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Asian History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 만주족, 돌궐족

Jobs 9 2021. 3. 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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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진족=말갈족=만주족

만주족은 중국의 동북지방인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퉁구스계 민족의 하나입니다. 만주족이라는 이름은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淸)을 세우고 그 지배층이 되었던 남방 퉁구스계를 가리키는 용어로, 역사상 숙신(肅愼)·읍루(婁)·물길(勿吉-중국 남북조시대)·말갈(靺鞨-중국 수당시대)·여진(女眞-10세기 전후) 등으로 불렸습니다. 부여·고구려·발해·요(遼)·고려 등 주변 민족이 세운 나라의 지배와 영향을 받다가 12세기에 이르러 아구다[阿骨打]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금(金)을 세워 한때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했으나 칭기즈칸 시절 금이 몽골에게 멸망한 뒤 다시 부족단위로 반농경·반유목 생활로 돌아갔다가 16세기말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1616년 누루하치(奴爾哈齊)의 주도로 후금(後金)을 세웠으며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 때까지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200여 년에 걸친 중국 지배기간 중 중국내륙으로 이주한 만주족은 절대다수의 인구와 높은 문화 수준을 가진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고유의 풍속과 언어를 잃고 한족의 일부가 되었으며 오늘날의 만주족은 청의 지배기간 중 만주지방에 남아 있던 자들의 후손입니다. 최근 연구에 의해 만주족들은 퉁구스로 알려진 거대한 인종집단의 일부임이 밝혀졌는데, 1세기경에 북동부 만주지역에 살던 많은 퉁구스족들은 북부와 서부로 이주하여 예니세이 강과 태평양 사이의 시베리아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만주족의 인종적 형질은 몽골로이드 계통으로서 키는 비교적 작고 머리는 단두형(短頭形)이나 다른 종족과의 접촉을 통해 여러 만주족 집단들 사이에도 신체유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거란족

거란족은 4세기 이래 동몽골(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으로 몽골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몽골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됩니다. '거란'이라는 용어는 모용연(慕容燕)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鮮卑族)이 우문(宇文)·해(奚)·거란으로 나뉘어 송막(松漠) 지방으로 피신한 4세기 전반부터 비로소 사서(史書)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변 집단에 대한 약탈과 방어의 필요가 있을 때만 서로 잠정적으로 동맹했으며,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초부족적(超部族的)인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질서를 형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남과 구별하여 '키탄'(Qitan)이라고 부른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느슨한 형태의 연맹의식 혹은 부족의식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당(唐)의 기미지배(羈支配)였습니다. 돌궐에 대한 철륵제부(鐵勒諸部)의 반란을 틈타, 628년에는 거란 8부(部)의 수령들이 모두 부족을 이끌고 내속해왔으며 당은 이들을 10주(州)로 나눈 뒤, 마회(摩會)를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여 8부를 통할케 하였습니다. 이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종래 8 부족 연합체를 붕괴시키고, 정복국가 군주에게 특유한 전제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병마권(兵馬權)을 장악하고 해·실위(室韋)·우궐(于厥) 등 주변의 유목부족은 물론 여진인(女眞人)과 한인(漢人) 등 정주민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많은 수의 부족을 송막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경지역에 거주하던 다수 한인들이 거란 영내로 도망해오기도 하여, 이들 정주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설한 성곽은 아보기의 경제적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사·경제 실력을 바탕으로 907년 카간에 즉위하였으며 즉위 후 911년과 912년, 913년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질랄부(迭剌部)의 부족민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반발을 받았으나, 곧 8부대인(八部大人)을 연회로 초대하여 모두 살해한 뒤 916년 요(遼)를 건국하고 스스로 '천황제'라고 칭하였습니다.

 

돌궐족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투르크계 민족입니다. 지배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는 처음에 알타이 산맥 서남쪽으로 가서 유연(柔然)에게 복속되어 있었지만, 족장 토문(土門) 때 그 세력이 강대해졌습니다. 551년 토문은 유연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이리 카간(伊利可汗)이라 칭하고, 동생인 디자브로스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투르키스탄을 경략하게 했습니다. 그후 제3대 목간 카간(木杆可汗) 때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정벌하고 키르기스를 장악한 다음 본거지를 북몽골의 우트켄 산으로 옮겼습니다. 한편 투르키스탄에서는 디자브로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고(563~567), 서면 카간(西面可汗)으로서 세력을 떨쳤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소그드 문자를 썼다. 현재 소그드문자로 된 〈목간특근기공비 木杆特勤紀功碑〉가 남아 있습니다. 후에 소그드 문자의 자모를 빌어 돌궐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관제(官制)로는 카간 아래 엽호(葉護)·설(設)·특근(特勤)·사리발(俟利發)·토둔(吐屯) 등 28관원이 있었습니다. 세금으로 유목민들에게 병마를 징발했고 각종 가축에 과세를 부과했습니다.

돌궐의 세력은 급속히 강대해졌지만, 카간의 지위를 둘러싸고 동족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아 통일의 기반이 취약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는 교묘한 돌궐 이간책을 써서 이시바르 카간(沙鉢略可汗)때인 583년 투르키스탄의 서면 카간을 독립시켰습니다. 이때부터 돌궐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누어졌습니다. 동돌궐은 도남 카간(都藍可汗)의 치세 때 그와 달두 카간(達頭可汗), 돌리 카간(突利可汗)이 서로 싸우다, 603년 결국 돌리 카간은 수에 투항하고 도남 카간은 부하에게 살해되었으며, 달두 카간은 수나라 군대에 격파되어 달아났습니다. 돌리 카간은 계민 카간(啓民可汗)으로 개칭하고 오원(五原) 지방에서 유목지를 얻어 북몽골 지역에 거주하던 철륵(鐵勒 : 당·송대(唐宋代)에 중국인이 투르크족을 부르던 이름) 각 부(部)를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돌궐의 혼란기에 철륵 각 부가 세력을 신장시켰지만 동·서 돌궐이 다시 강대해지면서 다시 이들에 예속되었습니다. 즉 동돌궐에서는 시필(始畢)·처라(處羅)·힐리(利)의 세 카간이 연이어 옛날의 국력을 회복했고, 서돌궐에서는 사궤(射)·통엽호(統葉護)의 두 카간이 동방의 철륵 각 부와 서방의 페르시아·쿠샨 등을 정벌하고 투르키스탄에서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서돌궐은 실크 로드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각국 상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또 이곳에 불교·조로아스터교·네스토리우스교(景敎) 등이 전파되었다. 당의 현장(玄)도 이곳을 거쳐가면서 통엽호 카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서돌궐은 지리적 중요성으로 동서 문화와 경제교류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7년에 각각 당에 멸망되었고, 당은 이곳의 각 지역에 도독부(都督府)·도호부(都護府)·주(州) 등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7세기말 서돌궐 지역에서는 돌기시(突騎施)가 독립했고, 동돌궐 지역에서는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祿)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골출록은 일테리시 카간(趺利施可汗) 이라 칭하고 돌궐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것을 후돌궐이라고 부릅니다. 동생인 묵철(默)이 그의 뒤를 이어 카파간 카간이 된 뒤로는 세력이 더욱 커져 거란·키르키스·탕구트를 정벌하고 돌기시까지 격파하여 영토가 동서로 1만여 리(里), 병력이 4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년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북방의 철륵 각 부가 반란을 일으켜 카파간 카간이 그들을 토벌하러 나갔다가 전사했습니다(716). 그 뒤 카간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골출록의 아들 퀼테킨(闕特勤)이 형을 빌게 카간(毘伽可汗)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스스로 군권을 장악하고 인망이 두텁던 톤육크(暾欲谷)를 고문으로 맞아들여 부족 간의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빌게 카간은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734년 빌게 카간이 독살된 후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 바슈미르·위구르·카를루크 등 여러 부족들이 독립함에 따라 후돌궐은 멸망했습니다. 후돌궐은 돌궐 문자를 사용했고, 빌게 카간, 톤육크, 퀼테킨의 공적을 기린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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