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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5. 3. 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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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Pop(ular) Music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을 의미




대중음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해 왔으며 시간과 장소, 사람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르다.

 

 

사전적으로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중에게 중점을 둔 음악을 말한다. 순수음악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감각적인 대중성과 오락성, 그리고 상업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순수음악은 더욱 긴 시간의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대중음악은 짧은 시간의 유행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의 속성을 계속해서 흡수해 오면서 예술성과 심미성을 얻어나갔고 소위 말하는 예술성은 대중음악을 논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대중음악을 가리켜 흔히들 '팝'이라고 부르지만 완전히 잘못된 사용법은 아니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팝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큰 의미의 대중음악이 있고, 작은 의미로는 장르로서의 팝이 있다. 전자는 Popular music 내지 줄여서 그냥 Pop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후자는 보통 Pop이라고 하지 Popular라고 하지는 않는다. 줄임말이 의미가 축소되면서 고유명사화된 것이다.

 

 

 

대중음악은 2010년대에 들어 인터넷과 유튜브 등의 매체 발달로 인해 세계 최대의 음악 시장인 미국조차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파급력과 영향력이 이전보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대중음악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막강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 첫 문제는 미국의 대중음악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의 음악이 자국에서조차 인기가 없을 정도로 자생력이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 이것에 의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케이스이다.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에 큰 자국어 시장을 보유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자국 대중음악 가수들의 인기 기반이 탄탄한 이탈리아, 러시아, 튀르키예를 제외하면 앞서 말했듯이 자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자국에서도 영미권 대중음악보다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아예 독일은 힙합/랩이 차트를 쓸어갈 정도니 말을 다했다. 동유럽 같은 경우 러시아, 튀르키예와 남유럽 쪽에서는 자국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영미팝으로 도배되고 있다.   





역사



1930~1940년대



대중음악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학문적으론 중기, 후기 낭만음악과 초창기 근현대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데 궤를 같이한다.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장르들의 뿌리는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영국 음악 역시 대중음악의 정의를 내리는 데 있어서 많은 역할을 했다. 초창기 대중음악은 오페라와 낭만주의를 거친 클래식 음악, 혹은 지역 공동체에서 널리 불리던 민요 등에서 보드빌, 뮤지컬 등의 고유한 공연극을 통해 점점 장르로 자생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중음악은 미국 흑인 문화가 혼합한 음악인 블루스나 재즈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다. 다양한 공연 양식들과 교류하며 블루스와 재즈는 비로소 보편적인 대중음악 장르가 되는데, 특히 스윙 재즈는 최초의 주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루이 암스트롱이 본격적인 최초의 대중음악 스타로 간주된다.

 

 

 

이후 틴팬앨리(Tin-Pan-Alley) 지역 작곡가들이 상업성을 노리고 유럽 오페레타를 더욱 가볍게 만든 백인 음악인 트레디셔널 팝(Traditional pop), 산지와 지방의 컨트리와 포크가 발달하며 서서히 200년간 서양의 음악사에서 지배적이었던 클래식 음악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대중음악계의 실질적인 첫 번째 스타는 빙 크로스비이다. 대중문화라는 말을 정립시킨 인물로 20세기 역사상 가장 영항력 있는 음악 인물 중 한 명이며 영화배우로서도 역사상 티켓 판매량 3위에 올랐고, 20세기 초중반 대중문화를 홀로 정립해나간 전설적인 인물이다.

 

 

 

오페레타, 전통 음악, 스윙 등에 기원을 둔 초창기의 팝 음악, 트레디셔널 팝의 정립에 큰 공헌을 했다. 1930년대 스탠다드 팝(트레디셔널 팝)의 시대가 개막하며 기존 클래식 시대에서 대중음악을 메인스트림에 올려놓은 인물 중 하나로, 1930년대에 홀연히 등장해 가수, 코미디언, 배우를 두루 섭렵했으며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 멀티테이너, 연예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순히 미국 대중문화계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 대중문화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어마 무시하다.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의 미국인에 예술가, 연예인으로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과 함께 당당히 선정되었으며 트레디셔널 팝의 특징으로 꼽히는 크루닝(Crooning) 역시 빙 크로스비가 홀로 개발한 것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라면 White Christmas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를 한 실물 싱글이다.

 

 

 

동시대에 재즈 음악 역시 주류 대중음악이었는데, 재즈의 역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네 단어 중 두 단어인 루이 암스트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재즈 역사의 기념비를 세웠으며 음악가로서 미국, 나아가 전 세계 문화사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의 대다수 교과서 근현대사 부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 중 하나다. 근대 미국 사회 문화의 한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1940년대가 되면 이런 인물의 뒤를 이어 음악을 네다섯번 바꿔놨다는 평론을 받은 현대 재즈의 분위기를 확립한 마일스 데이비스가 활동한다.

 

 

 

1940년대에 이 흑인 음악인 재즈가 백인들의 취향에 맞게 한 번 변화한 스윙 재즈가 인기를 끌게 되는데, 현대적인 대중음악의 시작점으로 볼 수도 있다. 글렌 밀러나 토미 도시가 이 스윙 재즈 시대의 대표적인 밴드리더였다. 스윙 재즈는 이 시대 미국 음악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시대 미국하면 스윙 재즈였고, 미국의 대중 음악이라 해도 스윙 재즈가 먼저였다. 이 시기 스윙 재즈를 대표하는 것 중 글렌 밀러 밴드의 In the Mood가 있다.

 

 

 

이 시대에, 대중음악의 실질적인 태동을 알리는 것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음악 차트이다. 빌보드는 1936년 최초의 현대적인 음악 차트를 시작했으며, 1940년에는 현대적인 싱글 차트를 시작하여, 미국 전역에서 인기 있는 곡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트레디셔널 팝을 정형화되게 하였고, 194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미국 대중음악을 정의했다고 평가받으며, "그의 목소리는 우리 세기의 목소리였다"는 극찬을 받는 프랭크 시나트라이다. 그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가수(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인식되며 20세기의 대중음악사 가장 중요한 음악 인물로 평가 받는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40년 토미 도시 악단에 들어가 보컬이 되었는데 이때 발표한 "I'll Never Smile Agai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를 하며 돌연 스타덤에 올랐고, 특히 10대 소녀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10대/사춘기 소녀들의 우상이라는 뜻의 바비 삭스 아이돌(Bobby Sox Idol))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역사상 최초의 아이돌 현상은 비틀즈가 불러왔으나,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대중음악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기원은 프랭크 시나트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명곡으로는 My Way, Fly Me to the Moon 등이 있다.

 

 

 

동시대에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 등의 가수도 프랭크 시나트라에 비견할 만한 상업적 성공과 인기를 얻었다.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는 프랭크 시나트라보다 시대의 아이콘적인 면은 적지만, 차트 성적이나 히트곡 수로만 보면 프랭크보다 월등했다. 국내에 알려진 대표적인 냇 킹 콜의 명곡으로 L-O-V-E가 있다.

 

 

 

토니 베넷과 코미디언 출신 딘 마틴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남성 4중창단들의 활약도 이 당시 돋보였다.








1950년대 대중음악




1950년대가 되며 SP가 쇠락하고 LP가 이를 대체하며 싱글이 아닌 앨범 단위의 음악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로큰롤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며 대중음악은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이루기 시작한다.

 

 

 

1950년대에 흑인음악인 블루스가 미국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블루스가 스윙 재즈를 흡수하면서 리듬감이 중요해지고 리듬 앤 블루스, 줄여서 R&B가 탄생한다. 그러다 1950년대 척 베리라는 로큰롤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척 베리는 백인의 음악인 컨트리도 가미하며 신선한 사운드를 연주했는데 이후로 백인들도 블루스를 하기 시작하며 로커빌리라는 장르가 탄생한다. 로큰롤의 정체성의 확립과 태동에 큰 영향력을 준 인물로, 존 레논은 그를 보고 일컬으길 로큰롤의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건 척 베리라고 정의했다. 척 베리의 대표곡으로 Johnny B. Goode이 있다.

 

 

 

로큰롤은 척 베리, 고전 로큰롤의 대명사 같은 곡으로 사실상 로큰롤의 시작을 알린 Tutti Frutti[로 스타덤에 든 리틀 리처드같은 아티스트들이 이끌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으면서 떠오르는데 그러나 당시 시대의 주류들은 천박하다고 경멸을 표현했고,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트레디셔널 팝을 즐겼다. 그러다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흐름을 변화시킨 대중음악사의 거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홀로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며 로큰롤을 끌어올려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격렬하던 시대에, 시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세계적인 성공을 하면서 음악의 인종 화합을 이루었다.

 

대중음악 내에서 처음 주류 진입에 성공한 하위문화 음악으로, 이는 50년대 이후에도 반복되며 주류음악과 하위음악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는 형국을 맞는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 시대를 이끈 명곡으로 Heartbreak Hotel, Jailhouse Rock, Hound Dog 등이 있다.

 

 

 

무려 20대 초반의 애송이 주제에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엘비스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그때까지 오락 산업이든, 일반 대중컬쳐든 30대 ~ 50대 중심으로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트렌드 또한 그러했으며, 지금의 영미권을 본다면 상상도 못 하겠지만 10대는 물론이고 청년층의 입지는 상당히 낮았다.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공을 기점으로 청년층의 입지가 메인스트림에 오르기 시작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락스타의 탄생이 청년 문화를 지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후배 음악가인 비틀즈의 문화 혁명으로 문화계 뿐만 아니라, 하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10-20대의 이념, 서브컬처가 메인스트림으로 오르게 되면서 사실상 주 핵심이 청년층이 됐는데, 이러한 혁명의 첫 신호탄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공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락스타이자,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변화시켜버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 이전까지의 대중음악계에서는, 스탠다드 팝 무대든 재즈 무대든, 기존 클래식 시대의 춤곡에서 유례한 댄스가 일반적이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경박한 댄스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계만의 댄스 형식이 시작된다.

 

 

 

그리고 로큰롤의 탄생으로 기존의 팝 음악도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50년대 ~ 1960년대에 걸쳐서 로큰롤, 록 음악과 젊음 지향적인 성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영미권을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그렇게 이전 시대 스타일의 팝은 트레디셔널 팝으로 불리게 된다.

 

 

 

블루스와 컨트리는 각각 흑인과 백인 커뮤니티 내에서 지역 음악으로 유행했고, 대중음악은 백인 가수 중심의 로큰롤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가자면 아무리 로큰롤, R&B이 탄생하고 유행한 시대라고 하지만 이때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은 다름이 아닌 재즈였다. 이 재즈의 영향력은 1960년대 초중반에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시작으로 급락하게 된다.

 

 

 

1958년부터, 미국에서는 "로큰롤의 종말"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58년 제리 리 루이스의 13세 사촌과의 결혼, 리틀 리처드의 "락앤롤은 사탄의 음악이다!" 발언 이후 가수 생활 은퇴, 척 베리의 체포, 이 사건들로 인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입대, 후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발라드 명곡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발매한다.

 

 

 

그리고 1959년 버디 홀리를 포함한 로큰롤 가수 3명의 경비행기 추락해 사망하며, 이 사건을 가리켜 음악이 죽은 날이라 부르게 된다. 같은 해 락앤롤을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한 라디오 디스크 쟈키 앨런 프리드의 페이올라 사건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락앤롤 정신은 사장되고야 말았다.









1960년대 대중음악

 

로큰롤 음악이 사장되어 버리자, 1960년대 초반의 미국 음악계는 크게 세 가지의 음악 장르가 주류가 되었다.

 

 

 

먼저 첫 번째로 소울과 R&B를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았다. 1959년, R&B의 대부 레이 찰스는 What'd I Say를 시작으로 일약 최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하고, 모타운의 초기 아티스트들도 히트하기 시작한다. 로이드 프라이스, 브룩 벤턴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로는, 로큰롤과 기존의 트레디셔널 팝을 섞은 팝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리키 넬슨이 대표적이다. 로큰롤 등장 시기 이전 스타일의 팝 음악은 트레디셔널(스탠다드 팝)이라고 구분짓게 되었다.

 

 

 

세 번째는, 이 로큰롤 음악에서, 로큰롤 정신은 빼버리고 특유의 멜로디만 남은 댄스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처비 체커의 The Twist를 시작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바비 루이스의 Tossin' and Turnin', 처비 체커의 Pony Time, 디 디 샤프의 Mashed Potato Time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1960년대 초반 미국 대중음악계의 주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대중음악계에 큰 전환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사실상 유명을 다한 로큰롤이 바다 건너 영국에서 유행하면서 재즈와 결합하게 되고 자연스레 스키플 밴드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였던 비틀즈가 1964년 미국에 진출하게 되고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시작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며 범지구적 인기를 구가한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현대 대중음악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며 세부 장르들이 태동하고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비틀즈는 로큰롤에서 록 음악을 정의하면서 대중음악의 바탕에 록을 자리잡게 했고,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든다. 그리고 비틀즈는 대중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꿨다.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에 비틀즈의 음반이 상상을 넘는 열광적인 판매량을 보이며 기존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의 활동으로 1960년대부터 록 음악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로큰롤은 발전하면서 그 뿌리인 컨트리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다양하고 실험적인 하위 장르를 포함하는 하나의 형식을 갖춘 상위 장르인 록 음악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1960년대 초중반부터 음악계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이 격변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시작하여 영화계도 현대적으로 바뀌면서 영화계를 포함한 대중문화계 전체가 현대적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에 비틀즈가 만든 자유로운 사회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아직 근대적인 색채가 강했단 시대에서 새로운 현대 시대로 발전 시점에 비틀즈가 강력한 오케스트레이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블루스가 영국으로 건너가 만들어진 브리티시 블루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와 R&B 밴드에서 시작했던 더 후는 영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비틀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I Can't Get No) Satisfaction같은 명곡으로 하드 록의 시초를 열면서 젊은 층의 큰 지지를 받았고 이는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로 상징되는 히피 문화는 절정에 오르다가 1970년대에 끝을 맞는다.

 

 

 

한편 1965년, 비틀즈는 Yesterday와 싱글곡 모음집이 아닌 작품으로 보는 '앨범'의 시초가 되는 명반을 내놓는데 바로 Rubber Soul이다. Rubber Soul 이전에도 '명곡'들은 많았지만, 대중음악계 최초의 '명반'은 Rubber Soul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로 앨범시대를 불러온 시초작이다. 이 Rubber Soul을 시작으로 자극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주도적으로 명반을 내놓기 시작하는 앨범시대가 도래하는데, 이 앨범시대가 개막하면서 상업적인 발전을 넘어 대중음악계는 더욱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틀즈의 Rain 등으로 시작됐다고 평가되는 마약을 한 몽환적인 느낌의 록 음악이 유행하는데, 이를 사이키델릭 록이라고 한다. 비틀즈가 1966년에 내놓은 걸작, Revolver가 사이키델릭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부터 비틀즈는 이전보다 좀 더 다양한 주제의 가사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갖은 실험적인 시도로 대중음악에 실험음악을 도입했다. 이 앨범으로 비틀즈는 한 시대의 끝과 다른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Revolver가 시작하고 페퍼 상사가 상징하는 사이키델릭 록의 사조를 바탕으로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대중음악계를 뒤흔든다. 이 사조는 1970년까지 이어지다가 샤론 테이트 암살사건으로 히피 문화가 몰락하고 사이키델릭 록을 이끌던 3J가 비슷한 시기에 요절하며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6년, Rubber Soul에 충격받은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대중음악의 완벽한 고전으로 불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Pet Sounds를 탄생시키는데, 이것이 대중 음악가들에게 많은 충격을 몰고 온다. 그중 God Only Knows는, 2023년도 평론에서는 앞으로도 현대 대중음악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들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완벽한 작곡이라는 평론을 받았다.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에 충격받은 비틀즈는 1967년,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역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탄생시킨다.

 

 

 

이 작품이 위대하다 평가받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크게 보면 일종의 유행이나 다름이 없던 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고 다른 음악들과 만나 확장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 그리고 1960년대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분리가 강하던 시기였는데 페퍼 상사는 20세기까지의 고전 음악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분리와 고립을 넘어 서양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 그리고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에 이전까지 확보했던 대중성에 기초해 위대한 예술이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덕목인 '보편성'을 획득한 사례라는 것이다. 비틀즈 신드롬이 생겼을 때 당혹해하던 기성세대들도 페퍼 상사는 거부감 없이 들었고, 그렇게 세대 간 단절을 끊어내면서 모든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이 시작됐다. 소위 고급 문화를 지향하는 클래식 음악계도 페퍼 상사를 통해 받은 신선한 충격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바꾼 음반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같은 해, 중요한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를 탄생시킨다. 앤디 워홀이 밴드의 후원자로서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었으며 펑크 록, 개러지 록, 익스페리멘탈 록, 뉴웨이브, 슈게이즈, 노이즈 록, 고스 록 등 그외 하부 장르가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또한, 1969년에는 The Velvet Underground를 발매한다. 마이너한 장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전작과 달리, 이 앨범은 부드러운 팝 멜로디에 비범한 미니멀리즘을 결합했다는 점 때문에 얼터너티브 록에 큰 영향을 미친 앨범이다. R.E.M.이라던가 디셈버리스트, 빅 스타, 비트 해프닝, 윌코 등이 이 앨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60년대 음악임에도 촌스럽지 않은 코드 진행과 사운드 덕분에 모던 록으로 대표되는 21세기 록 트렌드의 초석을 닦아놓은 앨범으로 평가받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높이 인정받는 명반이다.

 

 

 

앞서 언급했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함께 이끌었던 롤링 스톤스는 초기에는 블루스나 로큰롤 곡들을 커버하거나 비틀즈가 써준 곡을 받아 발매하는등 그저 그런 행보를 보였으나, 1965년 키스 리처드의 자작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시작으로 이후 롤링 스톤스 4대 명반이라 불리는 앨범들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로큰롤에서 록 음악이 아직 완전히 형성되기 전부터 '자유', '저항', '퇴폐'를 불어 넣어 현대에 일컫는 록의 정신을 세겼으며, 음악적 영향력으로 보면 록밴드로는 그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구르는 돌이라는 명칭답게 지금까지 구르고 굴러오며 현재는 세계 최고의 록밴드의 자리에 올라섰다.

 

 

 

1966년,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채운 명반 Aftermath을 시작으로 평론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그들의 음악성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7년 Between the Buttons를 시작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역작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재거/리처즈의 작곡 능력과 브라이언 존스의 편곡 능력 및 악기 연주 능력이 조화되어 롤링 스톤스의 앨범들 중 유일하게 기존의 이미지를 버리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록을 지향한 앨범이다.

 

 

 

1960년대 초반, 포크 음악에는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등장하며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데 밥 딜런이 대중음악계에 남긴 유산은 당시 의미없는 낱말에 지나지 않은 노래 가사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문학적이고 좀 더 은유적인 이야기를 담게 하며 대중음악에 부재했던 철학을 부여 했다는 점이다.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렇게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이 시기 밥 딜런이 출시한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Highway 61 Revisited에 수록된 밥 딜런의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은 명실상부 밥 딜런의 대표곡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을 꼽을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곡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버즈의 활동기이기도 하다.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컨트리 록 등 여러 장르에 음악적으로 기여하여 1960년대와 그 이후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특히 맥귄은 이미 버즈 결성 이전부터 비틀즈의 곡들을 모두 어쿠스틱으로 편곡해 부를 정도로 열렬한 팬이어서 1964년도 비틀즈의 앨범 A Hard Day's Night에서 조지 해리슨이 사용한 12현 리켄배커 기타에 영향을 받아 버즈도 같은 기타를 사용했으며 조지 해리슨과 로저 맥귄의 쟁글거리는 기타 사운드는 훗날 쟁글 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러 혼란을 겪은 밴드인데, 1967년에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The Notorious Byrd Brothers는 무그 사운드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흡수해 찬사를 받으며 버즈판 Pet Sounds로 남게 되었다.

 

 

 

로저 맥귄과 크리스 힐먼만 남은 버즈는 그램 파슨스와 힐먼의 사촌인 케빈 켈리를 기용해 테네시, 내슈빌에 박혀서 Sweetheart of the Rodeo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음악적 충돌과 저조한 판매량 역시 갖가지 충돌을 낳다가 남아공 투어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그램은 탈퇴했다. 이후 이 앨범은 얼트 컨트리 록의 시발점으로 재평가 받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 버즈의 또 다른 명반이 된다.

 

 

 

1964년에 데뷔한 킹크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록 밴드이다. 1966년의 Face to Face를 시작으로 음악적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전곡이 레이 데이비스의 자작곡으로 이뤄진 첫 앨범으로 음악적으로 큰 진화를 이룬 작품이었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며 발표한 싱글 Waterloo Sunset가 큰 히트를 내었고, 1967년 발표된 앨범 Something Else by the Kinks은 밝은 로큰롤 성향이 줄어들고 영국적인 멜로디가 있는 서정적인 곡들 위주로 짜여진 앨범이었다. 이로서 여러 뮤지션이나 평론가, 프로듀서들이 이른바 킹크스 사운드(Kinks Sound)로 지칭하던 타 밴드들과 다른 킹크스만의 독창적인 사운드가 완성된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미국 시장에서 대실패 등, 큰 실패를 맛보고 안 좋은 일을 연이어 겪는다. 현대에 와서 킹크스는 영국 포크 음악과 전통을 추구하면서 팝 멜로디를 만들어 '영국스러움'이나 '팝 멜로디', '서사가 있는 가사'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모타운을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은, 미국 음악계의 3분의 1이 날아간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로도 계속 전성기를 누렸다. 모타운은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포 탑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마사 앤 더 밴델라스, 더 미라클스 등의 아티스트를 기점으로 미국 음악계를 점령해갔다. 이 중에서도 슈프림즈는 빌보드 싱글 차트 갯수 기준으로는 비틀즈 다음가는 인기를 누린다. 같은 시기 윌슨 피켓, 오티스 레딩 등의 애틀랜틱 레코드, 스택스 레코드 아티스트들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매했다.

 

 

 

소울 음악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가교 역할을 한 에타 제임스, 소울의 왕이라 불리던 쌍두마차 샘 쿡과 오티스 레딩, 그리고 시카고 소울의 기린아 커티스 메이필드 등이 이 당시에 유명했던 인물들. 또한 흑인음악의 대중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아이즐리 브라더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다.

 

 

 

1963년에는 로네츠의 Be My Baby(로네츠)가 출시한다. 비틀즈, 브라이언 윌슨과 같은 스튜디오 개척자들을 위한 로제타 석이라 칭해지는 이 희대의 명곡은 사상 최고의 팝 레코드 중 하나로 불린다.

 

 

 

1967년에는 오티스 레딩이 부른 곡 Respect를 아레사 프랭클린이 커버해서 발표한다. 아레사 프랭클린 버전은 당시 막 시작되던 페미니즘과, Black Power Movement(흑인 자부심 고취 운동)에 대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곡이었는데, 페미니즘적인 사상이 들어가 있는 최초의 노래 중 하나이며, 백인들에 영합되려고 했던 모타운과는 다르게 당시 미국 흑인들의 사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흑인 음악인 소울 음악, R&B, 재즈 등이 서로 결합되어 현재의 수많은 흑인 음악의 모태인 펑크(Funk)가 탄생한 시기다. 소울 음악이라는 음악 장르를 완성했고, R&B의 유행에도 큰 업적이 있으며 펑크라는 장르를 만든 소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은 이 장르의 개발과 대중화를 거의 홀로 이끌었다. 1965년 Papa's Got a Brand New Bag (Part 1)으로 대중화의 서막을 알렸고, 이후 60년대 중후반 수많은 펑크 히트곡을 내놓는다. 제임스 브라운이 펑크를 대중화 시키면서, 수많은 펑크 아티스트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과 아이즐리 브라더스가 있다. 소울을 대표하는 제임스 브라운의 명곡으로 I Got You (I Feel Good)이 있다.

 

 

 

다시 하드 록으로 돌아오면, 1966년에 각 분야의 최고들인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가 결성한 세계 최초의 슈퍼밴드, 크림이 등장하는데 크림은 블루스 베이스의 초고음과 즉흥 연주를 보였으며 이들은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하드 록의 발전과 헤비 메탈 장르의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 시기 비틀즈의 Helter Skelter가 최초의 헤비 록 혹은 메탈로서 헤비 메탈의 탄생을 예시한다. 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역주행 사례로 크림의 Disraeli Gears 앨범에 수록된 Sunshine of Your Love가 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비로소 로버트 플랜트를 영입하며 완전체를 이룬 레드 제플린과 1970년대에 결성되는 블랙 사바스와 함께 하드 록의 불경한 삼위일체를 이루는 딥 퍼플이 데뷔하며, 레드 제플린은 1969년 Led Zeppelin 앨범을 시작으로 1970년대 하드 록의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다. 레드 제플린의 이 시기 대표곡으로는 Babe I'm Gonna Leave You, Good Times Bad Times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 4월에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한 것이다. 대중음악계도 이 시기 대대적인 조의를 표했으며, 대표적으로 비틀즈는 1968년 후반기 명반 The Beatles의 Blackbird로 조의를 표했다. 이외에도 비틀즈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금지하며 민권법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인종차별 완화에 여러 가지 공헌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시대로 수많은 사람이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히피 무브먼트가 그러한 이유로 탄생하고 절정을 맞고, 전쟁에 반대한다는 사회 각지에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음악계도 당연히 그러했고, 단순히 반전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명작들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앞서 언급한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와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명곡이자, 롤링 스톤스의 희대의 명곡 Gimme Shelter가 그러하다.

 

 

 

그리고 대중음악계에서 본격적인 무대 퍼포먼스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시작한 춤에서, 댄서의 면모는 제임스 브라운같은 뮤지션들이 이어 갔으며, 막춤이나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관중들을 조련하며 공연을 이끌어 나가는 면모는 록 밴드들의 프론트맨들이 이끌어 나갔다.

 

 

 

1960년대의 롤링 스톤스, 더 후, 레드 제플린,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등의 밴드들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치아로 기타줄을 연주한다던지 기타를 이용한 갖은 퍼포먼스를 보였고,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는 특유의 윈드밀과 슬라이딩, 그리고 악기 부수기 등의 퍼포먼스로 후대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가 기타나 관악기가 솔로 연주를 할때 특유의 막춤을 추는 퍼포먼스부터, 애드리브를 포함한 여러 가지 관객 조련까지 후대의 록 밴드부터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영향은 다음 시대에도 이어지며 발전한다.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가 혜성같이 등장하여 이펙터 등의 사용을 정립하고 좡좡거리는 주법을 퍼뜨려 이후의 록 음악계에서의 기타 연주법에 대한 기틀을 잡았다. 기타리스트의 역사는 이 사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는 기존의 흑인 블루스 연주자나 팬들한테는 상당히 멸시받았기도 했지만 이후 재즈, 소울 음악, 펑크 등 흑인 음악계도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아들여 큰 발전을 이룩한다. 그렇게 헨드릭스에게 가던 질타는 후대에 남긴 영향력이 워낙 거대했기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 시대에 등장한 비틀즈가,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1970년에 해체를 한다. 그들의 마지막 작품인 Abbey Road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 커버로도 유명하며, 1960년대 예술을 집대성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역작이다.

 

 

 

또한, 대중음악계에서 일렉트로닉 뮤직이 시작된 시대이다. 대중음악계에서 처음 전자음악적인 색채를 띄우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으로, 이 시기 비틀즈가 페퍼 상사, 화이트 앨범, 애비 로드 등에서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은 여러 음향 실험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시켰고, 처음으로 전자 악기만을 이용한 음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미국의 현대음악 계열에서 활동하던 웬디 카를로스가 바흐의 곡을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로만 연주한 음반 Switched On Bach가 히트를 치고 나서 였다.

 

 

 

미국의 밴드 실버 애플즈, 그리고 캔이나 크라프트베르크같은 서독의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들에 의해 1960년대 후반부터 발전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일렉트로닉 록이 탄생하고 발전한 시대로, 1970년대에 들어서 탠저린 드림, 장 미셸 자르가 이어서 일렉트로닉 뮤직을 발전시키고, 대중화시킨다.

 

 

 

뮤직 비디오도 이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최초의 뮤직비디오 중 하나는 디온의 1963년 스코피톤용으로 제작한 Ruby Baby 뮤직비디오다. 문제는 스코피톤 자체가 잠깐 유행하고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기기였다는 점인데, 한창 유행했을때도 미국 전역에 겨우 500여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틀즈는 최초로 TV용으로 1966년 Paperback Writer, Rain 싱글 발매 때, 광고 목적으로 프로토 타입의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고, 그 후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는 최초로 시각적인 효과를 도입하고, A Day In The Life와, Penny Lane같은 독특한 영상미를 추구하는 예술성이 잡힌 현대 뮤직 비디오의 시초격 작품을 제작한다.

 

 

 

이러한 수많은 발전과 업적들로 인해서 서양에서 흔히 이 시기를 대중음악사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부른다.













1970년대 대중음악

 

 

이 시기가 록 음악 최대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음악사를 들었다 놨던 비틀즈가 1970년대가 시작되는 1970년에 해체를 선언 한 뒤로 장르의 세분화가 가속화되었고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이 전성기를 맞고, 시각적 충격을 강조한 글램 록이 등장, 팝 록이 최전성기를 보냈으며, 팝 록에서 파생된 좀 더 잔잔한 분위기의 록인 소프트 록, 그리고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은 로큰롤의 원류 음악을 받아들인 루츠 록과 분파로 하트랜드 록, 컨트리 록이 등장하고 또한 개러지 록에 뿌리를 둔 펑크 록(Punk rock)이 등장한다.

 

 

 

펑크 록에서 파생한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도 등장, 댄스 록도 탄생한 시기이다. 고딕 록의 움직임도 시작됐으며, 1960년대 후반기에 탄생한 일렉트로닉 록이 정립, 발전했고, 인더스트리얼 록도 등장한다. 흑인 음악인 펑크(Funk)에 영향을 받은 펑크 록(Funk rock)도 등장했고, 블루스 록도 전성기를 맞으며, 록이란 록 음악은 거의 전부 등장한다.

 

 

 

한편 록과 대척점에 있는 흑인 음악 장르는 1970년대 초중반 소울과 펑크로 큰 재미를 본 뒤, 70년대 중후반 디스코가 제대로 터지면서, 팝 록과 소프트 록을 제외한 록 음악을 일시적으로 밀어 내고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시기의 소울과 디스코 등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백인 음악으로 인식된 록 음악과 흑인 음악 등이 크로스오버를 이루게 됐다.

 

 

 

영국 음악계

 

1971년 롤링 스톤스는 롤링 스톤스 4대 명반 중 하나인 Sticky Fingers로 오히려 1960년대를 뛰어 넘는 인기를 구가하고 더 후도 그들의 명반 Who's Next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데뷔한 밴드중에서 1970년대에 인기를 끄는 밴드들이 등장하게 된다. 에릭 클랩튼을 중심으로 한 블루스 록 역시 큰 인기를 얻었으며, 70년대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인 Layla가 71년 초에 발매가 된다. 롤링 스톤스와 더 후의 71년도 앨범의 명곡을 하나씩 적어두면 Brown Sugar, Baba O'Riley가 있다. 롤링 스톤스는 바로 다음 해 영국 밴드의 손으로 만든 아메리칸 록의 금자탑이라 평가받는 그들의 최고 역작 Exile on Main St.를 발매하나, 상업적인 면에서는 처참했는데 이후로 잠시 침체기에 든다. 그러나 Angie같은 발라드 명곡을 내놓기도 한다.

 

 

 

1970년대는 하드 록의 전성기로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중 레드 제플린은 1971년 하드 록, 고전 메탈 최고의 걸작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언급되는 Led Zeppelin IV를 내놓는데 레드 제플린의 아이콘이자 단일곡으로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명곡 중 하나인 Stairway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이 Stairway to Heaven은 은유적인 문학적 가사와 그에 걸맞은 소설 구성같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완벽한 구조, 전/초/후반부 마다 달라지는 장르, 8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명곡이다.

 

 

 

그들 커리어 최고의 작품 이후, 1973년 성공적인 Houses of the Holy 앨범을 넘어 1975년 Physical Graffiti 앨범을 만들어 내는데 하나하나 각 분야의 최고라 불릴 수 있는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의 역량이 최고점에 달해 있는 작품이다. 수록된 대표적인 명곡으로 Kashmir[가 있다. 이런 명반들을 줄이어 내놓았는데.. 1977년, 로버트 플랜트의 5살 아들이 사망하며 팀 해체의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이겨내고 밴드로 돌아오는데도 불구하고 1980년, 존 본햄이 사망하며 레드 제플린은 해체하게 된다.

 

 

 

레드 제플린은 대중음악 역사상 멤버 모두가 가장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밴드다. 멤버 전원이 한 손에 들 정도로 대단한 역량을 지녔는데, 보컬의 로버트 플랜트, 기타의 지미 페이지, 베이스의 존 폴 존스 그리고 드럼의 존 본햄. 레드 제플린은 언론에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음에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1970년대 총 앨범 판매량을 정산할때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다. 레드 제플린은 록 음악의 기술적인 면에서 전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고, 음악 외적으로 화려하고 섹시한 락스타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1971년 블랙 사바스나 딥 퍼플도 각각 Paranoid, Deep Purple in Rock같은 하드 록, 고전 메탈의 역사 남을 명반을 발매하며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블랙 사바스와 딥 퍼플은 레드 제플린보다 헤비 메탈이라는 장르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메탈 리프를 뽑자면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정립해지기 시작한 헤비 메탈은 주다스 프리스트 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해간다.

 

 

 

1973년, 시드 바렛의 탈퇴 이후 방황기를 겪던 핑크 플로이드도 주목받는 밴드가 되었는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역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발매되면서 역사상 전례없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누적 958주간 빌보드 200에 차트인했을 정도로 세계 음악계의 스테디셀러이기도 한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단일명곡이자 예술작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1975년, 또 다른 명반 Wish You Were Here을 발매하며 프로그레시브 록에서의 입지를 굳힌다.

 

 

 

핑크 플로이드부터 킹 크림슨 등 여러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도 시작됐다. 프로그레시브라는 이름답게 프로그레시브 록은 클래식부터 재즈 등 여러 장르의 음악적 요소 도입, 대곡 지향, 변박과 엇박 등을 이용한 치밀한 구성, 컨셉 지향적인 앨범, 각종 실험적 요소 등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장르를 묶어 부르는 말인데 이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가 시작하면서 대중음악계에 여러 큰 영향을 주었다.

 

 

 

글램 록 또한 유행했는데, 대중음악의 피카소라 불리는 데이비드 보위는 그전까지 다른 뮤지션들과 다르게 특이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으며, 본인의 음악에 페르소나를 도입하면서 정체성을 굳힌다. 데이비드 보위의 걸작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가 그 시초로 평가된다. 이는 대중음악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무대에서 각종 세트 기법과 연출을 도입하고, 각종 분장과 의상 등으로 무대에서 비주얼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전 시대까지는 록 아티스트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던 퍼포먼스에 힘을 주며, 음악에도 시각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대중음악에서 공연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르소나에 있어서 마돈나의 선조이며, 마이클 잭슨에 앞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으니, 음악의 시각적 감상의 시조인 셈이다. 데이비드 보위뿐만 아니라 록시 뮤직 또한 글램 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글램 록의 비주얼 부분은 MTV 세대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공연이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퀸도 빼놓을 수 없는 밴드이다. 1975년, 그들 커리어 최고 명반 A Night at the Opera을 발매한다. 그 당시에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가 되며 엇갈린 극찬을 받고 있다. 수록된 퀸의 대표곡 Bohemian Rhapsody은 뮤직 비디오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한편,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펑크 록이 등장함에 따라 록 음악은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은 당시의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등 연주가 너무 복잡하고 테크니컬한데다가 추상적인 가사를 쓰는 것을 증오했고, 기업화되어버린 록 밴드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 대신 사운드 면에선 더 원초적이고 단순한 로큰롤 음악을, 가사 면에선 뜬구름같은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거리의 생생한 현실 얘기를 다룬 쉬운 가사를 추구하였다.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등의 펑크 록 밴드들도 이 시기에 활동하다 장렬히 산화했다. 펑크의 대모라 불리는 패티 스미스는 이 시기 Horses라는 대중음악사에 아주 중요한 명반을 발매한다.

 

 

 

펑크 록을 대표하는 명반들로는 1976년에 발매한 라몬즈의 Ramones 앨범은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 앨범의 가치를 알아본 관련업계 종사자들은 하나 같이 극찬을 했고, 흔히 펑크 록의 필수요소라 불리는 DIY 정신 충만한 업템포의 빠르고 경쾌한 쓰리코드, 다운 스트로크 위주의 기타 연주를 담은 단순한 음악은 사실상 이 앨범이 구체적으로 확립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1977년에 발매한 섹스 피스톨즈의 걸작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앨범이 있다. 이 앨범은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펑크 록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더 클래시의 London Calling 앨범이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는 이기 팝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론트맨이었는데, 시드 비셔스는 베이스도 제대로 칠 줄 모르는 베이시스트였지만, 무대 매너가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회자되곤 한다.

 

 

 

1970년대 후반기는 디스코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때 당시 침체기를 걷고 있던 롤링 스톤스가 기존의 하드 록, 컨트리와 디스코와 블루스 등을 융합해 Some Girls라는 명반을 내놓는다. 이 앨범으로 롤링 스톤스는 빌보드 앨범,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당시 포스트 펑크와 침체기라는 것이 없이 잘 나가던 팝 록이 디스코에 영향을 받아, 댄스 록이라는 장르가 탄생한다. 보통 시초작을 Gina X의 "No G.D.M.", 러스 발라드의 "On the Rebound", 그리고 롤링 스톤스의 Miss You가 꼽힌다. 이 롤링 스톤스의 Miss You는, 롤링 스톤스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크로스오버로 평가되기도 한다.

 

 

 

비틀즈 해체 후, 멤버들의 이야기

 

해체한 비틀즈 멤버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도 이 시기에 작품을 내며 활동한다. 폴 매카트니는 '윙스'를 결성해 McCartney 앨범을 시작으로 현재의 인디 팝 전체 장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인정받는 기발한 명반으로 여겨지는 Ram을 발매, 그리고 Band on the Run같은 앨범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조지 해리슨도 All Things Must Pass 앨범을 출시하는데, 3LP로 발매된 탓에 일반적인 LP 앨범에 비해 가격이 2.5배나 비쌌는데도 빌보드 앨범 차트에 7주 동안이나 1위에 랭크되는 등 상업적으로도 어마무시한 성과를 올렸다. 1973년에 발매한 Living in the Material World도 크게 성공했다. 링고 스타도 Ringo 앨범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그리고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1970년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971년에는 Imagine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의 타이틀이자 수록곡 Imagine은 현재는 그 자체로 평화와 반전주의를 상징하는 대표곡이 됐다. UN부터 올림픽까지 다양한 국제 기관과 행사에서 사용되는 준(準)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매년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열리는 새해 맞이 볼 드롭(Ball Drop) 행사에 울러퍼지는 곡 중 하나다. 대략 밤 11시 57~59분 정도에 퍼포먼스가 나오는 관계로 미국의 공개적인 방송에서 나오는 한 해를 마감하는 노래가 되는 셈이 된다. 그 후, 존 레논도 솔로 곡을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리면서 비틀즈는 모든 멤버가 솔로곡으로도 빌보드 1위를 기록하는 엄청난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존 레논 같은 경우, 1970년대 솔로활동 시기 평화주의, 반전주의적 정치 신념을 가지고 숱한 노래를 써내려갔다. 단순히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 반대 시위 등 여러 집회와 사회 운동을 직접 주도해서 20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중 한 명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당시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까지도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해 감시하였을 정도로 그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1975년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다가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존 레논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람에게 총을 맞았다.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고 피격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도착할 즈음에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는데,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 레논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

 

 

타임은 음악이 죽은 날이라는 표지와 함께 추모를 표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대대적인 추모가 있었다.

 

 

 

 

 

미국 음악계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한껏 영국에 밀리기만 했던 미국 록 음악계에서도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록 음악계를 넘어, 미국 대중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음악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전성기가 열린다. 1964년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보고 충격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기타 가게로 달려가 싸구려 기타를 구입하여 활동을 시작했지만 연이은 실패를 맛본다. 그러다 1975년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Born to Run를 탄생시키는데, 이 명반은 미국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하트랜드 록의 탄생을 상징하는 명반이다. 미국의 양대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 표지를 동시에 장식한 사건은 당시 이 앨범이 미국을 얼마나 발칵 뒤집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어로스미스, 이글스같은 미국의 록 밴드들도 하나둘씩 등장하며 반격을 가했다. 에어로스미스는 Toys in the Attic로 미국의 저력을 보였고, 이글스는 1972년 데뷔부터 눈길을 끌기 시작하더니, 1975년 'One of These Nights' 앨범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위력을 보였다. 특히 1977년, 그들의 최고 명반 Hotel California는 미국에서만 3,000만 장을 판매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들의 5집 Hotel California의 타이틀곡이라 볼 수 있는 Hotel California는 국내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1968년에 성공적으로 복귀한 엘비스 프레슬리도 제2 의 전성기를 맞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한 시기이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었다.

 

 

 

포크 음악계에서도 다양한 활약이 있었는데, 밥 딜런의 경우 1960년대 출시했던 좀 더 포크 록에 가깝던 명반들이 아니라 기존의 포크 음악에 가까운 명반을 내놓는데, 1975년작 Blood on the Tracks이다. 그다지인 보컬과는 별개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도 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전설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 또한 커리어 최고의 명반이자 가장 위대한 포크 앨범 중 하나인 Blue를 발매한다. 또한 같은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캐롤 킹도 중요한 역작이라 불리는 Tapestry를 발매한다. 이 명반으로 캐롤 킹은 최초로 그래미 상을 수상한 솔로 여성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는데, 그것도 무려 4관왕을 했다. 추가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이렇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수많은 앨범들이 쏟아지는 1960년~1970년대는 음악적으로 폭발하는 시기였다.

 

 

 

소프트 록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카펜터즈와 브레드의 성공은 소프트 록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불러왔다. 그리고 1977년 플리트우드 맥의 최고 걸작이자, 소프트 록의 상징으로 언급되며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뽑히는 Rumours가 발매된다. 전 세계 총 3,5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77년 발매되자마자 광풍을 몰고 왔던 앨범이다. 1977년 영화 최대의 아웃풋이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이라면 음악 최대의 아웃풋은 바로 Rumours라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영향을 불러왔고, 지금까지도 빌보드 200 100위권 안에 들어 있을 정도로 많은 리스너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앨범이다.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디스코 열풍이 불때도 팝 록과 소프트 록은 건재했다. 당시 소프트 록은 디스코와 함께 미국 음악계의 큰 주춧돌이었다.

 

 

 

그리고 서독의 크라프트베르크의 활동도 이 1970년대 부터다. 테크노의 시초격이자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혁신을 이끈 그룹이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들을 때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멜로디의 배치, 그리고 반복적인 리듬 등 우리가 이미 귀로 익어있는 다양한 문법들이 바로 크라프트베르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의 작품은 신스팝, 포스트 펑크, 힙합, 앰비언트 뮤직, 테크노 등의 다양한 일렉트로니카 음악 장르들, 그리고 현대의 EDM 씬의 음악까지 현존하는 모든 일렉트로니카 음악과 팝 음악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으며 마이클 잭슨, 콜드플레이 등 팝 음악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아민 반 뷰렌, 에이펙스 트윈, 데드마우스 등 일렉트로니카 씬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까지, 많은 프로듀서에게 영향을 미쳤다. 1977년에 발매한 Trans Europa Express부터 독어/영어 다국어 녹음을 시작했다고 한다. 1978년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Die Mensch-Maschine를 발매한다.

 

 

 

독일의 일렉트로니카 그룹, 탠저린 드림도 이 시대에 데뷔한다. 크라우트 록의 거장이자, 크라프트베르크, 장 미셸 자르등과 함께 일렉트로니카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티스트다.

 

 

 

뉴 웨이브, 펑크 록 밴드 블론디도 이 시대에 데뷔해서 활동한다. 뉴욕 펑크 씬을 이끈 중요한 밴드로, 초창기 미국 펑크 록과 뉴웨이브 씬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Parallel Lines를 발매하고, 이 앨범의 싱글 "Heart of Glass"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예상치 못한 대히트를 거두는데, 빌보드 핫 100 1위, 대다수 유럽 국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미국을 넘은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다.

 

 

 

록 음악을 넘어, 음악적으로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토킹 헤즈의 활동 시기도 이 1970년대부터이다. 아프리카의 음악적 요소들을 서구 세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외적 요소를 일차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기반인 뉴욕 펑크의 도회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와 아프로비트의 훵키하고 복잡한 리듬을 잘 조화시키며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토킹 헤즈의 음악은 이러한 점에서 록 음악의 외연을 넓히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7년, Talking Heads: 77를 시작으로 그들의 활동을 알린다.

 

 

 

1970년대 후반기는 디스코와 소프트 록이 전성기이기는 했지만, 하드 록도 마냥 침체됐던건 아니었다. Foreigner나 보스턴이 큰 인기를 누렸다. 1976년 발매된 보스턴의 데뷔 앨범 Boston은 미국에서만 무려 1,7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Foreigner는 1977년 "Feels Like The First Time"을 빌보드 핫 100 4위에 올리고 같은 해 "Cold As Ice"가 빌보드 핫 100 6위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성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해인 1978년 "Hot Blooded"가 빌보드 핫 100 3위를 기록하며 대히트, 그 다음 해인 1979년 "Double Vision"이 빌보드 핫 100 2위를 기록하며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이 당시는 디스코 음악이 음반 시장과 미국 음악계, 나아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점령했던 1970년대 후반이었는데, 이들은 디스코는 커녕 디스코에서 영향을 받은 싱글이나 수록곡조차 만든 적이 없다. 무조건 미국적인 아레나 록/하드 록으로 승부한 것이다.

 

 

 

미국 흑인 음악계

 

펑크(Funk)는 이 시기 대중음악의 중요한 장르였다.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스티비 원더,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 템테이션스, 빌리 프레스턴, 커티스 메이필드, Ohio Players, Kool & the Gang,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잭슨 파이브, Rufus, B. T. 익스프레스, Earth, Wind & Fire, 팔리아멘트를 포함한 수많은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이 70년대 초중반에 펑크 장르의 히트곡들을 발매했다. 이중에서도 대표적인 펑크 아티스트로는 제임스 브라운이다.

 

 

 

레이 찰스와 함께 R&B의 대부로 꼽히는 스티비 원더는 그의 대표곡이자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곡중 하나로 꼽히는 Superstition를 내놓는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전형적인 펑크 노래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노래는 1972년작으로, 펑크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기 전에 나온 노래이다. 단일곡 말고도 스티비 원더는 1973년 Innervisions, 1976년 Songs in the Key of Life 같은 천재성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든 걸작들을 발매한다. 모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된다.

 

 

 

소울 음악은 이미 대중적인 양식으로 탄탄히 자리 잡아, 알 그린,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로버타 플랙, 디온 워윅 등의 거물급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미국 흑인 가수들이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197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0위 안에 든 곡 중 4곡이 소울 음악 아티스트들의 곡으로, 그 4곡은 5위를 기록한 에드윈 스타의 "War", 6위에 오른 다이애나 로스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7위를 기록한 잭슨 파이브의 "I'll Be There", 10위에 오른 프리다 페인의 "Band of Gold"이다. 8위를 기록한 레어 어스는 록밴드였으나 모타운 소속 아티스트였고, 연말 차트에서 8위에 오른 "Get Ready"는 스모키 로빈슨이 작사, 작곡한 템테이션스의 노래를 커버한 것이었다.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7곡이었다.

 

 

 

마빈 게이는 1971년에 기념비적인 걸작을 제작하는데 바로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꼽히는 What's Going On이다. 이 과정에서 모타운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으나 마빈 게이는 발표를 하지 않고 계속 뭉게면 더 이상 모타운에서 앨범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하며 발매를 강행하게 한다. 이전까지 부드러운 흑인음악을 내던 모타운에서 발매한 최초의 사회고발성 앨범이며 그 과정에서 아티스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한 권리를 쟁취하는 측면에서도 파격적이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의식, 아티스트가 회사를 상대로 자존심을 지킨 사례이며 이후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같은 모타운 계열 후배들도 뮤지션의 권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줬다. 이 앨범의 과정이나 내용이 없었다면, 이후 흑인 음악 장르가 상당히 바뀌었을지 모른다. 대중음악계의 흐름을 바꾼 음반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197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5곡이었다. 같은 해에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의 흥행 영화 샤프트가 개봉했는데, 아이작 헤이즈가 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Shaft"가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첫 싱글 "Theme from Shaft"도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로버타 플랙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dFace이 1위에 올랐고,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8곡이었다. 같은 해에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의 흥행 영화 슈퍼 플라이가 개봉했다. 커티스 메이필드가 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Super Fly"가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첫 싱글 "Freddie's Dead (Theme from Superfly)"이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4위, 앨범의 두번째 싱글 "Superfly"가 핫 100에서 2주 연속 8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타운이 주도하던 1960년대와 다르게 이 시점부터는 갬블 앤 허프가 설립한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라는 경쟁자가 나타났고 알 그린, 로버타 플랙과 같은 새로운 소울 음악 스타들과,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 등 Funk 밴드들이 전성기를 맞게 되어 씬에 변화가 일어났고, 1970년대의 모타운은 레이블의 최전성기였던 60년대에 비해 미국 대중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기존의 모타운 소속 스타들이 1970년대 중후반에 커리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회사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197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백인 1명과 흑인 2명으로 구성된 팝 그룹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의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가 1위에 올랐고,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7곡이었다.

 

 

 

소울 음악 중에서도 특이한 양식의 소울 음악이 바로 필라델피아 소울인데, The Stylistics, The Spinners, The O'Jays 등의 그룹들을 주축으로 하여 7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누렸다. 이 당시 이렇게 소울 음악은 현재의 팝 음악처럼 대중적인 장르였기에 미국 백인들도 소울 음악을 시도하게 된 것이 바로 블루 아이드 소울이다. 기원은 60년대의 더 라이쳐스 브라더스이지만 전성기는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Hall & Oates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블루 아이드 소울 아티스트다. 흑인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데이비드 보위도 이 시기 Young Americans 앨범으로 "플라스틱 소울" 이라는 형태의 펑키한 블루 아이드 소울을 시도했다.

 

 

 

한편 위의 펑크 음악은 당시 발전한 신시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대중화된 디스코가 등장했다. 펑크(Funk) 음악의 하위 장르로, R&B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데, 디스코의 대중화는 74년도 Love Unlimited Orchestra의 Love's Theme, MFSB의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 George McCrae의 Rock Your Baby, The Hues Corporation의 Rock the Boat 등의 대성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디스코 음악은 1970년대 후반을 미국 음악계를 지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은 소프트 록을 제외한, 미국의 주류 장르던 록마저 시들했고 기존의 다른 장르들은 거의 사장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미국 음악은 이 디스코 음악의 영향을 안 받은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동안 침체기에 들었던 롤링 스톤스는 이 주류를 받아들인 앨범 Some Girls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1974년은 디스코의 전성기가 시작된 해였다. 197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한 Love's Theme과 5위에 오른 잭슨 파이브의 Dancing Machine, 7위를 기록한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70년대 중후반이 디스코의 시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Love's Theme은 배리 화이트가 작곡과 프로듀싱을 했고, 배리 화이트의 개인 오케스트라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는 케네스 갬블-리온 허프가 작곡, 작사와 프로듀싱을 했고, 이들이 사장으로 있던 음반사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의 하우스 밴드였던 MFSB에 의해 연주되었으며 미국의 필라델피아 소울/R&B 걸그룹 더 쓰리 디그리즈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8곡이었다.

 

 

 

1975년에는 호주에서 결성하고 영국에서 활동한 3인조 음악 그룹, 비 지스가 디스코로 음악적 방향을 바꿨다. 빌보드 핫 100 1위곡 Jive Talkin'과 7위를 기록한 'Nights On Broadway'가 등장하게 되었고, 밴드는 새로운 사운드에 결과적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중들도 화답하여 Main Course 앨범은 순식간에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게 되었고 빌보드 200에서 14위를 기록했다. 다음 앨범부터는 본격적으로 디스코를 차용했고 남은 70년대에 전 세계를 디스코로 물들이며 밴드의 최고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다. 비 지스는 빌보드 핫 100 1위곡 순위에서 9곡을 보유해 그룹 자격으로는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위는 20곡을 보유한 비틀즈, 2위로 12곡을 보유한 슈프림즈 다음이다.

 

 

 

같은 해에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는데, Shining Star가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를 기록하고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위에 오르는 등 공전의 히트를 거두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6집 앨범 "That's the Way of the World"가 빌보드 200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크게 성공한다. 앨범의 두번째 싱글 "That's the Way of the World"도 핫 100에서 12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0위를 기록하며 히트했다.

 

 

 

1969년부터 Funk 밴드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아이즐리 브라더스는 싱글 "Fight the Power"가 핫 100에서 4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9위에 오르며 크게 히트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13집 앨범 "The Heat Is On"이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했다. 1973년에 Funky Worm으로 히트를 거둔 오하이오 플레이어스도 이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들의 싱글 "Fire"는 핫 100에서 1주 1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1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6집 앨범 "Fire"도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둔다.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1곡이었다.[ 1975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블루 아이드 소울 곡들로는 연말 차트 3위를 기록한 엘튼 존 밴드의 Philadelphia Freedom, 연말 차트 5위에 오른 프랭키 발리의 My Eyes Adored You, 연말 차트 8위를 기록한 데이비드 보위의 Fame이 있다.

 

 

 

197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0곡이었다. 같은 해에 발매된 스티비 원더의 18집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는 빌보드 200에서 14주 비연속 1위를 기록하고 197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둔다. 앨범의 첫 싱글 "I Wish"와 두번째 싱글 "Sir Duke"도 크게 히트했는데, I Wish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 Sir Duke는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77년, 비 지스는 미국 위주로 전성기를 누렸던 장르인 디스코를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를 통해 단숨에 세계인의 인기를 받게 한 장르로 변화시켰다. 이 사운드트랙 앨범에서는 비 지스에게 3곡의 빌보드 차트 1위곡을 안겨 주었다. How Deep Is Your Love, Stayin' Alive, Night Fever가 그 곡들이며 한 세대를 디스코 세대로 바꿔놓았다.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다른 가수 이본느 엘리먼(Yvonne Elliman)에게도 If I Can't Have You라는 노래를 주었고 이것 역시 빌보드 1위를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More Than A Woman'은 비 지스 버전과 타바레스(Tavares) 버전, 두 버전이 실려있고, 마찬가지로 히트했다. 이 시기부터 디스코로 대표되는 댄스 음악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토요일 밤의 열기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성공에 기름을 부었고, 4,000만장이 팔려나가며 당시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사운드트랙 앨범 탑5에 항상 들고 있다. 비 지스가 전 세계 음악 왕좌에 앉는 절정의 시기였다. 비 지스의 사운드는 1977년 크리스마스 시즌 시작부터 9개월 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삼형제가 쓴 7개의 곡이 27~37주 연속으로 차트 1위를 주름잡았다. 3곡은 비 지스의 이름으로 나왔고, 2곡은 동생 앤디 깁의 이름으로, 1곡 씩 이본느 엘리만의 If I Can't Have You, 프랭키 발리의 Grease이다.

 

 

 

197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2곡이었다.

 

 

 

1978년 3월, 1964년 4월의 비틀즈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작곡한 곡으로만 빌보드 핫 100 차트 10위권 안에 5곡을 채워넣었다. Night Fever, Stayin' Alive, If I Can't Have You, 'Emotion', 'Love Is Thicker Than Water'가 그 곡들이다. 배리 깁은 연속으로 4곡을 빌보드 1위에 올린 작곡가가 되었다.

 

 

 

197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1곡이었다.

 

 

 

197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0위 안에 든 곡 중 7곡이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으로, 그 7곡은 2위를 기록한 도나 서머의 "Bad Girls", 3위에 오른 시크의 "Le Freak", 5위를 기록한 피치스 & 허브의 "Reunited", 6위에 오른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7위를 기록한 도나 서머의 "Hot Stuff", 8위에 오른 빌리지 피플의 "Y.M.C.A.", 9위를 기록한 아니타 워드의 "Ring My Bell"이다.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1곡이었다.

 

 

 

하지만 1979년 여름에 있었던 디스코 폭파의 밤으로 이 화려했던 디스코의 전성기는 끝나고, 이를 통해 뉴 웨이브, 하드 락 등의 백인 음악이 인기를 얻게 되지만, R&B 역시 변화를 추구한다. 그게 바로 포스트 디스코와 컨템퍼러리 R&B 음악.

 

 

 

한편으로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힙합 음악이 태동하고 있었는데 펑크(Funk), 레게, 소울 음악, 재즈 등의 영향을 받으며 랩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1979년 발표된 슈거힐 갱의 Rapper's Delight은 레코딩 된 랩 음악의 시초를 알렸다.

 

 

 

뮤직 비디오와 공연 비즈니스의 발전과 카세트 테이프

 

음악 수준 뿐만 아니라 뮤직 비디오도 이전 시대보다 발전을 보인다.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핑크 플로이드 같은 아티스트들의 뮤비를 거쳐 단편 명작 수준으로 수준을 끌어올린 것도 이 시대 퀸의 Bohemian Rhapsody다. 이를 위해 일류 영상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큰 제작비와 세심한 공을 들여 제작하였고, 당대의 첨단적인 촬영 기법과 특수효과가 총동원되었다. 후처리를 거치지 않고 촬영 과정부터 특수 효과를 적용했다는 점도 유명하다.

 

 

 

1970년대 중반경부터 당시 두 인기 밴드였던 퀸과 ABBA에 의해서 뮤직 비디오가 더욱 보편화됐다. 퀸의 Bohemian Rhapsody이 당시로서는 블록버스터급 뮤직 비디오여서 많은 관심을 모았고, 그리고 퀸과 동시대의 인기 밴드였던 ABBA는 1974년경부터 모든 싱글 발표 곡들에 그 각 가사들을 단편극처럼 영상 스토리화하거나 댄스풍 영상으로 만든 뮤직 비디오를 촬영해서 전 세계 TV에 방영시켜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는 이후 다른 팝 뮤지션들에게도 신곡 발표때마다 뮤비를 제작하는 관행을 널리 유행시키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1970년대는 후술할 공연 비즈니스의 발전과, 서구 선진국들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등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도 가정용 TV가 대중들에게 한창 보급되던 시기라서 세계의 대중음악팬들이 "단지 듣는 것 뿐 아니라 보면서 즐기는 음악"에 대한 욕구와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은 다음 시대에 MTV의 탄생과 함께 1980년대 대중음악의 아이콘, 마이클 잭슨을 필두로 받아들이게 된다.

 

 

 

카세트 테이프가 점차 대중화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주 음반 매체였던 LP는 부피가 크고, 재생 매체마다 음질차가 큰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개발되었다. 카세트 테이프는 1980~1990년대의 대중 음악 시장의 급속 팽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LP는 가격도 비쌌고 부피가 커서 재생에 한계가 있었는데, 카세트 테이프가 등장하면서 수천 원 전후의 가격으로 LP보다 엄청나게 작은 크기에 좋은 휴대성까지 갖춘 덕분에 음반 시장 발달에 크나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데이비드 보위가 무대에 각종 연출 방법과 세트 기법을 대중음악 공연에 끌어와 도입시켰으며, 보위를 포함한 각종 록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하는 1970년대는 공연 비즈니스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다.

 

 

 

레드 제플린와 롤링 스톤스가 아레나 록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레드 제플린의 시대 이전까지 록 밴드는 콘서트장에서 30분~1시간 정도만 잠깐 노래를 부르고 나가는게 관례였고 비틀즈의 부도칸 공연이나 셰이 스타디움 공연도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비틀즈 등의 유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연 시간을 최소 2시간 이상으로 확 늘리고, 화려한 무대 의상과 조명을 통해 후대 글램 메탈 밴드들 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 전반의 무대 세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퍼포먼스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 보위부터,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같은 관객 친화적이고, 활동적인 프론트맨을 보유한 밴드들이 크게 이끌었다. 앞서 언급한 믹 재거,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이기 팝, 퀸의 프레디 머큐리,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 등이 있었으며, 이는 다음 시대에도 이어지며 발전한다.

 

 

 




주요 인물

 

 

 

1950년대 이전

 

 

로버트 존슨

 

빙 크로스비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페리 코모

 

프랭크 시나트라

 

듀크 엘링턴

 

척 베리

 

리틀 리처드

 

패츠 도미노

 

샘 쿡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1960년대

 

 

비틀즈

 

롤링 스톤스

 

레이 찰스

 

밥 딜런

 

처비 체커

 

마일스 데이비스

 

비치 보이스

 

더 후

 

제임스 브라운

 

마빈 게이

 

킹크스

 

샘 쿡

 

지미 헨드릭스

 

슈프림스

 

아레사 프랭클린

 

스티비 원더

 

사이먼 앤 가펑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비비 킹

 

크림(밴드)

 

Sly & the Family Stone

 

The Four Tops

 

템테이션스

 

스모키 로빈슨 & 더 미라클스

 

도어즈

 

 

 

1970년대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데이비드 보위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에어로스미스

 

이글스

 

존 레논

 

플리트우드 맥

 

Sly & the Family Stone

 

Earth, Wind & Fire

 

Ohio Players

 

Kool & the Gang

 

KC and the Sunshine Band

 

윙스

 

조지 해리슨

 

패티 스미스

 

조니 미첼

 

캐롤 킹

 

ABBA

 

카펜터스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롤링 스톤스

 

잭슨 파이브

 

도나 서머

 

다이애나 로스

 

시카고

 

홀 앤 오츠

 

두비 브라더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더 후

 

딥 퍼플

 

블랙 사바스

 

엘튼 존

 

비 지스

 

 

 

1980년대

 

 

마이클 잭슨

 

메탈리카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자넷 잭슨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Kool & the Gang

 

Earth, Wind & Fire

 

바비 브라운

 

스티비 원더

 

라이오넬 리치

 

티나 터너

 

Run-D.M.C.

 

퍼블릭 에너미

 

LL Cool J

 

Fresh Prince & DJ Jazzy Jeff

 

슬릭 릭

 

신디 로퍼

 

쿨 모 디

 

라킴

 

빅 대디 케인

 

브루스 스프링스틴

 

비스티 보이즈

 

조지 마이클

 

마돈나

 

홀 앤 오츠

 

필 콜린스

 

 

다이어 스트레이츠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폴 매카트니

 

듀란 듀란

 

폴라 압둘

 

밀리 바닐리

 

The Go-Go's

 

벨린다 칼라일

 

New Edition

 

포리너

 

밴 헤일런

 

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본 조비

 

The Bangles

 

뉴 키즈 온 더 블록

 

컬처 클럽

 

엘튼 존

 

데비 깁슨

 

티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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