나 이들 역시 10세기 경에 정점을 찍더니 이후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0세기 말부터 조금씩 약탈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11세기 중후반부에는 거의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바이킹이 쇠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 요약이 가능하다.

 

 

군사·방어 체계 정비

 

경제적 효용 감소

 

스칸디나비아의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제력 강화

 

그리스도교의 스칸디나비아 확산

 

기온 하강과 유빙의 증가, 항해 환경의 악화

 

 

 

이러한 바이킹의 공격은 당시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바이킹의 공격으로 서유럽의 많은 도시와 마을, 수도원 등이 파괴되고 약탈되었고, 인명과 경제적 면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당대의 서유럽 군주나 영주의 당면과제는 신민을 이들의 침략에서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그 성과에 따라 권력이 왔다 갔다 했기에 머리를 싸매면서 바이킹을 막을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다.

 

 

 

가장 먼저 이루어졌으며 큰 영향을 준 대응책은 축성이었다. 많은 주거지들이 스스로 성벽을 두르거나 피난용 요새를 마련하였고, 군주들이 이를 적극 조성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웨섹스 왕국에서는 알프레드 대왕이 곳곳에 요새화한 거주지인 버(burh)를 지어서 방어거점으로 삼았고, 유럽 대륙에서도 여러 도시와 수도원들이 요새화되었다. 하천 어귀에는 침략자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자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아 물리적으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기도 하였다.

 

 

 

서유럽 영주들의 대비책들 중에는 당연히 해안방어체계 정비가 있었다. 곳곳에 바이킹들의 기습을 막을 초소와 기지들이 세워졌고, 특히 분열되어 있었던 유럽의 왕국들은 중앙집권까지는 아니어도 군주와 유력 영역제후들을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하나 둘씩 안정을 찾으면서 방어체계도 굳건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잉글랜드 왕국이었다. 과거까지만 해도 칠왕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기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 되어 더는 바이킹들이 건드려서 크게 득볼 것이 없었다. 바이킹들은 더 이상 기습의 이점을 노릴 수가 없었는데, 치고 빠지는 싸움방식을 좋아하던 바이킹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였다.46

 

 

 

동원체계와 군제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졌다. 잉글랜드에서는 알프레드 대왕 치세부터 "fyrd"라고 불리는 징집부대를 반기 단위로 순환근무시키면서 언제든 투입 가능하게 하였고, 유럽 대륙에서는 중무장을 한 중세 유럽 기사들이 등장하여 해안가에 상륙하는 해적만 보면 말을 타고 몰려들었다. 기존의 치고 빠지는 소규모 보병 방진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고, 바이킹들이 상륙해봤자 기사들 아래에 짓밟히기만 했고 약탈도 점점 시원찮아졌다. 그 결과 일부 바이킹들은 약탈자 노릇이나 하기보다는 아예 현지에 정착해 본인들 스스로 봉건기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현지 사회에 녹아든 바이킹들은 이제 자기 신민과 재산을 지키고자 스칸디나비아 본토에서 온 침략자와 싸웠다. 이렇게 동화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르망디 공국이었다. 노르망디 공국의 지배층이었던 노르만인들은 바이킹 출신이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에 동화되어 누구보다 바이킹들을 막아내는 데 열정적인 정착민들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약탈형 바이킹들은 동화된 바이킹이든 토착 봉건기사들이든 현지 방어군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넘어야 할 산이 늘어나자 바이킹들로서는 원정과 약탈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만만한 마을들을 털어서 보화를 실어오고 노예도 수급했는데, 오히려 죽거나 헛고생만 하다가 돌아오게 된 까닭이다. 농노제 정착 역시 바이킹들에게 치명타였다. 중세 초까지만 하여도 그리스도교권 유럽에서도 노예제가 아직 남아있었으므로47 바이킹들도 점령지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가서 노예로 팔아넘기는 노예무역에 끼어들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는 하였는데, 노예제가 완전히 사장되면서 더는 노예들을 사줄 고객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예제가 비효율적인 제도여서 고대부터도 이미 자유민 농민들과 상호보완적으로 운용되었는데, 고대 말부터 이어진 혼란 속에서 자영농들조차 알아서 신종하고 투탁해오는 마당에 굳이 비싼 돈을 내고서 말도 안 듣는 새 노예들을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중앙집권화였다. 사실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통제할 중앙권력의 부재 탓이 컸다. 마치 일본의 전국시대 때 중앙정부의 약화 때문에 왜구들이 발호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1000년 경부터는 점차 스웨덴 왕국, 덴마크 왕국, 노르웨이 왕국 등 왕국들이 발전하고 힘을 갖추면서 바이킹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바이킹들은 과거처럼 날뛸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일대가 안정을 찾으면서 바이킹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러한 중앙화와 발을 맞추어 그리스도교가 스칸디나비아반도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49 같은 그리스도교도들을 노예로 부림을 금지한 교리 때문에 노예무역을 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가장 막대한 이익을 내던 노예무역이 점점 사라지니 바이킹들이 약탈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 외에 환경 악화도 문제였다. 특히 11세기에 정점을 찍었던 온난한 기후가 다시 악화되어 점차 소빙기 기후로 변해갔다. 원래 바이킹들의 약탈 자체가 넘쳐나는 인력이 원정을 갔다 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제는 본토 상황이 나쁘니 불가능해진 것이다. 바이킹의 주 근거지는 유빙 탓에 항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침략이라기보다는 이주에 가까웠던 그린란드 같은 경우에도 이러한 이유로 더이상 푸르를 수 없었다. 결국 그린란드의 바이킹 정착지들은 15세기 이후엔 완전히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바이킹 시대' 자체는 1066년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해 잉글랜드 침략에 실패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본다.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명확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승하하자 왕위계승다툼이 일어났다. 이 경쟁에서 밀려난 노섬브리아 백작 토스티그가 앙심을 품고 노르웨이의 하랄 3세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하랄 3세는 무려 선단 300여 척과 병사 9천 명을 모아 잉글랜드로 쳐들어갔고,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2세와 격돌했다. 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계 바이킹 군대가 괴멸하면서 바이킹들은 더이상 외세를 침공할 여력을 잃어버렸고, 이를 274년에 걸친 바이킹 시대의 종결로 친다.

 

 

 

가장 일반적인 종결 기준은 위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지만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1030년에 벌어진 스티클스타드 전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기독교도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이때 이후의 노르웨이인들은 더이상 '바이킹'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스웨덴은 995년부터 1020년까지 재위한 올로프 솃코눙 왕이 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바이킹 전통을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까지 바이킹 신앙을 유지하던 아이슬란드마저 그리스도교로 돌아섰고, 스칸디나비아반도 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되면서 바이킹은 저 시골 벽지로 들어가지 않는 한 더이상 찾아 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

 

 

 

아일랜드의 경우, 바이킹들의 도시였던 더블린이 1171년에 함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바이킹 전통을 간직한 최후의 노르웨이 왕이었던 호콘 4세가 1263년에 오크니 제도, 헤브리디스 제도의 패권을 두고 스코틀랜드와 벌인 일전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그때까지도 끈질기게 버티던 헤브리디스 제도나 맨 섬의 바이킹 왕국이 북유럽과의 연계가 완전히 끊기면서 1266년 끝내 스코틀랜드에 복종, 흡수됨으로서 마지막 바이킹 왕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스코틀랜드 곳곳에 남아 있었던 소규모 바이킹계 세력들은 꼼꼼하게 살해당하거나 동화되었고, 15세기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내에서 바이킹 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또한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는 1469년까지도 노르웨이 국왕 소유의 섬들이었는데, 그래서 바이킹 시대가 넓은 의미에서 15세기에 종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소수 있긴 하다.

 

 

 

재평가

 

지금이야 바이킹들이 '고귀한 야만족', 혹은 '진취적인 해양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달고 있지만 고대 및 중세인들에게 바이킹은 그냥 피에 미친 이교도 야만인 그 자체였다. 유럽인들이 어찌나 바이킹들에게 시달렸는지 그들을 신의 진노라고 불렀으며, 자연재해와 비슷하게 취급했을 정도였다. 유럽을 습격한 이민족들은 그리스도교도거나, 혹은 관용성이 있던 이슬람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교회나 수도원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바이킹들은 그런 거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이런 곳들을 보물이 있다며 습격했기 때문에 더욱 더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바이킹들이 중세 유럽인들에게 남긴 상처가 워낙 깊었기에 바이킹들은 유럽에서 1천 년 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추어졌다.

 

 

 

이렇게 워낙 이미지가 나빴기 때문에 한동안 유럽 역사에서 바이킹의 후손을 자처하는 민족도 없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 남은 후예들은 기독교화된 이후 악명 높았던 과거를 "이교도 시절에 한 일"로 거의 흑역사 취급했다. 잉글랜드(데인로, 채널 제도), 아일랜드, 프랑스(노르망디), 러시아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현지 주민과 동화되어 본토 시절의 언어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도 잃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 후손들은 자신들이 바이킹의 후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의 역사와 생활사를 문자화하여 남긴 것은 거의 없어 구두로만 전승되었고, 그들에 대한 기록은 침략당한 쪽의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다보니 악명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작권'을 주장할 만한 원주인들이 사라진 덕에 마음놓고 재평가를 할 수도 있었다. 바이킹 못지 않게 악명이 높았던 몽골 제국 역시도 한때는 유라시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현 몽골 지역 외에서는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반복되었다.

 

 

 

바이킹이 현대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17~18세기에 들어 낭만주의와 영웅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바이킹들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노르드어로 쓰인 고대 텍스트들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바이킹들을 칭송하는 시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대중들이 '바이킹'이라는 단어를 흔히 쓰게 된 것은 19세기 초 시인 에릭 구스타프 가이저가 쓴 시 <바이킹>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부터였는데, 가이저가 바이킹을 무슨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묘사하면서 바이킹들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인들이 북유럽에 품었던 환상적인 인식이 합쳐지면서 바이킹은 점차 영웅시되었다.

 

 

 

바이킹들의 영웅화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에 그 정점을 찍었다. 스칸디나비아 3국, 독일, 영국 등지에서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생겨나면서 그 일환으로 바이킹들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다. 특히 바이킹의 고향이었던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북유럽 통일 운동의 대두와 함께 전근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이전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바이킹을 개종하기 이전의 야만적인 문명에서, 북해와 발트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를 모조리 재패한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독일은 서유럽의 주류문화였던 로마-프랑스 문화에 대비되는 게르만 문화의 본류로서 바이킹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바이킹과 비슷한 해양제국을 건설했기에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도 만연했던 게르만 우월주의와 인종주의는 바이킹들의 신격화에 더욱 불을 붙였다. 게르만 우월주의자들은 게르만족을 '북유럽의 신비스러운 안개에서 걸어나온 선택받은 인종'이라고 미화했는데, 이들의 입장에서 영웅적이고 용맹한 바이킹만큼 입맛에 딱 맞았던 것도 없었던 덕분이었다. 북유럽 신화를 다룬 바그너의 오페라가 대히트를 치면서 바이킹들의 이미지는 180도 달라졌다. 특히 나치 독일에서는 게르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이킹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용맹한 전사들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52 노르웨이에서는 자원병 모집 포스터에 바이킹과 무장친위대를 나란히 놓은 이미지를 쓸 정도였다. 나치는 이들 북유럽 출신 자원병들을 중심으로 무장친위대 제5기갑사단을 편성했는데, 이들의 별칭이 다름아닌 바이킹의 독일어 표현인 '비킹'(Wiking)이었다. 현대의 바이킹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나치 독일의 공로도 있었던 것이다. 나치 독일 자체는 1945년에 패망해 사라졌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바이킹의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한때 피에 미친 악랄한 이교도로 불리던 바이킹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전사들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그 덕에 바이킹들은 현대까지도 토르(마블 코믹스), 드라마 <바이킹스>,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 등 다양한 미디어물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꾸준하게 등장하는 중이다.

 

 

 

정치

 

바이킹들은 중앙집권적인 왕국이나 국가를 따로 세우고 살지 못했다. 대부분은 부족이나 마을 단위로 살았고 족장에 해당하는 야를(Jarl)이 부족을 이끌었다. 왕권신수설도 없고, 지배자의 권위도 훨씬 약한 씨족 사회였던지라 제아무리 위대한 부족장이라도 더 강력한 경쟁자에게 패배하면 바로 자리를 빼앗겼다. 내부의 세력 다툼이 엄청나게 흔했기에 족장직이 갈아치워짐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권력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바이킹 족장들은 할 수만 있다면 보통 아들, 그중에서도 장자에게 족장직을 물려줬다. 형제가 공동 족장을 맡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자는 족장이 될 수 없었다.

 

 

 

바이킹들이 무식한 전사들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이들도 의회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선진적이었다. 바이킹들의 의회는 씽(Thing)이라고 부르는데 스웨덴어로는 하라드, 덴마크어로는 헤레드라고 부른다. 자유민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일종의 집회에 더 가까웠는데 일정 나이에 다다른 자유민이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여자들 역시 자유민이라면 참여할 수가 있었는데, 특히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처럼 먹고 살기 어려운 곳에서 이런 특징이 두드러졌다. 참고로 현대 아이슬란드에서는 알씽(althing)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세계 최초의 의회로 본다.

 

 

 

이런 의회 제도가 있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의 문화적 영향이 컸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씨족의 구성원이 남에게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면 씨족 전체가 그 가해자를 적으로 돌리고 싸워대는 복수의 전통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바이킹들은 사소한 다툼만 있어도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싸워댄다면 도저히 부족이 존속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말로 해결할 수 있도록 완화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싱'은 단순히 다툼을 중재할 뿐만 아니라 종교집회, 결혼동맹, 세력과시, 유산상속, 보증 등 다양한 목적으로 열렸다. 이런 점이 오히려 민주주의적이고, 평화로운 문제 해결방법이었던 셈이다.

 

 

 

씽이 열리는 곳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인원들을 수용할만큼 거대한 건물이 없었던 탓에 야트막한 언덕이나 인공둔덕 위에서 씽을 열곤 했다. 특히 조상이나 친척들을 묻어놓은 곳에서 씽을 여는 경우가 가장 흔했다. 유력 가문이나 족장들은 자기 가문의 룬 문자가 새겨진 거석들을 언덕 위에 세워놓고 그곳을 회의장으로 삼아 세력을 과시했다. 사람들이 오기 편해야 했기 때문에 무역로에 가까운 곳이나 맑은 물과 가까운 곳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하위 '씽' 위에는 더 상위의 씽들이 있었고, 최고 꼭대기에는 지역의 부족장이나 유력자들만 모여서 개최하는 '씽'이 따로 있었다.

 

 

 

씽은 주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족장이나 부족장을 선출하고 판사(lawman)들에게 판결을 받았다. 당시 판사들은 나이가 많고 현명하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뽑았으며 이들은 구전되어 내려오는 규칙들을 줄줄 암송했다고 한다.55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벌금형을 받거나 '무법자'로 낙인찍혔다. 무법자라고 낙인 찍한 사람들은 바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바이킹 사회에서 쫒겨났다. 그 누구의 음식도, 지원도, 호의도 감히 바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아서 아무나 이 사람을 죽여도 괜찮았다. 그래서 무법자형을 받은 바이킹들은 죽기 살기로 외국으로 도망쳐 살 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씽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졌지만 형을 집행할 권리는 없었다. 부상당한 당사자의 가족이 형을 집행했고, 형집행이 끝나면 상인들이 몰려와 축제를 벌였다. 자기들끼리 에일과 벌꿀술을 마시며 결혼 주선, 동맹 결성, 정보교환 등을 벌였던 것이다. 이렇게 활발하게 운영되던 씽은 점차 스칸디나비아가 중앙집권화되면서 축소되기 시작했다. 왕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지방 자치를 하는 씽이 아니꼬웠고, 씽을 국왕 산하의 기구로 편입시켰다. 씽은 독자적인 기구라기보다는, 국왕이 내려보낸 신하들과 지방의 유력자들이 서로 견제하고 의견을 나누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왕권이 더 강해진 중세 이후부터는 씽이 의회의 기능을 완전히 잃고 지방법원의 형태로 변했다.

 

 

 

사회

 

 

바이킹 사회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엘리트 계급인 야를(Jarl),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유민인 카를(Karl), 사회 밑바닥인 스렐(Thrail)로 분류할 수 있었다.57 자유민들은 무기를 휴대할 권리가 있었고 의회인 '씽'에서 발언권도 있었으며 투표권도 있었다. 자유민 대다수는 농부였고 자영농도 소작농도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58 우리가 흔히 '바이킹'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전사들은 다 자유민 계급이었다. 이 전사들은 대부분 재산이 없는 무일푼에 미혼인데다가 대체적으로 어렸다. 전사들이 이렇게 어렸던 이유는 바이킹들의 상속관습 때문이었다. 바이킹 상속체계에서 아들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못한 나이가 어린 아들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바다 밖으로 나가 약탈을 저질렀던 것이다.

 

 

 

야를들은 여러 전사들을 거느리는 거물들로 보통 족장이나 지방 유력자가 여기 해당되었다.59 이들은 수많은 전사들, 말, 노예들을 거느렸으며 거대한 영지를 경영하며 롱하우스에서 살았다. 주요 소일거리는 행정, 정치, 사냥이었고 허드렛일은 아래의 자유민과 노예들이 해줬다. 종종 해외원정이 있을 때 함대를 이끄는 것 역시 이 야를들이었다. 카를(자유민)과 스렐(노예) 등 대부분의 바이킹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바이킹은 기본적으로 농민 공동체였으며, 약탈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불가능했다. 바이킹 사회에서 밖으로 나가 약탈에만 종사하는 인원의 비율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돈이 없는 어린 전사들이 젊은 혈기에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경우가 더 흔했다. 바이킹들은 대부분 대가족 형태로 살았는데, 여자는 농장에서 일하며 집안일을 했고, 남자들은 배를 타고 밖으로 나가 약탈을 해오거나 씽에서 가족들을 대표했다.

 

 

 

바이킹 자유민들인 카를의 경우, 야를을 제외하면 자기들끼리는 대체적으로 평등했지만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던 스렐(노예)들은 바이킹 사회 내부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로 바이킹들이 약탈지에서 납치해온 사람들이거나 노예 가문에서 태어나 날때부터 노예인 부류로 나뉘었다. 이 노예를 스렐(Thrail)이라고 불렀다. 바이킹들이 하도 약탈을 많이 저질렀던 탓에 한 가구마다 노예가 최소 1~2명은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많은 집은 노예 30명을 데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들의 생활조건은 주인의 취향, 그리고 경제 여건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다.

 

 

 

노예는 어딜 가나 천시받는 비참한 존재였지1 의외로 계급 유동성은 상당했다. 주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해방될 수 있었고, 심지어 돈을 모아 자신의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예들이 해방되었다고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난 자유민인 '카를'(karl)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해방노예들은 노예와 자유인 사이의 계급인 레이싱기(leysingi)가 되었는데, 여전히 주인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고, 의회에서도 자신의 의견이 아닌 주인의 뜻에 찬성해야만 했다. 해방노예들이 주인 가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선 최소 2세대가 지나야 했다. 해방노예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주인이 해방노예의 재산을 환수해갔다.

 

 

 

바이킹들이 잡아오는 노예들은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애초에 바이킹들이 스칸디나비아에서 벗어나 약탈을 시작한 이유에는 성비 불균형 문제도 있었는데, 일부다처제를 선택한 스칸디나비아에서 권력자가 여자들을 죄다 독차지하자 번식의 기회를 놓친 남자들이 바다로 나갔던 것이다. 남성 전사들은 당연히 약탈지의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만 납치해서 데리고 왔다. 그렇게 노예로 잡혀온 여자들은 강간에 수시로 노출되었고, 주인이 음주가무와 군사훈련을 하는 동안 고된 가정일에 종사했다. 다만 운이 좋다면 주인의 아내가 되어 신분이 상승할 수도 있었다. 노르드 문화에서는 행복한 가정생활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정실부인만 된다면야 여자들의 생활은 상당히 나아졌다.

 

 

 

여성의 지위

 

 

마초적인 이미지와 달리 여성 인권 또한 강한 축에 속했다. 일부 여성들은 방패 처녀라고 불리며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그중에는 고위직 군사지도자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무장들과 방패들, 군마 두 필과 함께 매장된 고위직 바이킹 방패 처녀 한 명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기사 링크 해당 무덤 관련 네셔널 지오그래픽 영상 이 무덤 이외에도 군마 한필과 매장된 다른 방패 처녀의 무덤이 노르웨이에서 발견된 바 있고 잉글랜드의 바이킹 전사자 매장지의 유골들 중 20%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유골이 전사로써 몸을 여러해에 걸쳐 혹사시키고 싸우다 죽은 전사자들이라는 것 또한 분석으로 드러난 바 있다. 군사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바이킹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다만 이혼을 하려면 결혼 당시에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다시 돌려줘야 했다. 바이킹 여성들이 이처럼 권리가 강했던 까닭은, 남성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여 집을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기간 동안 아내가 집을 관리하고 재산과 농토를 지키는 등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결혼한 여성은 후스프레야(húsfreyja)라고 불렸으며 육아, 가정일, 농장일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여자는 20살이 되면 법적 성년이 되었고 스스로 거주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다만 결혼에 대한 권리는 없어서 제 아버지가 짝지어주는 남자와 결혼해야만 했다. 신랑은 신부 가족에게 지참금인 'mundr'를 지불했다. 여성은 의외로 이혼이나 재혼을 할 수도 있었는데, 남자들이 밖에 나갔다가 죽는 일이 하도 많아서 그랬다.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함께 사는 첩 문화도 있었는데 이런 여자들은 따로 프릴라(friðla)라고 불렸다. 보통 프릴라를 둘 정도의 사람이라면 상당히 부유하고 강한 유력자였다. 프릴라도 남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좋은 대우를 받긴 했지만 역시나 본처에 비하면 그 지위가 약했다. 첩의 자식, 즉 서자는 의외로 별 차별이 없었는데 혼외자식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 다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었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도 있었다. 물론 본처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조금 더 우위를 점했던 것은 사실이다.

 

 

 

남편이 죽으면 과부들은 그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다. 특히 남편 가문이 어느 정도 재력과 권세가 있는 가문이고, 그 가문에 적법한 남자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예 그 과부가 그 가문의 수장이 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런 여자들을 따로 바우그리기르(Baugrygr)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재혼할 때까지 쭉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혼하면 과부가 가지고 있었던 권한은 모두 재혼한 남편에게로 넘어갔다. 여자들은 여사제(gydja)나 예언자(sejdkvinna)가 될 수도 있었고 시인, 룬어 해석자, 상인,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방패 처녀'의 이야기가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일부 여자들은 병사로 활동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유입 이후 여성의 권리는 서서히 악화되더니 13세기 후반부터는 여타 기독교 문화권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종교

 

 

10세기 이후로는 바이킹들 중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대거 나타나긴 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북유럽 신화를 믿었다. 청동기까지는 그 원형격인 원시 인도유럽 신화68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앙을 믿었다. 그러다가 점차 신화 체계가 정립되고 나서69 바이킹의 전성기가 도래한 8~9세기에 북유럽 신화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의 융성함으로 인해 게르만 문화권에서 각 요일을 뜻하는 단어에도 북유럽 신화의 흔적이 남았을 정도였다.

 

 

 

군사

 

바이킹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면 죽은 뒤에 오딘의 궁전인 발할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믿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바이킹 남자들은 보통 하나 이상의 무기는 반드시 가지고 있었다. 모든 노르웨이 자유인들은 무기를 하나씩 지녀야만 했고, 오딘이 바이킹에게 내렸다는 조언집인 《하바말》에도 항시 무기를 챙기고 다니라고 쓰였을 정도였다. 부유한 사람이라면 헬멧과 사슬 갑옷, 방패와 검을 전부 지녔다. 즉 우리가 아는 '투구, 갑옷, 도끼들을 풀로 갖춘 바이킹'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보다 못한 복장이었다.

 

 

 

바이킹은 자신이 사용하는 무장은 직접 구비해야 했고 빈•부에 따라서 무장이 달랐다. 부유한 경우는 찰갑이나 사슬 갑옷을 착용했고, 대부분은 천 갑옷을 입고 싸웠으며, 방패와 창은 필수 무장이었고, 검은 부유한 경우 부무장으로 착용했다고 한다. 도끼와 단검은 도구로서 소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날도끼와도 연관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바이킹들은 던지기 좋은 가벼운 손도끼나 자루가 긴 외날 도끼인 데인 액스를 좋아했고, 양날도끼는 제의 의식에나 사용했다는 것이 당대의 성상화나 조각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이킹 전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무기는 도끼였다. 검은 만드는데도 비쌌고, 여유가 있는 남자 전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무기였다. 심지어 여자들도 도끼를 많이 써서 여자들은 무덤에 도끼와 함께 묻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양날도끼를 사용했다는 편견은 사실이 아니며, 실제 바이킹들은 데인 액스라는 외날 도끼를 썼다. 양날도끼를 쓰고 다녔다면 철을 낭비하는 팔자 좋은 놈이거나 과시용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바이킹 유물 중에는 정교하게 잘 제련된 검이 많이 출토되고 부무장으로 단검이나 검을 소지한 전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검은 만들기 어렵고 비싸다 보니 어디까지나 부무장 또는 의장용 성격이 강했고, 실제로 전쟁터에서 애용된 무기는 둥근 방패와 창이었다. 창의 길이는 보통 2~3m 가량이었으며, 들고 찌르는 것 외에 투창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단검도 즐겨썼다. 바이킹은 두 종류의 단검을 썼는데 하나는 'knífr'라고 하는 다소 평범하게 생긴 외날 칼이었다. 바이킹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무기로, 심지어 노예들조차 휴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목적보다는 야채나 나무를 깎는데 썼고, 조금 더 큰 사이즈는 사냥할 때 썼다. 무기용으로 쓰는 칼에는 일부러 날에 무늬를 새겨넣었다. 손잡이는 원통형이었고 칼등은 직선, 칼날은 약간 휘어진 곡선이었다.

 

 

 

또 다른 단검 종류는 '색스'였다. 브로큰백 스타일식의 단검이었는데 knífr보다는 더 무거웠고, 마체테처럼 사용했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 크고 무거운 색스를 사용했다. 만들기도 편하고 무거워서 타격력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고. 외날검인데 칼날이 워낙 무거워서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기까지 했다. 이 색스는 유럽 곳곳으로 이주한 게르만 부족들이 많이 썼는데 심지어 색슨족의 '색슨'이 이 색스에서 유래했다. 이주가 끝나면서 스칸디나비아반도를 포함한 유럽 대륙에서는 점차 인기가 떨어져서 사라졌지만, 바이킹이 정착한 브리튼 제도의 지방에서는 약간 남아있었다.

 

 

 

방패는 가장 일반적인 방어 수단으로, 유물에 따라 다양한 나무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가장 선호된 것은 라임나무, 그 다음이 비교적 더 무겁지만 단단한 참나무, 그리고 물푸레나무나 소나무등을 이용해서 만들기도 했다.링크 이외에도 가문비나무, 전나무등 사용할 수 있으면 다양한 나무들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가죽을 붙여 덧대거나, 테두리에 철을 박아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방패는 원형이었고 지름이 45~120cm 사이를 왔다갔다했지만 보통 75~90cm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바이킹식 선박의 측면 난간에는 방패를 걸어둘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여기에 방패를 걸어둔 바이킹 롱쉽은 마치 바이킹을 상징하는 클리셰나 다름없는데,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 파도나 바람에서 바이킹 승무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줬다. 매체에서는 라운드 실드들이 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카이트 실드도 썼는데 동로마에서 서유럽으로 유입된 카이트 실드가 다시 서유럽에서 바이킹들에게 유입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방패와 창 등을 주로 썼던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바이킹들의 전투는 방진을 이룬 보병 육박전이 많았다. 배를 많이 이용하는 생활상 말을 타는 문화나 기병은 꽤 나중에서야 등장했고, 말을 이용할 때도 초창기에는 물건을 나르거나 이동을 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기병을 활용한 전투 자체도 드물었다.75

 

 

 

탁 트인 개활지에서의 야전이나 해전에서는 활도 많이 이용했지만 보통 활을 쓰는 것보다 냉병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여겼다. 고고학적으로는 도끼 유물이 많이 발굴되고, 당시에 바이킹을 그린 벽화나 회화에서 도끼를 든 전사의 모습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활과 화살은 장거리에서 적을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바이킹들이 쓰는 활은 주목이나 느릅나무처럼 상대적으로 유연한 나무를 잘라 만들었고 당기는데 대략 400N의 힘이 필요했다. 400N이 40kg짜리 물체를 들때 필요한 힘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힘을 써야 활을 당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을 주고 쭉 당겨 쏘면 유효사거리가 최소 200m에 달했다. 활이 강할수록 사거리도 길어져서 그보다 더 멀리 나갈 수도 있었다. 현대처럼 시위를 입꼬리나 턱 아래가 아니라 가슴 쪽으로 당겨서 쐈다. 화살촉은 철로 만들었고, 가끔씩 나무나 뼈, 뿔을 잘라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독수리 깃털을 붙여 완성했다.

 

 

바이킹 전사들 중에는 반쯤 정신착란 상태에서 싸우는 버서커의 어원이 되는 베르세르크 등이 있어서 맹활약하기도 했다. 게임위른에서도 등장하는 버서커, 즉 광전사의 원조가 바이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버서커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입에 거품을 물고 동물처럼 울부짖으면서 싸웠다. 전설에 따르면 이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불과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눈으로 노려보기만 해도 적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주문을 외워 적들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 수 있었다고. 물론 전투가 끝나면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바이킹들은 이들이 곰이나 거대한 늑대로 변신할 수 있고, 인간보다는 트롤에 가까운 무서운 존재라고 여겼다. 어찌나 버서커들이 광포한 존재들이었는지 타오르는 숯불을 통째로 삼키기도 했으며,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전사 여섯 명을 한 번에 작살냈다는 카더라도 있다. 스칸디나비아 왕들은 버서커들을 휘하의 친위대로 고용하기도 했다. 버서커가 죽으면 곰가죽 위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알려졌지만, 베르세르크 문서에 들어가면 알 수 있듯이 반쯤 맞는 말로 곰가죽을 걸치거나 스칸디나비아의 권력자들이 친위대로 고용하긴 했지만, 고문헌을 연구하면서 베르세르크들이 트랜스 상태로 싸웠던 광전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복부에 자상을 입었을 경우 양파와 향신료를 섞은 수프를 먹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배에 양파 냄새가 나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서 장에 구멍이 났는지 여부를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배에서 양파 냄새가 나면 복부 장기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확인은 할 수 있었으나,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스캴드메르(skjaldmær), 혹은 방패처녀라고 불리는 여전사들도 존재했다. 원래 학계는 바이킹 전사들이 100% 남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무기가 함께 매장된 여자의 무덤이 발견되고, 971년 불가리아에서 바이킹 여전사들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증거로 여전사들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물론 남자들에 비하면 전사 내 비율은 압도적으로 작았다고.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여전사 발키리 역시 이 스칼드메르의 존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가설이 있을 정도다.

 

 

 

유명한 용병대로 욤스비킹이 있었다. 10세기~11세기 동안 활동한 바이킹 출신 용병대로 돈만 주면 기독교도 영주 심지어는 이슬람 교도들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북유럽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던 덕분에 바이킹 버전 성전기사단이라고 불린다. 이후 스칸디나비아가 덴마크를 시작으로 기독교화되면서 소멸되었으나, 그 타고난 기세 덕분에 위명은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바이킹들의 키는 컸지만 덩치는 의외로 크지 않았으며 유골 조사 결과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3cm,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58cm 전후로 추정되며 기초대사량이 높아 마른 근육 체형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작물에서 나오는 근육돼지 급의 바이킹들은 타 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스테레오타입이다. 하지만 평균 신장이 170cm 정도였어도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웬만한 유럽인들에게는 거인처럼 보였고 바이킹들은 동시대인들을 체격에서 압도했다.

 

 

 

갑주

 

현대 매체에선 야성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이사타이처럼 비키니 아머 수준의 장구류를 입고 나오지만, 당대의 바이킹들은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꽁꽁 싸매고 싸웠던 걸로 유명했다.

 

 

 

일단 대부분의 가난한 하위 전사들이 갑옷을 입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도 매체에서처럼 벗고 싸웠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위 전사들은 가장 두꺼운 평상복 위에 모피나 망토를 둘러매서, 일종의 천 갑옷으로 만들어 입은 채로 전장에 나갔다.

 

 

 

좀 여유가 있는 이들은 후손인 노르만 기사처럼 체인메일(사슬갑옷)을 자주 입었다. 다만 자주 입은 것과는 별개로 영 선호되는 장구류는 아니었다. 일단 사슬갑옷은 철고리 수천 개를 만들고 휘어서 연결하는 대단히 번거로운 작업으로 만들어지는데, 분업화가 덜 된 바이킹 사회에선 입는 전사 본인이 직접 수선해야 했으니 대다수 전사들이 싫어했다. 그래도 사슬갑옷 특유의 유연한 움직임은 해상 전투가 잦았던 바이킹 전사들에게 고평가를 받았다. 특히 바랑기안 가드78들이 사슬갑옷을 애용했는데, 이들은 원시적인 하네스79를 위에 걸쳐서 사슬 갑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도 했다.

 

 

 

가장 대접 받았던 갑옷은 라멜라 아머(찰갑)이었다. 주로 고위층들이 입고 다녔는데, 금속제가 대부분이었고 드물게80 가죽제(피갑)도 있었다고 한다. 바이킹의 가죽제 찰갑은 특유의 야만적인 분위기 때문에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

 

 

 

이 밖에도 상술한 베르세르크 전사들처럼 짐승의 모피를 뒤집어 쓰고 싸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덧붙여서 멋드러진 수염과 장발을 자랑하기 위해 투구를 쓰지 않았다는 낭설이 퍼져있는데, 바이킹들은 투구를 반드시 쓰고 다녔다. 바이킹들은 두 개 이상의 둥근 판을 리벳으로 조여 만든 슈팡겐 헬름을 썼으며, 여기에 특유의 T자형 코가리개를 달아 사용했다. 이 T자형 코가리개의 크기를 키우거나, 사슬을 달아서 면갑 효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의외로 상징으로 알려진 뿔투구를 절대 쓰지 않았다. 바이킹의 뿔투구는 바이킹을 악마와 동일시한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을, 리하르트 바그너를 비롯한 근대 창작자들이 차용하면서 기원했다. 실용적인 장구류를 선호했던 바이킹들은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뿔 장식을 쳐다 보지도 않았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바이킹들을 몰락시킨 동시대 그리스도교 기사들이 뿔투구를 쓰고 싸웠다. 뿔투구와 별개로 날개 장식을 달았던 투구는 실제로 있었으나, 신라 금관처럼 부유한 이의 매장품이나 중요 행사 용도로만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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