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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족, Goths, 게르만 부족들 하나, 서고트, 동고트 왕국, 고딕(Gothic) 양식

Jobs 9 2025. 5. 1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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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족, Goths

 

비록 고대로부터 존재하던 여러 게르만 부족들 하나이지만, 특히 단독으로 고대 로마 제국의 위기와 서방 영토 상실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단 로마 제국이 3세기의 위기를 겪은 원인 중 반절 이상이 고트족의 준동에서 나왔다. 대규모의 마적이자 해적으로서 수시로 제국군 방어선의 허점을 뚫고 들어와 민간도시를 대상으로 한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바람에 로마 제국은 변경은 물론 핵심 속주들까지 타격을 입었으며 황제들마저도 고트족을 상대하다가 여럿 죽었다. 그 결과 세입이 크게 줄고 국방예산이 부족해져 방어병력을 유지할 수도 없고 원정이나 토벌도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 등 다른 외적들까지 침략을 반복하는 무한 쇠퇴의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제국 말기에는 수도 로마까지 8백 년 만에 약탈하더니 아예 본국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 속주를 빼앗아 통째로 점거하고 나라를 세워버려 로마 제국이 서방 영토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 이름은 고딕(Gothic) 양식이라는 역사, 문화 용어로도 남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 북유럽 성당 양식을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세련되지 못했던 고트족에 빗대어 고딕 양식이라 일컬었으니,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닌 셈이다. 그래도 원래 명칭이던 고딕은 오늘날에는 훌륭한 문화 양식으로 인정받으므로 문화 파괴 활동 대명사인 반달리즘이란 오명을 얻게 된 반달족보다는 대접이 나은 셈이다. 고트족은 3세기 때까지만 해도 게르만족의 대부분을 느슨하게나마 거느렸던 거물급 민족이었으니 그 대접이 과했던 것도 아니다.

 

지금의 예텔란드 섬4과 스웨덴 남부인 예탈란드 지방에 살았던 기트족이 고트족의 원류라는 말이 있지만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기트족이 고트족인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5 원래는 지금의 폴란드나 발트해 연안에 살았던 민족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 영내를 침범할 무렵에는 오늘날의 루마니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트족은 후일 서고트족(Visigoths)과 동고트족(Ostrogoths)으로 따로 일컬어진다. 참고로 'vis', 'ostro'가 방향이 아닌 다른 단어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는데, 테오도리크 대왕 시절에 동고트에서 활동한 로마인 정치가인 카시오도루스가 이들을 동고트(ostrogoth)에 대비되는 비스고트라고 지칭하기 전까지 서고트족은 자기들을 서고트(visgoths)라고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의 견해대로 동/서에 따라 붙은 것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 제국 말기 이민족 침략도

고대 후기 민족대이동

 

 

 

 

3세기 이후

 

2세기 말부터 일부 고트족 분파가 로마군으로 복무했지만(3세기 사산 왕조와 고르디아누스 왕조와의 전쟁에서 그 존재가 또한 기록되어 있다) 고트족이 역사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건 3세기의 위기 때부터였다.

 

376년에서 418년 서고트족의 이동 경로

 

본격적인 영향은 서기 4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온 훈족에게 밀려 로마 영내로 이주하게 되면서부터. 이 와중에 동고트는 370년경 일시로 멸망하고, 서고트족은 376년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내로 들어온 후 수십 년에 걸쳐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갈리아(프랑스)를 거쳐 히스파니아(스페인)까지 먼 걸음을 하게 된다.

 

국가 운영이 차츰 막장으로 기울던 로마는 최초에는 이들을 받아들여 북방 국경 안정화와 국경지대 경제 활성화라는 토끼 두 마리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부정부패로 말미암은 삽질로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버린다. 결국 고트족의 지도자였던 프리티게른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심지어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발렌스와 동로마군의 고위 및 중간급 장군진, 그리고 주력 야전군의 3분의 2가 이 싸움에서 모두 전사했을 지경이었다.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을 간신히 제압하는 듯했으나, 때마침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동맹 협정을 맺어 고트족을 로마 영내에 아예 정착할 수 있게 허용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야만족이라 멸시하던 이들을 물리치기는커녕 동맹 상대로 승인하고 국내 거주까지 허용했다. 본래 고대 로마는 이런 '야만' 부족들을 국경 내에 정착하게 하고 동화정책을 꾸준히 수행해 인력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목적을 실현하려 했었다. 그런데 고대 로마 말기에는 '야만' 부족들의 국경 내 정착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고, 국내 사정 탓에 이 부족들을 전성기만큼 억제하지 못하면서 국경 내에 들어온 부족들이 깽판을 부리기 시작했던 것.

 

450년경 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 제국은 브리튼 섬과 북아프리카에서 철수했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 일대에 이민족 세력이 등장했다.

 

 

이후 서고트족은 판노니아에 정착하고 동맹 부족으로 로마 제국에 상당 기간 봉사했다. 그러나 대제 테오도시우스 사후 무능한 황제들로 동서 협조체제가 마비되자 빠른 태세전환을 하고, 서로마를 공략하기 시작하지만 스틸리코에게 패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410년 족장 알라리크(Alaric)의 지휘 아래 로마를 점령, 약탈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10 알라리크는 로마에 입성하기 전 최후 통첩으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의 라틴어 문장을 로마 시민에게 전하였다.

TETE RORO MAMA NUNU DADA TETE LALA TETE11

로마, 난 그대들을 내 손으로 파괴하겠다, 무기와 갑옷들을 내놓고 너희 자신들은 숨어라!

 

이후 서로마에 의해 아퀴타니아를 할당받아 동맹자로 정착한 후 아틸라와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의 동맹군으로 참여해 왕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훈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450년대 이후 서로마가 더욱 막장이 되자 주변 속주를 본격적으로 공격, 남서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에도 진출하여 잔여 서로마 지역을 차지하고 이 지역의 맹주로 있던 수에비족을 반도 북서쪽으로 축출해 버린다.

 

500년경의 서고트 왕국 세력도.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은 수에비족 아래에 있었다.

 

 

493년 ~ 540년의 동고트 왕국 세력도.

 

5세기 중엽 훈족의 왕 아틸라가 죽고, 훈족이 몰락한 판노니아에 정착했던 동고트족은 테오도리크 대왕이 즉위한 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점유한 오도아케르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이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서로마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고트 왕국이다.

 

전통적인 대제국의 수도 로마를 최초로 약탈하고 제국의 위신에 치명상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고트족의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쇠퇴

 

 

서고트는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경쟁 부족이었던 프랑크 왕 클로비스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왕 알라리크 2세까지 전사해버렸다. 이로 인해 셉티마니아(남프랑스 연안)를 제외한 오늘날 프랑스 방면의 영토를 잃고 서고트는 이베리아 반도로 피난해 권토중래하여 세력을 다시 모았다. 이때 즉위한 어린 왕을 대신해서 동고트 족의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을 하기도 했고 그 후엔 내분에 휘말려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동로마 제국에 내주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50년 동안 힘을 결집하여 최종적으로 수에비 왕국 및 잡다한 이베리아 북부의 민족들과 남부의 동로마 세력을 전부 물리치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왕권 투쟁은 여전했다. 결국 100여 년 뒤인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나 잔존 세력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 후에 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갈라진 여러 왕국들이 다시 통일되고 레콩키스타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 스페인 왕국으로 발전한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서 군림하던 동고트 왕국은 테오도리크 대왕 치세에 로마인과 동고트인이 1국 2체제 형식으로 평화롭게 잘 지냈으나 526년 그가 사망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외손자인 아탈라릭(Athalaric)이 후임 왕으로 즉위했으나 즉위 당시 나이가 10살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자 테오도리크의 딸이었던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섭정을 하였다. 아탈라릭은 즉위 8년 만인 534년에 사망했고, 아말라순타는 여왕으로 즉위한 후 공동왕으로 테오도리크의 조카 테오다하드(Theodahad)를 임명했는데 오히려 테오다하드의 계략에 말려 살해당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구실로 535년 동고트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이탈리아와 달마티아, 판노니아에서 고트 전쟁이라고 불리는 18년간의 전쟁이 벌어진 끝에 결국 동고트 왕국은 55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나르세스에게 멸망당했다.

 

이후 적지 않은 동고트인들이 아나톨리아로 끌려가 대(對)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고토그라이키(Γοτθογραῖκοι)란 부대로 편성되어 동로마 제국의 핵심 정예 부대로 탈바꿈했다. 대 이슬람 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소수 부족 가운데 불가르족의 경우는 적지 않은 수가 탈영하거나 이슬람에 붙어서 배신을 했던 반면, 동고트 병사들은 의외로 동로마 제국을 잘 섬겼다.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은 동고트족은 동로마의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랑고바르드족과 싸워서 이들의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냈다. 그나마 이탈리아 내에서 로마 영토와 로마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고트족 출신 군인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등으로 전출당해 편성된 동고트인들의 부대는 훗날 옵티마테스 부대로 개명되었는데, 이슬람 제국의 맹공 때문에 제국이 어려울 때에도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시해하는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들이 적에게 투항하지는 않았지만 대우를 시원찮게 하는 황제를 곧잘 죽여서 콘스탄티누스 5세 때에는 전투 부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종합하면 이탈리아와 아르메니아, 발칸 반도의 동고트인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고트 왕국이 이슬람에게 멸망한 후 정체성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동로마 제국에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16

 

본토에 남아 있던 기트족은 11세기경 스웨덴 왕국의 성립 이후로 북쪽의 스베아족과 점차 융합하여 스웨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성립하게 되었다.17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고트족의 이름은 현재 스웨덴 본토의 지명인 예탈란드(Götaland)와 고틀란드섬(Gotland)에만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8 참고로 훈족의 침공 당시 크림반도에도 고트족이 거주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테오도로 공국 참조. 크림 반도의 고트족은 훈족, 아바르족, 동로마 제국, 제노바인들에게 지배받았지만, 18세기까지 근근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곳을 장악한 러시아가 고트족들을 아조프 해 북부로 이주시키고, 이후 종교가 같은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들과 통혼하여 점차적으로 동화되었으며 몇 만 명 정도만이 우룸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지닌 수준이다.

 

스웨덴에서 한때 고트족 열풍이 불어서 '스웨덴은 고트족의 역사 계승권이 있고 고트족을 이어 전 유럽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나머지 유럽인들은 이에 대해 가뿐히 논파하면서 무시. 고트족의 명성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1434년 바젤 공의회에서 고트족의 역사 계승권을 두고 스웨덴 대표와 스페인 대표가 언쟁을 했었는데, 스페인 측은 고향이랍시고 구석 촌에 처박혀 빌빌거린 야만인들보단 영웅다운 무용담이 전해 내려오는 서고트족의 후예인 스페인이 진정한 고트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스웨덴 대사의 말을 막은 일화가 있다. 스웨덴 왕의 정식 명칭은 '스웨덴인, 고트인, 반달인의 왕'이었지만 1973년 칼 16세 구스타프가 즉위하면서 '스웨덴의 왕'이란 명칭만 쓰고 있다.

 

 

 

 

고트족은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에 아리우스파 그리스도 선교사였던 울필라스(Ulfilas 또는 Wulfila)19에 의해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가톨릭을 믿고 있었던 서로마인들과 결국 융화하지 못했다. 한편 울필라스는 선교를 위해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했는데, 현재에도 그 일부가 남아 있으며 자료가 태부족한 동게르만어군 연구에 대단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18세기 중엽까지 우크라이나 남부의 크림 반도에 살았던 크림 고트족들도 크림 고트어를 사용했지만20, 현지에 동화되면서 고트어도 소멸되었다.

 

서브컬처의 일종인 고스족과 한글 표기만 다를 뿐 영어 표기는 같다. 그래서 현대 고스족처럼 이 고트족도 바디 피어싱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오해하기도 하지만 실제 고트족은 바디 피어싱을 한 기록이나 유물이 손에 꼽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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