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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천대, 1949년, 國府遷臺, 장제스, 타이완

Jobs 9 2025. 4. 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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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국민당의 이동 과정 (지도는 1947년 기준)

 

국부천대

國府遷臺

Retrea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China to Taiwan

 

국부천대(國府遷臺)는 1949년 12월 7일 제2차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게 패배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 섬으로 옮긴 사건을 말한다.

 

오늘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고 중화민국이 '대만(타이완)'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랴오선전역에서 만주의 국부군이 인민해방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공산당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내준 장제스는 슬슬 자신의 패배 가능성을 머릿속에 넣기 시작했다. 이후 장제스는 만약 공산당에게 밀린다면 정부를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극비리에 최측근과 대책 회의를 논의했는데 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었던 쓰촨성 등 중국 서남부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쓰촨 지방도 공산당의 내부공작과 사보타주가 꽤 있었기에 쉽게 결정내릴 수 없었다. 또한 최악의 경우 패배하여 내륙에 갇히면 빠져나올 방법도 없기에 이 의견은 묵살되었다.

 

이때 지리학자 장치윈(張其昀)이 일본의 식민지였다 1945년 반환받은 타이완섬으로 가자는 의견을 내었다. 장치윈에 따르면 타이완 해협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하는 타이완은 해공군이 없다시피한 공산당의 추격을 한동안 뿌리칠 수 있는 곳이며, 위치상 전략적 요충지로 유사시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시설도 있으며, 토착 공산당 세력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곳이었다. 여기에 장제스에 반항적인 군벌세력도 없다는 점도 장제스의 흥미를 끌었다. 이에 장제스는 1948년 8월부터 유사시를 대비해 정부기관과 군을 타이완으로 이동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해군과 공군의 주도로 매일 수송기 수십 대와 수천 척의 선박들이 중국 대륙과 타이완을 오가며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실어나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타이완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1949년 1월 핑진전역과 화이하이전역의 잇다른 패배로 국민정부는 장강 이북의 모든 영토를 공산당에게 잃었고 수도 난징 코앞까지 인민해방군이 도달했다. 장제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총통 자리에서 물러났고 부총통인 리쭝런이 권한대행이 되었는데, 리쭝런은 공산당과 협상에 들어갔지만 총통 자리에서는 물러났어도 막후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장제스는 공산당과 협상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정부와 군에게 그대로 타이완으로의 철수작전을 속행할 것을 지시했다.

 

난징은 1949년 4월 23일 함락되었고 타이완으로 향하는 비행기와 선박의 주요 출발지였던 상하이는 5월 27일 함락되었다. 난징 함락 후 국민정부는 일단 광저우로 퇴각했으나 중공군이 화난(華南) 지방을 석권하면서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3일 광저우를 버리고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1월 30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국민정부는 재차 청두로 퇴각하였고 12월 7일 시캉성 시창(西昌)에 대본영(총사령부)을 남겨 두고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난징이 함락되고 국민정부가 대륙 곳곳을 전전하는 8개월 동안에도 타이완으로의 철수는 계속되었고, 철수가 거의 완료된 12월 10일 장제스와 장징궈 부자는 전용기를 타고 청두를 떠나 타이베이로 향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청두시까지 인민해방군에 함락되었으며 시창과 윈난 일대에 잔류한 국부군은 이듬해 4월까지 저항을 이어가다가 인민해방군에 진압당했다. 일부 잔존 국민당 병력은 버마나 태국 등지로 도피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타이베이시는 정식 수도가 아니라 본토를 수복하기 전에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이 임시로 머물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곳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섬에서 대륙을 수복하는 것은 대만을 아무리 발전시켜도 불가능하였다. 오히려 타이완섬 방어에 온 힘을 다 해도 모자랄 판이고 그 결과 타이베이시는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결과

 

천대 이후 국공내전은 당연하게도 중국공산당의 사실상 승리로 끝났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 전역을 석권하였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단, 실제 건국 선언은 국부천대 이전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선언을 한 것은 내전이 끝난 후가 아니라 내전 도중이다. 난징 함락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과도기로 볼 수 있으며 대륙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넓은 나라에서 경상도보다 조금 더 큰 넓이로 축소되었고 인구 역시 인구 5억 6,000만 명의 세계 최다 인구를 보유한 국가였지만 800만 명 남짓으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명목상 내전이 끝나지 않았으며 신생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기존 국가 중화민국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두 국가는 서로를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6.25 전쟁처럼 휴전 내지는 종전 협정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955년 이후 이 전쟁은 이후 더 이상 뺏고 뺏기는 땅 없이 교착상태를 유지하다가 1970년대 말에 사실상 종전 상태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양안이 휴전이나 정전 협정을 특별히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대만에 대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적은 있으나 이 역시 양자간의 어떤 형태의 협정이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지금은 이미 멸망했고 과거 중화민국의 권리만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금 있는 중화민국은 말하자면 중화민국을 참칭하여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는 국민당의 불법 정권인 셈이다. 다만 92공식 기점 이후에는 대만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간주하며, 대만 국민당 정권은 지방 자치 세력 정도로 보고 있다. 중화민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러모로 남북관계와 유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첫째로 최소한 협정의 주체로서는 인정하여 휴전 상태인 남북한과는 다르게, 두 '중국'은 어떠한 협정조차 맺은 적이 없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교류나 민간교류가 지극히 적거나 거의 없는 남북한과 달리, 중국과 대만은 경제적 교류나 민간교류는 허용되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분단 체제와 장제스의 독재 체제 자체는 오히려 국부천대를 통해 완성되었다. 기존의 군벌 세력을 기반으로 하며 국민당 내외에서 장제스를 견제하였던 정치 세력들은 국부천대로 인해 중국 본토에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기반을 상실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를 견제할 힘을 잃었으며 장제스는 확고한 1인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국부천대에 따라 사실상의 수도는 난징에서 타이베이시로 옮겨졌다. 하지만 천도 이후에도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명목상 중국의 정통 정권임과 중국 전체의 통치주권을 천명했으며 수도를 난징이라고 명시했으나 천수이볜, 마잉주 집권기를 전후해서 '중국의 정통 정부' 및 '법적인 수도'에 대한 인식이 약해졌다. 행정원이 발행하는 연감에선 아예 대륙지구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정부 관료들도 당당히 "중화민국의 수도는 타이베이"라고 말한다.

 

이때 중국국민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성 관할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외성인이라 부르며, 타이베이, 신베이시, 지룽시, 타오위안 등 대만 섬 북부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아무튼 국공내전 덕에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변방의 고만고만한 도시 중 조금 큰 도시'에서 '중심 도시'로 변모해 버렸다. 1661년에 세워진 타이완 동녕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타이완 섬 남부에 있는 타이난시 이래 중국 역사에서 수도를 섬에 둔 첫 사례인 것이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건국을 선언하자 기존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전격 취소해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그 뒤를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뒤따랐는데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들도 이를 뒤따라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자국령인 홍콩의 안보를 걱정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빠르게 승인한 서방 국가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몰라도 영국만큼은 미국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에 홍콩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중국 공산정권을 승인할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륙 지배를 돌이키기 어려워진 1960년대부터는 너도나도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6.25 전쟁과의 관계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이고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의 관계가 대한민국-북한의 관계와도 서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에 6.25 전쟁과 비교되는 일이 잦다. 보통 냉전 시기의 공산주의-자본주의 진영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는 편.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전한 직후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국민당 정권을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봐 오던 미국은 공산당 쓸어 버리라고 국민당에 지원을 해오기는 했는데 국민당이 대책없이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는 것을 보자마자 미련없이 손절했으며, 당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공공연히 대만 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 자료 이때 CIA도 얼마 못 가 대만 섬도 공산당에 점령되리라고 보았으나 공화당 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의 무관심이 중국을 공산화했다며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6.25 전쟁이 터지자 트루먼은 미군 파병을 결정함과 동시에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띄워 공산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대만 침공을 위한 중공군 부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소모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6.25 전쟁의 휴전 후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포기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마자 승인한 국가들 중 하나인데 사실 당시 스탈린은 그 전까지 같은 공산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을 무식하다며 나쁘게 보았고 차라리 장제스를 더 선호했다. 그러다가 마오쩌둥이 승리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UN에서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CHINA)으로 취급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안전보장이사회를 장기간 보이콧했다. 덕분에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할 수 있었다(유엔의 국제 분쟁 최초 개입). 지금도 유엔군 사령부(실제로는 미 8군 사령부지만)가 있다.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베이징시의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 29만 점을 위시로 전국 각지의 유물 60만 8,000점(출처)을 선발해서 가져갔다. 이 유물들이 대륙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문화대혁명으로 박살났을 위험이 크니 대만으로 옮겨둬서 결과는 좋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11월 3일 방송분에서 이 일화가 소개되었다. 비슷하게 자금성에 있었던 사고전서 문연각(文淵閣)본도 이때 이송해서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라 국공내전 이후부터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절도한(도둑질한) 유물들 내놔라"고 하는데 범람연맹 쪽에서는 빨갱이 공산당 불법 정권의 억지 따위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고 범록연맹 쪽에서는 "늬들 문화재 문혁의 풍파에서 보호해준 것부터 감사해라"라는 입장이다. 사실 그대로 있었으면 홍위병 손에 박살났을 운명이라는 것은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팩트다. 다만 21세기 들어서는 오히려 중공이 고궁박물원에 대륙에 있는 문화재까지 주겠다고 하고 있고 과거 장제스가 유물 대륙에서 가져간 걸 굳이 뭐라하진 않는 경향이 있는데, 고궁박물원이 대만인들의 (독립의식 고취와 대조되게) 중화민족 정체성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중공 쪽에서도 보고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유물은 아니지만 중국 역대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직계 적손(嫡孫)으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었던 쿵더청도 장제스가 대만 섬으로 데리고 건너갔다. 북송이 금나라에 밀려 회수 이남으로 내려갈 때 송고종이 중화로서의 정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3대 연성공 공단우를 함께 데리고 간 것에 비견할 만한 일로, 신해혁명 이래 연성공 작위를 이을 사람이 쿵더청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타이완에서 공자 가문의 종가(宗家)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대륙에는 북종계18의 직계 남성 후손은 없으며 남종 가문19과 쿵더청의 누나 쿵더마오(孔德懋)의 후손만 남아 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중화민국 정부의 유일한 세습 공직으로 지위는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쿵더청은 국부천대 이후 고시원 원장, 총통부자정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고 쿵더청 사후 제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세습한 장손 쿵추이창도 총통국책고문을 맡고 있다.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유교의 성현인 맹자, 안회, 증자, 자사의 제사를 받들던 직계 후손에게 세습되었던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를 각각 아성봉사관, 복성봉사관, 종성봉사관, 술성봉사관으로 개칭해 그 지위를 간임관(차관급)에 준하도록 했는데 국부천대 때 쿵더청 만이 아니라 2대 아성봉사관 멍판지(孟繁驥)와 2대 종성봉사관 쩡셴후이(曾憲禕)도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 지성, 아성, 종성 세 봉사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2대 복성봉사관 안스융(顔世鏞)은 대륙에 남았고 술성봉사관은 쿵더청의 차남 쿵웨이닝(孔維寧)이 맡았다가 쿵웨이닝이 201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복성, 술성 두 봉사관은 폐지되었다.

 

운남성에서 패배한 국민당군 잔당은 리미 장군의 지휘 하에 사단급 병력으로 재편하여 동남아시아의 미얀마나 태국으로 퇴각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통칭 운남 반공구국군) 이들은 CIA의 지원에 따라 반공구국군으로서 운남과 중화민국 수복을 부르짖으며 운남-버마 및 태국 국경지대에 여러 번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주권 침해에 버마가 당연히 유엔에 문제를 제기하여 중화민국 정부에 압력이 가해지고 결국 장제스가 철수 명령을 내려 리미가 복종함에 따라 대다수 병력은 철수하여 대만으로 이주하였다.23 철수 명령을 거부한 이들은 태국과도 충돌을 일으킨 끝에 서로 싸우지만은 않게 되었고 잔당들은 아편을 재배하여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이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어 쿤사 같은 마약왕들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최후의 잔당들은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혼란기 속에 태국 정부의 지원 하에 적극적으로 반공 항쟁을 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결국 태국에 귀화하여 태국 국적도 얻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들어 대만이 인구감소를 겪어 징병제 유지가 어렵자 이들의 후손들을 우대해 대만 귀화를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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