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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잣나무, 조주백수자, 趙州柏樹子, 조주스님의 잣나무,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

Jobs 9 2025. 3. 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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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백수자(趙州柏樹子; 조주스님의 잣나무)」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조사(祖師;달마)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니라."

"큰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져다 가르치지 마십시요."

"나는 경계를 가져다 가르치지 않았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尚莫將境示人。』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州云:『庭前栢樹子。』

 

이 공안(公案)에서 조주(趙州)스님은 「뜰 앞 잣나무(庭前柏樹子)」로 

사람들에게 「눈 앞에 있는 바로 그대[眼前者]」가 곧 그것임을 

알아차리도록 가르쳤다. 

학인(學人)이 불법(佛法)을 따로 찾으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 

즉 사람과 경계와 같은 상대적 분별견해를 초월한 「본래풍광(本來風光)」으로

달마요지(達磨要旨)의 참 기풍을 해석하였다. 

*본래풍광(本來風光) ;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미혹하지도 않고 깨어 있지도 않은 면목(面目).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분사(本分事), 자기본분, 본분전지(本分田地)라고도 한다.  

 




조주의 정전백수자는

 

이나무 저나무 구분한

 

분별상의 측백이 아닌

 

주객이 하나된 ‘진여’

 

 

 

원문: 趙州에게 因僧이 問하기를 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州가 云하기를 庭前柏樹子다(무문관)

 

번역: 조주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측백)나무이다.”

 

 

 

‘정전백수자’는 선가에서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화두다. ‘무문관’37, ‘종용록’47, ‘선문염송’421에 나타나 있다. 조주백수(趙州栢樹)라고도 부른다.

 

 

‘조주선사는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불교의 핵심인 깨달음의 수행법인 선법을 중국에 가지고 온 뜻을 묻는 제자의 답변에 왜 바로 눈앞에 보이는 뜰 앞의 잣나무라 했을까?’ 이것이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내용이다. 오로지 ‘시심마(是甚, 이 뭐고)’ 하는 의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이나 분별 지식을 가지고 화두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면 사구(死句)가 되고 만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생각이 막히고 논리가 끊어진 경계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분별과 차별의 양변(兩邊)의 상대적 경계를 떠난 공(空)의 세계를 체득하라는 뜻이다. 이 세계가 중도(中道)의 세계이고, 일심(一心) 불이(不二)의 자성(自性) 본체의 마음자리이다. 이 세계는 언어문자와 사량분별을 떠난 불립문자의 경계이다.

 

한 마디 말을 붙이면 곧 바로 어긋나고 만다(開口卽錯). 그래서 선의 세계에서는 논리와 이론적인 구조를 가진 언어를 배격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모든 문화가 언어문자에 의해서 사유되고 창조된다. 따라서 언어문자에 의해서 기록되지 않는 인간의 문화와 사유의 세계는 소멸되고 만다.

 

 

그래서 불립문자를 종지로 삼는 선종의 조사들도 ‘조사어록’이라 하여 자신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경계를 기록하여 방대한 선서(禪書)를 남기고 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고도로 상징화되고 축약된 교육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선문답이 생기고, 1700공안이 만들어졌다.

 

‘정전백수자’ 화두가 설해진 절은 조주선사가 80세부터 머물었던 조주성 동쪽에 위치한 관음원이다. 지금은 절 이름이 조주선사의 ‘정전백수자’ 화두를 나타내는 측백나무가 무성해 있어 백림선사(栢林禪寺)이다. 현재 절 마당 앞에는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가 무성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백(栢)’의 한자가 ‘잣나무(소나무과) 백’과 ‘측백나무(향나무과) 백’의 뜻을 가지고 사용해 왔는데 ‘정전백수자’를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할 때 번역자가 잘 살피지를 못하고 ‘뜰 앞의 측백나무’로 해야 하는데 ‘뜰 앞의 잣나무’로 번역하여 현재는 ‘뜰 앞의 잣나무’가 선어의 관용어가 돼서 고치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

 

조주선사가 말한 측백나무는 우리가 보통 소나무나 은행나무와 구분해서 말하는 분별상의 측백나무가 아니다. 주관(보는 사람)과 객관(측백나무)이 나뉜 상대적 상태가 아닌 주객이 하나가 된 초월적 세계 즉, 진리의 세계 진여(眞如)를 가리킨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위산스님이 서쪽에서 온 조사와 같이

 

“산승이 앉을 자리를 가져오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스님이 법상에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이 공부는 소위 초탈한 대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노승이 위산스님이 계신 위산에서 지낼 때였지. 한 스님이 위산스님께 여쭈었느니라.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위산스님이 이르셨느니라. 마치 서쪽에서 온 조사와 같이.

 

‘산승이 앉을 자리를 가져오시게!’

 

이 대목에서 소위 종사라면 이렇게 해야 좋다. 피하지 말고 본분사를 가지고 질문자에게 응하셔야 하는 거야!”

 

이때 한 스님이 조주스님께 여쭈었다.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정전 백수자(庭前 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도 경계(境界)를 써서 응하지 마십시오!”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산승은 경계를 써가면서 응하지 않느니라.” 스님이 조주스님께 다시 여쭈었다.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정전 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니라)!”

 

강설 /

 

경계는 손님이다.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의 핵심을 이리 피하여 돌리고 저리 피하여 돌리는 방법을, 경계를 가지고 응한다고 말한다.

 

눈푸른 사람은 전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경계가 없으나 모르는 사람은 사바의 세계 어디를 가나 손님이기 때문에 도처의 경계를 만난다.

 

“왜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셨을까?” 한번 의문에 빠져보자. 이것이 화두. 이 말씀을 지레짐작하여 경계라고 단정 지으면 열가지 화두 병 중의 하나에 걸린다.



“참 이상하네. 달마 스님이 서쪽으로 건너오신 까닭을 물음에, 뜰앞의 잣나무라고 하신 것은?”

 

화두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일단 의문을 가지는 게 기본이다. 더 중요한 점은 기상이 없이 맥 빠진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의문을 일으켜 평생 그렇게 조용히 앉아있기를 즐기는 부류. 옛사람은 앉는 것을 종으로 삼는 병폐를 꾸짖는다. “이런 누에고치 부류는 때려 죽여도 살생죄가 되지 않는다.”

 

조주 어록 원문/

 

조주스님이 다시 말씀하셨느니라.

 

“노승의 90년 전 일이니라. 마조 대사의 회상에는 선지식으로 80분이 넘게 계셨지. 한분 한분이 저마다 일가(一家)를 이루신 분이시지!

 

요즘 번뇌의 가지 넝쿨에다 또 가지 넝쿨을 뻗게 만드는 어중이떠중이 법사하고는 다르니라.

 

애시 당초 부처님께 나아감에 때가 멀어 이렇게 한 세대 한 세대의 차이가 크구나!

 

남전스님만이 평소 하신 말씀이니라.

 

‘원력수생(願力受生)한 보살이 되어 수행할지니라.’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 가르침에 깨우침이 있는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겠느니라. 아직 삭도(削刀) 물이 채 마르지 않은 애송이들이 참새 새끼의 노란 부리를 가지고 짹짹거리는 데 말씀이야. 감히 네거리에 나와 법문이라고 한답시고 법문을 하고는 공양과 절을 받는 게 가관이야! 300명 혹은 500명 청법 대중 앞에서 큰소리를 치느니라.

 

‘산승은 선지식이고 그대들은 초심 학인이니 잘 들을지니라.’

 

이런 부류가 날뛰고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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