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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5. 4. 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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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

(金章河)

 

출생

1944년 (80 ~ 81세)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남성당한약방 대표

학교법인 남성학숙[진주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진주신문 이사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경상국립대 발전후원회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의장 겸 상임의장

진주오광대보존회 이사장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등

 

남성(南星)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대한민국의 한약업사, 교육가, 전 문화기관단체인, 시민활동가.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문형배 헌법재판관도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친 바 있다. 문 재판관은 2019년 본인의 인사청문회에서도 김장하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 바 있다

 

 

생애

 

경상남도 사천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했고, 9년 뒤인 1972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했다. 이곳 남성당한약방을 약 50년 동안 운영하였고 2022년 5월 말 은퇴하면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정작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이 돈을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온 독지가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0여 년간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한 일이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진주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해왔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2021년 재단이 해산되자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



2019년 1월 김장하 본인도 몰랐던 생일잔치에 진주 시민사회 각계각층 120명이 모였다.

 

2022년 5월 은퇴 후 아내와 4남매, 손주들과 함께 사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다. 문을 닫은 남성당 한약방 건물은 진주시에서 복합문화공간 ‘진주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2025년 개관이 목표다.

 

 

남성당한약방

 

본업이 한약업사이다. 1963년 사천에서 개업하면서 줄곧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1973년 진주로 이전하고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영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진주에서는 한때 매출이 상당히 높은 한약방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곳에서 번 돈이 시민운동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진주에서는 '김장하' 하면 후원 잘해주는 어른으로 통해서 진주시민운동계에서 돈이 필요하면 곧장 이곳으로 달려와 상담을 받는다.

 

 

이렇게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누구를 돕게 되어도 보도자료 등을 일체 내지 않으며, 무엇보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김주완 기자가 7년이 넘게 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썼는데 그 숫자만 대략 100명이 넘는다. 김 기자는 김장하와 함께 산을 오르거나 모임에 참석하면서 곁에서 그를 바라봤고, 카메라도 없이 갔다가 핸드폰으로 부랴부랴 촬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활동을 이어왔지만 언론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고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 첫 민선 진주시장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압도적으로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했는데, 그는 후보를 제안하러 오는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했으며 주변에서 경남도문화상이나 진주시문화상, 경남교육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못하게 하거나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고 하느냐'며 극구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 남성(南星)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김장하 선생은 '남성(=남두육성, 南斗六星)은 목숨(壽)을 맡은 별이라고, 남성이 비치는 곳에서는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평생 많은 기부를 했지만 돈을 빌려주는데도 나름의 원칙이 있다. 정치인이나 선거자금은 절대 지원해주지 않으며, 개인적인 사업자금이나 경비 같은 것도 안 준다고 한다.

평등사업과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오랫동안 후원을 해왔다. 이 때문에 일부 극우 세력의 색깔론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 <어른 김장하>에서도 한 극우 성향의 사람이 김장하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빨갱이짓 하고 다니지 말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허나 김장하는 상대방이 쌍욕을 섞어가며 비난하는데도 “나에 대해 잘 모르면 얘기하지 마세요” 라면서 담담한 말투로 대응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 집도 따로 없이 한약방 건물 3층을 집으로 사용했으며, 해외여행도 다닌 적이 없는데 여행이라고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한 것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역시 6.25 전쟁 때 전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친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 유세중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장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습적으로 한약방을 찾아가 만남을 가졌다. 이미 김장하에 대해 알고 있던 보좌관들이 사전 요청을 할 경우 무조건 거절한다는 걸 알아서 그냥 통보 없이 들어가서 만났다고 한다. 김장하는 노무현이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때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다른 손님들을 대할 때처럼 믹스커피를 주며 환담했다고 전해진다. 노무현은 만남이 끝난 뒤 김장하와의 면담을 주선한 김상진 당시 보좌관에게 "상진 씨, 정말 좋은 사람 만났다." 라며 칭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훗날 노무현이 사망한 뒤 봉하마을에 조성된 묘역에 박석을 남겼다.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당시 전교조 해직사태가 터졌으나,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교사도 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2022년 연말 MBC경남 유튜브와 TV를 통해 동시공개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뒤 호평이 이어지자, 설 연휴 전국방송을 통해 해당 프로그램이 재방영되었다. 이 다큐의 감독 김현지는 그를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고 표현했다.

야구선수 최동원의 팬이라고 밝혔고, 지금은 NC 다이노스의 팬이라고 한다. 다큐가 방영된 뒤 배주현 창원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는 "이런 분이 NC 팬인 것이 코리안시리즈 우승보다 더 뿌듯하다"고 말했고, NC는 선수단의 사인이 담긴 유니폼을 전달하기도 했다.

제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넷플릭스 화제작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과 Wavve 오리지널 국가수사본부를 꺾고 교양부분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역 지상파의 작품이 수상하는 것은 어른 김장하 프로그램이 최초라고 한다.# 물론 평소의 가치관대로 시상식에는 불참했으며, 제작진이 대리수상을 하였다.

2023년 11월 15일,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극장판 버전이 전국 동시 개봉했다. 더 마블스 등의 대형 블록버스터에 밀려서 상영관은 1일 1~2회 정도만 확보한 편. 김의성 배우 등 영화계 명사들이 MBC경남 시사교양 유튜브 채널 '엠키타카'를 통해 응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2025년 4월 4일 윤석열 탄핵심판 판결일에 문형배 헌법재판관(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판결 직후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어린 시절 문형배를 도와준 김장하 선생에 대한 그의 추억과 미담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문형배 재판관과 ‘어른 김장하’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2019년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장하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판사가 못 됐을 것”이라며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유일한 잣대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경남 하동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었던 자신을 도와준 김 선생을 언급한 것이다. 김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60년간 한약방을 운영하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2023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하며 선행이 알려졌다.

 

□김 선생은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한약방 점원으로 일해야 했다. 1962년 처음 시행된 한약종상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해 한약사가 됐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은 오직 가난이었다”며 버는 족족 장학금으로 내놨다. 1984년 100억 원이 넘는 가산을 모두 털어 진주명신고를 설립했고, 8년 뒤 사회에 환원했다. 2021년에는 남은 재산 34억여 원까지 경상국립대에 기부하고 맨몸으로 돌아갔다.



□지역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김 선생도 이념 공세는 피하지 못했다. 1999년 가정폭력 피해여성 피난시설 지원이 문제 됐다. ‘여성 인권’이란 말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던 사회 분위기에 짓눌렸다. 민족문제연구소를 후원하자 “어디서 빨갱이가 설치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양심에 따른 선택의 대가였다. 70년 지기 최관경 부산교대 명예교수는 “장하의 일관성 있는 삶은, 말은 쉬워도 긴장의 연속 아니었겠냐”고 말한다.

 

□‘빚을 갚으려거든 이 사회에 갚으라’는 김 선생 말을 좇은 문 재판관도 이념 공세에 시달린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국민의힘과 극우 진영이 우리법연구회 회장 경력을 근거로 좌편향을 문제 삼는다. 6년 전 인사청문회 때와 반대다. 민주당은 “동성혼 반대” 등 보수적 소신을 우려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은 “자질과 능력, 도덕성에서 적격”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법관의 양심을 진보·보수라는 도식적 이념 틀로 규정짓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다. 특정 집단의 이념이 개인의 양심을 억누르는 걸 방치해서야 우리 민주주의가 어떻게 건강하다 할 수 있을까.






'윤석열 체포 시국대회'에 김장하 선생도 함께했다

6일 저녁 진주시청 앞 집회 참석해 촛불 들어... "민주주의 지키는데 추위는 견뎌야"

 

 

'12.3 윤석열 내란 사태'에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윤석열 대통령 체포‧탄핵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경남 진주에서 열린 시국대회에 김장하(80) 선생도 함께했다.

 

윤석열퇴진 진주시민모임은 6일 저녁 진주시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체포 진주시국대회'에 4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고, 김장하 선생도 함께했다고 7일 전했다.

 

김장하 선생은 이날 자신을 소개하지 말아 달라고 주최 측에 요구했고, 발언을 하지 않았다. 김 선생은 집회가 시작될 때부터 거리행진이 시작되기 전까지 촛불을 들고 함께했다.

 

"나라 걱정을 많이 한다"

 

김장하 선생과 함께한 하정우씨는 "낮에 점심을 같이 하면서 요즘 텔레비전 뉴스 특보를 보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저녁에 집회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점심을 드시고 나서 댁에 모셔다 드렸다. 오후에 전화가 와서 같이 가보자고 해서 모시고 함께 갔다"라고 설명했따.

 

그는 "특별히 말씀은 하시지 않았고 '나라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하셨다"라며 "집회 중간에 추우니 가자고 말씀을 드렸더니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이 정도 추위는 견뎌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라며 "행진은 하지 않으셨다"라고 전했다.

 

한약업사인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50여년간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다가 2022년 5월 문을 닫았고, 자신의 호를 딴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교육과 문화예술, 사회, 여성, 인권 등 분야를 지원했다.

 

또 김장하 선생은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10여 년간 이사장으로 있다가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또 그는 1990년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신문)가을문예'를 지원했다.

 

2021년에 재단을 해산하면서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했고, 평생 사회에 환원한 기부금이 수백억원에 이른다. MBC경남이 김장하 선생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진주시민모임은 지난 4일부터 매일 저녁 진주시청 앞에서 시국대회를 열어오고 있으며, 경상국립대 칠암캠퍼스 앞까지 거리행진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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