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어록, 명언, 감정수업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당황하신적 있으신가요?
그럼 진짜 당황이란 단어의 뜻을 아신적은요?
철학자 강신주는 이 당황이라는 단어의 뜻을
당황은 나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이전까지 생각하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경험할 때 발생합니다.
모두들 하루 하루 지내다보면 실제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럴 때 생각지도 못햇던 실제의 자아는 여러모로 나 자신을 '당황'시키곤 합니다.
여기서 부터는 단순히 저의 생각입니다만
이 모든것들은 나 자신과의 대화,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 아닐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르는데
누가 알아주길 바라겠습니까.
작년부터 참 오랫동안 해왔던 생각이지만
이제 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볼까 합니다.
신문이나 뉴스, SNS를 확인하며 남이 누구인지는 그렇게 궁금해 하지만
실제로 내 이야기는 듣지 못하는 사실이 참 서글프거든요.
여행을 가건 카페를 가건 혼자가 아니면 불안한 느낌은
아마 내 자신과 대면한 적이 없어서 겁나는 것일지도 모름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머리말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게 될까요. 아마 우리에게 기쁨과 설레음을 선사하는 풍경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일 겁니다. 그러니 기쁨이나 설렘이라는 감정이 먼저이지요. 만일 우리에게 이런 핑크빛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카메라나 스프트폰을 꺼내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찍은 것은 풍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의 기쁨과 설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에 사로잡힌 풍경이나 사람은 단지 나의 기쁨이나 설렘을 실어나르는 매체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잘 찍은 사진이 전달하는 것이 풍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것과 마추쳤을 때의 감정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그때의 감정이 기쁨과 설렘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경탄, 환희의 감정일 수 도 있지만 회환이나 분노의 감정일 수도 있으니까요.5
행복했거나 불행했던 유년시절이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그건 어린 시절 우리의 감정은 정말로 호수를 뛰어오르는 송어처럼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쁨, 슬픔, 동경, 절망 등 다채로운 감정들이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기에, 그 시절의 노을, 흰 구름, 친구, 선생님, 그리고 가족의 면면들이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빛바랜 사진들처럼 말입니다.6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감정을 억누느거나 죽이는 기술을 얻었다는 것 아닐까요? 매사에 일희일이하면 너무나 피곤해지는 것, 혹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면 불이익을 받기 쉬운 것이 사회생활이자 가정생활이니까요.6
프롤로그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 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프리드니히 니체15
고참의 거친 말처럼 '까라면 까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군대였던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소중한 감정들은 '까라면 까야만 하는' 군대에서는 사치이거나 장해물일 수밖에 없었다. 부장하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했던 고참들의 명령, 개인의 자존감을 짓뭉개는 그들의 행동들, 이 모든 것을 견디기 위해서 나는 우선 내 감정과 거기에 따른 판단을 모조리 유보해야만 했다. 하물며 그들은 사적인 슬픔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았고, 비웃었다. "졸병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제대한 지 이미 20년이나 지났지만, 변기를 혀로핥던 그때의 모멸감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어떤 분노도 모멸감도 사라져야만 변기를 핥을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변기를 핥기 위해서 나는 분노나 모멸감과 같은 내 감정을 억압해야만 했던 것이다.16
바로 이것이다. 억압이란 본질적으로 감정의 억압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억압이 작동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16
그 감정이 분노나 웃음일 수도, 냉소나 절망일 수도, 미움이나 동정, 아니면 사랑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엄청난 불이익이 나의 신상에 몰려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 않는가.17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7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모르니 누군가 나의 감정을 억압하려야 할 수도 없는 곳, 직장 상사도 없고 엄한 시부모도 없고 나를 질식시키던 사회 통념도 미치지 않는 곳, 우리는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모든 감정들이 불꽃놀이처럼 터져 나오기 쉽기 때문이다.18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냐의 여부에 달린 것 아닌가.18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18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나보코프의 작품으로 10대 소녀 롤리타를 사랑했던 어느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때로는 배극적으로, 때로는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진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은 나보코프의 작품을 불온한 것으로 단죄하려고 한다. 딸 나이의 소녀를 중년 남자가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근친상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북하게 다가왔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아예 '롤리타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생겼을 정도다. 이동에 대해 성욕을 느끼는 정신 질환이라는 것이다. 18-19
모든 사람의 저주를 감당하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했던 주인공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분명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이성의 힘으로 억누르려고 했을 것이다. 롤리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이나 그녀의 삶에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감정은 용수철과 같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반발력을 갖기 마련이니까.19
모든 사회적 통념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지키겠다는 결단은, 주인공을 통념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을 부정하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반대로 사랑을 긍정하면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마침내 주인공은 알게 된 것이다. 롤리타에 대한 감정 그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것은 감정의 강력함에 직면했던 인간의 절망스러운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20
스피노자만은 '이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스피노자가 피력했던 감정의 윤리학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슬픔 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20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대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 에서 20
그렇다. 어떤 사람과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 느낌이 기쁨이라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려고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이 쪼그라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니 기쁨을 주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법이다. 반대로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만남도 있따.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불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슬픔의 감정이다. 같이 있을 때 무기력해지고, 그와 헤어지려고 하면 즐거워지는 불행한 감정 상태인 셈이다.21
슬픔과 기쁨이라는 상이한 상태에 직면한다면, 슬픔을 주는 관계를 제거하고 기쁨을 주는 관계를 지키라고 말이다. 스피노자가 제안한 '감정의 윤리학'이 '기쁨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21
험버트는 롤리타를 만났을 때 기쁨을 느꼈고, 반대로 그녀와 헤어질 때 슬픔을 느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롤리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삶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21
자신이 완전해지는 기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차가운 이성을 선택할 것인가?21
감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신적이다. 왜냐하면 감정은 평범한 삶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힘을 지닌 데다, 한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신적'일 수 밖에.22
감정은 나의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신탁과도 같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감정을 신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누군가를 만나서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테니까 말이다. 반대로 만남을 통해 슬픔을 느낀다면, 내가 떠나든가 아니면 상댕방이 나를 떠나는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소망하게 될 것이다.22
문제는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명확히 알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22
예를 들어 연민이란 감정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쁨ㅁ의 감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슬픔의 감정이다. 그러니까 연민의 대상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기쁨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좀먹는 슬픔의 관계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될 테니까. 연민으로 상대방을 만나는 사람은 내심 상대방의 불행에 기대면서 산다는 것.23
상대방이 행복해지는 순간, 이제 자신은 불필요하다는 느낌에 슬픔을 느끼게 될 테니까 말이다.23
"그는 불행한 남자야. 내가 필요해" 이것이 연민의 공식이다. 그렇지만 이때 연민에 빠진 여지가 원하는 것은 불행한 사람을 돌보고 있다는 우월감, 혹은 내가 그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느낌일 뿐이다.23
지금 어떤 감정이 자신을 휘감고 있는지 헛갈린다면, 그 감정이 '기쁨'의 계열에 속하는 감정인지 '슬픔'의 계열에 속하는 감정인지 확인해야 한다.24
"앞으로 당신은 이렇게 될 거예요.:라고 속삭이는 감정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가 과연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24
작고 귀여운, 그리고 기초적인 감정들은 대지에 피는 새싹과도 같고, 변덕스럽지만 떄로는 격정적이기도 한 감정들은 굴곡과 고도 차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소리를 만드는 시냇물을 닮았으며, 화려하지만 곧 쇠락하기 쉬운 감정들은 모닥불의 가녀린 떨림을 연상시키고, 마지막으로 차갑고 허허로운 감정들은 들리지 않는 차가운 바람 소리를 연상시킬 것이다.25
땅의 속삭임
비루함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노예는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감정인 사랑은 오직 자유인에게만 허락되니까 말이다.30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순간, 노예는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예나 다름없었던 농노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야만 한다. 만일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부정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30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지키려는 순간, 충직했던 게라심은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게 쵤 테니까. 이건 노예를 가진 주인 입장에서는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지주가 서둘러 타티야나를 다른 농노에게 시집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30
그래, 농노에게 사라은 사치일뿐. 게라심은 이렇게 자조했을 것이다.31
자신의 감정을 부정당하는 불쾌한 느낌을 어떻게 쉽게 잊겠는가?31
인간이 아닌 동물을 사랑한다면, 여지주도 뭐라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판단도 한몫 했을 것이다.31
주인은 노례가 자기만의 감정을 갖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라는 진실, 그래서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일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31
마침내 게라심은 본인이 직접 무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자신을 그렇게도 따르던 무무를 위한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차라라 나은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32
마침내 게라심은 몸을 쭉 펴고는 어떤 병적인 분노의 표정을 지은 채 자기가 가져온 벽돌을 노끈으로 서둘러 묶고는, 올가미를 만들어서 무무의 목에 걸고 무무를 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마지지막으로 무무를 바라보았다. 무무는 무서워하지 않고 신뢰의 눈빛으로 게라심을 바라보며 작은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게라심은 얼굴을 돌리고 나서 실눈늘 뜨고는 두 손을 쳤다. 게라심은 물에 떨어지면서 무무가 낸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철썩'하고 튀어 오른 둔탁한 물소리도, 다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에게는 가장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지난간 것이다. 마치 가장 고요한 어떤 밤이 우리에게는 전혀 고요하지 않을 수 있듯이.32
여지주는 결코 게라심에게 무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게라심의 행위는 소극적이나마 주체적인 결단, 다시 말해 여지주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33
무무를 강물 속에 던지는 순간, 게리심은 농노로서 가지고 있던 비루함도 함께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33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한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 스피노자.에티카 33
'슬픔'은 어떤 타자나 나의 삶의 의지를 꺽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여지주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할 때, 게라심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슬픔이다. 3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라는 말일 것이다.33
사랑이 가져다주는 기쁨의 감정은 우리에게 항상 조용히, 그렇지만 강력하게 요구하기 떄문이다. 당신은 사랑의 기쁨을 지킬 수 있는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34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도 지킬 수 없다는 진실을 뼈저리게 지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무무를 죽인 뒤, 게라심이 여지주로부터 도망을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다.34
이후로는 절대로 여자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심지어 여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자기 집에서 한 마리의 개도 기르지 않았다 라고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34
자신의 삶에 완전한 주인이 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라라고.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34
투르게네프 : 사랑은 죽음보다다도, 죽음의 공포보다도 강하다. 우리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인생을 버터 나가며 전진을 계속하는 것이다.35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보다 우리 삶에 더 치명적인 것도 없다. 스스로 비하하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루한 삶'은 결코 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비루함의 감정, 혹은 그런 정조를 강하게 띠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대부분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비루함을 "슬픔 떄문에 자기에 대한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감정이라고 정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슬픔'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는 비난과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났다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공부는 잘해서 뭐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너는 엄마를 닮아서 구제불능이야, 피가 어디 가겠니."이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들었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해도 비난을 받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슬픔의 정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 만들어진 슬픔이 하나의 습관처럼 내면화될 때, 우리는 자신을 항상 비하하는 감정, 즉 비루함에 젖어들게 된다. 습관화된 슬픔, 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슬픔, 그것이 비루함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만큼 비루함은 벗어던지기 힘든 감정이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애정과 칭찬이 있다면, 비루함도 조금씩 사라질 수는 있다. 자신을 쉽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 오랜 시절 만들어진 습관화된 슬픔을 그만큼 시간을 들여서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봄 햇살이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그렇게 비루함이라는 고질적인 슬픔을 천천히 치유해 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만이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법이니까.36
자긍심 :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38
그는 샹탈의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장마르크는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모든 여자는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자기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한다.”라고 그래서 장마르크는 스스로 미지의 스토커가 되기로 작정한다.38
자신의 편지를 받은 샹탈의 변화에 장마르크스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누군가가 찬양하고 숭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셩탈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40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40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 마련이다.41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41
샹탈의 우울과 슬픔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감정이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41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12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 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걸.44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었다. “내 눈이 깜빡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바다.”
밀란 쿤데라 : 그녀를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아무리 해주어도 소용없고 사랑에 가득한 시선도 그녀에겐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시선은 외톨이로 만드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장마르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투명하게 변한 두 늙은이의 사랑스러운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슬픈 고독이다.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사회로부터 유리한다.45
우리는 평생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타자는 너무나 쉽게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간혹 이렇게 말할 것이다. "머리에 뭐가 묻었네요. 이리 와서 돌아봐요. 제가 털어 줄게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치다. 그의 상의가 바지에서 빠져나와 있으면 나는 어김 없이 그에게 그 사실을 일러 준다. 이건 뒷모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면을 타자는 마치 거울처럼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사실 거울보다 수백 배나 더 좋은 요술 거울이 바로 타자라고 할 수 이다. 거울이 현재의 시가적인 모습만 비추어 준다면, 타인은 과거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도 보여 줄 수 있고, 심지어 나의 내면마저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던 장점을 보여 준다면, 나는 행복을 위해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나의 단점을 보여준다면, 나는 우울해 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 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경탄 : 사랑이라는 감정의 바로미터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자신이 그, 혹은 그녀의 고귀함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은 경탄과 함께 시작되고, 경탄과 함께 유지되는 법이다. 결국 내 마음속에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어졌다면,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8
가브리엘 앨리자베트로부터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경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 보자.
그녀의 검은 눈에서 금빛 광채가 반짝거렸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으로도 결코 꺼드리지 못할 장난기였다. 가브리엘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잘 몰랐다.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호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요컨대 가브리엘은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은 만나 본 적이 없다.49
어느 사회이든 인간은 가족 구성원으로 존재하거다가 타인을 만나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부모를 떠나 낯선 남자나 여자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도록 만든느 동력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까 기존 가족 관계에 따르면 사랑은 일종의 배신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부모와 함께 있기보다는 새로 만난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불륜'이다. 50
가브리엘의 말,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라는 선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50
사랑에 빠진 뒤 청혼이 이루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자신의 가족에 속해 있으면서도 부단히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상태에 있었다. 일종의 불륜 상태인 셈이다. 그렇지만 청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두 사람은 새로운 가족, 새로운 무리로 묶이게 된다. 바로 이때가 불륜 관계가 해체되는 시점, 즉 사랑이란 감정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제 가브리엘의 여자는 아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내는 더 이상 불륜의 상대가 아니다. 물론 아내는 불륜이라는 찬란했던 과거를 공유한 여자이지만, 동시에 지금은 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가브리엘에게 아내는 '별도의 잡종'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는 불륜, 즉 사랑의 대상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녀는 그저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는 가족 구성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50
한 번도 부정할 수 없었던 성스러운 가족 관계에서 거리르 두게 하고, 심지어 자신을 기존의 모든 관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여자가 어떻게 경탄스럽지 않겠는가.51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51
"혼외의 사랑은 결혼 생활과 달라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죠. 끊임없이 온갖 것을 파악해서 범상함을 초월해야 해요. 아니면 차츰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거예요."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태양"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가브리엘에게 항상 '경탄'의 대상으로 남아 있기 위해, 현명한 엘자베트는 '범상한 관계'를 초월하려고 노력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으니까.54
에릭 오르세나-오래오래는 여든이된 정원사 가브리엘이 젊은 시절 첫눈에 반한 유부녀 엘리자베트와 평생의 '불륜' 관계를 어떻게 사랑으로 꽃피워 뒤늦게나마 함께하게 되었는지를 매우 익살스럽게 들려주는 소설이다. 55
작가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업이 인공적으로 꽃을 피우고 아름답게 가꿔야 하는 정원의 속성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55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상대방에 대해 항상 자유로워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 이런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에만 상대방도 우리를 주인으로 대우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처럼 주인은 관심을 받고, 노예는 무관심에 방치되는 법이니까. "당신이 없다면 나는 살 수가 없어요!"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레토릭이지, 결코 사실을 묘사하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상대방의 뜻에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 노예의 제스처는 글자 그대로 상대방도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제스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한 나의 헌신이 나의 자유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는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상대방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떻게 대우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기쁨을 줄 필요는 업을 것 아닌가. 미워해도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것이고, 밀쳐내도 내게 안길 사람이라면 말이다.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으로 사랑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뿐이다.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 대한 사랑도 식을 테니까 말이다.56
경쟁심 : 서글프기만 한 사랑의 변주곡
방에서 친구와 다정하게 놀던 아이로부터 서러운 웃음서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무슨일일까? 아이는 자신의 장난감을 부여잡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58
아이는 친구가 지신을 좋아하기를 갈망했다. 그렇지만 친구가 자신이 건네준 장난감에 온 신경을 쏟게 되자, 아이는 절망하게 된 것이다. 친구는 자신이 아닌 장난감과 묘한 경쟁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좋아? 아니면 장난감이 좋아? 하지만 장난감은 바로 자기 것 아닌가, 그러니 다시 장난감을 빼앗을 수밖에. 불행히도 그 순간은 친구에게 기쁨을 뺴앗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원래 친구를 기쁘게 하려고 장난감을 준 것이니 말이다.59
토니 모리슨이 소설 술라에서 술라와 넬, 두 흑인 여성들의 사랑을 통해 고민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어렸을 적 은밀한 경험까지 공유하던 단짝 친구 술라가 마을에 다시 돌아오자 일이 벌어졌다. 넬은 술라가 자신의 남편 주드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59
그렇지만 술라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뒤, 넬은 마침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주드도 다른 사람도 아닌 술라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59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동안 내내, 난 떠나간 주드를 그리워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상실감이 넬의 가슴에 밀려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우린 둘 다 소녀였지." 넬은 마치 무엇은 설명하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오 하나님, 술라야." 그녀는 울부짖었다. "이 계집애야, 이 계집애야, 이 계집애야!" 그것은 크고 긴, 한바탕 멋진 울음이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밑도 끝도 없는 그저 슬픔의 둥근 원, 원들이었다.60
타자가 나를 부정할 때,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 아닌가. 불행한 것은 술라를 사랑하고 있었던 자신의 마음을 넬이 너무나 늦게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항상 이렇게 사후적으로만 제대로 확인되고 음미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감정 아닌가.60
내가 저 사람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와 헤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헤어져 있다는 게 생각만 해도 힘들다면 나는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60
만약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이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정말로 그가 내곁에 없게 되었을 때 생각했던 만큼 괴롭지 않아서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비극으로 끝날지 축복이 될지 모르겠지만, 자기 사랑의 감정이 어떤 수위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랑하기는 사람으로부터 잠시 떠나 있을 필요가 있다.61
경쟁심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가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61
여기서의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61
언뜻 보면, 소꿉친구 넬과 술라는 주드라는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친구 사이였다. "즉 한 남자아이와 둘 다 입맞춤을 해보고는 한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 했고 다른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 했는지 하는 걸 비교했다."62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가 상큼한 단발머리를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긴 머리를 자를 것이다. 그가 브람스를 좋아한다면 대 MP3에서 브람스가 흘러나올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63
사랑이 아니어도 우정의 관계에서도 경쟁심은 필수적이다.63
서로 농구를 잘하는 친구가 되어서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63
주두는 두 사람에게 잘해야 장난감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던 쪽이 술라였다면, 넬은 주드가 떠나고 또 술라마저 이 세상을 등질 때 비로소 알게 된다. 하지만 넬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내면의 진실이 아주 때늦게 찾아왔다는 것, 이것이 넬에게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그러지만 어떤 점에서 넬은 행복한 사람 아니었을까?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살고 있으니까. 이것이먈로 진정한 비극 아닐까?64
토니 모리슨- 술라는 우정을 통해 진짜 나의 모습을 찾아 나서는 여성들의 성장 소설이다.65
보통 우정은 동성끼리, 그리고 사랑은 이성끼리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정과 사랑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정과 사랑은 모둔 어떤 타인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자신이 과거보다 더 완전해졌다는 뿌듯함이 드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방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슬픔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정과 사랑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감정이 아니라, 양면적 차이, 혹은 정도상의 차이만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타자가 무어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일 수도, 동성일 수도, 개나 고양이일 수도, 혹은 슈베르트의 음악일 수도 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경쟁심이든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다. 우정이나 사랑의 감정에 빠지면 우리는 상대방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는 과정을 꼭 겪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면 좋을 것 같다. 싫어하지 않는 어떤 사람과 묘한 경쟁 관계에 들어갈 때, 여러분들은 우정, 혹은 심하면 사랑의 관계에 들어서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서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하긴 미워하는 사람과 경쟁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66
야심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
모파상의 장편소설 벨아미에서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출세에 목마른 뒤루아가 지금까지 자신의 기자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애를 써 주었던 아내 마들렌을 간통죄로 고소하여 내치고는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69
모파상의 소설 벨아미는 19세기 최고의 도시 파리에서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여성들과 성공에만 눈이 먼 남성들이 펼치는 화려하지만 덧없는 군무를 묘사한 작품이다.70
명예욕은 둘 이외에 제3자를 전제하고 있는, 다시 말해 타인이 나에게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내 주기를 바라는 사회적인 감정이다. 그러니까 잘생긴 남자나 높은 지위를 가진 여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의 이면에는 희소성을 추구하는 사회학적 원리가 이미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잘생긴 남자를 애인으로 두는 순간 다른 여성들의 시셈을, 또한 높은 지위를 가진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순간 다른 남자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71
야심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 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71
야심이란 둘 사이의 관계 혹은 나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망과는 다른 것이다.이 양자의 관계 바깥에 있는 제3자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바로 야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동료들이 어떻게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나며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그 남자 정말 멋진데!" 라고 말해 줄 때가 있다. 이런 찬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때, 그 남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더 커지고 강화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야심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이나 욕마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72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행복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의 남루한 자화상 아닐까? 자신의 행복을 알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항상 행복한 상태에 있지 않으니, 행복한 사람은 그만큼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이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제3자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 것이 된다.73
기 드 모파상-벨아미의 주인공 뒤루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출세에 이용하는 야심의 화신이다. 그러나 뒤루아가 귀족 행세를 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식적이고 부패한 귀족 사회와 돈 많은 사교계 여인들의 문란한 생활, 언론과 정치가 영합하는 부패한 사회가 있었다.75
야심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특정 다수들로부터 시기와 관심, 그리고 찬양과 찬탄을 받으려고 한다. 나를 찬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찬양하기만 하면, 우리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도 보석으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창 시절을 한번 돌아보자. 다음과 같은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첫 강의를 듣자마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교수의 강의가 보잘것없다는 것, 심지어는 강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리포트를 제출하고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교수가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교수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인만큼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심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심이 강한 사람은 너무나 취약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칭찬해 주면 사족을 못 쓰는 아기와도 같다. 그러니까 강해 보여도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하고, 당연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자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전쟁이라고 할 때, 이렇게 지피지기를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삶이나마 제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직급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야심이 커질수록 너무나 당연한 감정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도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심은 아카시아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야심은, 적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속에 다른 수많은 감정들도 자기 곁을 따라 제대로 자라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76
사랑 :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자신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에 따라 사는데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오직 사랑에 빠질때만 가능해진다.78
한마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79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79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79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79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정한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쁨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돠었다는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을 떠날 수도 없거니와 그가 떠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다. 그가 떠나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80
그렇다고 해서 사랑은 헌신적인 것이라고 섣부른 오해는 하지 말자.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방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다. 상대방이 내 곁에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 뜻대로'는 일종의 유혹, 내 곁이 있으면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노예로 두고 영원히 존중받을 수 있다는 치명적인 유혹인 셈이다. 어느 누가 이런 매력적인 유혹을 거부할 수 있을까.
펄 벅의 소설 동풍 서풍의 주인공 궤이란의 동양 여인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신념과 아울러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전족을 버린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80
신기하게도 내 외적인 아름다움은 남편의 마으을 돌리 수 없었건만, 내 고통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는 나를 어린아이 달래듯 위로하려고 했어요. 나는 고통에 못 이겨 그가 누구인지, 그의 직업이 뭔지도 잊어버린 채 종종 그에게 매달렸어요.
"궤이란, 우리는 이 고통을 함께 견뎌 낼 것이오." 남편은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지만, 이건 단지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걸 생각해 보오. 사악한 구습에 대항한다고 말이오."
"싫어요." 나는 흐느끼며 말했어요.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참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 신석 여성이 될 거예요.
남편은 웃음을 떠트렸어요. 그러자 그 얼굴도 류 부인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처럼 약간 밝아졌어요.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어요. 또 이후로는 이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 같았죠.81
그녀의 남편은 궤이란 자체보다는 그너의 외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관심을 주고 그렇지 않을 땐 무관심하다면, 이것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겠는가.83
평생 "달리지고 싶다고 꿈꿔 본 적"도 없는 궤이란이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깊이 몸을 담그기로 결심한 반면, 남편의 관심은 여전히 궤이란 그녀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왜곡된 그녀의 발, 낡은 습관을 상징하는 그녀의 발을 향하고만 왜곡된 그녀의 발, 낡은 관습을 상징하는 그녀의 발을 향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남편은 아내를 일종의 계몽의 대상으로, 다시 말해 인류애라는 감정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남편은 전족으로 상징되는 동풍에 아직도 젖어 있는 아내에게 측은지심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신여성 류 부인에게 지어 보였던 똑같은 미소를 궤이란에게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궤이란도 미개한 풍속을 버리고 개화의 길을 따랐으니까.83
그에게는 자신이 타고 있는 서풍을 버리고 동풍에 몸을 맡길 만큼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4
펄 벅 - 동풍 서풍은 짧지만 신구와 동서 갈등이 응출된 소설이다. 궤이란의 어머니는 "네 또래 중에 너처럼 작은 발을 가진 아이를 본 적이 없단다."라며 딸의 전족을 자랑스러워한다. 반면 아들의 약혼녀가 사서를 배웠다는 말에 "학문은 미모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며 걱정한다. 이 소설은 '전족'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통해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충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85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주인공이 된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조연으로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종교와 정치적 신념 같은 관념들일 수도 있다. 주인공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조연일 때 우리의 삶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신의 꿈과 의지를 관찰시키지 못하는 조연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몸숨을 거두는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표어는 사랑에도 그대로 관찰된다. "주인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사랑의 위기나 비극은 모두 사랑의 정의로부터 설명된다. 우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 동등한 주인공이 아닐 때, 사랑은 비틀거리게 된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주인공으로 만들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여자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는데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 순간 사랑은 위태로워진다. 또 다른 위기는 두 사람 이외에 제3의 것들이 조연의 자리가 아닌 주연의 자리로 떠오를 때 발생한다. 시부모가 무대를 휘두른다든가. 남녀 중 어느 한 사람의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중심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조연으로 강등되고 동시에 사랑의 기쁨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기를 지혜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유일한 문제일 것이다.86
대담함 : 나약한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 비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비검한 사람이라도 사자처럼 용감하게 압도적인 상대와 싸울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겁함을 보여 주느니 차라리 맞아 죽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당한 사람만이 사랑을 해야 하지만, 사랑을 하면 당당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이성간에 사랑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홀로 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대담함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적군들에게도 악귀처럼 달려들어 싸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에 대해 스피노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89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89
다른 사람들이라면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것이 대답함이라는 것89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가는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조지 오웰이 1984라는 소설에서 모색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파괴력,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이었다.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공유했던 사랑만큼은 빅브라더도 어쩌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다 다를까,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빅브라더의 하수인들에게 잡히고 만다. 그리고 서로 격리된 채 온갖 고문을 당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왜냐고?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빅브라더의 하수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을 진정으로 굴복시킬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92
사랑이 죽으면 대담함이라는 감정, 온갖 불의와 억압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가장 인간적인 감정도 맥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1984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 아닌가. 사랑을 지켜라, 그러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긍심도 무기력해질 테니까.93
조지 오웰 - 고도의 정보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한 1984는 절대 권력과 인간성 말살의 관계를 성찰한 무건운 정치소설이지만, 명료한 주제읫기으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선다.95
대담한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용기라는 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정말 용기가 있어."이런 표현 때문에 누군가의 내면에 용기라는 것이 마치 실체처럼 있다는 착각이 벌어진다.96
번지점프대에 올라갔다고 하자. 쉽게 점프대 난간에서 한 걸음 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이런 번지점프대의 같은 위기 상황, 그러니까 그 점프대 제일 끝에 서 있을 때,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창공에 몸을 던질 수도 있고, 뒤로 한 걸음 빼서 안전함을 도모할 수도 있다. 대담하게 몸을 창공에 던지는 경우 우리는 '용기'나 '대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러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때 '비겁'이나 '우유부단함'을 가진 사람이라도들 말한다. 그러나 용기가 있어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용기일 뿐이고, 비겁해서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물러난 것 자체가 바로 비겁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 그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몸을 던졌다면, 지금까지 그는 용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위기 상황,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과감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용기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중요하다. 용기와 비겁은 불변하는 성격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번지점프대에 서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96
탐욕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동시에 탐욕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지고한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탐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99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99
스피노자의 말처럼 '무절제하게' 부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탐욕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러니까 탐욕에는 중용이 있을 수가 없다. 탐욕의 상태는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마신 상태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닷물을 마시면 잠시 동안 갈증은 해소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보다 더 강한 갈증이 찾아오게 된다. 불교에서는 '갈애'라는 말이 있다. '목이 마르는 애착'이라는 뜻이다. 마실수록 더 마시게 되는, 밑고 끝도 없이 치명적으로 중독적인 욕망이 바로 갈애이자 탐욕인 셈이다.100
지금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의 집, 미래의 음식, 그리고 미래의 연인을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돈에 대한 탐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끝내 그 무절제함으로 인해 탐욕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100
바로 그것이다. 전에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갖그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결국 캐츠비의 사랑도 탐욕에서 출발했던 셈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캐츠피, 데이지, 그리고 톰을 가로지르고 있는 '탐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102
데이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우아한' 여자였다. 그는 온갖 숨겨진 능력을 발휘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몹시도 탐났다.104
결국 캐츠비의 사랑도 탐욕에서 출발했던 셈이다. 그러니 사실 위대했던 것은 캐츠비가 아닐 수 있다.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개츠비, 데이지, 그리고 톰을 가로지르고 있는 '탐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세 삶이 아니라'돈'이었던 것이다.104
위대한 캐츠비의 화자 닉은 이러한 '동경'의 순수성을 깨닫는다. 톰과 데이지가 겉모습과는 달리 실은 타락한 인간들인 반면, 수상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긴 했어도 캐츠비의 꿈만은 오히려 순수했다는 것을.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업이 연이어 실패하고 젤더마저 병에 걸리자 절망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술을 끊지 못하고 마흔네 살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105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을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미 돈은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승격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돈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돌아보면 우리가 대학교와 전공을 정하는 것도, 취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한 것 아닌가. 돈만 있으면 여행도, 물건도, 행복도, 사랑도, 심지어는 애인마저도 쉽게 구할 수 있을것만 같다. 그렇기에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친구가, 애인이 내게 친절한건 내게 돈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도 나처럼 돈을 신처럼 숭배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 자리로 만들려면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106
반감 : 아픈 상처가 만들어 낸 세상에 대한 저주
가족 폭력의 매커니즘은 자식들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 평생 동안 해소하기 불가능한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특히 딸인 경우에는 그 트라우마가 더 심각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두 얼굴이 중요하다. 술에 취해 마치 자신을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함부로 대했던 아버지와 술에 취해 마치 자신을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함부로 대했던 아버지와 술에 깨서 자책하는 가련한 아버지.
전자가 악마라면, 후자는 천사로 각인된다. 바로 이것이 딸에게는, 아무리 성숙했을지라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트라우마의 실체다. 자신을 아끼는 천사라고 받아들여도 악마가 따라오니, 그녀에게 어떻게 제대로 된 애인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 천사와 같은 애인은 항상 악마와 같은 폭력성을 아우라로 숨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런 악마성 때문에 애인의 보잘것없는 친절이 천사처럼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폭력적인 아버지를 유년시절에 겪었던 모든 ᄄᆞᆯ들은 제대로 된 연애나 행복한 결혼 새활에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떨쳐내기 힘든 유령처럼 혹은 자신이 죽어야 끝나는 환각처럼 우리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마침내 우리가 죽어야, 트라우마와 그 영향력은 비로소 안식에 들게 될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가 서럽게 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09
강자에게 당하는 억압을 눌러 두었다가 약자에게 해소하는 정신적 메커니즘이 바로나약한 인간의 특징이니까 말이다.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기에 작가는 아버지의 폭력성보다는 아버지의 소시민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제 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게 된 지성인의 사후적 해석일 뿐이다. 소시민적인 아버지가 어떻게 메리나 그녀의 어머니에게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약한 아내와 딸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느껴졌을 테니까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아버지의 폭력이 물리적이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110
애정 결핍을 겪고 있었기에 메리는 남의 험담을 견디지 못하고 너무나 성급하게 결혼을 결정한 것이다.111
리처드의 나약한 소시민성이 언젠가 자신의 삶에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와 우울함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메리가 결혼 전에 리처드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본 것은 그의 소시민성을 친절로 해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메리는 그것이 단지 자신의 삶을 궁핍하고 무럽게 만드는 그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다른 측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112
반감이란 우연적으로 슬픔의 원인인 어떤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스피노자 : 에티카112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우연적’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슬픔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그 사람은 나의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내가 느끼는 슬픔과 미움은 ‘필연적인’것이다. 분명 나와 있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슬픔과 미움이니 말이다. 반면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과거에 미워했던 다른 사람이 떠올라서 슬픈 감정이 들 수도 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금 보고 있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미움은‘필연적’이지 않고‘우연적’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반감’이라는 감정이다.113
사른 살 노처녀 메리, 그녀가 지금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리고 휘청거렸다.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었기에, 남 애기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만 된다고 말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마구 휘청거렸던 것이다.114
도리스 레싱 – 풀잎은 노래한다.의 소재는 작가 자신이 살던 남아프리카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 사건이다. 메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능력 있는 타이피스트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 때문에 중대한 미래를 성급히 결정할 만큼 메리의 자아는 연약했고 그녀의 만족은 사상누각에 불과했다.115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새로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새로 만난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래도 반감일 생기는 걸 어쩔 도리가 없다. 안타까운 것은, 첫 만남에서 반감을 느꼈을지라도 그가 사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면을 갖춘 사람일 수도 있고, 심지어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과거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연상시키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반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과거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모두 기대한다면, 비록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망령을 쫒아내야만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116
박애 :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장 발장의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힘이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냉담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동시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것도 사람이었던 셈이다.120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121
“자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 어떤 정서에 자극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유사한 정서에 의해 자극된다.”라고 그 얼어 가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장 발장에게 부모를 잃고 오갈데가 없어진 코제트는‘자신과 유사한’존재였다. 그러니 코제트의 비참은 바로 장 발장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던 비참의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121
명료한 지적이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든다. 스피노자의 정의를 따르면,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박애의 감정은 생길 여지도 없을 테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우리의 이런 궁금증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어떤 정서에 자극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유사한 정서에 의해 자극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으로 천대받아 얼어 가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장 발장에게 부모를 잃고 오갈데가 없어서진 코제트는 '자신과 유사한' 존재였다. 그러니 코제트의 비참은 바로 장 발장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각이된어 있던 비참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121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테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122
내 삶이 가장 비참해질 때,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그만큼 모든 사람을 품어 줄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123
비참한 삶을 겪어내는 사람은 마침내 박애라는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박애는 막연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124 *미사여구 : 아름다운 말로 듣기 좋게 꾸민 글귀
빅토르 위고 - 성공한 작가, 재능 있는 화가, 잘나가는 정치가, 위대한 사상가, 그리고 바람둥이였던 위고는 부, 명예, 사랑 모든 것을 거머쥔 '세기의 전설'이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을 계기로 왕당파에서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위고는 나폴레옹과 대립하여 20여 년 동안 고달픈 망명생활을 하게 되는데, 딸의 죽음, 우울증, 투욱 등 여러 시련을 겪고 나서 집필한 대작 레 미제라블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다.125
레 미제라블 : 이 소설은 불합리한 사회에 희생되어 낙오자가 된 장 발장이라는 평범한 노동자가 어떻게 존경 받는 인물로 변신하여 인간애를 발휘하게 되는가를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가의 정치, 문화, 사회, 그리고 민중의 삶에 대한 세밀화가 펼쳐진다. "그는 이제 장 발장이 아니었고 24601호였다. 도합 19년. 1815년 10월에 그는 석방되었다. 그는 유리창을 부수고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796년에 형무소에 들어갔던 것이다. 장 발장은 흐느끼고 떨면서 감옥에 들어갔고, 무감정한 사람이 되어서 거기서 나왔다. 그는 거기에 절망해서 들어갔고, 거기서 침울해져서 나왔다. 이 사람의 영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125
오랜 시간동안 사랑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서 다루어져 왔다. 예수의 사랑도 그렇고, 싯다르타의 자비도 그렇고, 공자의 인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 제도가 관철되면서 사랑도 사적인 영역으로, 결혼 제도와 일정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는 공적인 차원으로 확정하든 간에,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톧애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한다. 겨울의 찬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도시나 같은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서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합리적인 것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커플이나 부부사이에도 사랑의 원리가 훼손되어 있는데,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이런 시대에 전체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원리, 즉 박애의 정신이 어떻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연애엣허부터라도 차근차근 사랑 연습을 하자.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이 연습이 필요한 시대니까.126
연민 :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몸이 아픈 그녀가, 만신창이인 그녀가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 이것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어린아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힘없는 소녀가 감히 진정한 여인의 감각적이고 의식적인 사랑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나로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예상했어도 운명의 저주를 받아 자신의 몸조차 가눌 힘 없는 소녀가 남자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 단순히 연민 때문에 이곳에 오는 나를 그토록 끔찍하게 오해했다는 사실만큼은 전혀 에상하지 못했다.129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만 마음은 두 남년 사이의 엇갈린 감정, 그래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남자는 불구의 여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고 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이 감정을 키우고 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비극의 전조로는 충분하다.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 이야기이지만, 결국 연민을 게속 품고 있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계속 불행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연민의 감정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연민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잿빛 아우라가 퍼져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130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을 극복하고 기쁨을 회복하려고 하낟.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도'도 슬픔은 슬픔이다. 그러니 어떻게 극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호프밀러라는 젊은 장교가 계속 에디트라는 불행한 여이은 찾아가는 이유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통해 에디트가 활력을 되찾는 것을 목격하면서 호프밀러가 스스로를 찬탄하는 대목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준다.131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행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그렇지만 강자의 자부심은 오직 약자가 약자로서 계속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만 유지되는 법. 이 점에서 연민의 주체는 연민의 대상만큼이나 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키스로 에디트가 자신의 사랑을 토로할 때 호프밀러가 당혹감을 느꼈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의 감정은 어느 누가 약자이고 어느 누가 강자인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이 대등한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131
키스를 마치자마자 에디트는 호프밀러의 속내를 눈치 챈다. 이성 관계이든 동성 관계이든 상관없이 상대방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키스를 포함한 육체적 접촉밖에 없다. 만일 상대방이 당혹스러워한다면, 그 사람의 감정이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른 감정으로 나에게 친절했던 것이다. 이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사람과 키스를 나누어 보라, 아니면 섹스를 시도해 보라. 그 순간 그 남자에 대한 나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감 정도였는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132
그렇지만 호프밀러는 자신의 연민을 애써 사랑이라고 포장하면서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그녀가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 고백을 철저하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하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지혜롭지 못했던 것이다. 호프밀러는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느낌을 좋아했다. 불구의 몸을 가진 에디트는 호프밀러의 자긍심을 위한 먹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그녀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냐, 연민이냐의 이분법에서 호프밀러는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연민을 선택하는 순간, 에디트는 마음이 아파 와도 그와 헤어질 테니까. 반면 에디트는 키스 후 알게 된 그의 감정, 즉 호프밀러는 자신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해 버리고 만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호프밀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사실을 왜곡할 만큼 컸던 것이다. 132
불행은 이제 현실화되고 만다. 호프밀러는 세 시간도 되지 않아 동료들 앞에서 약혼 사실을 부인하고 마니까. 돈 때문에 불구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세상의 평판이 무서웠던 것이다. 이 순간 호프밀러는 약혼자가 받을 충격은 짐작조차 못 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불명예만이 뇌리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133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에디트라는 여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는 오직 자기만을 사랑했던 것이다. 약혼자가 약혼을 부인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은 곧 에디트의 귀에 들어가고 만다.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었던 에디트는 참담한 마음으로, 혹은 담담한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까. 어쨌든 에디트의 말은 예언처럼 적중했던 것이다. 정말 호프밀러는 지독한 바보, 아니 정확히 말해 사랑을 감당할 수도 없었던 어린아이였던 것이다.133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134
슈테판 츠바이크-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 초조한 마음에서 주인공 호프밀러가 장애인 에디트에게 느낀 연민은 처음에는 일종의 우월감에서 시작한다. "남을 도와주고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만으로도 나는 흥분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중요한 조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의 변화와 우유부단한 성격 묘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인지하지 못하여 불행을 초래하는 인간의 비극성을 통찰하도록 만든다.135
사랑의 우정만큼 우리에게 소망 가득한 감정이 또 있을까? 아무도 나의 내면과 감정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데, 특정한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한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때, 사랑니 때문에 격심한 치통을 겪을 때, 아니면 생리통을 겪을 때도 있다. 아니면 실연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미래가 불안할 때, 부모님의 죽음에 홀로 눈물을 떨구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럴 때 눅누가 나의 고통을 함께하고 내게 웃음을 주려고 하고 내 눈물을 닦아 주려고한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의 고통과 나의 눈물은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인과 친구가 고마운 이유는 그들이 나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공감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사랑이나 우정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애인과 친구의 가치를 알려면, 사실 내가 고통에 빠져 있을 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내가 가장 행복할 때에 진짜 애인인지 가까 애인인지, 혹은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당신의 행복을 함께 행복해하고 당신의 불행을 함께 불행해하는 사람이어야만이 여러분은 자신에게 애인이나 친구가 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당신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당신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에 뿌듯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혼했거나 실직했다고 치자.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은 친구들 혹은 직장에 불평불만이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어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그나마 자신에게는 가정과 직장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게 인간이다.136
회환 : 무력감을 반추하도록 만드는 때늦은 후회
클라망스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자살한 여자를 구하지못했다는 이유로 파리의 생활을 접고 마치 죄인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않기 때문이다.139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책임은 이미 그의 영혼에 지울 수없는 죄로서 각인된 것을 어쩌겠는가? 이렇게 별일도 아닌 일이 별일이 되어한 사람에게 속죄의 삶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별일 아닌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일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과 관련된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다."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혁명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등이 가려운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을 수도 있다.140
회한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 에티카 140
스피노자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에 어긋나게'와 '과거 사물'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애인이 위험에 빠지기만 하면 언제든 도울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사람이 있다고 하자. 심지어 그는 애인이 위험에 빠지기를 기다릴 정도다. 위험에 빠진 애인을 구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꿈꾸면서 말이다. 불행히도 정말로 애인이 위험에 빠졌다. 예기치 않게 사기 사건에 말려든 애인에게 경제적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 둔 돈으로 충분히 애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웬걸, 그는 애인을 구하지 못했다. 애인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애인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정말 슬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속물이었는지를 자각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자각에 눈을 뜬 이상 그가 어떻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애인을 계속 만날 수 있겠는가.141
클라망스의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물에 떨어진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소망을 품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기사도로 무장한 멋진 남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야망을 대신하고 있는 탐욕을 늘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더 높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거든요."클라망스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여자와 정의를 동시에 사랑하는" 균형 잡힌 인간이자 너무나 많은 자질을 지니고 있는 '선택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말 그대로 허공을 날아다닐" 만큼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이었다. 어쩌면 이런 자신감이 그를 변호사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여자가 차가운 센 강에 떨어지는 사건을 접하는 순간, 그는 얼음의 되어 버렸다.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생각, 아니 희망이 허위로 드러날 때, 그 얼마나 참단한 심정이었을까. 법정에서 편안하게 사람들을 변호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말이다.141
회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과거와 달리 더 이상 무기력하고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성숙하고 강해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유령처럼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다. 만일 지금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지사는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142
자신의 무력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슬픔만큼 비참한 경험이 또 있을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을 느낌에게 오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그러니 회한이라는 감정은 얼마나 무서운가? 위기 상황에 이르면 타인을 구원하기는 커녕 항상 무력감을 느낄 것 같은 예깜이 드는데 어떻게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소망스러운 감정에 빠져들 수 있겠는가.143
회한의 감정을 지울 수 없는 상처처점 품고 있는 클라망스의 삶은 얼마나 고된 생일까? 어쩌면 여기서 그가 '속죄판사'를 자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회한의 감정을 주입려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클라망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에게도 자기처럼 죄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야만 했다. 자기만 회한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너무나 쓸쓸한 인생 아닌가.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기처럼 회한을 품고 속죄로 한다면, 자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속죄판사' 클라망스의 노력은 이런 허황된 자기 위로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암스테르담의 남루한 바에 들르는 모든 사람들을 회한의 세계에 빠뜨리려는 절망적인 노력이 그를 얼마나 위로 할 수 있을까?144
알베르 카뮈 -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 하는 인간"에 의하면, 인간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맹복적인 삶에 묶여 있다는 걸 인식할 때 삶의 부조리함을 깨닫지만,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인해 '구역질'을 느끼고 불합리함에 대항하여 희망없는 반항을 하게 된다.145
엎질러서는 안 되는 물동이를 엎질렀다는 슬픈 느낌, 이것만큼 회한의 감정에 대한 좋은 비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우리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러지만 회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다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순간의 결정이 이다지도 평생 잣니을 따라다니며 삶을 슬픔에 물들게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회한의 감정이 가진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때는 내가너무 미성숙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 나약해서 용기가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과 비겁의 경험을 배경으로 회한은 꽃피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회한에 빠진 사람은 이제 자신이 무기력과 비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과거에는 무기력하고 비겁해서 물동이를 들지 못하고 물을 엎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성숙하고 강해져서 물동이를 계속 들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때, 이번에는 진짜로 물을 엎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정말로 성숙하고 강해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지사는 하나의 전설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로 기억될 테니까. 결국 회한에 빠진 사람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한이라는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회한이 없도록 지금 과감하게 선택하고 당당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0년 뒤에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의 무기력과 비겁에 맞서 싸운다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희한은 밝은 태양에 녹아내리라는 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146
물의 노래
당황 : 멘붕, 즉 멘탈붕괴와 함께하는 두려움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성적인 코드를 강화시켜 영화하한 것이다. 20세게 초에 로렌스의 작품은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출판을 금지당했었다. 전쟁으로 하반신 불구가 된 귀족 남편 클리퍼드 채털리와 그의 매력적인 부인 콘스턴스 채털리가 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미 하반신 불구라는 코드로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성적인 욕망으로 치달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151
그녀의 희생, 클리퍼드에 대한 그녀의 헌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는 결국 무얼 위해 그렇게 애써 봉사하고 있는 것인가? 고작 허영에 찬 한 사람의 차가운 영혼, 즉 따뜻한 인간적 접촉이란 하나도 없고, 성공의 암캐 여신에게 간절히 몸을 팔고 싶어하는 면에서는 비천한 유대인 못지않게 타락한 그런 영혼을 위한 것에 불과한 아닌가.152
이렇게 환멸이 깊어 갈수록 코니는 진정한 사랑,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통일되어 있는 사랑을 꿈꾸게 된다. 무의식적이나마 그녀는 남편 클리퍼드의 비뚤어짐이 결국은 그이 성불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152
코니를 끌어안을 것인가, 코니를 거부할 것인가? 도대체 어찌 해야 하는가? 불쌍한 멜러즈로서는 멘붕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로렌스의 소설을 읽고 멜러즈의 감정 상태를 알았다면, 스피노자는 당황의 감정이 멜러즈의 온 몸을 감싸고 있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153
낯선 상황에서 내 안에 전혀 예상치 못한 욕망을 발견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즉 생각했던 나의 모습과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당황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맨얼굴을 찾을 수도 있다.154
당황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동요하게 만들어 약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스피노자 : 에피카 155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한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이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멜러즈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는 설명 아닌가.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도 새롭게 꿈틀대는 욕망에 대한 놀라움으로 제약되니, 멜러즈는 '무감각해지게' 된 것이다. 동시에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은 여자를 피했을 때 발생하는 악을 고려할 수밖에 없으니, 멀레즈는 '동요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당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신 상태, 요즘 말로 멘붕 상태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당황은 단순히 멘붕 상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감정이다.155
체털리 부인의 연인은 멜러즈가 느끼는 이런 당황이 전체 등장인물을 물들이면서 전개되는 소설이다.멜러즈와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코니도 멜러즈가 느끼던 당황의 감정을 겪게 된다. 불구가 된 남편이라도 남편은 남편 아닌가. 이제 어쩔 것인가. 남편에게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멜러즈와 새로운 삶을 영위할 것인가? 멜러즈가 코니를 사랑하면서 당황의 감정을 나름 극복했던 것처럼, 코니도 멜러즈와의 사랑을 통해 당황의 감정에 대처해 나간다. 그렇지만 코니가 극복한 당황의 감정은 이제 다음 순서, 그녀의 남편 클리퍼드에게로 옮아간다. 아내에게 이혼하자라는 요구를 듣고, 심지어 그녀가 사랑하는 애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 부리던 사냥터지기라는 사실을 알고는 클리퍼드도 적잖이 당황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렇게 당황이라는 감정이 로렌스의 소설 전체를 움직이는 엔진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그렇지만 멜러즈, 코니, 그리고 클리퍼드에게서 당황의 감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이 느꼈던 당황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남겨질 것이다.156
데이비드 로렌스 - 교살를 지냈던 어머니는 주정뱅이 광부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아들을 향해 남다른 애정을 쏟데 되었는데, 아들와 연인 에는 그런 어머니의 집착으로 인해 연애가 꼬이곤 했던 작가의 경험이 잘 나타나 있다. 157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오랫동안 프로노라는 꼬리표를 달고 출간되었으나, 돈을 숭배하는 현재 사회의 대한 작가의 신랄한 문명 비판을 담고 있다. "문명사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돈과 소위 사랑이란 것에 사회는 아주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돈이 단연 우세한 광증이었다. 개인들은 각기 따로따로 미친 가운데 이 두 가지 방식, 즉 돈과 사랑으로 스스로를 주장하며 내세우고 있었다."또한 작가는 명예만 탐하는 남편에 대해 구토를 느끼는 코니를 통해 공허한 관념주의를 비판한다.157
단순히 후배나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들 때가 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결혼했지만, 허니문에서 그와 섹스를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혹은 클럽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폄하했던 내가 부득이하게 클럽에 들어갔는데 음악과 조명에 몸을 맡기는 낯선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처럼 전혀 예상치 않았던 욕망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동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니 당황에 빠질 때 걱정할 건 없다. 무조건 맨얼굴의 욕망, 즉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경이롭게 생각하는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여린 사람들은 맨얼굴의 욕망을 거부할 수 있다.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 위해 후배나 선배에게 오히려 쌀쌀맞게 굴거나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남편과의 섹스를 꺼리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신 채로 그의 섹스에 응할 수도 있다. 아니면 춤을 추려는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 뒤풀이 장소에는 가급적 가지 않거나 친구들과의 늦은 만남을 피할 수도 있다. 뭐,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이게 저항해 보라. 맨얼굴의 욕망을 부정하고 가면의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낯빛은 피폐해지고 삶은 무기력해질 테니까.158
경멸 : 자신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서글픔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사랑은 거대한 꿈과 같다. 어쩌면 일시적인 정신착란이라도 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고, 반대로 없는 것을 있다고 보니까 말이다.160
너무나 때늦은 후회다. 촛불만이 외롭게 빛을 내는 거실에 홀로 앉아 이사벨은 자신이 남편 오스먼드를, 그리고 남편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유산 상속으로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살 수 있었음에도, 이사벨은 가난한 남자, 심지어 이미 딸까지 있는 오스먼드와 결혼했다. 결혼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녀는 영국 귀족 위번튼 경과 미국의 성공한 사업구 굿우드의 청혼마저 과감하게 거부했다.영국 귀족이 상징하는 고리타분한 관습과 인습, 그리고 미국 사업가가 보장하는 부유함 때문에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는 의도가 좌절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가를 무릅쓰고, 그리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며,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결혼은 그녀에게 오히려 참담하기 그지없는 현실로 보답했다. 오스먼드라는 남자가 겉보기와는 달리 인습의 추종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유함을 지향하는 속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밤이 새도록 이사벨의 고민은 깊어져 가기만 했던 것이다. 162
헨리 제임스의 소설 여인의 초상은 사랑, 결혼, 그리고 부부 생활에 고뇌하는 한 여성의 내면을 담담한 필치로 서럽게 묘사한다.162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162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과 만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자꾸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씨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소중한 정신적 태도가 떠오를수록, 우리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자체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부정하게 된다. 이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식으로든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이럴 때 상대방은 우리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직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경멸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163
이사벨은 "지삭과 자유가 결합된" 삶, 그러니까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살아내는 삶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이런 꿈도 사실 일종의 허영이었던 셈이다. 이사벨은 그렇게 사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가장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과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싶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그렇지만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겠는가. 남편 오스먼드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처럼, 그녀도 그만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이미 결혼은 파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순간, 이사벨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인습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겉모습은 확연히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부자유스럽기는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녀가 점점 자신의 꿈을 버리고 남편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164
남편을 경멸한다면, 이사벨 자신도 경명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삶, 그러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충만하나 삶을 영위하려면, 이사벨은 경멸하는 과거 자신과 철저히 단절해야할 뿐만 아니라 경멸하는 대상과도 단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용기는 또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지.165
남편을 경멸함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삶을 유질하려는 비겁함 때문에, 마침내 이사벨은 자신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내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경명하는 대상과 단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166
헨리 제임스 - 여인의 초상은 철저한 내면 분석으로 통해 외피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자 한다.167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가 어떻게 남자를 쉽게 포기하겠는가.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이 느낀 기쁨을 포기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바로 여기에 사랑의 비극이 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기쁨을 느끼지만,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인 셈이다. 그래서 여자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그녀는 남자를 떠나 슬픔을 혼자 감당할 수 있다. 아니면 남자들 억지로라도 붙잡아서 둘 다 슬픔에 빠뜨릴 수도 있다. 억지로 붙잡힌 남자는 슬픔에 빠져들 것이고, 그의 슬픔은 여자를 또 슬프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불행히도 여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억지로라도 남자를 곁에 두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남자가 슬픔에 빠질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남자를 행복하게 해 주면 그의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너무 진부한 방법이지만 여자는 남자를 호텔로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여자는 남자가 호텔로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여자는 남자가 호텔에 함께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치자. 그곳에서 여자는 정성을 다해 남자의 몸을 그리고 의 마음을 애무한다. 그렇지만 남자는 마치 시체처럼 반응이 없다. 심지어 그는 지금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옷 한 조각 걸치지 않은 자신에게, 그렇게 애정을 담아 애무하고 있는 자신에게 무감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지금 남자는 할 수 있는 한 여자를 경멸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멸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체 옆에 있는 느낌을 얻은 경험은, 이제 알겠는가?경멸당하지 않으려면 내게서 슬픔을 느끼는 사람을 쿨하게 보내 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168
잔혹함 : 사랑의 비극
적반하장도 이만 하면 예술이다. 바람둥이 찰스와 의도한 외도한 사실이 들통 나자, 키티는 오히려 남편 월터를 윽박지른다."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잔아. 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들을 죄다 지루하기만 해." 키티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나머지 절발은 거짓이다. 기티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바람둥이를 만난 것이 아니니까. 사실 그녀는 바람둥이를 만나 쾌락에 빠져서 순간적이나마나 남편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육체적 욕망 때문에 망가지는 여자가 아니라는 자존심 떄문일까? 키티는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고 강변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말에 무게감을 주기 위해 키티는 지금까지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도리어 역정을 내고 있다.170
"나는 당신에 대한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업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사랑은 애인을 행복하게 해 주는 감정 아닌가?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다. 애인에 대한 잔인함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잔인함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172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172
잔혹함이나 잔인함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지극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 에티카 172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이유는 나의 존재가 그 사람에게 행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이타심은 늘 결국에는 이기심이라는 지적이 가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잔인함은 기묘하고, 심지어는 괴이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이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쁘게, 심지어는 분노하게 만드는 감정이니까. 결국 이런 잔인함은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곁에서 떠나도록 만들게 된다. 잔인한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그래서 둘 사이를 끈끈히 연결시켜주고 있던 사랑의 끈을 자르고 싶었던 것이다.173
결국 잔인함으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서글픈 공명이 잔인함의 최종 목적일 테니까 말이다. 칼자루가 없는 칼, 그러니까 양쪽 모두 날이 퍼렇게 선 칼을 잡고 서로를 찌르니, 상대방도 피를 흘리고 칼날을 잡고 있는 나의 손에도 피가 흐르는 모영새다.175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서머싯 몸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교훈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176
서머싯 몸 - 인생의 베일은 삼각관계를 다룬 연애소설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성장소설이다.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여 노처려 신세를 면하려고 했던 키티는 "정부 세균학자의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가 특별히 주목받는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살짝 경박한 키티에게는 지적이고 품위 있는 월터와의 결혼 생활이 따분하다. 이때 찰스라는 멋쟁이 바람둥이가 나타나 키티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찰스가 허풍쟁이라는 걸 잘 아는 월터는 그런 남자에게 반한 아내를 경멸하기에 이른다. 177
겉모습만 화려한 찰스에게 반해 남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키티, 그리고 그녀의 허위의식을 알면서도 아내를 사랑한 워터 두 사람의 애증을 통해 작가는 사랑의 가치와 성숙의 의미를 전한다177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조금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잔인함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한때 서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 이라고 말이다. 한때 사랑했던 남녀가 있다. 그런데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한 사람은 여전히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두 사람 중 애 한 사람만이 사랑이 식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사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사태가 아닐 수없다. 이럴 때 우리에게 상대방의 사랑은 떨치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지금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배신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나인 셈이다. 배신의 피를 혼자만 묻히고 있는 것이 싫어서일까. 나는 상대방도 사랑을 배신하는 피를 흘리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바로 잔인함이라는 감정의 서글픈 실체다. 내자 지금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상대방의 가슴에 잔인한 행동과 잔혹한 말을 비수로 던져 피를 흐르게 할 참이다. 슬프게도 이런 식으로 한때 두 사람을 천상에 살게 했던 사랑은 피를 흘리며 무참히 살해된다. 178
욕망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실은 삼사 초 동안에 불과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떤 신비로운 교감에 의해 손가락이 서로 엉켰다. 이어서 찰스는 한쪽 무릅을 세우고 열정적으로 사라를 끌어 안았다. 두 입술이 서로 부딪쳤다. 둘 다에게 충격을 줄 만큼 거친 입맞춤이었다. 그와 그녀의 알몸 사이에는 한 겹의 얇은 잠 옷밖에 없었다. 찰스는 오랫동안 참아 온 갈증으로 그녀의 입술을 빨면서, 사라의 몸을 가슴에 끌어당겼다. 그 갈증은 단지 성적 욕망만이 아니다.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그 모든 욕망들이 찰스의 내면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지나갔다.180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분명 연애소설이다. 그렇지만 흔한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작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 그러니까 욕망이라는 문제와 아주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기 떄문이다. 따라서 사라와의 격렬한 정사에서 찰스가 충족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제 분명해진다. 찰스는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욕망의 윤리하자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잠시 경청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181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욕망은 자신의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이라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다. 스피노다 : 에티카 181
우리의 모두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존재이고, 당연히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맞서 싸우려고 한다. 그러니 만일 욕망을 억압당한 채 끝내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182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유한자. 우리가 유한자라는 것은, 신조차 누릴 수 없는 축복일 수도 있고 비극일 수도 있다. 우리가 관계를 맺어 나가는 타자들이 내 삶에 어떤 결과를 미칠지 미리 결정할 수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저주스러운 관계가 맺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모든 타자가 우리 삶에 이로움, 그러니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즉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관계도 있다.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에서 기쁨의 감정이, 반대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서 슬픔의 감정이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피하고 기쁨의 감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182
비극은 우리의 나약함에 있다. 자신의 본질인 욕망을 지킬수도 없는 비겁함과 나약함이 또한 인간의 특징 아닌가. 자연은 아무래도 사디스트인가 보다. 욕망을 주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데, 동시에 비겁함도 아울러 인간에게 부여했으니까.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예는 주인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잿빛 삶을 살아내는 서글픈 존재이니 말이다. 소탐대실! 인간은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순간의 안위를 확보하려다가 자신의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꺼이 노예로 살아가려고 결정해도, 우리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욕망이라는 본질의 소리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노예의 삶은 슬픈 삶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가 슬픈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순간 우리는 살아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울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183
슬플 때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이것을 제외하고 인간이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결국 우리는 대탐소실로 갈 수밖에 없다. 기쁨을 추구하고 슬픔을 피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 우리의 안위는 위태로워지고, 우리 자신은 사회의 지탄이나 저주, 심지어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뭐 어떠한가! 하루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행하고 죽는 것, 그것이 더 커다란 행복이니 말이다.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자. 그것이 바로 욕망을 긍정하는, 쉽지만 녹록지 않은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184
허례허식이 판을 치던 빅토리아 시대에 사라가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사라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찰스는 무의식적으로나마 간파했던 것이다. 질투일 수도 있고, 동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찰스에게 사라는 일종의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그가 '엉터리 책'이었을 때, 그녀는 '진솔하고 단순한 책'이었기 때문이다.184
사라의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욕망을 되찾을 때에 사라와 제대로 만나게 되리라는 것, 찰스는 이 사실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185
그 갈증은 단지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186
존 파울즈 - 프랑스 중위 여자에서 중인공 찰ㅅ는 전혀 다른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 나간다. 찰스의 약혼녀 어니스타는 "부잣집 딸들이 대개 그렇듯이 관습적인 취향을 즐기는 것 말고는 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양장점이나 가구점에서 엄청난 돈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영토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이 침벙당하는 게 싫었다." 반면 사라는 "몸 전체가 불꽃이었다."187
인간에게는 원숭이와 같은 속성이 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주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마 가장 결정적인 타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들이 명문대 입학을 원하면, 나도 명문데 입학을 원한다. 그들이 단정한 외모를 원하면, 나도 기꺼이 단정한 외모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헛갈린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나의 고유한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이런 고뇌의 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인가 욕망하는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해 보아야만 한다. 실현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나의 것이었는지 타인의 것이었는지 사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대에 간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면, 입학하자마다 우리에게는 '이제 시작이다. 멋지게 살아야지."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반면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었다면,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이제 완성했다. 다행이다."리고 생각할 것이다. 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어떤 남자를 욕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와 고대하던 첫날밤을 지낸 뒤, 우리는 바로 알게 된다. 앞으로 이 남자와 보낼 날이 희망 속에 떠오른다면, 그 남자에 대한 욕망은 나의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이제 이 남자랑 뭐하지?"라는 허무한 느낌이 든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가 만들어 낸 남자를 욕망했다는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작가의 욕망을 욕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자. 이런 식의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더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다른 방법은 없다!188
동경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는 서글픈 시도
아우라는 콘수엘로라는 할머니가 현실에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사랑을 되찾으려는 열망과 그 좌절을 다루고 있는 서글픈 소설이었던 셈이다. 상상력의 힘으로 펠리페와 아우라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 잃어버린 사랑의 기쁨을 다시 맛보려는 그녀의 발버둥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콘수엘로는 결코 미친 할머니는 아니리라. 그녀 스스로 자신이 만든 아우라나 펠리페가 모두 자신만의 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관념 속의 펠리페에게 잠시만 쉬어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아우라를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긴 109세의 나이라면 육체적 거동도 힘들겠지만, 동시에 상상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신력도 쇠잔해져 있을 것이다.192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193
동경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193
가장 절정에 있었던 순간을 꿈구는 것이 동경이다. 그렇지만 동경의 이면에는 이미 자신이 전성기를 지났다는 씁쓸한 자각이 깔려 있다. 이처럼 과거의 절정에 사로잡혀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194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195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충동!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의 욕망이나 충동은 단순한 욕망이나 충동이 아니라 동경이 된다. 그러니까 동경의 정의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나 충동"이 바로 동경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속내였다. 마음으로는 아름다고 섹시한 아우라가 되는 것기 가능하지만 ,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어느 사인엔가 동경마저도 지속하기 버거운 109살의 할머니라는 현실로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때 자신을 기쁨으로 달뜨게 했던 사랑의 열정을 다시 소유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195
이런 동경마저 사라진다면, 콘수일로 부인은 그저 죽어 가는 노파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콘수엘로 부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때 격정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활짝 피우는 데 성공한 거의 모든 여인네들은, 지금의 나이가 예순이 되었든 여든이 되었든 간에, 그 화려했던 사랑을 동경하며 잠을 청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아름다웠던 사랑을 동경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인지도 모른다.196
카를로스 푸엔테스 - 아루라는 너라는 이인칭 화자가 등장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짧지만 강렬하게 표현한 매혹적인 작품이다.197
한때의 전성기 혹은 가장 절정에 있었던 순간을 꿈꾸는 것이 동경이다. 그렇지만 동경의 이면에는 이미 자신이 전성기를 지났고 절정에서 내려와 있다는 씁쓰름한 자각이 깔려 있지 않은가. 너무나 나익라 들어 이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 동경은 마지막 삶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마디로 몸을 움직이는 데 별다은 불편이 없는 사람이 과거를 동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절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삶과 직면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삶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 과거 애인을 잊지 못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새로운 절정을 향유할 수 있겠는가. 꽃은 한 번만 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꽃나무는 매년 기적처럼 새로운 꽃을, 작년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신선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작년에 피었던 꽃만 동경하고 있느라 올해 필 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직 움직이는 데 여력이 있다면, 과거에 피웠던 꽃망울에 대한 동경일랑은 접고, 지금 현재를 살아내야만 한다. 강렬한 햇빛도 있을 것이고, 뿌리를 뽑을 것 같은 비바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당당히 맞설 때에만, 삶의 절정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198
멸시 : 사랑이라는 감정의 막다른 골목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과대평가의 감정을 수반한다. 한마디로 말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이 일종의 유일신으로 보인다는 것이다.200
사랑은 두 사람을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유일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감정이다.200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때, 사랑에 수반되던 '과대평가'의 감정은 이제 '멸시'의 감정으로 변하게 된다. 과대평가가 상대방을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감정이라면, 멸시는 상대방을 평범한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 한마디로 벌러처럼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드는 감정이다.201
멸시란 미움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201
미움 때문이다. 밉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에세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는 것이다.202
에드워드 올비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탐색했던 것도 바로 이 멸시하는 감정이다. 이 작품을 끌고 나가는 것은 대학 설립자의 딸이기도 한 아내 마사와 같은 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남편 조지가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듯 상대방을 멸시하는 대사들이다.202
조지와 마사는 마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만의 사랑을 쟁취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사가 조지에게 홀딱 반했던 이유는 결코 조지가 총장이 될 인물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 아니다. 조지 역시 총장이 되려고 마사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그냥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비극은 두 사람을 그토록 강하게 묶어 주었던 사랑이 어느 사이엔가 그들 곁을 떠나고 없다는데에 있다. 203
도대체 사랑은 어디로 떠나 버린 것일까? 조지도, 특미 마사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을 강하게 묶고 있던 사랑의 끈이 풀리자마자 사회적 지위, 사회적 시선 등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옥죄는 것을 그들은 무력하게 방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이 어떻게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냈던 사랑의 시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은 현재의 비참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법이다. 그 비참함의 원인, 다시 말해 사랑의 상실을 마사는 남편 조지 탓으로 돌리고 있고, 조지는 아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204
그렇지만 불행히도 두 사람은 모르고 있다.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멸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로 치유할 수 없는 생체기를 남기며 거듭되는 멸시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마지막으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사랑은 곧 싸늘한 주검이 될 것이다. 205
사랑이 떠난 뒤에도 남은 현실은 그들의 이별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니 상대방이 미울 수밖에, 그러니 상대방을 멸시할 수밖에. 어쩌면 그들이 진정으로 멸시하고 있는 것은 그런 현실에 굴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비겁함과 나약함이 아닐까?206
에드워드 올비 - 미국 전역에 극장을 소유한 뉴욕의 부잣집에 양자로 들어가 어릴 때부터 극에쑬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상류사회에 어울리는 전문 직종을 갖기 바라는 양부모에 대한 반항과 친부모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스물 살에 가출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207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라. 이 작품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미움으로 서로에게 등을 돌리면서도 헤어지지 못할 때의 처절함을 잘 보여준다.207
모든 감정은 나와 타자의 마주침에서 발생한다. 돌과 마주치지 않는 한 잔잔한 호수가 일체의 동요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특정 감정은 전적으로 나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오로지 내가 만난 타자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정 감정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기보단느 외부 타자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야간 산행을 할 때, 자신의 손에 랜턴을 쥐고 있는 걸 망각하고는 신기하게도 바깥이 환희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드디어 감정의 파문들이 본격적으로 호수 전체를 누비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원인을 내가 만난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만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움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든 관계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가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208
절망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자살이다. 오랜 수감 새활을 끝마치고 출소하는 그 찬란한 날, 동틀 무렵에 한나 슈미츠는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210
미하엘에게 여자를 가르쳐 준 한나는 소년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 그렇게 소년과 미지의 성숙한 여인 사이의 사랑은 묘하게 전개된다.책 읽어 주기, 샤워하기,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남녀 사이의 사랑은 이렇게 반복적인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갑자기 사라진다. 두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9년이 지나서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재판장에서였다.211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던 미하엘은 과거에 몰랐던 한나의 결정적인 비밀을 하나 알게 된다. 한나는 글을 전혀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던 것이다.그리고 한나에게 그것은 절대로 남에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던 것이다.211
과도한 형량을 무릅쓴 한나가 측은했던지, 미하엘은 10년 동안 감옥에 갇힌 그녀에게 카세트테이프를 보낸다. 직접 책을 읽고 녹음한 것ㅇ들이다. 한나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니면 소년 시절 자신의 사랑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어쨌든 미하엘은 계속 한나에게 ‘책 읽어 주는 남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212
4년째 미하엘은 어린아이와 같은 필체를 쓰인 한나의 편지를 받는다.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 그녀가 그 고통스러운 문맹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기는커녕 계속 녹음테이프만을 보냈다. 미하엘은 감지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한나는 법정에서도 느끼지 않았던 깊은 절망을 맛보게 된다.212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212
무시무시한 결과가 예측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운 결과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 두려운 결과에 직면하게 될 때, 절망은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우리의 목을 조인다. 이것이 바로 한나가 느꼈던 절망의 실체다. 그녀의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극도록 두려웠다. 그래서일까? 한나는 문맹에서 벗어나려고 절치부심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자신이 결코 문맹이 아니었다는 것을 포장하기 위해 미하엘에게 짧은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하엘은 그녀에게 답신을 하지 않고 녹음테이프만 계속 보내면서 그녀의 마음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212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가 모두 공개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미하엘을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213
한나는 당신이 편지를 써 주기를 정말로 고대했어요. 그녀는 오직 당신에게서만 우편을 받았어요. 우편물을 나누어 줄 때면, 그녀는 ‘나한테 온 편지는 없어요?’라고 물었지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 소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한나에게 그의 편지는 자신이 문맹이었던 어더운 수치심을 영원히 덮어 주었을 선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213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정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 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214
비록 아내와 좋게 헤어졌지만 홀로 된 그를 지배하던 감정은 외로움과 버려졌다는 느낌이었다. 수감 중인 한나를 통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자기 모습이었던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역할을 다시 맡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그것은 한나가 문맹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216
한나가 애써 문맹을 탈출하여 편지를 써 보냈을 때, 미하엘이 그것을 무시했던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는가? 미하엘로서는 한나는 문맹이고 자신은 ‘책 읽어주는 남자’로 계속 남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려는 그의 무의식적인 노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 읽어주기, 함께 샤워하기, 그리고 격정적인 사랑 나누가, 마지막으로 함께 침대에서 편안하게 누어 있기. 청소년 시절 그 흥분과 설렘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과거에 그녀가 자신을 씻겨 주고, 자신을 품에 아 주었던 것,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책을 읽어 줄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무슨 종교 의식인 것처럼 외로움에 빠져 있던 미하엘은 녹음기로 책을 읽어 녹음했던 것이다. 그는 문맹에서 벗어난 한나를 부정했던 것이다. ‘책 읽어 주는 남자’라는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지키기 위해서, 잔혹하게도 그는 현재의 한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한나를 절망으로 몰고 가 죽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미하엘 본인이었던 셈이다. 그가 끝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216
베른하르트 슐링크 –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일 문화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1위를 기록했다. 이 작품은“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한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이자, 한 소년의 성적 모험을 다룬 성장소설이다.217
해고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해고될 수도 있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얼마 전 상사가 내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지만, 돌아가는 회사 사정이 영 불안하기만 하다. 분명 감원이 있을 것 같은데 내게 새로운 일을 맡겼다는 것은 내가 해고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맡겨진 일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희망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비극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자기중심적인 판타지를 견고한 성곽이라고 믿고 의지할 때, 절망은 강하게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판타지의 성곽이 무너지는 순간 거기 기대고 있던 우리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테니 말이다.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대로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218
음주욕 :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발버둥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동물이다. 물론 우리가 바라는 것은 타인의 칭송, 칭찬, 사랑, 그리고 관심이지, 멸시, 비하, 미움, 무관심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하고, 학벌을 높이 쌓으려고 공들이고, 가혹한 다이어트로 몸매를 관리하고, 회사나 조직에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려고 애쓴다. 그래야 주변에 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들끓을 테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위대해지면 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소망이 마법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위대해지는 것이 이제 언감생심이 되는 순간, 비참한 시간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 혹은 영화배우로 레드카펫을 밟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돌아보면 누구나 한 번은 남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현실은 퇴락하여 그 누구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씁쓸하게 술잔을 들게 되는 것이다.220
첫 잔은 현재의 남루한 모습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쓰디쓰지만, 한 잔 두 잔 들어가면 술은 어느 사이인가 우리에게 위대했던 과거와 그 시절의 희열을 선사한다. 이렇게 술은 우리를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웠던 과거로 데리고 가는 최고의 묘약이다. 여기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심지어는 어머니마저 묘약에 취해 살고 있는 한 가족들의 슬픈 이야기가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펼쳐지고 있다.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는 이렇게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다. 221
아버지 티론과 그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는 현재 가족의 삶과 자신들의 모습을 한찬하며 한 잔 두 잔 마시고 있다. 어머니 메르는 과거 산고 후유증으로 돌팔이 의사에게 모르핀을 맞았다가 거기에 중독되어 있고, 단순히 독감인 줄 알았던 에드먼드의 증상은 폐병으로 밝혀진 상태다. 첫째 아들 제이미도 나머지 가족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술주정뱅이였으니까 말이다. 이런 잿빛을 탈출하려면, 과거 화려했던 그 시절, 에드먼드의 말대로‘인생의 정점’이었던 시절로 돌아가야만 한다.222
음주욕은 술에 대한 지찬 욕망이나 사랑이다.222
적당히 술을 마시는 것, 이것을 음주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너무 지나치게 술을 찾을 때, 우리는 음주욕에 빠진 것이다. 무엇이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 즉 음주욕을 낳는 것일까?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무기력과 패배 의식 때문이다. 222
술이라는 묘약으로 순간적으로나마, 한때 정점을 향유하던 과거의 나가 불쑥 나타나 현재의 남루한 나를 추방할 수 있다. 처음에 완강히 물러나지 않으려 버티던 현재의 나는 어느 순간 한 잔 두잔 들어오는 술의 힘 앞에서 맥을 쓰지 못하고 점점 무기력해질 것이다.223
가련한 일이지만, 그들의 몸부림은 덧없는 꿈에 불과할 뿐이다. 꿈이란 무엇인가? 깊은 밤중에, 과거 낮에 벌여젔던 일을 회복하려는 몽상 아닌가.224
현재의 밤을 제대로 응시할 용기가 이미 이 네 사람에게서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224
유진 오닐 – 밤으로 긴 여로는 작가가 사후 25년 동안 발표하지 말라고 한 작품이다. 작가는 아내에게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그만큼 아픈 가족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자전적인 이야기이다.셰익스피어 배우에서 몬테크리스토 백작 흥행 배우로 주저앉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돈이 있어도 가족에게 병적으로 인색하게 구는 아버지, 싸구려 호텔방에서 돌팔이 의사에게 맞은 진통제 때문에 모르핀 중독이 된 어머니,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죽은 형, 그리고 뱃사람으로 방황하다 페병에 걸렸던 작가 자신, 이 모든 것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225
늘 취해 있어라. 다른 건 상관없다. 그것만이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짓이기는 시간의 끔찍한 잠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무엇에 취하냐고?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마음대로 그저 취해 있어라. 그러다 이따금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가 풀밭에서나, 그대 방의 적막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싹 가셨거든 바람에게나, 물결에게나, 별에게나, 새에게나, 시계에게나, 그 무엇이든 날아가거나, 탄식하거나, 흔들리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에게 물어보라. 지금 무엇을 할 시간인지, 그러면 바람은, 물결은, 별은, 새는, 시계는 대답하리라.‘취할 시간이다! 취하라, 시간의 고통 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술에든,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원하는 것에 ’225
지금은 몰락했지만 과거 영광스러운 권좌에 앉아 있던 사람과 과거에는 불우한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 존경 받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사이에서 동창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싸움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왕과 현재의 여왕 중 누가 동창회 모임에서 큰소리를 낼 것인가. 이것은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과거의 여왕이 대취할 테니까 말이다.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그녀는 독한 소주라도 마시도 또 마실 것이다. 현재를 깨끗이 잊을 정도로 마시다 보면, 어느 사이인가 과거의 여왕은 다시 화려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취기를 빌려 과거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 그녀는 현재의 여왕이 과거에는 자기 시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계속 좌중에게 주지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부분 친구들은 과거의 여왕이 취했다고 조롱하면서 그녀의 술주정만 탓할 테니 말이다. 이어서 그들은 과거의 여왕을 버리고 단호히 현재의 여왕 편을 들 것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부침에 대한 슬픈 보고서. 그래서 술을 마시게 만드는 묘한 공간으로 동창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226
과대평가 : 사랑의 찬란한 아우라
어떤 사람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일까? 그렇지만으 않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일정 정도의 거리'이다. 거리란 이미 어떤 사람과 내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한다면, 그 사람과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자꾸 그 사람긔 학벌, 연봉, 가족 관계 등이 눈에 들어와서 다른 살마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에게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소망 가득한 관계는 조금씩 깨져 가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품에 꼭 안겨 있는 것이 낫다. 거리를 두고 보면 배가 나왔다거나 혹은 눈에 눈곱이 껴 있다거나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까 말이다.228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거리를 두고 보는 순간, 우리는 그사람의 모습을 이미 객관적으로 보아 버린 것을.228
어쩌면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이제 시간문제인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객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이때부터 우리에게서 사랑은 슬프게도 점점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229
솔 베로의 소설 허조그의 한 대목을 읽어 보였다. 주인공 모지스 허조그는 한때는 존경받는 교수였으며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남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의 화살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 차례 파경을 거친 허조그는 4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 되었다. 더 이상 그는 여성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못 되었다. 두 번째 아내 메들린도 공공연히 남편을 무시한 채 이웃집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허조그는 이미 당당함을 잃은 지 오래다. 지금은 이곳저곳 지인들에게 감상적인 펴지나 써대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한심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 스스로 무기력증에 빠진 허조그는 어린아이 된 것이다.230
그가 자신이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린아이처럼 칭얼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때 30대 후반의 섹시하고 매력적인 여성 사업가 라모나가 허조그 앞에 등장한다. 231
이제는 노인 냄새가 난다며 혀를 찼을 아내 매들린과 달리 라모나는 감미로운 냄새가 난다며 허조그를 기꺼이 안아 주었던 것이다.231
자신의 몸에서 감미로운 냄새가 난다니! 그렇다면 라모나가 허조그에게서 맡은 감미로운 냄새의 정치는 무엇인가? 그녀는 지금 허조그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실제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결국 허조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의 감미로움은 라모나의 사랑이 가진 감미로움을 투사하여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231
과대평가란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 : 에티카 231
이렇게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실제보다 과한 평가를 내리기 마련이다. 애인이 배가 나왔다면 우리는 그를 푸근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애인이 공공장소에 바귀를 껴도, 우리는 그가 당당하고 진솔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혹은 애인이 정리해고를 당해도, 우리는 그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회사를 탓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제외한 제3자가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어처구니 없는 과대평가에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볼품없는 애인을 신처럼 숭배하는 친구를 보면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느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인가?232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본다는 것,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과대평가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부수 효과가 아니라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글서 스스로 사랑에 빠져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까.
어쩌면 과대평가야말로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애인을 힜는 그대로 괜관적으로 본다면, 다시 말해 제3자처럼 애인을 본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미 많은 부분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 뽈록 나온 연인의 배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방귀를 뀐 여인에게 화를 낸다거나, 해고된 연인의 무능력에 심기가 불편하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만큼 약해진 것이다. 애인을 신처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과대평가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그러니 스피노자도 과대평가를 설명하면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덧붙일 수 있었다. "과대평가는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는 사랑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라고 말이다.232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실제보다 과한 평가를 내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애인이 배가 나왔다. 그를 푸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랑은 두 사람을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어쩌면 과대평가야말로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234
솔 벨로 - 허조그는 '낭만적 자아'라는 연구 주제에 골몰하던 샌님 교수가 바람 난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이야기다. "나는 어떤 성격인가?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자기도취적이고, 마조히스트이자, 시대착오적인 성격이었다. 임상적으로는 대체로 우울증이라 진단되겠지만, 중증은 아니다." 그러나 힘없는 지식인의 우울증은 관능적인 여성 라모나를 통해 위로 받는다.235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과대망상에 빠진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른들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과대망상에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흥분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는 뉘앙스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 자체에 이미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지 않은가. 사실 사랑에 빠진 친구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매우 걱정했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친구의 애인이 매우 우유부단한 사람인데, 친구는 그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친구의 애인은 경제적인 능력이 떨어지는데, 그 친구는 그가 아직 떄를 만나지 못했다고, 언젠가는 억대 연봉을 받을 거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런 사례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렇지만 이건 사실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 친구들은 노파심 탓인지 내 애인에 대해 계속 주의를 주거나 우려를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경우이든 내 경우이든,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랑으느 과대망상이라는 감정 상태가 지속도리 때까지만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애인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과 판단을 친구가 수용한다면, 불행히도 친구가 불태우던 사랑의 열정은 이미 꺼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노파심에 가득 찬 친구들의 충고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나의 경우에도 사랑은 이미 떠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사랑에 빠진 친구들을 걱정하는 것이나 친구들이 사랑에 빠진 나를 걱정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일 뿐이다. 그런 우려와 걱정을 무시하고 기꺼이 과대평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자격도 없는 것 아닐까?236
호의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젊은 시절은 뒤죽박죽 혼돈의 시대다. 어랜이면서 어른 흉내를 내려고 하니 혼돈스럽고, 또 마음은 미성숙한데 몸은 지나치게 성숙하니 또 혼돈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젊은 시절은 포르노와 사랑이 교차하는 시절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무장한 고급 포르노의 시절이 바로 우리의 젊은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인지 포르노인지 모를 이 혼존의 시절은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성숙한 사람은 이 관문을 피투성이가 된 채로 통과하는데 성공한 사람이고, 반대로 아직도 미성숙한 채로 남아 있는 사람은 이 관문을 통과할 문을 못 찾아 지금도 그 성벽을 더듬으며 정말적으로 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238
나의 회상은 먼저 20년 전 세 명의 젊은 남녀 사이에 펼쳐졌던 애매한 관계로 되돌아간다. 와타나베라는 이름의 나, 나의 친구 기즈키, 그리고 기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가 바로 그들이다. 고급 포르노라는 혼돈의 시절 그 관문에서 가장 먼저 좌초한 것은 기즈키였다. 기즈키는 열입골 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기즈키가 자살하는 날에도 여느 때러첨 함께 당구를 쳤던 나도, 그리고 기즈키와 한몸처럼 지냈던 나오코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기즈키가 와타나베를 우정의 대상으로, 혹은 나오코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진짜 친구가 있다면 친구를 두고 홀로 세상을 떠날 수도 없고, 진짜 애인이 있다면 애인에게 슬픔을 안기고 자살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니 친구라고 믿고 있던 와타나베가 애인이라고 믿고 있던 나오코, 남겨진 이 두사람에게 기즈키의 자살은 하나의 어두운 신비로 남게된다.239
정말 '나'는 기즈키를 친구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오코는 기즈키를 애인으로 받아들였던 것일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사실 기즈키에게 와타나베는 외양만 친구였고, 나오코는 외양만 애인이었던 것처럼, '나'또한 기즈키를 친구라고 믿고 있었고 나오코도 기즈키를 애인이라고 믿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젊은 시절의 우정과 사랑이 가진 특성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친구나 애인보다는 자신을 더 아끼니까 말이다. 남겨진 두 사람이 어느 날 서로의 몸을 격렬하게 탐하는 당혹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240
나와 나오코는 말없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손으로 부드럽게 유방을 감쌌다. 나오코는 딱딱해진 나의 페니스를 잡았다. 그녀의 질이 따스한 열기를 띠고 젖은 채 나를 원했다. 그래서도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심하게 아파했다. 처음이냐고 물었더니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줄곧 기즈키와 나오코가 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페니스를 깊이 밀어 넣은 채 가만히 오래도록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나오코가 안정을 되찾은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사정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나오코는 내 몸을 꼭끌어안고 소리르 질렀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보았던 오르가슴 소리 가운데에서 가장 애달팠다.241
어쨌든 '나'에게 안기면서, 마침내 나오코는 자신의 성욕을 내게 폭발시킨다. 사실 이 순가 두 사람의 뇌리에는 자살로 세상을 떠난 친구이자 애인인 기즈키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격정적인 관계를 끝낸 순간, 두 사람이 충분히 성숙했다면 하나의 진실에 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오코에게 자사라한 기즈키는 성적인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내가 기즈키와 만나려고 했던 것도 성욕 때문이었다는 진실을.241
애인이 죽은 뒤에 애인의 친구를 상대로 섹스를 즐기는 것, 친구의 애인과 섹스를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욕이나 섹스에 대한 동경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이런 엄연한 현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나오코라는 여자를 사랑해서 섹스를 했다고 믿어 버리는 '나'는 이 경우 순진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경우는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나'와의 섹스를 은폐하기 때문이다.241
나오코는 와타나베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자신은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게 된다. 물론 애인은 잃은 여자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그래서 나중에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난 나에 대한 네 호의를 느끼고,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런 기분을 솔직히 네게 전할 따름이다. 아마도 지금 나는 그런 호의가 절실히 필요해."
지금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섹스를 호의의 문제로 정당화 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친구의 애인이 느끼는 불완전성, 그 결핍을 잠시라도 채워 주려는 '나'의 호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렇다. 성욕 때문이 아니라 호의다. 스피노자도 말했던 적이 있다.243
호의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243
여기서 타인이란 내가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내가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호의라는 감정의 정체이다. 지금 나오코는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호의라는 감정을 끌어들이고 있다. '나'는 자살한 친구를 너무나 아꼈고, 당연히 그에게 친절을 베푼 여자에 대한 사라으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243
즉 친구의 애인을 위로하려는 '나'의 호의를 받아들였기에, 나와 섹스를 했다는 논리다. 여기서 우리는 나오코의 정신이 심하게 분열되리라는 불길한 전망에 이르게 된다.244
섹스를 나누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걸 몰랐던 것, 그것이 젊은 시절 '나'나 나오코, 그리고 기즈키가 가진 미성숙의 정체였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서른 아홉 살 주인공 와타나베뿐만 아니라 우리도 섹스와 사랑과 관련된 진실을 모르고, 아름답고 격조 높은 고급 포르노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노르웨이 숲이라는 소설이 우리에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섹스에 대한 갈망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포장하면서 말이다.244
무라카미 하루키 - 노르웨이 숲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방황하는 두 남녀를 통해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이겨 나가는 젊은이들의 성정통을 다룬 소설이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245
호의라는 감정 구도에는 최소한 세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 사이에 친구가 개입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두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혹은 두 명의 남자가와 한 명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누구든지 애인과 우정을 맺고 있는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기 마련이다. 참 고마운 사람 아닌가, 애인을 아껴주는 사람이니 말이다. 애인의 친구도 처음에는 아무런 의도 없이 내 호의에 대해 호의로 응대해 준다. 그의 입장에서도 친구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호의를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애인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는 호의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내가 애인과 소원해질 때 발생한다. 나나 내 애인은 잠시의 냉각기라고 생각할 뿐,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냉각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인의 친구와는 계속 호의를 주고받게 된다. 애인과 소원해졌을 뿐 애인의 친구와 맺은 관계에서는 달리 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살짝 심드렁해진 애인보다는 애인의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드디어 심각한 본말전도가 벌어진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함께 있으면 기쁜 감정이 들 때 그게 바로 사랑 아닌가. 이제 나와 애인의 친구는 진실을 직시하기만 하면 된다. 사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호의는 무천 위험한 감정이다. 왜일까? 첫째, 호의는 애인의 친구에 대한 사랑이기에 그 사람에 대해 무장 해체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애인과 소원해질 때 서로 주고받던 호의는 금방 애인을 배제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가사처럼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잘못된 만남은 바로 이 호의라는 감정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자신의 애인을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거나 셋이 함께하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말기를.246
환희 : 원하는 것이 선물처럼 주어질 때의 기적
단호환 결별에 주저하는 사람은 그래서 항상 우울할 수밖에 없다. 기쁨과 활기가 아니라 슬픔과 우울을 가져다주는 사람과 결별하지 못하고 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249
결국 여린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남김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결별을 선언하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어쨌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우우울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49
아버지에게 벗아나고 싶지만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게오르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날이 온 것이다.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으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판결은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꿈의 논리로 읽어야 한다. 프로이트도 말하지 않았던가? 꿈은 억압된 것의 실현이라고. 아들이 죽으면 아버지도 죽는다. 하긴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존재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까. 스스로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던 카프카의 분신 게오르크를 지금 아버지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별에 우유부단했던 사람에게 상대방이 먼저 결별을 선언해 주는 순간이다.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환희의 송가가 나올 정도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겠는가.250
환희란 우리가 희망했던 것보다 더 좋게 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251
무엇인가를 희망했다. 그런데 그 희망했던 것보다 사태가 더 좋게 펼쳐진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환희를 느낀다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옳은 지적이다. 신춘문예에 원고를 제출한 시인을 떠올려 보자. 최종 심사에라도 오르기를 희망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시가 신춘문예 최종 대상으로 뽑혔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이럴 때 환희라는 감정이 우리를 감싸게 된다. 혹은 여러 명이 함께하는 동아리 안에 한 선배가 있어서 행복했는데, 어느 날 선배가 내게 이성으로서 프러포즈를 해 온다. 기쁘을 넘어서 우리는 환희로 전율하게 된다.251
작은 소망이 정말로 실현되어, 그것도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내게 주어질 때, 바로 이 순간 환희의 감정은 우리를 사로잡게 되는 것이다. 별로 바라고 있지 않았는데도 선물을 받을 때 우리는 더 감격스러워한다. 기대 이상의 선물과 같은 느낌, 에츨 불가능성이 환희라는 감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252
아버지 이제 아버리라는 굴레를 벗어 던졌고, 아들도 죽어 이제 게오르크라는 자유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지도 침대에 쓰러지는 장면과 아들도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죽어야 다시 탄생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어떻게 환희의 기쁨이 없을 수 있겠는가.252
기대하지 못했던 소망이 지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환희에 휩싸이게 된다. 이처럼 환희의 감정에는 기대 이상의 선물과도 같은 느낌, 즉 에측 불가능성이 깔려 있다. 그러고 보면 환희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일수록 더 자주 맞닥끄린다고 할 수 있으니, 그리 축복할 만한 감정은 아닌 것 같다.254
프란츠 카프카 - 카프카는 작가가 꾸미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체코 프라하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당시 최고 인기 직업이었던 보험회사에 입사한다. 카프카는 소설가로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원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쓴 원고를 펼쳐 볼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255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소망하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환희를 느끼는 사람은 너무나 여리다는 점이다. 소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루려고 하지 않고, 혹은 기대감을 상당히 줄여 놓을 정도로 소심하고 여린 사람만이 환희라는 감정을 자주 느낄 것이다. 대학이든 회사든 합격자 발표문이 공고되는 날을 예로 들어 보자. 그곳에 몰려든 응시자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뉜다. 우선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합격한 경우에는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환희나 감격에 빠져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크하게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네."라는 표정만 짓고 만다. 전자는 소심한 사람들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불합격의 경우에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듯이 쿨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 믿기지 않다는 듯이 합격자 명단을 반복해서 읽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에는 전자가 소심한 사람들이고, 후자가 적즉적인 사람들이다. 소심한 사람들은 이미 합격에 대한 기대를 줄였기에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쉽게 흥분하고, 반대로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시크하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반대로 기대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던 적극적인 사람들은 원하는 결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원하지 않던 결과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매사에 환희를 느끼고 쉽게 감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소극적인 경우가 대부분인고 타인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강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환희란 그다지 축복할 만한 감정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극적이고 여리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256
영광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이렇게 희소한 것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존경이나 선망의 대상이 된다. 5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의 도도한 얼굴을 보라. 희소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차고 있는 순간 그녀 자신도 희소한 여성이 되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아무나 이런 고가의 목걸이를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258
그렇다면 바다에서는, 그러니까 어부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잡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물고기를 잡은 어부가 희소성을 거머쥐는 것이다. 한 번 보기도 힘든 희소한 물고기를 잡는 순간, 어부 그 자신도 희소한 존재가 될 테니까 밀이다. 259
영광은 우리가 타인의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식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260
내가 한 어떤 행동으로 인해 타인의 칭찬을 들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영광이다. 물론 우리의 행동은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영웅적이고 초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희소한 행동이어야 할 것이다.260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명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262
평범한 늙은이가 아니라 '별난 늙은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별나다는 것은 회소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거대한 고기를 포힉하는 것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노인은 어부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희소한 것이 희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노인의 말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참고 견뎌 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강인한 불굴의 의지와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거대한 영광을 가져다두려는 것인지. 거대한 고기는 결코 자신을 쉽게 내주지 않고, 노인이 느낄 영광의 높이를 더 높여 주었다. 그러니 청새치와의 사투는 매 순간순간이 위기였지만 또한 희망이기도 했다. 고기는 매번 노인에게 한께를 주고 그것을 넘어서도록 만들었으니까. 말이다.263
노인이 원했던 것은 이미 노인이 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빛나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 자신과 함께 배를 타겠다는 소년의 말만으로 우리 늙은 어부는 충분히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264
길 위쪽의 찬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들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264
어니스트 허밍웨이 - 노인과 바다 : 노인은 몸뚱이가 뜯겨 성하지 않게 되어 버린 고기를 이제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가 않았다. 고기가 습격을 받았을 때 마치 자신이 습격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고기를 공격한 상어를 죽였다.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저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265
인간이라면 누구나 영광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찬탄하는 것을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등이 되려는 것도, 권력을 잡으려는 것도, 섹시한 몸을 만들려는 것도, 고급 아파트에 살려는 것도, 대기업에 취업하려는 것도, 명풍 가방을 사려는 것도, 멋재 배우자와 결혼하려는 것도 모두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느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영광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은 치욕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안도하는 것이고,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광의 정점에서 허무하게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사리 권력과 자본은 유년시절부터 몸서리쳐지는 치욕의 경험을 선사헤서 우리에게 치욕을 겪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을 각인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권력의 해묵은 공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어쨌든 지나치게 영광 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을 원하는가? 공존과 공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멀리하고 치욕을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266
불꽃처럼
감사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그보다 더 찐한 육체관계도 가졌건만, 이상하게 두 사람은 키스도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이별의 고통이 두 사람의 때늦은 첫 키스로 완화될 수 있을지. 그보다 우리 눈에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몰리나의 주저하는 마음이 포착된다. 몰리나는 무엇을 고백하려는 걸까? 그건 바로 사랑이다.271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저도 그래요"라는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으면, 적어도 불쾌한 반응은 보이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없다면, 그 누구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할 것이다. 헤어지는 마당에 몰리나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지금까지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만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갈뿐이다. 바로 이것아다, 몰리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발렌틴은 결코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니 몰리나가 어떻게 그런 발레틴 앞에서 사랑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몰리나는 "사랑해." 대신 그저 "고마워."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고, 발렌틴 또한 예상했던 대로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 대답한다.272
감사 또는 사은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272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ㅇ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식힐 수 있다. 아니,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서로 알고는 있지만 고백할 수 없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마무리될 때, 어느 커플이든 그제야 애잔하게 이야기하지 않은가.272
이러첨 서로에게 친절하려고 할 때, 같은 말이지만 서로에게 감사할 때,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일정 정도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273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대로 관철된다면, 친절의 행위는 사실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때론 무레할 수도, 때론 거칠 수도, 떄론 화를 낼 수도 있다. 물론 때에 따라 친절할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행동 양식들은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겠다는, 오직 그럴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는 사랑이라는 폭발적인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친절이 사랑에 빠졌던 사람을 지배하는 유일한 행위가 될 때는, 사랑에 아주 심각한 위기가 찾아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너무나 예의바르고 친절할 때, 우리는 그가 내게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지 않은가. 더 심각한 것은 상대방이 내게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감사를 표할 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이 친절한 , 너무나도 친절한 이별 선언이라는 것을 누가 모를 것인가.273
둘 사이의 거리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들은 모두 남자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발렌틴은 마르타라는 여자를 사랑하는 이성애자이고, 몰리나는 지금 발렌틴을 사랑하게 된 동성애자다. 발렌틴은 정부 전복 혐의로 감오게 갇힌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몰리나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온 게이였던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와 감성에 민감한 동성애자의 만남은 매력적인 조우였다. 발렌틴은 몰리나에게 민감한 감성을 배웠고, 몰리나는 발렌틴에게서 모든 인간에게 억압은 없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이상을 배웠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에게 감성과 이성의 섞임은 육체관계를 맺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발렌틴은 부정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완전해짐을 느낀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275
불행한 것은 발렌틴이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조리한 사회를 혁명하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내면에 각인된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를 완전하게 해 주는 것, 그래서 그것과 함꼐 있고 싶은 마음,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니었는가? 그 대상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아니면 개나 고양이든, 심지어 슈벨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나 알리시아 비칸데르 주연의 영화 퓨어인든 상관없다. 그렇지만 발렌틴은 이성주의자답게 사랑마저도 자신의 이성과 생각대로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강성이나 행동을 부정한 채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몰리나가 이별을 준비하면서 감사의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275
사람의 영혼은 생각이나 말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속적인 행동 속에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감옥에서 나온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으로 정치적 행동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발렌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생길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이제 외롭게 감방에 남아 있던 발렌틴에게는 정부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가해졌다. 발렌틴이 약물에 취해 있을 때 마르타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몰리나의 강한 흔적을 느끼게 된다. 몰리나랑 있을 때 마르타를 떠올렸건만, 발렌틴은 지금 마르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몰리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276
마누엘 푸익 - 거미여왕의 키슨느 친구가 될 수없는 서로 다른 부류의 인간들이 한곳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소통하는 구조에서 출발한다.277
젊은 정치범 발렌틴은 동성애자를 몰리나를 한심하게 생각하지만 결국 그의 따뜻한 마음에 자신도 억눌러 왔던 감정과 내면의 자아를 들여다보게 된다. "네가 볼레로를 부를 때 왜 내가 화를 냈는지 알아? 네 노래가 내 여자 동료가 아니라 마르타를 생각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심지어 나는 마르타가 아니라 그녀의 계급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상류계급만 좋아하는 이 세상의 개만도 못한 놈들처럼 말이야." 반대로 시답잖은 로맨스 영화 애기만 하면서 발렌틴을 짝사랑했던 몰리나는 의도치 않게 정치 탄압의 희생자가 된다.277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한 남자와 함께 있으려면, 가족들과 친구들을 놓아야만 한다. 심지어 목숨마저 요구하는 사랑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뽑아 버릴 수 있는 폭풍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지금까지 너무나 행복했었다."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가급적 다 해주려고 한다. 하룻밤의 섹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와 잠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평상시 원했던 근사한 자동차를 사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복에 대한 선물이자.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278
겸손 :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결국 우리는 지금 돈을 사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다는 사람이 돈의 메시전에 지나지 않는 것만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제를 사랑해서 삶을 함께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실직하거나 혹은 사업이 망했을 때,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애정도 어느새 식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진 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의 사랑이 돈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상대방을, 그리고 사랑을 지금까지 속여 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자산의 삶마저도 하나의 허구라는 것을 아프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스스로 속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삶에서 더 아픈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281
한 인간에게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노래를 잘할 수도 있고, 섬세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도 있고, 부드럽게 잘 안아 줄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가치들도 모조리 돈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폭력성이다. 그런데 별로 돈이 안 되는 가치들이 정말로 소중할 수도 있다. 영화나 음악에 대해 나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를 누가 돈으로 사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의 삶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282
스무 살 어린 시골 아가씨 드니즈가 파리에 소비의 상징으로 처음 등장한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취업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화점의 젊은 사장 무레는 자신의 재력과 권세 앞에서 파라의 여자들, 특히 백화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자기에게 기꺼이 몸을 내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ㄱ 그에게 드니즈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드니즈에 대한 호감은 그저 하찮은 신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되었지만, 무레는 점차 그녀가 발산하는 예상치 못한 매력에 끌리게 된다. 그러자 무례는 늘 그랬듯이 돈과 권력으로 드니즈를 유혹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큰 돈과 더 큰 지위로 유혹할수록 드니즈는 무레로부터 더욱 멀어지기만 했다. 이쯤 되면 모든 걸 다 갖춘 무레가 무기력을 느낄 만도 하다. 무레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이면 사랑이라 한들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자신해 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절망하며 절규한다.282
겸손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284
스피노자의 말대로 무레의 겸손은 자신이 자랑하던 돈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겸손은 동시에 한 여자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자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 아니겠는가?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 뜻대로 '가 바로 사랑의 표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드니즈는 무레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고, 마침내 무레는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된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항상 자신의 무기력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나의 구애를 받아줄지 거부할지가 전적으로 상대방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레의 겸손, 즉 자신이 자랑하는 돈이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는 자각이야말로, 그가 드디어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다. 이것이 바로 돈으로 사랑을 사고파는 우울한 파리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제2의, 제3의 무레 아닐까?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줄 여신과도 같은 여자 말이다.284
돈으로도 드니즈의 마음을 살 수 없게 되자 무레는 절망한다. 즉 무레의 '겸손'은 자신이 그토록 의지했던 돈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그렇지만 그의 겸손은 또한 한 여자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에 뒤따르는 겸손의 감정이다.286
에밀 졸라 -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 가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여주인공 드니즈가 진실함과 내면의 힘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백화점 사장과 결혼하게 되는 신데렐라 이야기인데, 작가는 자신의 딸에게 '드니즈'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287
스피노자의 말처럼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인정할 때, 누구나 겸손해진다. 그렇다고 겸손해서 무엇인가 비극적인 느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겸손의 감정을 느껴 보았던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색안경을 벗고 자신이나 세계, 그리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지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없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과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할 수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능력과 약함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청년기 때를 돌아보라.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고,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유치한 자만심에 우리가 얼마나 찌들어 있었는지를. 그래서 겸손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마저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렇지만 이런 절망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추가 한쪽에서 반대편 쪽으로 급격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자만심도 절망으로 바닥을 쳐야 한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추는 천천히 가운데서 멈춘다. 마찬가지로 자만심에서 절망으로 왔다 갔다 해야만 우리는 균형 잡힌 겸손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강함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288
분노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될때까지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291
스피노자는 또한 분노에 대해 더 명료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고 말이다. 자신과 유사한 대상, 즉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에 그것은 바로 돈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돈이 없어 자신의 딸 소냐를 창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느 퇴역 관리, 자신에게 돈을 보내느라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봉변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여동생 두냐, 전당포 노파가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복여동생 등.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수치심을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키게 된다.291
전당포 노파도, 가스콜리니코프 본인도 모두 자본주의의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그는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인간이 살 수 없도록 구조화된 사회를 말한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보다 월등한 지위를 얻을 수밖에 없다. 돈을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돈의 양만큼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자유를 갖지만, 돈이 없는 자에게는 생존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 되니까. 그래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은 돈을 가지려고 든다.293
라스콜리니코프가 느낀 모멸감은 사실 전당포 노파로 인해 생긴 것은 아니다. 그가 느낀 수치심의 진정한 원인은 소중한 추억이라는 주관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근성,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부여한 가치를 탐욕스러운 노파에게 철저히 부정되었다는 자괴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294
죄와 벌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어느 청년의 분노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소냐라는 창녀를 만나면서 , 불행한 청년 로쟈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분노는 타당한 것이었지만, 자신에게는 한 인가을 단죄할 수 있는 권능이 없다는 것을 지각한 것이다.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의 분노는 강한 죄의식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하지만 너무 때늦은 반성, 혹은 너무 무기력한 반성 아닌가. 불행한 청년은 끝내 자신도 혹은 전당잡이 노파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사회 구조의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 이르지는 못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지혜로웠다면, 그는 자신이나 노파를 모두 돈의 노예로 만든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295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로 자본주의 문턱에서 과도기를 겪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도시 빈민들의 다루었는데, 특히 죄와 벌은 작가 스스로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밝혔듯이 '라스콜리니코프' 라는 고뇌하는 청년의 대명사를 창조하여 죄와 속죄를 둘러싼 다양한 인식들을 탐구했다. 주인공 로쟈는 자신의 논문에서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고 주장한다.297
분노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최소한의 연대 의식, 혹은 유대감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 혹은 동료와 함께 있지만 스스로 왕따라고 느끼는 사람에게서 분노의 감정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둑한 길을 홀로 걸어갈 때 힘센 불량배를 만나 무릅까지 꿀려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량배에 분노하기보다는 단시 수치심만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나 애인이 불량배를 만나 그런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면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그 불량배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불량배는 한 명이지만 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은 직접 해악을 당하고 있고,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언제든지 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직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 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자들이 연대하는 조직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자들이 어떤 해악을 입고 있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해악을 막기 위해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우리라는 의식이 없다면, 해악을 끼치는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298
질투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브루주아 결혼제도의 맹점이라고나 할까. 사적 소유권에 토대를 두고 있는 브루주아 결혼제도는 영혼의 교감보다 육체의 교감에 더 신경을 쓰니까. 소유의 문제는, 아파트나 땅을 소유하듯이, 그렇게 모두 시각적인 대상에만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눈에 보여야만 문제를 삼을 수 있다. 프랑크의 옷에 아내의 루즈가 묻어 있거나, 아내의 목에 낯선 남자의 키스 자국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 영혼의 교감은 전혀 시각적이지 않기에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남루한가. 우리의 결혼제도라는 것이.302
알랭 고브그리예의 소설 질투는 자신의 아내와 이웃집 남자 사이의 연애에 촉수를 세우고 있는 어느 남자의 질투심을 다루고 있다.302
누보로망 : 화자는 존재하지만 소설에서 결코 '나'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는 화자의 시선과 그의 눈에 포착된 풍경만 주어질 뿐이다.
독자는 당연히 화자가 어떤 내면을 가진 주체인지 짐작할수조차 없다. 그러니까 질투에 빠지지 않았을 때, 화자는 어떻게 보고 생각할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누보로망 소설이 가진 힘 아니겠는가. 질투에 빠져 이을 때의 나, 연민에 빠져 있을 때의 나, 혹은 불안에 빠져 있을 때의 나는 사실 완전히 다른 '나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말을 쓰는 습관 때문에 이 모든 다양한 '나들'이 하나로 통일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편집증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소설을 써야 제대로 살아 있는 삶과 감정을 포착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과잉된 자의식으로 검열된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것 303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마음이다.303
사실 프랑크에게도 아내가, 그리고 a에게도 남편이 있으니, 두 사람 사이의 행복은 지속적인 것일 수는 없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법이다. 그래서 화자는 프랑크와 a...가 함께한 자리에 그렇게도 자주 동석하였던 것이다.303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질투 때문에 화자의 내면이 산산이 찍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질투는 화자에게 이미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증발해 버린 예기치 못했던 건강한 긴장을 가지고 온다. 그에게 질투는 지금까지 무관심했던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녀의 내면을 읽는 긴장감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인간은 자신이 그다지 수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이 그것을 소유하려는 순간, 그것을 다시 움켜줘려고 하는 법이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것이고 그것을 즐기려고 할 것"이라고. 그래서 프랑크에게 느낀 질투라는 감정은 A...에 대한 화자와 관심과 애정을 다시 되살려준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다.304
이것만으로 화자에게 사랑이 완전히 복원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럴 수는 없다. 사랑의 감정은 질투라는 감정을 낳지만, 반대로 질투라는 감정이 사라의 감정을 낳지는 못하는 법. 질투는 단지 사라으이 찌꺼기에 해당하는 감정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프랑크는 일종의 손전등과 같은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화자의 시선에 중심적으로 들어오지 않던 아내가 그의 눈과 마음에 들어온 것은 프랑크가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카메라 엥글과 같은 화자의 눈에 그녀가 다시 사라질 수도 있는 법이다. 프랑크가 더 이상 그녀를 주시하지 않고,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말이다.305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니까.306
알랭 로브그리예 - 질투에서 화자는 아내 A...와 자기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이웃집 남자 프랑크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강박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독자는 화자의 시선과 화자의 들리는 소리만을 따라갈 뿐인데, 프랑크가 아내의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잘록한 허리에 매혹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를 진투해서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다.307
지금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사랑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간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일대일의 관계, 즉 알래 바디우의 말처럼 '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두 사람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애인을 멋지게 포장한 다음에 친구들에게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친구들과 자신이 주연이고 남자친구는 잘해야 예쁜 조연 정도로 전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모임에서 애인이 시키지도 않은 멘트를 던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그 멘트에 빠져든 친구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애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피력하고, 심지어 애교마저 떠는 것 같다. 예상치도 못한 질투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질투의 감정이 클수록 그녀는 서둘러 남자친구를 데리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자리를 뜰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을 빼고 자기 친구와 자기 애인을 순간적이나마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직감했으니까. 바로 이것이다.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는 감정이니까. 그렇다고 이 여자가 다시 남자친구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당신만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줘요." 그녀에게는 이것이 사랑일 태니까 말이다.308
적의 :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허망한 전투
적의는 미움에 의하여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들을 자극하는 욕망이다.312
버드는 불구로 태어난 아이가 미웠다.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에 버드는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라면 버드의 감정 상태를 '적의'라고 말했을 것이다. 미운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 바로 적의니까 말이다. 뇌헤르니아로 태어난 아리에 대한 버드의 적의는 두 겹이어서 더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칼날 위에 서게 만든 아이니까 적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에게 평생 동안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얹을 아이니만큼 그 적의는 더 강해질 수 밖에. 그래서 버드가 이를 죽이는 선택으로 한 걸음 더 가가가느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버드를 '이기주의자'라도 되는 듯이 비난하고 경멸하는 주변의 시선이다. 여린 버드는 이런 시선들이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었다.312
만일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고 동시에 아네를 사랑했다면, 버드는 불구가 된 아이를 기꺼이 삶의 무게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불구로 태어난 아이는 비록 가볍지는 않을지라도 충분히 감당할 만한 무게일 테니까. 그렇지만 이혼마저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버드는 아내와 어떤 정신적 교감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버드는 대학 시절 여자친구 히미코를 만나 결여된 사랑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섹스를 나누는 사이라면, 누구든지 그 관계를 통해 서로 어떤 존재인지 가장 분명하게 이해하는 법이다. 일시적으로 성욕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남녀의 섹스는 두 사람의 전체 실존을 주고받는 행위니까 말이다.313
사랑은 상대방이 내 앞에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섹스는 두 사람이 가장 깊게 함께 있는 경험 아닌가. 그런데 버드와 그의 아내는 섹스를 나눌 때 기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부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어쩌면 불구의 아이가 태어난 것은 이런 불구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런 것은 모두 사후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섹스는 무슨 상관이 있으며, 사랑가 아이의 탄생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이는 태어날 수 있고, 아무리 사랑해도 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어쩄든 히미코가 없었다면, 나약하고 여린 버드는 아이를 죽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최소한 히미코는 사회적 의무에서는 자유로운 여자였고, 아프리카를 열망했던 버드와 기꺼이 함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히미코는 버드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건 버드도 마찬가지였다.313
정말로 버드가 성장해다면, 그 성장의 핵심은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라는 통찰에 그가 이르렀다는 점일 것이다.314
불구로 태어난 아이에 대한 적의의 진정한 대상은 어쩌면 아내와의 사랑 없는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불구로 태어난 아이는 버드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의 사랑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히미코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지. 불행히도 나약한 버드는 칼날 위에 선 책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다.; 그렇게 버드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불구가 된 아이는 수술을 받게 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의 문제는 사실 뇌헤르니아처럼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 단순한 육종으로 확인된다. 버드는 결단에 주저하지만, 아이의 성장, 의사들의 수술, 그리고 주변의 분위기 등이 버드 대신 결정을 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버드는 자의 반 타의 반 수술하는 아기를 위해 자기 피를 재공하기까지 한다. 버드의 장모는 그런 사위가 기특하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버드는 엄청난 활약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훌륭한 성장소설이라고, 그리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을 버리고 인류애를 기원하는 성숙한 인격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315
버드가 불가가 된 아이에게 적의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버드가 스스로 적의를 거두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주변의 변화에 따라 적의를 거두는 쪽으로 변했을 뿐이다. 이것이 정말 성장일 수 있을까? 성장이라고 해도 너무나 기이한 성장 아닐까? 316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죠.(......)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사이엔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316
오에 겐자부로 - 머리에 부상을 입고 태어나 지적 장애를 비롯한 온갖 장애를 짊어지고 성장해 가는 아들과의 공생을 때로는 계기 삼아 때로는 있는 그대로 주제 삼아 집필 작업을 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로서의 나의 생애를 아들과 같이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 최초로 청춘 소설로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개인적인 체험이다.317
어떤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슬픔과 우울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자신에게 우울함과 슬픔을 안겨 주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지만 미움은 적의에 비하면 그나마 상황이 나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의는 그 미움의 대상에게 구체적인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서 어떤 사람을 파괴하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적의라는 무서운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사무실의 동료가 애써 준비한 ppt 자료를 훼손하거나, 회식 자리에서 직상 상사의 신발을 다른 곳에 숨긴 적은 없는가? 아니면 상대방이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 그 의자를 빼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아니면 신혼의 행복함에 젖어 있는 동료에게 남편이 어느 여자랑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며 음해한 적은 없는가? 모두 적의로부터 나온 행동들이다. 누군가에게 가하는 해악을 꿈꾸거나, 아니면 직접 실행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적의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내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형법에 저촉될 수 있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라는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다. 어쨌든 적의는 비록 뒤틀려 있기는 하지만, 욕망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을 해치는 구체적인 해악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엄청난 결핍감을 느끼게 되고, 반대로 구체적인 해악이 성공했을 때는 하늘에 뛰어오를 듯한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적의란 얼마나 치명적인 욕망인가. 그러니 적의를 느끼는 사람과는 하루속히 결별하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도 나도 모두 적의라는 감정에 의해 산산이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318
조롱 : 냉소와 연민 사이에
인간들은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세미처럼 초연한 척하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세속적인 명예욕도 있고 욕심도 있다. 그들의 평소 대화에는 남을 이기려는 마음과 경쟁심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터라, 여차하면 그들이 늘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도리 우려도 있으니 고양이인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323
조롱이란 우리가 경명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324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그것은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들이 미워하는 인간 속에서 그들의 불합리와 위선을 발견하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세키=고양이'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고양이 족을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폄하한다. 고양이보다 못하면서 고양이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런 인간 족속만큼 고약한 존재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반면 고양이의 장점을 단점이라고 단정하며 으쓱거리는 건 정말 꼴불견이다. 그만큼 소세키는 자신도 한 마리의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간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에서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간파한 다음, '고양이 = 소세키'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제 당당히 인간을 조롱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324
그렇지만 아무리 고양이와 가깝다고 해도 소세키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결국 인간에 대한 고양이의 조롱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조롱일 수밖에 없다. 이런 냉소적인 자기 조롱은 얼마나 허무하고 자기 파괴적인가? 고양이가 물독에 빠져 죽은 것이나, 소세키가 고질적인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정말로 정직하게 직시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고양이 선생의 통찰과 가르침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고양이 선생의 예리한 유훈을 우리에게 알려 준 작가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325
주인이 이 문장을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선불교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326
나쓰메 소세키 - 작가는 페르시아고양이 '나'를 화자로 내세워 주워들은 이야기로 아는 척하는 지식 허영꾼들을 유쾌하게 희화화한다.327
평소에 일을 못 한다고 자신을 갈구는 직장 상사가 사장에게서 무능하다는 질책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속으로 쾌지를 부른다. 혹은 똑똑한 척하는 얄미운 후배가 웬만한 사람도 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리를 때도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도 한다. 아니면 성인군자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밥맛 떨어지게 행동했던 어느 지식인이 치명적인 스캔들에 빠질 때, 우리의 마음은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흥분되기까지 하다. 이것이 바로 조롱이라는 감정이다. 이렇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할 때, 우리는 잠시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네. 너도 별 수 없는 인간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속으로만 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남의 불행에 기쁨을 표시하는 순간,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이럴 때 능숙한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내심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테니 말이다.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라. 내심 조롱을 아끼지 않고 있던 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희열이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처럼 조롱이라는 감정에는 무엇인가 병적인 데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우리는 미움과 슬픔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에게 불행과 불운이 찾아든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잠시 기쁨에 젖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기쁨 아닌가. 마치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을 배회할 때 하늘에서 찔끔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와도 같다. 그렇지만 한 방울의 비에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아예 사막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328
욕정 : '프레스토'로 격하게 요동치는 영혼
악마와 함께 톨스토이가 인생의 후반기에 자신의 결혼관을 담은 작품들이다. 이 소설들을 통해 톨스토이는 결혼일 참다운 사랑의 결실이라는 통념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결혼의 본질은 정신적인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정에 있기 때문이다.331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교회의 금욕주의와 러브호텔의 욕망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제 노골적으로 물어보자. 지금 이 순간 교회에 들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러브호텔에 갈 수도 있다. 하나만 고르라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돌아보면 결혼 생활에서 우리가 꿈꾸는 것은 '합법적인 러브호텔' 아닐까?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두 연인이 서로 몸을 섞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 허니문의 전설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달이 비치는 깊은 밤 꿀처럼 달콤한 섹스를 '합법적으로'나눌 수 있는 그날, 그것이 바로 신혼여행이니까. 그만큼 욕정은 삶에 있어 가장 아찔하고 달뜬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331
욕정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이나 성교에 대한 사랑이다. 성교에 대한 이런 욕망은 적당한 경우에도, 그리고 적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보통 욕정이라고 일컬어진다.332
그렇지만 인간에게 섹스는 욕망이나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나 사랑은 삶의 힘을 유지하거나 증진시키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의 섹스는 종족 보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동물의 교미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332
개개인의 열정덕인 자유를 본질로 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섹스는 어떤 의미도 없는 본능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적 통념은 종족 보존을 위해 수행되는 섹스만이 정당한 관계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말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인간에게 발정기 때의 동물과 같은 성생활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톨스토이가 악마라는 단편소설에서 집요하게 추적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333
욕정도 개체적인 의미를 지닌 소중한 감정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면, 섹스도 인간적인 의미를 띠어야 하는 것 안닌가. 다시 말해 개개인의 열정적인 자유를 본질로 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섹스는 어떤 의미도 없는 본능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354
사실 스테파니다를 악마라고 부르는 순간, 예브게니는 자신의 욕정을 악마로 여기고 저주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이미 비극은 예견되어 있다. 에브게니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사회적 감시와 시선에 따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스테파니다는 개인적 욕망의 세계를, 그리고 아내는 사회적 평판의 세계를 상징한다. 지금 에브게니는 두 가지 세계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두 세계를 그대로 남겨두고 자신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자신을 휘어잡고 있는 욕정을 말살하려면,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예브게니의 뇌리에는 크로이처의 마지막 세 번째 악장의 선율이 '아주 빠르게'그러니까 베토벤이 지시대로 '프레스토'로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한 바람에 곧 꺼질 촛불이 아주 격렬하게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말이다.336
레프 톨스토이 - 악마 : 주인공 예브게니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데 결혼전에 관계를 가졌던 스테파니다를 잊지 못하여 괴로워한다는 내용이다.337
섹스는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그렇지만 남녀를 가질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가 사랑의 완성이라고 쉽게 믿고 있다. 섹스가 아직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한 착가이다. 금욕주의적 가치관이 유교적 관습에 기독교적 관념이 결합되면서 더 강화되어 왔다. 심지어 아직도 젊은이들에게 순결 서약을 강요하는 것은 남루한 우리 사회의 단면 아닌가. 그렇지만 금욕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금기와 금지는 욕망과 상상력을 더욱, 부채질하는 법. "들여다보지 마세요!" 길을 걷다가 벽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으면, 누구나 벽 안을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오만 가지 상상이 작동하게 된다."벽 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 결국 사회를 음란하게 만드는 것은 놀랍게도 금욕주의적 가치관이었던 셈이다.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금욕주의가 오히려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폐해를 고스란히 우리들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도 섹스를 금기시하면서 동시에 섹스를 신성시하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된다. 식다도, 운동도, 여행도, 영화 관람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은 다른 것이다.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욕정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허락하는 조건에서 기꺼이 섹스를 시도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가 지속적으로 정사를 나누면서 그 외의 것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완성이나 결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사랑이 시작되는, 혹은 사랑이 진척되는 한 가지 계기일 뿐이다.338
탐식 : 자신의 동물성을 발견할 때
배에서 울리는 꼬르륵거리는 소리나 방귀 소리는 혼자 있을 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리적인 현상은 부끄러움을 자아내곤 한다. 특히 그 타인이 내게 중요한 사람일 때는 더욱 그렇다. 왜일까? 영원을 꿈꾸고 싶은 소중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덧없는 삶처럼 변하지 않고 마치 신적인 것처럼 영원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니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물적인 요소가 끼어드는 것을 우리는 본증적으로 꺼리게 되는 것이다.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는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당신은 신이 될 수 없어. 당신은 생리적인 현상에 지배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아.341
상대방을 밥도 먹지 않고 하장실도 가지 않는 신적인 무엇을 보고 싶고 동시에 자신도 그런 존재로 보이고 싶은 것, 이것만큼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절망적인 희망이 또 있을까? 혼자 있을 때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동물적인 욕구다. 이런 욕구들 가운데 특히 심각한 것이 바로 식욕 아닐까? 배고픔 앞에서 누가 영혼의 자존감, 혹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자존감을 지킬 수 있겠는가?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유명한 모옌의 단편소설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 둘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점을 포착했기 때문이다.341
과거 중국 사람들은 먹는 것에도 전전긍긍할 정도로 가난했었다. 산업은 발달하지 않았고 인구도 지나치게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모옌의 유년기도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을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점이다. 유년기의 욕구 불만은 하나의 트라우마 처럼 작동하는 법이다. 배고팠던 시절 그 배고프을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왔다고 할지라도, 배고픔의 트라우마는 그렇게 간단히 씻어질 리 없다. 먹어도 무엇인가 충족되는 느낌, 그것이 바로 배고픔의 트라우마가 아닌가. 그러니까 배가 부른데도 자꾸 다른 음식에 시선이 가는 것이다. 몯느 집착이 그렇지만, 음식에 대한 집착, 즉 식욕은 원만한 대인 관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음식에 시선이 팔려 있는데, 어떻게 다른 것에 시선이 갈 수 있겠는가.342
식사 시간에 지나치게 먹는 데에만 몰입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자신이 품위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이건 단순한 품위의 문제만은 아니다. 동석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음식에만 탐욕을 보인다는 것, 그것은 함께한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에 몰입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무시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이해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혹여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 모욕감을 표현할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식욕에 빠지곤 했던 모옌이 음식 앞에서 "돼지인지 개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고 술회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343
탐식이란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이다.343
식사 시간은 소중한 사람과 음식을 매개로 엮어지는 자리이다.맛있는 음식과 소중한 사람,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우아한 식사 시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맛있는 음식에 빠져 앞에 있는 상대방의 존재도 까먹을 때가 있고, 반대로 너무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느라 요리사가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뜨는 둥 마는 둥 할 수도 있다. 모옌은 전자에 너무 빠진 경우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든든히 맛난 것을 먹으며 식사 약속에 대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오늘은 세 젓가락 이상 먹지 않겠다."라고 이런 혹독한 트레이닝이 있어야 유년시절에 각인된 배고픔의 트라우마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에게 식사 시간은 동물도 신도 아닌 인간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344
모옌 - 초등학교 때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시골 노동과 군 생활을 겪는데, 이러한 경험들이 작라를 큰 이야기꾼으로 만드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옌은 서민들이 당하는 서러움을 예리하게 포착했지만 특유의 해학으로 아픔들을 승화했다. 특히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 둘은 어릴 적 가난과 기아의 트라우마를 묘사하고 있다.345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여류 시인의 시가 생각이난다. 실연의 아픈 상처를 달래면서 시인이 폭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가랑이 사이에 밥통을 끼고 거기에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마구 비빈다. 그리고 떠난 사람의 공백을 채우듯이 숟가락이 넘치게 김치비빔밥을 담아 입 안 가득 쓸어 담는 것이다. 입이 터질 것 같지만. 그럴수록 떠나간 남자의 공백은 커져만 간다. 그러니 가득 들어 있는 밥 때문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뺨에는 애처로운 눈물이 떨어질 수밖에. 약간의 과장기도 느껴지지만, 분명 누군가는 시인과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타자의 공백이 주는 공허감을 먹는 것으로 충족하려는 사람도 존재하니까. '멋있다'가 '맛있다'로 옮겨지는 슬픈 순간이다. 그렇지만 타자의 자리를 어떻게 김치비빔밥이나 스파게티가 채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런 식의 식욕은 항상 눈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이별을 겪었으면서도 음식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개나 돼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홀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자신이 버려진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가 아니어도 좋다. 성적이나 업적 등등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때 발생하는 원초적인 충만감의 기억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좌절할 때마다 음식을 먹는다면, 쉽게 비만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내 주변을 보면 약간 뚱뚱한 사람들 중에는 쉽게 좌절하는 타입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금방 좌절하고 공허감을 느끼니, 그들은 쉽게 먹을 것에 손을 대 왔고, 또 댄다. 그러니 집안사람들은 안 그런데 혼자 뚱뚱한 사람을 만나면, 편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쉽게 상처받고 좌절하는 여린 영혼의 소유자일 수도 있으니까.
두려움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내일이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먼저 내일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하면서 우리에게 설렘의 감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이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일은 지금보다 더 끔찍한 삶을 예켠케 하면서 두려움의 감정을 심어 주기도 한다.348
오히려 불행한 사람은 계속 불행하기 쉽고, 행복한 사람은 계속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일까. 첫 사랑에 실팼던 사람은 다음 사랑에서도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은 법이다. 이 불행한 사람은 새롭게 찾아온 사랑에 설레기보다는 실패를 예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떻게 두려움을 갖니 사랑이 원만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겠는가. 조금만 관계가 소원해져도 바로 꼬리를 내리기 일쑤고, 그러면 좋은 관계를 회복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시들 수밖에.349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349
여기서 미래의 사물과 과거의 사물이 동일한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 어려움은 쉽게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애인이 지금 만난 다른 애인과 같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과거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슬픔은 새로운 애인과의 미래를 잿빛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 미래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슬픔, 즉 두려움은 바로 이렇게 우리 내면에서 탄생하여 우리의 비전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불행한 고가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350
기독교적 삶을 내면화한 알빙 부인은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로 너무나 커다란 상처를 받았지만 묵묵히 참아 온 여인이다. 알빙 부인이 아들 오스왈드를 어릴 적부터 외국으로 보내 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남편의 자유분방함이 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파리에서 화가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오스왈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빙 부인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들 오스왈드에게서 남편의 기질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350
결국 알빙 부인에게 유령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특질들을 실체화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자유에 대한 동경,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열정 같은 것들이다. 한마다디로 말해 그녀가 체화한 종교적 가치에 어긋나는 모든 것, 특히 탐스러운 육체와 관련된 에로틱한 가치들이 유령으로 실체화하면서 그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렇지만 에로틱한 가치를 부정하는 존배야말로 진짜 유령이 아닐까?351
진짜 유령은 편협한 종교적 가치로 퇴색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판단하는 알빙 부인이었던 셈이다.353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로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354
헨리크 입센 - 사회의 민감한 주제와 고전 비극 같은 정제된 형식미가 어우러진 작품들을 발표하여 생존에 이미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입센은 스스로 오만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자신의 서재에 경쟁자였던 스웨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커다란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네메시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을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시대인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광고만큼 좋은 건 없다고 생가했기 때문에 매일 신문 광고들을 열심히 읽어다고 한다.355
병이 걸릴까 봐 두렵다. 해고될까 봐 두렵다. 가난해질 까 봐 두렵다. 사랑이 떠날까 봐 두렵다. 이처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다.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 상실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때 병으로 고생 했거나, 한때 실직을 했거나, 한때 실연을 당했던 사람은 미래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감정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발생한다고 하겠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어쨌든 두려움은 우리의 현재를 좀먹는 감정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픈 기억은 우리를 과거로 보내고, 자니친 염려는 우리를 미래로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 즉 건강, 젊은, 직장, 애인 들은 모두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잠시 내 곁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젊음이니 건강이니 모두 어느 사이엔가 떠날걸 염두에 둔다면, 젊었을 때 그리고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해고되든 내가 떠나든 간에 지금 회사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인식한다면, 직장 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인도 언젠간 떠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애인과의 근사한 키스에 더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에 곁에 머물러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 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356
동정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이야기를 풀어 가는 화자 '나'는 우연히도 홀리와 같은 공동주택에 살게 된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홀리와 '나'는 유사한 데가 있다. 홀리가 항상 신분상승을 꿈꾸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지금은 무명이지만 언젠가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 방에 끌어들였던 남자가 폭력적으로 변하자 홀리는 화재 비상구를 타고 ‘나’의 방으로 피신하게 된다. 물론 작가를 꿈꾸던 ‘나’의 눈에 홀리의 특이한 삶은 오래전부터 관심거리였다. 낯선 남자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 홀리는 어색했나 보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서 그녀는 자신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시작한다. 좌우지간 어색함을 푸는 대는 이야기만 한 것도 없으니까.360
삶이 너무나 궁핍하고 남루하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근사한 꿈을 꾼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군가가 꾸고 있는 현실 도피의 꿈을 응시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도피하려고 하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직감할 수 있다.362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돈을 모아야만, 안전하게 보호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화자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홀리에게 ‘티파니’가 안전한 곳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베스트셀러 작품이 안전한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내가 위기에 빠진 홀리를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동병상련! ‘나’는 홀리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있던 것이다.363
동정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363
‘나’는 홀리가 티파니와 같은 곳을 얻기를 바라고 있고, 반면 그녀가 티파니에서 멀어지는 것에 슬퍼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홀리를 통해 자신의 꿈을 가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홀리가 부유함으로 넘치는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위기에 빠진 홀리를 도와주고, 그녀는 티파니와 같은 곳을 찾아 뉴욕을 떠나게 된다. 더 이상 뉴욕은 홀리에게 티파니처럼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홀리가 떠난 뒤, 나는 생각해 본다. “홀리는 정말 티파니를 찾아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이제 가구도 사고 고양이에게도 이름을 붙여 주면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을까?”363
트루먼 커포티 – 홀리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게도 이름을 붙여 주지 않을 만큼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방랑자이며 명함에는 ‘여행중’이라고 적어 넣는다. 콜걸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상당히 독립적이고, 어리지만 분별 있고 사랑스러운 여자다.365
동정에는 묘한 동일시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 받는 사람은 비슷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은 연민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라고 하겠다. 멋진 남자친구를 둔 여자는 아직도 미혼인 데다 연애도 하지 않는 친구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연민의 감정에는 모종의 우월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남자친구에게 차인 경험이 있는 여성이 최근 실연의 비극을 겪은 친구에게 느끼는 안타까움이 바로 동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친구 사이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연애가 꼬이는 걸까? 라는 느낌, 그러니까 나나 너나 똑같은 비극에 빠졌다는 일종의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이 바로 동정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러니 충고를 할 때 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동정의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를 들어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도 통과한 동창이 있다고 하자. 동창회에서 우리는 그가 최근에 자신이 다니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가 그의 아픔에 동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그는 위그를 받기는커녕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지방대도 간신히 졸업했고 영어도 못 해서 변변찮은 중소기업에나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동정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동창회 자리를 벅차고 나갈지도 모른다.”아무리 내가 실직자가 되어도 너희들의 위로나 받을 사람으로 보이니? 뭐, 이런 거지같은 것들이 다 있어. 무능한 것들은 주제 파악도 못 하지. 이제 아주 맞먹네.“ 그러니 아무나 동정하지 말지니! 충분히 우리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동정을 표현해야 한다. 선의의 동정이 잘못했다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반발을 초해랄 수도 있으니까.366
공손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부재의 고통에 빠진 사람은 한때는 타자와 함께 있는 행복을 충분히 느껴 봤겠지만, ‘존재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살아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으니까.369
타자가 무섭다면 우리는 그에게 화를 낼 수 없다. 작가가 자신이 인간으로서는 실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타자가 무섭다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없다. 항상 타자의 욕망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이미 우리는 죽은 것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관찰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까.370
요조에게 아버지는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는 타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느 날 요조에게 묻는다. 도쿄에 갔다 올 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으냐는 것이다. 앗, 위기가 다가왔다. 타자로서 아버지가 무서웠던 요조는 달팽이가 촉수로 앞길을 가늠하듯이 아버지의 내면을 읽으려고 한다. ‘도대체 아버지는 자신이 어떤 선물을 원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린 요조에게 어떻게 가지고 싶은 것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아버지가 질문하는 순간, 요조는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의 욕망만을 읽어내려고 한다. 잘못 읽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까. 그래서 요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던 것이다. 수줍은 듯이 보였지만, 사실 요조를 휘감고 있는 감정은 공포였다.371
요조의 행동에서 우리는 내면의 공포가 외면의 수줍음, 항상 타자의 말에 순종적인 공손함으로 드러나는 메커니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372
공손함이나 온건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372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아이, 즉 투정을 부리지 않고 너무나 의젓한 아이를 보면 어른들은 미소를 띠며 말한곤 한다. “아이가 정말 공손하네요.” 혹은 “참 착하고 순한 아이야.” 그렇지만 이걸 아는가? 아이는 그런 평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당신의 욕망에 순종하는지를. 그리고 그만큼 아이는 또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스피노자의 말대로 공손함이나 온건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감정이다. 표면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들, 혹은 공동체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공손한 아이나 온순한 이이는 타인이 화를 폭발할까 봐 자신의 욕망, 그러니까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일과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주장하지 않는 것뿐이다.372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들이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374
다자이 오사무 – 인간 실격은 기녀와의 관계, 공산주의 학생운동, 긴자의 카페 여급과 동반 자살하려다 여자만 죽고 자살방조죄로 구류된 일, 글쓰기에 몰두하다 졸업을 못한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한 정신적 충격, 폐결핵을 앓고 아내에게 속아 정신병원에 입원한 일 등 작가의 개인적인 고뇌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소설이다. 또한 다섯 번째 시도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375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이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기보다 항상 타인의 욕망을 따르려고 하니 온화하다느니 공손하다느니 하는 칭찬을 받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타인의 욕망을 따른 데 성공한다면, 그는 폐인이 될 것이다.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반면 타인의 욕망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첫 번째 부류의 인간은 정말로 위험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정에서 약한 아내나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자에게 굽실거리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겪이다. 첫 번째 부류의 남자를 만날 때 여자들은 그의 공손함과 온화함에 속아서 결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조심하라! 법 없이 살 사람을 조심하라! 이건 생활의 철칙이다. 결국 우리가 기꺼이 해도 되는 유일한 인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니, 적과 동지가 명확히 구분도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것이다. 만일 그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ㅇ과 부합된다면, 이런 사람과는 주저하지 말고 사랑에 빠져도 된다.376
미움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되거나
사랑하는 남녀가 섹스에 몰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성욕일까? 아니, 그 이상이다. 이 세상에 둘만 있다는 경험, 그리고 완전히 자신이 현재를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 사랑하는 남녀가 섹스에 몰입하는 진정한 이유다.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격정적인 섹스에서는 일말의 불안감도 남아 있지 않는 법이니까. 뜨겁고 거대한 모닥불 앞에서는 차가운 눈발도 그 종적을 감추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별을 앞둔 연인들은 서로를 격정적으로 쓰다듬으려고 한다. 미래의 불안감이 클수록 우리는 현재에 몰입하여 삶을 향유하고 싶다. 마침내 거친 호흡과 몸부림으로 성적인 희열이 극에 도달할 때, 여인들은 지금 함께 있을 수 있는 현재를 소중하게 만끽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신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며, 인간적이고 에로틱한 사랑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축복인 셈이다. 사랑이 현재를 호흡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데 가장 소중한 감정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불행히도 에로틱한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 없도록 사육된 어느 여류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녀는 사실 에로틱한 사랑만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결정적인 계기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378
미움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381
어머니라는 ‘외적 원인’을 생각했을 때 발생하는 슬픔, 이것이 바로 어미니에 대한 미움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기쁨을 지향하고 슬픔을 피하려는 존재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에티카에서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는 대상을 멀리하고 소멸시키고자 한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가장 큰 복수는 물론 클레머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럴 때 에리카는 미워하는 어머니를 드디어 멀리할 수 있디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그녀의 아랫도리는 부패하였고, 아랫도리의 부패는 온몸에 퍼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온몸에 만연되어 있는 불감증로 어떻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381
자신은 사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음악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자식은 어머니의 우상이고,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그저 약소한 대가를 요구할 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의 삶 전체인 것이다.382
어머니를 죽이는 것으로 에리카는 빼앗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이미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딸을 사육함으로써 에리카를 내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미 어머니는 에리카의 내면에 그녀의 ‘초자아’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라 내면에 군림하는 초자아로서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는다면, 에리카는 결코 자유를 회복할 수 없다. 사실 현실의 어머니는 에리카에게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이미 노쇠하여 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노인, 바로 이 늙은 여자가 그녀의 어머니였으니까. 어머니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에리카는 아무것도 좋아진 것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진정으로 죽여야 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알았을 때, 에리카는 절망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얼마나 씁쓸한 장면인가.384
엘프리데 옐리네크 –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로 빈 대학교에서 연극과 예술사를 공부했으며, 페미니즘 색깔이 강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면서도 도발적인 성 묘사 때문에 격찬과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지만, “비범한 언어적 실험”으로 진부한 사상에 복종하는 기성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을 보여 2004년 여성으로서는 열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우경화에 대해 ‘범죄의 나라’라고 강하게 비판하여 조국에서는 ‘둥지를 더럽히는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기도 했다. 옐리네크는 음대를 졸업했지만 어머니의 강압적인 음악 교육에 대한 반발심으로 문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딸을 향한 어머니의 왜곡된 집착을 통해 또 하나의 불합리한 권력 관계를 폭로한 걸작이다.385
사랑이라는 감정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마디로 헛소리다. 정말로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거나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한 번도 제대로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랑 아니면 무관심일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미움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 헤어져야만 하는, 그래서 둘 중 하나가 이 세상을 떠나야 끝낼 수 있는, 한마디로 저주받은 관계다. 불행히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혹은 자살하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게 된다. 그래서 미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항상 처절하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과 무관심한 관계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관계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미움만큼 비극적인 감정이 또 있을까. 어떤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관계를 소망하도록 만들 정도로 처절함 감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미움이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감소시켜서 우리를 고사목처럼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그러니 자살하기 싫으면, 상대를 죽일 수밖에. 반대로 상대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자살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꽃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슬픔도 없으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행복하게 눈을 감게 될 것이다. 반대로 미운 상대를 죽인다면,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기꺼이 감내하게 되는 작은 기쁨을 조금씩 되찾게 될 것이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순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미소를 띠울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미움이라는 비극적 관계를 경험하지는 않았으니까.386
바람의 흔적
후회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학창 시절 매번 시험을 볼 볼 때마다 쓸데없는 후회가 엄습하곤 했다. 아직 답안지를 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야속한 감독관은 어서 마무리하라고 재촉한다. 공부를 조금만 더 했더라면 이런 낭패는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학생 신분을 벗어난 지 이미 오래지만 사정이 별반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연말이면, 비슷한 후회들은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올 한 해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한몫 단단히 한다. 이렇게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고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 순간, 수많은 후회의 감정들이 커피 향과 함께 피어오른다. “만일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다면......” 후회는 항상 이런 문법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법이다. 마치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390
토머스 하디가 소설 케스터브리지의 읍장에서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후회라는 감정이다. 이 작품은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술김에 저지른 경솔한 ‘결정’으로 인해 인생의 여정이 바뀌고 결국 쓸쓸하게 죽어 가는 헨처드의 절절한 이야기다. 일자리를 잃은 스트레스로 인해 헨처드는 아내와 심하게 다툰다. 얼마나 남루한가, 사장에게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애꿎게도 약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반, 그리고 그걸 받아주지 안는 아내에 대한 서운함 반, 집에서 뛰쳐나온 헨처드는 마을축제에서 만취하고 만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그의 시냉을 바꾸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술만 취하면 허세를 부리던 헨처드는 술집 여주인의 농간으로, 아내를 경매에 붙여 5기니를 받고 뉴손이라는 뱃사람에게 팔아 버린 것이다.
격분한 아내 수잔은 헨처드의 얼굴에 결혼반지를 집어던지고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뉴손을 따라 가 버린다. 술이 깨었을 때, 헨처드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한다고 한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법. 아내는 이미 뉴손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난 뒤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아내 수전도 홧김에 뉴손을 따라나섰지만 머지않아 후회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생면부지의 남자와 살아갈 일이 막막해서였을까? 그러나 홧김에 남편을 떠난 것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 격정적인 커플이 아닌가, 어쩌면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후회할 일을 과감히 그리고 단호하게 실천하다니 말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될지 그때는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391
자신의 딸이라고 믿었던 엘리자베스를가 뱃사람 뉴손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처드 로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어리석은 선택도, 엘리자베스 제인의 탄생도 모두 스물한 살 때 저지른 실수 때문이니, 결국 자신이 모두 감당해야만 하는 업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392
지나친 후회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면서 말이다. 감정적으로야 헨처드의 생각은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수전이 헨처드를 떠난 것, 그리고 수전이 뉴손과 살면서 엘리자베스 제인을 낳은 것,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핸체드의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헨처드가 아무리 자신을 경매에 붙였다고 할지라도 수전이 좀 더 신중한 여자라면 철없는 남편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했다면 친딸이 죽지 않고 살아서 재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비극은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처자식을 돌보아야하는 헨처드를 실직으로 내몬 당시 사회 구조 때문에 예정돼 있던 것은 아닐까? 문명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면, 헨처드가 좌절하여 수전과 다투거나 술독에 빠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392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393
'후회'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 보다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결국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393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394
예를 들어, 아버지가 음주운전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자.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성적이 나빳던 탓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그날 아침에 좋은 성적표를 보여 드렸다면, 아버지가 밤에 술에 마시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동창회에서 친구와 만나 술을 마셨고, 가까운 거리라 차를 직접 몰고 귀가하다가 사고를 당했을 뿐이다. 딸의 후회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자신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올렸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말해 이 논리에 의하면 딸은 아버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무소불위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딸은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그러니까 자신이 살인자라고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395
만약 어떤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후회라는 슬픈 감정으로부터 벗아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호 한 번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여간해서 이 감정을 떨쳐내기 어렵기 떄문이다. 아버지가 술을 마신 것은 나의 성적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도, 딸은 여전히 후회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의 참담한 성적 때문에 아버지는 울적해져서 친구를 만났다고, 딸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395
토머스 하디 - 케스터브리지의 읍장, 테스, 이름 없는 주드 등 웨식스 시리지를 통해 영국 문화사에 비극적 주인공의 원형을 창조한 작가 하디는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이 섹스의 판도라 상자에다 붙여 둔 봉인을 뜯어내려고 시도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당시 비도덕적인 로맨스를 그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으나,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하릴없는 몸짓과 그 심리를 파고든 하디의 소설들은 지금도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캐스터브리지의 읍장은 19세기 중엽 영국 농촌에서 유행했던 마누라 팔기를 소재로 삼은 소설이다. 당시에도 인신매매는 불법이었지만 서민들은 그런 관행도 합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397
후회는 유아적인 감정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느끼고 판단하는데, 비가 오는 것도 자신이 울어서라고 생각하고 무지개가 뜬 것도 자신이 방금 사탕을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세계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세상이 되지 않을 때 그렇게 쉽게 짜증을 내곤 한다. 후회는 불행한 일의 원인을 자신이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후회라는 감정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유아적인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자신의 어떤 행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후회라는 감정은 생길 수도 없다. 후회에 금방 젖어드는 사람에게는 대학에 떨어 진 것도 오로지 자기 탓이다. 대학 정원 같은 구조적 문제라든가 학과 선택에 있어서 부모님의 강효 혹은 공부에 몰두하기 힘든 가정환경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실연당한 것도 완전히 자기 탓이라고 믿는다. 애인이 덧 멋진 이성을 만나서 자신을 떠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인이 학업 때문에 자신을 머리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결국 후회라는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유아적 태도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즉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여야 후회라는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몇 가지 지혜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소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행복이나 불행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398
끌림 : 사랑으로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
끌림이란 우연의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401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의 감정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 발생하는 기쁨으로 설명된다. 그렇지만 타자로부터 유해한 기쁨은 꽃으로 만개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만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자가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후자가 '끌림'이라는 감정이다.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우연'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기쁨이 필연적일 때, 우리는 이 기쁨을 사랑이라고 한다. 반면 그런 기쁨이 우연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끌림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내게 필연적인 기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게 사랑을 가져다주는 그 사람만이 나의 기쁨을 지속시켜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필연적인 기쁨이다.
반면 우연적인 기쁨에서 연유하는 끌림은 이와는 다르다.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가 가진 유머감각, 혹은 부유함 등이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이 나에게 매력적이냐 아니야 하는 것은 지금 나의 현재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점이다. 내가 우울하면 그녀의 유머감각은 분명 내게 기쁨을 줄 수 있다. 내가 가난하면, 그가 가진 돈이 곧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이것이 우연적인 기쁨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래서 너무나 우울해서 외로울 때 누군가 따뜻하게 대해 주면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연적인 기쁨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만약 내개 우울함이 가시고 행복함이 찾아올 때, 이런 우연적인 기쁨은 첫눈처럼 덧없이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401
1984년에 출간한 자전적 소설 연인은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추억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 '끌림'이다. '연인'이라는 제목 때문에 작가가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사는 백이들이지만 이미 가세가 기운 집, 그리고 큰 오빠만 편애하고 딸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 이런 조건에서 열다섯 살 어린 소녀가 부유한 중국인 사업가의 아들, 그것도 삼십 대 후반의 남자에게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녀와 남자가 운명적으로 만난 곳은 메콩 강의 어느 선착장.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소녀와 리무진을 타고 있는 남자의 랑데부였다. 돈이 많은 데다 자상하고 섬세하기까지 한 남자, 그가 소녀를 달콤하게 유혹한다. 어떻게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불행한 삶은 조그마한 행복에도 달뜨기 마련인데. 그렇지만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게 될 영민함이 빛을 발해서일까? 소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402
그것 없이는 자신이 제대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만이, 우리는 그것을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어서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인 것이다.
그렇게 그 동양인 남자에게 느낀 설렘과 기쁨이 소녀에게는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끌림에 불과하다는 것, 소녀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그녀보다 스무 살도 많은 남자 쪽으로 보일 것이다. 그는 소녀에게 끌렸던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큼 가슴 아리는 일이 또 있을까? 그렇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그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수십 년이 흐른 뒤, 남자가 전화를 건다.404
과연 이 남자, 수십 년을 한결같이 한 여인을 사랑했던 이 남자는 정말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쩌면 진짜로 불쌍한 사람은 소녀, 그러니까 뒤라스였을 수도 있다는 느낌일 들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꽃필 수 없이 아련하기만 한 감정, 끌림에만 머물러 있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래서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소망해 본다. 뒤라스도 다른 어떤 남자에게서 우연적인 끌림이 아니라, 그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없어질 그런 필연적인 사랑을 한 번이라도 느껴 보았기를. 그러지 못했다면 그녀의 삶을 정말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사랑이 아니라면 그 누가 자신이 어떤 꽃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녀도 부명 다른 남자에게서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던 동양인 남자를 회상하는 자전적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평생 끌림만을 경험했다면, 그녀는 결코 그 중국 남자의 사랑을 음미는커녕 이해할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405
끌림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는 것과 입맛에 맞아서 맛있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사랑에 허기질 정도로 불행한 상태는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한다.406
마르그리트 뒤라스 - 자전적 소설 연인의 주인공처럼, 뒤라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떤 베트남에서 태었나는데 프랑스어 교육 공부원이었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다. 이 소설은 가난한 백인 소녀와 부유한 동양 남자 사이의 연애 이야기이자만, 실은 가족에 대한 아픔을 말하고 있다.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407
뒤라스가 계속 감각적인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예순여섯 살 때 그녀를 찾아온 20대 청년 얀 앙드레아가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뒤라스는 내가 그녀와 나눈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독점욕이 강한 그녀에게 그건 엄청난 고통이었다." 연인은 뒤라스가 구술하고 얀이 타이프를 쳐서 완성한 원고이다.407
너무나 서둘러 일찔 결혼하는 여성이 있다. 이건 그녀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따. 불행한 가족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은 행보지수가 매우 낮다. 그래서 그녀는 눅누가가 조금만 잘해 주어도 금방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충'이라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떤 여자가 있다고 하자.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정말 맛나게 잘 드시네요."라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곧 가족을 떠나 그와 새로운 삶을 꾸미려고 할 것이다.그 렇지만 그 남자와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녀가는 금방 그에게 심드렁해질 것이다.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남자보다 조금 더 잘해주는 남자가 생기면, 그녀는 금방 새로운 남자에게 또 끌리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지만 그 대가로 화려한 연예인이 되는 데 성공했던 여배우들의 경우 대부분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파탄 나는 데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 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이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끌림을 사랑을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408
치욕 : 잔인한 복수의 서막
의사와 환자라는 프레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의사이고, 두목과 똘마니라는 프레임에서 우월한 사람은 물론 두목이다. 접촉 사고가 났을 당시에, 헨리는 박스터와 두 똘마니들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었다. 그렇지만 순간적인 기지로 헨리는 무지한 박스터에게 의사와 환자라는 거미줄을 던졌다. 한순간에 헨리가 건달들보다 우월한 위치로 역전된 것이다.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박스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불치병 환자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온순해져서 헨리의 진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밥스터의 반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 아닌가.412
박스터는 심한 치욕감을 느꼈다. 돌마니들 앞에서 나약한 외과의사에게 좌지우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412
치욕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413
치욕은 차인이 자신의 어떤 행동을 비난 받았다고 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발생하는 슬픈 감정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타인이 비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실제로 타인이 나를 비난하고 있지만 본인은 그것을 비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치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타인이 나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닌데도 내가 비난받앜ㅆ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치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413
행복이 예감되는 저녁 만찬에 박스터가 똘마니들을 데리고 난입한 것, 이것은 치욕을 갚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똘마니들에게 자신이 헨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치욕을 되갚아 줄 수 있겠는가?415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물론 이런 욕망은 허영일 수도 있고, 덧없는 인간의 자존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평범한 우리 인간의 자화상 아닌가. 이런 허영과 자존심이 좌절되었을 때, 인간은 치욕감에 몸을 떨게 된다. 치욕을 푸는 길은 그것을 가져다 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길밖에 없다.416
이언 매큐언 - 9.11 테러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테러가 어떻게 평범한 도시인들의 일상과 연결되는지를 놓고 작가들의 고민이 이어져 왔다. 토요일은 2003년 전 세계적으로 이라크 반전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어느 토요일 의사 헨리 퍼론의 하루를 묘사한다. 헨리는 섹스, 테니스, 가족 행사 등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충실하서 동시에 전쟁과 테러 같은 국제정치 문제를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지구적 차원의 폭력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일상과 맞닥뜨리지 않는 한 '이미지'와 '담론'에 불과하다.417
역린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고전 한비자에 등장하는 개념인데. '거꾸로 된 비늘'이라는 뜻이다. 용의 머리 뒤편에는 다른 비늘 방향과 반대로 되어 있는 비늘이 모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 용을 탄 사람이 잘못해서 그 부분을 만지게 되면, 용은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려 자기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을 물어 죽인다. 한비자가 용의 거꾸로 된 비늘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마다 '역린'이 있으니,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빠지지 않는 뱃살이 역린일 수 있다. 누군가 뚱뚱한 사람에게 "어머, 건강해 보여서 너무 다행이지."라고 말했다고 하자. 뚱뚱한 사람은 그 말에 모욕감을 느끼고는 자신의 치부를 건드린 그 사람에게 적의와 반감을 품을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못 배운 부모가 역린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어머니는 무슨 과 나왔니?"라고 가볍게 되묻는 것조차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살의를 견디기 힘들 테니까 말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이혼 경력이 역린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요즘엔 돌아온 싱글이 대세야."라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혼한 사람은 그 말을 자신에 대한 동정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마다 역린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강한 반감을 표현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외모를 역린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그가 처한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외모가 역린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좋은 인간 관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만나고 있는 사람의 역린을 먼저 파악할 일이다. 역린만 건드리지 않고 보호해 준다면, 우리는 타인과 좋은 관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웬만한 섬세함이 아니고서는 사람마다 다른 역린, 그리고 상황마다 옮겨 다니는 역린을 파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418
겁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강한 자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약자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 철학자 니체의 지적이 옳기는 한가 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자가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강자는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때문에, 생각이 별로 없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반면 약자는 너무나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약자에게는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생각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생각을 많이 가지는 것이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하는 데 생각을 이용하는 것보다 바람직할지도 모르겠다. 후자는 나약을 넘어 자신의 삶을 날조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자신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짙고 두터운 가면을 쓴다고나 할까.420
몇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그녀로서는 사랑이란 정말로 매력적이지만 끔찍한 것이가도 하다. 모든 끝이 그런것처럼 사랑도 수줍게 꽃망울을 내밀고는 어느 사이엔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무화시키듯 절정에 이른다. 그렇지만 비바람에 떨어져 무심한 인파에 짓밟히는 꽃들처럼 사랑도 그렇게 퇴락을 맞게 되어 있다. 이제야 그녀는 "직접 불에 대 봐야 비로소 뜨거움을 알 수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 거이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 30대 중반의 멋진 남자 비알이 사랑으로 다가오려고 한다.421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422
불혹의 여인이게 싱그러운 연하의 남자가 다가오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몸을 맡길 수 있지만, 불혹의 여인은 늦가을 단풍과도 같은 사랑이 무서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성적인 매력은 감퇴할 테지만, 연하의 남자는 더 왕성한 욕망을 드러낼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의 여자들은 기꺼이 사랑에 몸을 맡긴다. 위험하지 않는 사랑, 안전한 미래를 보장하는 사랑이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목숨을 건 모험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콜레트도 여느 여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도 비알과 사라을 불태우고 싶었다. 이것이 그녀의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422
그렇지만 그녀는 겁이 났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마음속으로자신의 비검함을 정당화한다. 자신이 비알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다면 다시 한 번 거침없이 사랑에 운명을 걸었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렇지만 이 나이에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그녀는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또 뜨거운 사랑에 온 몸과 마음이 데는 것에 겁이 났으니까.423
겁먹은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비알은 착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 이별을 겸험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용기나 성숙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다. 우리는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 아직도 아물지 않는 흉터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죽고 싶어." 이 대사는 사랑이 무섭다는 것이지, 사랑을 저주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채로 살고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건 그녀도 알고, 동시에 그도 알았던 것 아닐까?424
우리의 인생은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사랑으로부터 해탈, 그것은 오직 마지막 숨을 내뱉은 뒤에나 가능할 뿐이니까.425
사랑에 겁을 먹고 있는 여자를 사랑으로부터 초탈한 사람이라고 비알이 착각한 것 , 수많은 경험을 통해 그녀가 엄청 성숙한 여인이라고 비알이 오해한 것 이것이야말로 그녀에게 비극이 아니었을까?426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 골레트는 금기시되는 감정까지 솔직하게 표현하여 당시 '우리의 콜레트'라 불리는 파리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자전적 소설인 여명 또한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섬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아버지의 파산, 유명한 남편의 오디로 인한 고통. 벨에포크 시대 물랑루즈의 팬터마임 배우, 서른 살 어린 양아들과의 스캔들, 세 번의 결혼 그리고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 등 여성 작가로서 모든 것을 겪고 누렸던 콜레트는 팔레루아얄 아파트에서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전설적인 생을 마감했다. 427
결국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느 감정의 정체다.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이빨이 썩을까 봐 달콤한 초콜릿을 먹지 못하는 사람, 실연의 공포 때문에 프러포즈는 거부하는 사람, 시험의 공포 때문에 공연을 즐기지 못하난 사람, 사고가 날까 봐 여행을 가지 않으려는 사람......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물입하고 그것을 관찰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니 더 강한 욕망의 대상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웬만한 욕망의 대상으로는 항상 미래의 실패가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염두에 둘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아무 매력적인 그리고 강렬한 대상을 만나야만 한다. 너무나 근사해서 뿌리칠 수 없는 초콜릿을 발견하면 이빨이 썩는 것 쯤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한 번의 키스라도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중에 올 실연이 뭐 그리 두렵겠는가. 너무나 환상적인 공연이어서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지상의 행복을 느낀다면, 내일 시험이 중요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매혹적인 대상과의 우연적인 마주침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바깥으로 자주 나가야만 한다.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기다리면서 말이다.428
확신 : 의심의 먹구름이 걷힐 때의 상쾌함
의심한다는 것, 그것은 불행일 수도 있고 행복일 수도 있다. 아무나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의심이 생길 수 있는데, 이것은 불행한 의심이다. 반면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면 생길 수조차 없는 의심과 맞닥뜨릴 수도 있는데, 이건 부럽기까지 한 행복한 의심이다.430
멘덜리 성은 아직도 그 유명한 남편의 전부인 레베카의 흔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운의 사고로 죽고 사라졌건만, 레베카는 여전히 저택의 모든 공간, 모든 식솔들, 심지어는 남편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소중한 남편의 집이라지만, 레베카와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어떻게 유쾌할 수 있껬는가.431
레베카는 모든 사람에게 현모양처의 연기를 했을 뿐, 사실 악녀의 화신과도 같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심지어 맥심은 그걸 못 견디고 끝내 레베카를 총으로 쏴 죽이고는 보트 사고로 위장해 버린 사실을.431
확신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이다.433
의심을 충분히 일으킬 만한 원인이 사라져야만 확신의 기쁨이 찾아오니까 말이다. 낯선 여행길을 지도에 의해 가고 있다고 하자. 교차로에서 호텔로 가는 길이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수가 없다. 지도를 몇 번이나 꼼꼼히 보아도 의혹은 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쪽이든 저똑이든 선택은 해야 한다. 그렇게 선택한 길을 갈 때 시간이 지날수록 의구심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가지 않은 길이 목적으로 가는 진짜 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더 들 테니까. 그럴 때 갑자기 저 멀리 호텔이 보인다면,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만일 그동안 의심이 작았다면 확신이 가져다주는 기쁨의 강도도 보잘것없을 테지만, 의심이 크고 깊었다면 확신은 그 어떤 감정보다 더 강한 희열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433
그렇지만 확신에는 어떤 흉터, 그러니까 의심을 품었던 상처가 그대로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이 상처는 다시 드러날 수 있고, 확신은 다시 저 멀리 물러나고 의심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확신과 의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비극적 숙명에 서로 묵여 있는 셈이다. 앞면이 보이면 뒷면은 보이지 않고, 뒷면이 보이면 앞면이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확신과 의심은 동시에 존재하는 법이다. "이제 나는 당신을 확실히 믿어요." 사실 이것은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발화되어서는 안 될 말이다. 애당초 의심이 없었다면 이런 말은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에도 상대방에 대한 어떤 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확신과 의심의 동전 굴리기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정신을 분열시키고, 끝내 사랑을 비극으로 물들이기 쉬운 법이다.435
대프니 듀 모리에 - 레베카에서 죽었으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맨덜리 전택을 지배하고 있는 레베카,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맥심. 그리고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대저택의 주인과 사랑에 빠진 '나'의 구조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연상시킨다.437
공감과 슬픔으로만 받아들였던 침묵이 실은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서 나온 것이었다니. 돌이켜 보면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스스로 쌓을 은 벽을 깨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그렇게 진실 앞에서 눈감아 버리는 아둔함이 얼마나 높고 거대하고 뒤툴린 장벽을 쌓아 올리는 것일까? 내가 바로 그런 짓을 했다. 마음속에 잘못된 그림을 그리고는 그 앞에 그저 앉아만 있었다. 진실을 알아내려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단 한 걸음만 나아갔어도 맥심은 널 달 전, 아니 다섯 달 전에 이 모든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을 텐데.437
"나는 너를 믿어!' 정말 무서운 말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지혜로운 사람만이 상대방의 깊은 의심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용수철이 눌려진 것처럼 압력을 받아내고 있는 이 조용한 의심은 언제든 튕겨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확심과 의심 사이를 저울추처럼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그것은 우리가 자신이 가진 역량보다는 타인에게 더 많이 의지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타인이 움직일 때 행복해지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여기서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이라는 감정도 덤을 자라나게 된다. 확신과 의심라는 치명적인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의 슬로건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님 말고!"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한 다음에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쿨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닌 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면, 그것을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게만 적용된느 게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 혹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한 확신을 갖거나 의심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의심과 학신에 갇힌 사람이라면 이제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도록 하자. 그러면 아마도 너무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438
희망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그렇다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 이다. 19세가 영국도 그랬지만 지금 우리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이것은 우리가 돈을 많이 가질 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소설의 원제목(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큰 재산을 얻거나 물려받을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뜻한다. 비천한 대장장이 소년의 인생역전은 뭐니 뭐니 해도 일확천금 아니겠는가.441
어떤 것이 대해서든 희망을 품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희망이라는 감정이 또한 얼마나 불안한 감정인지를 말이다. 에스텔러와 손을 잡고 산책하는 장면, 혹은 그녀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핍은 행복했을 것이다.442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이다.442
'결과가 어느 정도 의심되는 기쁨' , 그러니까 '불확실한 기쁨'이 바로 희망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확실'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찍어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끼쁠 텐데,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불학실성' 아닌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희망이라는 감정 뒤에는 우리의 감정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 자신의 희망대로 상황이 펼쳐진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크면 클수록, 현재 우리가 느끼는 불학실성은 그만큼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올 것이다. 희망이 주는 불확실성을 견디기에 너무나 나약하다면, 우리는 희망이 넌지시 보여 주는 기쁨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칠 것이다. 희망이 약속하는 기쁨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몸을 떨 필요가 없을 테니까. 희망은 그것이 안겨 주는 기쁨이라는 앞면과 불확실성이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다. 그러니 사실 어느 하나를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가 제거되면, 나머지 다른 하나도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443
항상 그림자를 곁에 두고 있는 나무를 생각해 보자. 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림자도 그만큼 더 커지고 길어진다. 그림자의 검은빛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동시에 그는 큰 나무의 웅잠함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나무를 그대로 두고 그림자를 반으로, 나아가 반의 반으로 줄이려는 그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림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크고 웅장한 나무를 자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희망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싫어서 그것을 줄이려고 한다면, 우리는 희망 자체를 그만큼 잘라내야 한다. 잊지 말자. 나무가 있어서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에 불확실성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견디기 힘들도록 무섭다는 이유로 희망의 싹을 자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443
위대한 유산은 고아 소년 핍이 미몽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그린 슬픈 소설이다. 돈이 지고한 가치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사랑받으려는 인간의 희망이 어떻게 왜곡되고 굴절되는지, 그리고 마침내는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 주었더 작품도 없으리라. 그렇지만 작가가 더 중요하게 의도한 바는, 자본주의에 오염된 인간의 가짜 희망을 통해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소설의 표면적인 줄거리만 보면 위대한 유산이 좌절되고 에스텔러가 돈만 많은 속물 신사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핍의 희망은 좌절된 것이고, 미스 해비셤의 예언은 헛소리였던 것이다. 어쩌면 핍으로서는 잘된 일 아닌가? 그 속물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었을 텐데. 에스텔레를 포기하면서 핍이 버린 것은 돈을 욕망했던 자기 자신의 속물근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핍은 샐패한 것이 아니다. 핍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444
돈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고 잃을 수도 있다면, 우리는 오직 돈만 희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21세기의 핍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슬픈 미소를 띠며 묻고 있다. 그렇디고 지금 돈이야 사랑이냐라는 거친 이분법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아니. 너무나 당당하고 멋진 일 아닌가. 과거 원시인들도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면,위험을 무릅쓰고 동물들을 사냥하러 가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사냥감이나 돈은 사랑을 위한 수단이지 사랑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돈을 벌었다고 해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올 수도 있다.그렇지만 그가 사랑하는 것은 돈을 가진 나, 그러니까 내가 가진 돈일 것이다.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것, 즉 핍이 받은 진정한 '위대한 유산'은 바로 이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히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하게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닌지.444
찰스 디킨스 - 위대한 유산에서 막대한 상속과 사랑의 결실에 대한 희망은 모두 꿈에 불과한 것이 되지만, 주인공 핍은 결국 진실을 볼 줄아는 성숙한 인간이 된다. 신사라는 인간들은 사실 야비한 족속인 데 반해 무서운 죄수 매그위치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 고마운 후원자라고 생각했던 미스 해비셤이 실은 살아있는 유령이었단 것을 깨닫는다. 결국 "한 어린아이를 양녀로 삼아 자신의 사무친 원한과 버림받은 애정과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복수를 해 줄 도구로 길러내는 쓸라린 잘못을 범한 미스 해비셤에게 핍은 위대한 용서를 보여준다.447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곳에 반드시 가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희망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희망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이 품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이들은 희망이 가진 불확실성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음껏 희망을 품을 수가 있다. 반면 어른들은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는 그것이 지닌 불확실성에 더 신경을 쓴다. 여러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이런 불확실성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사람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희망을 현실이라는 제단에 바치고 반다. 그러면서 우리는 희망에 부푼 삶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우치한 삶에 불과하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일종의 '신포도'전략인 셈이다. 따먹기 힘드니까. 아예 포도가 시다고 미리 폄하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포도를 따먹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가?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럴 때 그냥 하루하루 매너리즘에 빠진 삶 만이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커다란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조그만 희망들을 품어 보도록 하자. "나는 화가가 될 거야. 멋진 유화를 그릴 거니까" "나는 플라밍고 기타를 배울 거야." "나는 마추픽추에 갈 거야." "나는 키스자렛을 만나 그의 연주를 듣고 cd에 사인을 받을 거야."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내 마음에 희망은 더욱더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기쁨과 행복도 내 곁에 더 머물 테니까. 448
오만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특히 종교적인 이유에서 철저하게 부정되거나 폄하되었던 남녀 사이의 에로스가 증정되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육체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서양인들에게는 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그러니까 계몽되었다는 가장 큰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과거 기독교기 정신적인 사랑의 가치만을 인정했다면, 이제 계몽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신적인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에 지나지 않다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절름발이 사랑에 불과한 것이 되고, 에로스적 사랑이 완전한 사랑의 권좌에 오르게 된 셈이다.450
사실 남녀 사이에 정신적인 사랑만이 있다면 사랑과 우정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남녀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엄연한게 구별되는 육제적 특증을 갖추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만 생각해 보아도 남성의 육체와 여성의 육체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아닌가. 그러니 계몽된 남녀는 아담과 이브처럼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이야말로 지상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인 에로스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에 계몽주의가 가진 가장 큰 힘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에로스의 긍정은 축복만이 아니었다. 이제 남녀는 그에 수반되는 온갖 다채로운 감정들이 만들어 놓은 파도를 감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451
위험한 관계는 희대의 바람둥이 발몽 자작과 그에 버금갈 정도의 요녀 메르테유 후작부인 사이에 벌어진 기묘한 내기, 혹은 밀고 당기기로 시작된다.정숙하기로 유명한 투르벨 법원장 부인을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면, 발몽은 후작부인과 잠자리를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법원장 부인을 유혹하는 과정에서 발몽은 여인을 정복한다는 단순한 승부욕이나 쾌락을 넘어 진짜 사랑에 빠지고 만다.451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바람둥이는 그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는 법. 그러니 여자를 정복하는 것, 그래서 여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 말고 바람둥이에게 또 다른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발몽이 메르테유 후작부인의 지적, 즉 바람둥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지적에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기꺼이 누군가의 노예가 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스스로 여자의 노예가 아니라 여자를 노예로 부르는 주인이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발몽 자작은 지금 오만을 포기하지 못하고 투르벨 법원장 부인을 자신이 정복했노라 우리고 있는 것이다.453
오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453
발몽 자작은 여자에 휘둘리지 않고 여자를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 혹은 그 명성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나마 투르벨 법원장 부인의 노예가 되어 버린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오만 때문에 발몽 자작은 메르테유 후작부인의 치명적인 제안, 아직도 여자에 대해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려면 법원장 부인을 차갑게 버리는 제안을 수용하고 만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로 이 순간 발몽은 자신의 오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어쨌든 발몽은 법원장 부인을 차갑게 내치고 만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희대의 바람둥이가 아니라 이미 한 여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법원장 부인을 외면하는 순간, 발몽이 거의 정신분열에 가까운 자기분열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믿고 있던 자신의 모습과 실제 사랑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 사이의 괴리를 확힌하는 것은 잔혹하기까지 한 일이다.453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따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454
사랑하는 여인을 버렸지만 그 대가로 얻기로 한 섹스도 거부당한 남자,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내기를 하며 경쟁하던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이 둘은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빼앗아야만 하는 욕구에 불만에 사로잡힌 두 사람 사이는 은밀한 애정 관계를 넘어 서로를 파괴하려는 극심한 증오에 휩싸이게 된다. 그 와중에 사랑에 배신당한 순진한 투르벨 법원장 부인은 수녀원에 칩거하다 곧 죽어 버리고 만다. 사랑은 전염병처럼 세 사람의 남녀를 휩쓸고 지나가 그들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만 것이다.455
페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 위험한 관계는 사교계에서 수집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프랑스혁명 직전 귀족들이 퇴폐적인 연애 풍속을 묘사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루소의 누벨 엘로이즈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서간체 소설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였다. 위험한 관계는 오랫동안 악덕한 소설로 낙인찍히기도 했으나, 스탕달,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 등은 섬세한 심리 묘사를 담은 작품의 진가를 알아 보았다. 남편을 여읜 메르테유 후작부인은 정서적으로 독립적인 자유부인이다. "자작님 내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괜찮은 혼처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예요. 어느 누구도 내 행동에 대해 말할 권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여느 남자 못잖게 당당한 여성이기에 그녀는 더욱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진 발몽으로부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래서 발몽이 시랑에 빠졌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녀는 감정의 균형을 잃게 된다.457
"너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것이 없어." 오만한 사람의 내면을 이만큼 분명히 보여 주는 표어도 없을 것이다. 오만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전지전능하다는 자신감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래서 오만은 항상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전지전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만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동차 사고로 죽기 쉽고, 암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추락사하기 쉽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할 때, 우리는 절로 탄식이 나온다. "도대체 자동차는 무엇이며, 자동차를 안다고 자임하던 나는 또 누구인가?" "도대체 암벽은 무엇이며, 암벽을 잘 안다던 나는 또 누구인가?" 사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학신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암벽도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암벽을,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한때는 사랑받았던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나를 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변하는 자동차의 상태를 민감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암벽의 상태를 제대로 점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또 애인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당할 수밖에.458
소심함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상처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과도한 피해의식에서 발생하는 소심함일 것이다. 항상 타인에게서 피해를 받을 것 같다는 느낌 속에서 사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나 행동에 주저하는 법이다. 가만히 있어도 피해를 보는데 스스로 그런 피해를 자초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어떤 피해를 보았을 때, 차라리 자신이 아닌 남의 탓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460
즉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심한 상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장하여 큰 아픔으르 기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심각한 것은 그가 미래에도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지나친 염려와 불안감일 것이다. 이런 염려와 불안감은 확실한 현재보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염려와 불안감은 특히 연하의 애인을 두었을 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비록 지금은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사람도 사랑도 흐르는 시간을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연상의 남자 혹은 연상의 여자가 자신은 곧 늙고 추해져 더 이상 연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쉽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461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폴은 지금 자신의 삶에 빛을 안겨 주었던 시몽을 떠나 6년 동안 사귀었던 바람둥이 로제에게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폴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로제는 지금 폴이 시몽에게 빠져 있는 걸 견디기 힘들어하고는 있지만, 폴이 시몽을 버리고 로제에게 돌아가는 순간 로제는 또 다시 그녀를 외로움에 방치하리라는 것을.462
시몽은 너무나 젊지만 자신은 점점 더 늙어 갈 것이고, 언젠가 시몽은 자신에게서 어떤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 로제는 지금처럼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외롭게 만들지라도 그는 항상 낡은 가구처럼 자기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경험적으로 폴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로제는 한눈을 팔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떠날 사람은 아니라는 걸. 더군다나 로제도 자신과 비슷하게 늙어갈 것이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의바람기도 사그라들지 않을까. 그렇지만 시몽은 로제와는 전혀 다르다. 아직 삶의 절정에 이르지 않은 젊고 매력적인 연하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과연 시몽은 그의 삶의 절정에서도 여전히 폴을 사랑할 수 있을지. 그렇다, 폴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미래의 불확실성이었던 것이다.463
영원히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금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삶을 떠나 시몽을 선택하면 잠시 행복 하겠지만 머지않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로제를 선택하면 지금은 불행할 수 있지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로제를 선택하면 지금은 불행할 수 있지만 버려질 위험은 별로 없다. 그녀는 사랑의 위험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소심했던 것이다. 불안하나 사랑보다는 불행한 안정에 손을 들어 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스피노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463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463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우리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이 선이고, 반면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다주는 것이 악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폴으 비극은 그녀가 간만에 찾아온 사랑이 주는 현재의 기쁨을 긍정하지 못하고 시몽과의 사랑이 야기할 수도 있는 불안한 미래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시몽과의 사랑이 로제와의 쓸쓸한 삶보다 더 큰 악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폴은 사랑의 충만함보다 홀로 버려져 있다는 외로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시몽의 이별을 결정하면서 폴의 눈에서 흘렸던 눈물의 의미다.464
만일 자신의 결정이 행복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폴의 눈물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폴도 자신의 결정이 소심함으로 부터 연유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사랑 앞에어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이 몸서리쳐지게 싫었을 것이다. 홀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현재 만끽할수도 있는 사랑을 포기하는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폴도 이렇게 느꼈던 것아다. "그 눈물을 너무도 칠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라고 말이다. 마치 시몽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사리 그녀는 사랑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464
어쩌면 사강이 폴의 슬픈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사랑이란 용기 있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진실 아니었을까? 50대 나이에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사강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기 파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한 안일함은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겁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아주 천천히 우리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사강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의 맹목적인 비약에 어떻게 위험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의 삶과 단절하여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건너뛰려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꿀맛을 맛볼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464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466
프랑수아즈 사강 - 오랫동안 자아를 잃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폴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시몽의 질문은, 정체성을 찾아 모험을 감행하던, 많은 가능성들을 앞에 두고 아직 미완성이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시몽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기" 싫다며 직장도 등한시한 채 '행복한 몽유병자'처럼 폴 주위를 서성거린다. "시몽은 행복했다. 그는 자신보다 열다섯 살 연상인 폴에게 열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에게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잠깐 시몽이라는 새오룬 세계에 발을 담가 보지만 폴은 결국 로제라는 현실로 돌아가고, 아울러 '자아'도 잃어버린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467
소심함과 대담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양극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매사에 소심하게 된다. 반대로 결과가 항상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일에 대담하게 된다. 소심함이든 대담함이든 두 감정 모두 극단적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소심함에는 미덕이 한 가지 있다. 미래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소심한 사람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항상 실패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담함에도 예상하기 힘든 후유증이 있기는 하다. 미래를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대담한 사람은 비관적인 결과가 발생했을 때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나 자신과 타자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면서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예측할지라도, 타자는 우리의 예측 이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예측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고 해도 혹은 되지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지나치게 대담한 사람에게는 소심함이 필요하고, 반대로 불필요하게 소심한 사람에게는 대담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만이 미래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소심함과 대담함의 중도, 혹은 중용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소심한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 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님 말고!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실천하는 것마저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심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조금씩 갗추게 될 것이다.468
쾌감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마음과 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이한 전통이 있다. 마음의 기쁨만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고, 몸과 마음의 기쁨 모두를 중시하는 전통도 있다. 정신주의라고 불릴 만한 전자의 경우, 마음의 능력과 몸의 능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마음의 기쁨을 위해서는 몸의 기쁨을 희생하는 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선택이다. 결국 성적 쾌락은 정신적 쾌락의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주류 문명권, 그러니까 기독교나 유교의 정신주의가 표방하는 입장이다. 반면 관능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후자의 전통은 몸과 마음의 능력이 정확히 비례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몸이 기쁨으로 충만했을 때, 우리의 마음도 기쁨으로 들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 전통에서는 성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우리 삶의 동일한 쾌락의 두 가지 표현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470
라틴아메리카 문화는 몸의 쾌락이 마음의 쾌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 그러니까 쾌락은 관능적인 기쁨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조르지 아마두의 소설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도 마찬가지다. 도나 플로르라라는 매력적인 여성이 삶의 희열을 두 가지 기쁨, 그러니까 마음의 기쁨과 몸의 기쁨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각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약사이자 신사인 테오도로와 재혼했지만, 플로르는 이미 고인이 된 첫 번째 남편 바지뉴를 잊지 못한다. 오히려 테오도로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그녀는 바지뉴를 더욱 갈망하게 된다. 두 번째 남편은 그녀에게 정신적 기쁨을 제공 하지만, 육체적 기쁨은 전 남편만큼 안겨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열망이 너무 컸던 탓일까? 바지뉴는 일종의 환각이나 유령의 형식으로 플로르 앞에 나타나더니 남의 아내가 된 그녀를 당당하게 다시 유혹한다.
물론 처음에 도나는 바진유의 유헉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점점 육체적 기쁨이 없다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기쁨도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471
인간에게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순간이라는 용어와는 조금 다르다. 1초, 1초, 그렇게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이 가리키는 것이 순간이 아니다. 초침의 누적으로 분침이 움직이고 분침이 쌓여서 시침을 움직이는 지속의 시간을 무력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할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인생이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인셈이다.472
지속의 시간은 결혼 생활에서 쉽게 확인된다. 왜냐고? 결혼 생활은 질서와 조화, 그리고 안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순간의 시간은 열정적인 연애를 통해 폭발한다. 연애란 결혼과는 달리 무질서, 격정, 그리고 환희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로르는 지금 지속되는 결혼 생활에 지쳐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첫 번째 남편 바지뉴가 지속의 나태한 매너리즘을 파괴하는 환상으로 그녀 앞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굳이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환상도 억압된 것이 연극적으로 실현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지속과 순간은 항상 서로를 배경으로 해서만 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되는 시간이 있어야 그것을 끊어내는 순간의 시간을 찾고자하는 욕망이 가능할 것이고, 반대로 순간의 시간에서 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속의 시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473
"이제는 죽어도 좋다." 이런 탄식이 흘러나오는 순가느 그것은 바로 마음과 몸이 동시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순간 아닌가.473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한다.473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우리의 감정은 몸과 마음 그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당연히 기쁨도,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라면, 몸이나 마음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쾌감으로 전율할 때,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바지뉴의 유혹을 긍정하는 순간, 플로르는 꽃처럼 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바지뉴라는 '환각'으로부터 플로르가 꽃으로 피어날 수없는 법. 살아 있는 남자와의 사랑을 통해서만 그녀는 완전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결국 플로르는 남편 테로도르와도 격식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결합하는 섹스를 통해 바지뉴라는 환각 없이도 육체적 희열을 얻는 데 성공한다. 바로 그 순간 비지뉴라는 유령은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진다.475
정신적 사랑이란 사실 과거 자신에게 관능적인 쾌감을 안겨 주었던 사람에 대한 아련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지. 그러니까 정신적 사랑은 사랑의 기억만을 추억하는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정직하게 스스로 되물어 보자. 만일 몸과 마음이 함께 어울려 극한의 쾌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당신은 과연 한때 자신에게 그런 쾌감을 안겨 주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무료하게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한때 꽃을 피웠던 기억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롭개 꽃을 피울 것인가? 조르지 아마두로 상징되는 남미의 정신은 도전적으로, 진지하게 묻는다. 당신은 자신의 바지뉴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새롭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476
조르지 아마두 - 카카오 농장주의 아들로 태아나 어린 시절에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며 자랐던 아마두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기록한 소설들을 발표했다. 1945년 브라질 공산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곧 정치적 박해를 받아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고, 가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 바이아 연작은 금서가 되어 불태워졌다.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와 문학에만 몰두한 후에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버리고 남미 특유의 유머와 낭만적 감성을 담은 소설들을 발표하여 브라질의 국민작가가 되었다.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에서 작가는 능력 업는 바람둥이였으나 육욕을 만족시켜 주었던 죽은 전남편에 대한 환상의 세계, 그리고 열정은 없으나 사회적 안정과 가정의 따뜻함을 제공하는 재혼한 남편과 함께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통해 인간의 다층적인 욕망을 유쾌하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477
정신과 육체에서 모두 기쁨, 즉 쾌감은 자주 찾아오는 경험은 아니다. 일단 몸을 움직여야만 우리는 쾌감을 소망할 수 있다. 섹스, 춤, 그리고 스포츠가 쾌감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춤이나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섹스에서도 쾌감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몸에 기쁨이 찾아오는 경우에 우리는 정신에서도 반드시 기쁨을 느끼지만, 반대로 정신의 기쁨이 필연적으로 몸의 기쁨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자와 얼떨결에 섹스를 나누게 되었다고 하자.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너무나 흡족하게 섹스를 즐길 수도 있다. 섹스를 마친 후 그 상대방은 완전히 다른 남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제 그 남자만 생각해도 정신은 기쁨으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함께 있다는 생각만으로 정신을 기쁨에 젖어들게 하는 남자가 있다. 기대감을 품은 채,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자.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섹스에 서툴 뿐만 아니라 전혀 상대방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그 후 과연 이 남자를 떠올렸을 때, 여자는 기쁜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항상 옳지만, 정신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때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느 때 불행을 느끼는지 계속 응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정신으로 "이럴 때 자신은 틀림없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해도 직접 몸으로 겪은 기쁨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478
슬픔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기쁨과 슬픔은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기쁨이나 순수한 슬픔은 있을 수 없다는것이다. 왜냐고? 현재의 슬픔은 과거를 기쁨으로으로 치장하고, 반대로 현재의 기쁨은 과거를 슬픔으로 기억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볼까. 아무리 부모가 나를 아껴 주었다고 하더라더, 우리는 멋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부모에 대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슬픔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권위적인 부모로부터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설상가상이라고나 할까, 지금 그는 배우자의 심한 폭력에 휘둘리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당연히 그는 권위적인 부모와 함께 살았던 삶을 기쁨으로 기억하기 쉽다. 480
미국의 비극. 주인공 클라이드는 한때 가장 사랑했던 여자 로버타를 죽여야겠다는 무서운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공에 지나지 않지만 한때 로버타와의 연애는 클라이들를 행복하게 했었다. 481
행복은 자신이 과거보다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에 다름 아니니까. 그렇지만 클라이드는 로버타와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결혼은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버타는 너무나 가난했고, 그만큼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물론 클라이드가 로버타를 사랑했다는 것,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으리라. 불행이라면 불행이랄까, 그러던 그에게 미모와 부를 겸비한 매력적인 여자 손드라가 나타난 것이다.482
다시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는 기회가 클라이드에게 찾아온 것이다. 손드라만 차지하면 그의 오래된 꿈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이런 희망에 부풀수록 그에게 로버타는 신분 상승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쩔 것인가? 신분 상승이라는 파랑새를 쫒고 있던 클라이드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손드라와 꿈꿀 수 있는 장밋빛 미래는 로버타에게서 얻는 현실적 앉어감보다는 훨씬 더 소망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손드라와의 연애가 클라이드에게 기쁨이라는 감정을 안겨 주자, 반대로 로버타와의 만남 자체는 그에게 하나의 슬픔으로 밀려오게 된다.482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483
당연히 우리는 덜 완전해지는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은 기쁨을,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그래서 클라이드는 불행히도 이제 슬픔의 원인이 되어 버린 로버타를 제거하려고 꿈꾸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한때 기쁨의 원천이었던 여자가 이제는 슬픔의 원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지만 멀쩡한 여자를 죽이고도 무사할 리 없다. 그래서 지금 클라이드는 로버타의 사고사를 꿈꾼다. 아무도 자신의 죄를 묻지 않는 완전한 사고사.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합법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꿈이 이루어지면, 그의 말대로 '찬란한 미래'가 열릴 테니까 말이다.483
그를 체포한 사법당국은 로버타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의 결과라고 판결한 것이다.484
지금 우리도 여전히 부와 사랑, 혹은 자본만 인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와 사랑 중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치스러운 교훈을 읊조려서는 안 된다. 살기가 막막한 사람에게 사랑은 근사한 생계 수단, 혹은 유일한 생계 수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와 사랑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비극은 불가피하다.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두 사람은 생계의 불안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불안이 지속되면, 두 사람은 처음과는 달리 둘의 만남이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라고 느끼게 될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돈을 선택하는 순간, 사정이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클라이드는 로버타로 상징되는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항상 어떤 선택을 동시에 어떤 포기를 야기하는 법. 바로 이런 아이러니 때문에 클라이드의 비극이 결코 통속적이만은 않게 보이는 것이다.484
표면적으로 클라이드는 손드라와 로버타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거처럼 보리지만, 사실 그는 부유함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고뇌일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당분간 우리는 클라이드가 먼저 서있던 그 자리에 다시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클라이드의 갈등과 선택을 반복하기 전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부와 사랑, 둘 중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테니까 말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자신의 위엄을 위해 우리를 생계 불안 속으로 던져 넣는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본은 우리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485
시어도어 드라이저 - 미국의 비극은 1910년대 급속히 퍼진 자본주의 가치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왜곡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발자크와 에밀 졸라를 탐독했던 드라이저는 미국 문학사에서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미국 판 죄와 벌로 불리는 미국의 비극은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의 양지라는 제목의 영화로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다. 외모는 매력적이지만 아직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한 한 청년의 헛된 꿈을 통해, 작가는 급격한 도시화와 소외, 성숙하지 못한 인간과 비뚤어진 성공 신화가 야기한 '미국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작가 자신도 주인공 클라이드처럼 가난한 아버지의 편협한 가톨릭 신앙에 반항적이었다. 신문기자의 경험으로 건조하지만 진실을 파헤처 나가는 듯한 문체로 주제의식에 집중했으며, 뉴욕 주에서 발생한 실제 살인사건 기사에 매혹되어 구상한 소설이 바로 미국의 비극이다.487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기쁨이나 절대적인 슬픔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불행히도 우리는 영원을 구가하는 신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은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감정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은 타자와의 관계가 지속되면 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럴 때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조금만 더 잘해 주는 타자가 등장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당연히 우리는 내게 기쁨을 안겨 준 그 타자와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타자보다 더 많은 기쁨을 주는 타자가 또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새로운 타자가 기쁨의 대상이 되는 만큼, 과거 기쁨을 주었던 타자는 자연스럽게 슬픔의 대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건 슬픔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타자일지라도, 나에게 더 심한 슬픔을 주는 또 다른 타자가 등장하는 순간, 과거의 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저 기쁨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슬픔을 주는 대상이라면 단연코 그것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덕'이나 '변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평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쿨'해질 필요가 있다.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냥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자가 기쁨을 주는지. 그렇지 않는지에만 집중하자.488
수치심 : 마비된 사람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어떤 순간에 노숙자가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에서 인간의 정신적 마비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있기 때문이다.491
치욕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491
치욕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강자에게 아부하고 약자에게는 군림할 때, 혹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느라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치욕에 몸을 떨기 마련이다. '치욕'은 슬픈 감정인 셈이다. 인간이라면 누가 이런 슬픈 감정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치욕을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인간이란 기쁨은 가급적 유지하려 하고 슬픔은 멀리하려는 존재니까. 그래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치욕과 수치심을 구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치욕은 슬픈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그런 슬픈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원동력이니까.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치욕을 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법이니까.492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을 짓을 애초에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행동 도한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나의 정신과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492
그레타의 첫사랑은 마이클 퓨리라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그녀를 기다리다 페렴으로 허무하게 죽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만을 하염없이 기달릴 수 있다는 것, 이것만큼 사랑의 순수성을 보여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어느 여자가 이런 순수한 사랑의 기억을 선사한 남자를 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레타도 여전히 그 소년을 그리워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남편 게이브리얼이 순수한 사랑을 점점 잃어 갈수록, 그레타는 퓨리라는 소년을 더욱더 그리워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절절한 그리움이 마침내 겉으로 드러난 순간 게이브리얼은 억누를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질투심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게이브리얼이 아내의 그리움을 통해 순수한 마이클과는 달리 자신은 너무나 속물이 되어 버렸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493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아보기 힘들다.494
게이브리얼은 아내의 그리움이 결국 자신의 타락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때 가장 순수하게 아내를 사랑했던 자신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더블린 관습에 찌든 누추한 속물이 들어선 것이다. 그가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수치심을 통해 게이브리얼은 지금까지 자신을 옥죄고 있던 마비에서 서서히 풀리고 있다. 수치심이란 관문을 통과했을 때 게이브리얼은 어떻게 되었을까?495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연인의 눈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고스란히 담아 두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브리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몸소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나, 이런 감정이야말로 바로 사랑이려니 싶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더욱 가즉 고였고, 어두운 한쪽에서 빗물 듣는 나무 밑에 선 젊은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상상이 들었다.495
게이브리얼의 절절한 눈물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마비 증세를 보이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그건 게이브리얼이 그녀를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을 갖고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집안일을 돌보고 필요하면 자신의 욕정을 해소할 수 있는 아내로만 보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이제 게이브리얼은 아내가 아니라 그레타를 발견한 것이다. 그에게 아내는 그의 뜻대로 되는 존재지만, 그레타는 자기만의 역사와 내면을 갖추고 있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레타의 내면은 자기처럼 더블인의 관습에 찌들지 않고 순수한 사랑을 품고 있는 고귀한 것이었다. 자신이 매너리즘(*일정한 기법이나 형식 따위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어 독창성과 신선한 맛을 잃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을 상징한다면, 그레타는 순수성을 상징했던 것이다. 게이브리얼이 발견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게이브리얼은 자신을 속물근성에서 구원할 수 있는 여신으로서 그레타를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녀가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녀를 놓친다면 자신은 결코 더블린의 마수로부터 구언받을 수 없다는 것을 게이브리얼은 너무나 잘 알게 되었으니까.495
제임스 조이스 - 조이스의 소설들에는 경제적 추락을 비관하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한 상심, 남편의 폭력을 신앙심으로 참아내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 무너져 가는 가정과 억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사창가를 찾을 때 느낀 해방감과 죄의식 등 자전적인 고뇌가 응축돼 있다.
특히 더블린 사람들은 정신적 '마비'로 인해 정체성을 잃은 인간들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다. 망자에서 주인공 게이브리얼은 대단치도 않은 파티에서 연설을 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가 하면 무식한 청중이 못 알아들을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회의적이고, 이런 구절을 써도 좋다면, 사상에 시달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이 새 세대가 아무리 교육, 아니, 교육의 할아버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전 시대의 자산인 인간애, 환대, 다정다감 등의 특질은 결여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게이브리얼은 스스로를 책임 있는 시민이자 멋진 지식인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편협한' 생각에 갇힌 '우스꽝스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채 살아가는 '마비된' 인간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작가는 언뜻언뜻 거울 속에 비치는 게이브리얼의 모습을 통해 자각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소망한다. "흔들 거울이 있는 데를 지나치면서 자신의 몸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딱 벌이지고 꽉 찬 셔츠 가슴팍과 거울에서 볼 때 항상 곤혹감을 안겨 주던 얼굴 표정과 번들거리는 금테 안경까지."497
후안무치라는 말이 있다. 얼굴이 두꺼워 수치스러운 줄 모르는 말이다. 최소한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얼굴이라도 붉게 상기되는 것이 정상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낯짝이 두꺼운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정말 화가 나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혹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당당하기까지 하다.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생기면 가방을 던지거나 심지어 자신의 거대한 몸을 날리는 아주머니들, 새치기를 해 놓고서는 태연자약하게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직장인들,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서 정원 초과를 유발해 놓고도 내리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 한 때 그들은 섬세한 감정을 지닌 여학생, 혹은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헌신했던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뱀처럼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지 않는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발생할 수도 없는 감정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도 자신의 행동이 당당할 때, 그러니까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감, 혹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자긍심과 자존감을 위해, 우리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을 다시 느끼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은 없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타인이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딸이 곁에서 보고 있는데도 새치기를 하면서 시치미를 떼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또 아무리 뻔뻔한 아저씨일지라도 최근에 만나 호감을 느끼는 여자가 옆에 있다면 결코 만원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도 않을 테니까말이다.498
복수심 : 마음을 모두 어려 버리는 지독한 냉기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다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우리 시인 김수영이 1963년에 쓴 시 죄와 벌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복수를 굳게 다짐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자신은 복수의 대가로 사회적 처벌, 혹은 양심의 가책 등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이런 모든 대가를 감내하겠다고 입술을 앙다물지 못하는데 어느 누가 자신과 상대 모두를 파괴시키는 복수를 감행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 우리는 막상 복수를 실행하려는 순간, 주저하게 된다. 모든 상황이 완전히 변해 버릴 혁명적인 상황인데, 어떻게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500
시청의 낡은 문기둥 옆에 선 채 게이조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요코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게이조는 코트깃을 세웠다. '본심은 요코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쓰에에게 범인의 자식을 키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배반하고 무라이와 정을 통한 나쓰에 때문에 그날 루리코는 살해되었다. 나는 그런 나쓰에가 요코의 쿨생의 비밀을 알고 괴로워할 날을 위해 그 아기를 데려온 것이다. 나쓰에의 부정을 일시적인 마음의 방황으로 돌리고, 어떻게든 용서할 수는 없는가? 한 번은 나도 용서를 했다. 루리코의 죽음을 미칠 듯이 슬퍼하는 나쓰에를 나는 용서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루리코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또다시 무라이의 품에 안겼을 리가 없다. 무라이도 내가 나쓰에를 어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나쓰에와 무라이는 배신했다.'나쓰에의 흰 목덜미에서 본 보랏빛 멍이 지금도 게이조의 가슴에 아프도록 깊이 새겨져 있다.501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은 무엇보다도 먼저 얼음처럼 차가워진 사람들이 마침내 어떻게 서로를 얼려 버리는지, 그 화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보고서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병원 원장 게이조는 아내 나쓰에의 배신으로 그 부드러운 심장이 돌처럼 딱딱하게 되었다. 나쓰에가 무라이라는 젊은 의사와 연정에 빠지는 날, 어린 딸 루리코는 참혹한 시체로 변하고 만다. 무라이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세 살 난 딸을 나가 놀라고 방치하여 야기된 사건이다. "무라이와 나쓰에가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이 루리코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501
아내의 행동을 한때의 열정이라고, 부주의한 실수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용서할 생각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아내를 용서하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게이조의 조그만 기대는 속절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딸 루리코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나쓰에에게서 무라이와 키스를 나눈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매력적인 목덜미에 보랏빛 멍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용서하려는 마음은 일순간 냉각되고 그 자리에 잔혹한 복수심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어떻게 이토록 마음을 산산이 찍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이조는 복수심에 치를 떤다. 자신의 마음을 싸늘하게 얼려 버린 것처럼 나쓰에의 마음도 싸늘하게 얼려 버릴 궁리를 하게 된다. 502
게이조가 마침내 생각해 낸 방법은 잔혹하다 못해 섬뜩하기 까지 하다. 자신들의 딸 루리코를 죽이고 자살한 살인마의 딸을 입양하겠다는 계획이다. 그 아기가 바로 요코다. 마침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나쓰에가 루리코의 빈자리를 대신할 여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남편을 조르고 있던 참이다. 언젠가 자신이 범인의 딸을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 아내도 싸늘한 얼음처럼 변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또한 입양한 딸 요코에게 충분히 정을 붙일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내 나쓰에가 자신이 사랑하는 요코가 살인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그때는 아내도 지금의 자신처럼 싸늘하게 얼어 버릴 것이다. 그래야만 아내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싸늘하게 식은 심장을 가지고 사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503
복수심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503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녀가 밉다. 이것을 씻을 수 있는 방법은 당한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것. 마침내 남자는 복수의 화신이 된 것이다. 복수심이란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이 해악을 가하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미움의 정서"가 영혼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 일체의 온기도 남아서는 안 된다. 얼음이 되지 않는다면, 복수는 생각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실행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빙점'에 이르러야만 하는 것이다. '빙점'은 액체가 고체로 결정되는 온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언제 인간의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응결되는지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복수심이다.
타인에게 해악을 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딱딱한 얼음처럼 만들어 놓는 것이 좋다. 부드러운 마음, 온기가 남아 있는 마음으로는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딱딱한 얼음은 쇳덩어리처럼 타인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지만, 미지그한 물로는 타인의 옷깃만 적실 뿐이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복수심의 이면에는 더 심각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의 본능도 읽힌다. 삽은 물렁물렁한 진흙에는 쉽게 들어가지만 딱딱하게 언 땅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처럼 복수심의 이면에는 자신의 상처를 급속 냉각시키려는, 그래서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모종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빙점'이 동시에 '융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이 0도 에서 냉각되어 얼음이 되듯이, 얼음도 0도 에서 풀려서 물이 되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복수심이라는 빙점이 동시에 융점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504
그렇다, 용서다 배신한 아내를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마음을 얼음처럼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쩌면 복수심이 어떤 파국을 가져오는지 하나하나 처절하게 경험해야만 빙점이 융점으로 변할 수 있는 건 아닐까?505
배신한 아내를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마음을 얼음처럼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복수심 어떤 파국을 가져오는지 하나하나 처절하게 경험해야만 빙점이 융점으로 변할 수 있는 건 아닐까?506
미우라 아야코 - 7년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국가의 기만성(남을 속여 넘기려는 성질.)에 좌절하여 1946년에 교직을 그만두었다.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잡화점이 번창하여 이웃 가게에 지장을 주자 가게 규모를 줄이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게 된 소설 빙점이 1964년 아사히신문 현상공모전에 당선되어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복수의 부질없음과 화해에 이르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 용서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507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에게 잘해 주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그 만큼 위해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면의 진리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거꾸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일단 함무라비 법전을 관철시키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노예 도덕을 상장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강한 자에게 핍박을 받는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게 자신이 당한 것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말인가, 복수를 시행할 힘조차 없는데. 이럴 때 예수의 속삭임이 우리의 나약함을 정당화하며 찾아온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는 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야." 이런 속삭임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자신에게 원수를 갚을 수도 있고 갚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양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약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강자에게 복수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에 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이든 복수든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자. 혹은 강자만이 누릴 수 욕망이라는 사실을.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조차 없다. 강자가 되었을 때에만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을 갖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해악을 당했지만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면, 아주 천천히 힘을 키워서 강해져야 한다. 5년이든, 10년이든 치욕을 잊지 말고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마침내 해악을 가한 사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게 되는 날, 우리는 진정 결정할 수 있다. 계획대로 복수를 추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용서할 수도 있다.508
에필로그
편견, 그것도 아주 해묵은 편견이 하나 있다. "감정은 순간적이어서 맹목적으로 따르면 위험하다."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어서 감정을 따르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것일까? 분명 감정은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감정이야말로 충만한 삶의 정수니까 말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볼까. 역시 감정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예로 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하니까.509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그는 좋은 대학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는 볼것없는 월급으로 노모아 동생들을 돌보기에도 벅찬 생활을 하고 있다. 근데 그와 함께 있으면 그냥 좋다. 기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욕망 아닌가.510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로 결혼을 포기했다고 치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과의 미래가 불안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녀는 사랑이라는 현재의 충만한 감정을 포기하고 미래의 안전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족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밀래로 미루지 말라!511
화려하게 절정에 이르렀다가 언젠가 지게 되는 꽃처럼, 사랑이란 감정도 그렇게 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런 서글픈 순간에 그녀를 휘감고 있는 감정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것이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수도 있고, 아니면 당황이라는 감정일 수도 있다. 미움이든 당황이든 사랑이 아닌 바로 그 감정이 현재를 사는 그녀를 규정하는 것이다.511
미움의 대상이나 당황의 대상과 함께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단지 과거에 피었다가 져서 이제는 다시는 못 볼 꽃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미래만 꿈꾸며 사는 것도 문제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든 것도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미움이나 당황이라는 감정에 부합되는 다른 삶의 방식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감정이든 아니면 남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이든 간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따라 살아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충만한 현재로 살아가려면 별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의 김정에 어울리는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을 지키는 방법이니까.511
사실 '감정은 순간적이다.' 라는 말만큼 감정을 모욕하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분명 감정은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것만은 아니다. 감정은 지속적인 것이다. 오늘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내일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슬픔을 주는 경우는 없으니까. 오늘 미워하는 사람이 내일 사랑하는 사람으로 불쑥 탈바꿈하는 경우도 없다. 감정은 우리 삶의 속도만큼 풍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감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속되는 그 감정의 목솔리르 존중하라! 그것만이 당신이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자유로운 감정의 소유자와 당당한 인격을 무서워하는 법이다. 그건 자신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감히 손대지 못한 과일을 과감히 따먹는 사람을 보고 마음이 편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들의 비겁함이 폭로되는 광경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512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얼마나 그녀가 지금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삶을 '좋다'라고 느끼는지 따위가 그들의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진짜 비극은, 그녀가 자신의 '좋음'을 버리고 부모나 친지들이 '선'이라고 평가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 자기 삶의 정수였던 감정을 포기한 거라는 진실을 알까?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마한다. 니체가 산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에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섭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513
'좋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라! 나의 삶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선택하고, 반대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을 거부하라!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지 간에 상관없다. 간혹 '좋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과 삶을 교살시키는 이런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느는 두 가지다. 우선 '선과 악'이라는, 부모나 타인들의 가치 평가를 그대로 수용했기에 이런 비극이 발생한다. 하지만 감정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이런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514
'좋음과 나쁨' 이라는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배신하게 만드는 두 가지 이유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두 번째 이유다. 연민을 사랑이라고 찾각해서 누군가와 결혼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스피노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연민은 기본적으로 슬픈 감정이고, 당연히 그것은 '나쁜' 감정일 수밖에 없다. 연민의 대상, 즉 근본적으로 슬픅로 나쁜 감정을 제공하는 사람과 어떻게 사랑의 기쁨을 일굴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파국과 비극은 불가피하다. 이처럼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제대로 식별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불신의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모나 사회의 통념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좋은 감정들과 나쁜 감정들로 양분될 수 있는 48가지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성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감정인데 좋은 감정이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좋은 감정인데 나쁜 감정이라고 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감정의 혼동은 삶의 혼돈을 낳고, 마침내 자신을 불신하는 것으러 막을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515
48가지의 감정들에 서열과 우열을 매길 수는 없다. 어떤 감정이든 중요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516
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섬세하게 직조된 기쁨과 슬픔은 신성한 영혼을 위한 안성맞춤의 옷, 모든 비탄과 갈망 아래로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감상문
나는 숨기고만 살았던 것은 아닐까?
정확한 날짜는 생각나지 않는 월요일. 쌤이랑 민정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서 맛있는 참치와 위스키를 먹으면서 내 가면은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술을 잘 못 먹는다. 그런데 술을 입에 대면 그만두기 힘들다. 그것은 술을 먹으면 가면의 벗겨짐을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차에서 먹은 고량주는 내 이성의 가면을 완전히 벗겨버렸다.
다시 이성의 가면이 눈을 뜬 시간은 새벽 4시. 비틀거리며 스투디움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했던 행동을 들었을 때, 내 생명이 위험했고, 슬이한데 폭력적인 행동을 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지난 기억 저편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던 행동을 스스로 했다니 당황스럽다.
술을 먹으면 소위 개로 변하는 이유 그것은 내 마음속에 쌓아두기 때문이다. 내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기쁨의 순간도 온전히 들어내지 않고 슬픔의 순간도 표출하기 보다 참는다. 그리고 가면이 약해지는 순간 이성이라는 가면에 막혀있던 감정들은 폭발적으로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일까 숨기고만 두었던 감정들을 공부하고 싶었다. 공부를 해서 지금 내가 일어나고 있는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무의식으로 쌓아만 두었던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지며 말이다.
올해 초 마음학과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감정수업을 다시 한번 꺼냈다. 그리고 다시 읽어갔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느껴졌다. 24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에게 잘못하고 살아왔다. 근우에게 미안한다.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버림 받는 것이 두려워 숨고만 지냈던.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단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끙끙 않았을 때,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다고 말하지 못해 위염에 걸렸을 때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히던 근우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얻어진 것이 착한 아들, 착한 친구, 좋은 사람 등등 스스로 두꺼운 가면 속에 태어난 허명으로 세상을 살아온 나에게 미안하다.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7
얼마 전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행복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기쁨을 행동으로, 불행은 가족간의 불화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내가 생각했던 것이 행복인지 혹은 불행이 진실일까? 혹시나 진실이 아닌 내가 만들어 놓은 가면들의 허상이 아닐까.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18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것은 감정의 강력함에 직면했던 인간의 절망스러운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20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김근우라는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세상을 살아갔다. 감정의 강렬함을 무시한 채 세상을 살아왔다. 이러한 환상 속에서 감정수업은 나에게 알려준다. 자신과 타인의 제대로 된 응시. 책을 읽으면 읽을 수 록 비겁함이 들어나고 자괴감이 묻어 나온다. 책 읽고 인상깊은 구절을 적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감정을 공부하며 얻은 자기반성은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동경인지 구체적으로 일깨워 준다. 그리고 일깨워진 감정들 속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행복하고 어떤 상황을 경험하면 불행한지 배워갔다.
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섬세하게 직조된 기쁨과 슬픔은 신성한 영혼을 위한 안성맞춤의 옷, 모든 비탄과 갈망 아래로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521
감정수업은 길고 긴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소심함, 비겁함ㅍ그리고 기쁨과 사랑이 있다. 그 동안 참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고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직 감정에 대한 솔직함을 들어내는게 쉽지 않다. 짧은 시간안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천천히 연습하자. 조금씩 내가 느낀 감정을 긍정하자. 그리고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울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