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책, 고전, 읽기 Reading, Books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Jobs9 2023. 6. 20. 18:36
반응형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다. 나였던 것들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엄마 손을 잡고 불이 난 건물 계단을 내려오던 나도, 산골짜기를 헤매며 사슴벌레를 잡던 나도,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도, 흰 눈을 맞으며 펑펑 울던 나도, 없다.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이 그것들을 나이게끔 한다.

그런 기억은 삶을 비가역적인 무엇으로 만든다. 사랑이 불가역적인 반응인 이유도 기억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이 남긴 기억으로 인해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우리를 늙게 한다. 첫사랑을 다시 할 수 없고, 첫 키스를 새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것을 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의 퇴적층이다. 시간은 기억을 풍화시키고, 죽음은 마침내 기억을 소멸시킨다. 나는 한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타자의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기억이 있다. 생명이다.


…기억으로서, 생명…

기억의 핵심은 재현이다. 기억 속에서 사건은 재현된다. 내일 자전거를 자연스럽게 탈 수 있는 것은 어제 자전거를 탔던 행위를 내 몸이 기억하고 그것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행복했던 여행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기억이고 재현이다. 기억이 없다면 재현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사건은 오로지 기억의 매개를 통해서만 현재, 혹은 미래와 연결된다.

생명의 핵심 또한 재현이다. 생명체는 사건을 끊임없이 재현한다. 세포가 분열하여 똑같은 세포가 나오고, 그 세포들이 분열하여 다시 똑같은 세포를 만든다. 하나의 세포가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고, 그 알은 다시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는다. 아버지가 딸에게 파란 눈을 물려주고, 어머니가 다시 그 파란 눈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생명체는 마치 과거를 기억한다는 듯 행동한다. 세포가 분열한 후 딸세포는 다시 모세포의 모습을 되찾고, 달걀은 자신을 낳은 닭의 꼴을 갖춘다. 손자의 눈은 할아버지 눈의 색깔을 기억하는 것마냥 푸른빛을 띤다.

생명체는 기억을 통해 본연의 삶을 획득하고, 살아 있는 한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반대로 생명체의 죽음은 기억의 끝이며 재현의 정지다. 최초의 심장박동이 더 이상 재현되지 않을 때,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죽음 이후에도 기억을 매개로 생명은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손자의 눈은 여전히 파랗다. 닭이 더 이상 달걀을 낳을 수 없게 되는 날, 그가 낳은 달걀이 닭이 되어 다시 달걀을 낳고 있다. 최초의 생명은 그 탄생 이후 단 한 순간도 재현을 멈추지 않았다. 38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기억, 생명은 바로 그 영속하는 기억이다.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의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는 그 영속성에 대한 고찰이다. 그는 여기서 생명이라는 기억의 물리적 본성을, 그 물질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지적 모험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생명이 기억이라면, 그 기억은 어디에 기록되는가.”

…기억의 법칙…

슈뢰딩거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양자역학의 대주주다. 언뜻 물리학은 생명을 다루기에 역부족으로 보일 수 있다. 물리학은 사물에 대한 탐구이지만, 그 사물들은 대개 생물들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도 인정한다.

우리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지식을 하나의 전체로 짜맞출 준비가 되었다고 우리는 분명히 느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 개인의 정신이 작은 전문 분야 이상의 지식에 정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참된 목표를 영원히 잃지 않으려면) 누군가 과감하게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감수하고 사실들과 이론들을 종합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나의 변론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15-16쪽) 

자신의 한계와 책무를 인정한 슈뢰딩거의 작업은 과감하다. 그는 물리학과 유전학을 통합하여 생명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재현적 사건들의 물적 토대, 즉 기억의 화학적 본성에 대해 논증, 더 정확히 말하면 예언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류를 실제로 범했다. 유전자를 단백질이라고 본 잘못된 예언과, 유전정보는 이성질체의 형태로 저장될 것이라는 부정확한 예언을 했다. 그러나 예언은 반증의 대상이 아니라 묵상의 원천이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는 완벽한 방법은 아무 길로도 가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목적지를 잃어버리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기도 하다.

비록 완벽한 예언은 아니지만, 그의 세련된 예언은 이미 당대 과학자들의 의식계에서 조용히 점화되고 있던 어떤 열망을 폭발적으로 발화시켰다. 기억으로서의 생명을 해독할 수 있는 ‘로제타석’에 대한 열망 말이다.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로제타석은 훗날 왓슨과 크릭에 의해 디엔에이(DNA)라는 이중나선 구조의 화합물로 해독되었다. 왓슨은 그 여정을 기록한 <이중나선>에서 자신과 크릭을 순례길로 이끈 예언자와 예언서가 슈뢰딩거의 <생명은 무엇인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물리학자로서 슈뢰딩거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한다. 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 그의 자답은 간결하다. 그렇다. 그것도 자신이 크게 기여한 양자역학이 생명의 원리이자 기억의 법칙이라고 예언한다.

우리는 유기체 내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을 기꺼이 찾아야 한다. 혹시 그 법칙을 비물리학적인, 아니 심지어 초물리학적인 법칙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새로운 원리는 전적으로 물리학적이다. 그 원리는 다름 아닌 양자이론의 원리라고 나는 믿는다.(<생명이란 무엇인가>, 135쪽)

여기서 슈뢰딩거는 ‘안다’는 말 대신 ‘믿는다’는 말을 쓴다. 직감이며 느낌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양자역학이 무미건조한 사물들뿐만 아니라 경이로운 생명 현상의 이면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 확신을 과학적 언어로 표현한 결과물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나는 믿는다.


…염색체는 어떻게 그토록 작은가…

슈뢰딩거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논증을 시작한다. “원자는 왜 그토록 작은가?” 사실 이 질문은 “우리는 왜 원자에 비해 그토록 큰가?”라는 같은 질문의 다른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원자에 비할 바 없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크기의 문제가 필연적이라고 진단한다.

모든 원자가 항상 완전히 무질서한 열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오직 엄청나게 많은 원자들이 함께 행동할 때만, 통계적인 법칙들이 그 집단의 행동을 원자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증가하는 정확도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사건들은 참된 질서를 얻는다. 유기체의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물리법칙들과 화학법칙들은 모두 이런 통계적인 법칙이다.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법칙성이나 질서는 원자들의 끊임없는 열운동에 의해 교란당하고 무력해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28쪽)

아주 작은 원자들의 세계는 카오스다. 그 많은 존재들이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없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런 원자들의 모임인 빨간 잉크를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여지없이 잉크의 원자들은 물 전체를 빨갛게 물들인다. 천 번을 반복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마치 잉크가 물을 빨갛게 물들이려는 지향성을 품고 있는 듯 말이다.

하지만 잉크 속의 원자들은 결코 물에 퍼지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물에 퍼지는 것은 개별 원자가 아니라 평균으로서 원자 집단이며, 과학자들은 이 집단적 패턴을 확산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무작위로 움직인다. 무수히 많은 원자들이 물병 안에서 아무렇게나 움직이다 보니 아무 곳에나 있게 되는 패턴이 확산이다.

이처럼 지향 없는 것들의 지향성은 우주의 지향으로부터 발생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이행이라는 우주의 본성 말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지향성이 성취될 시간뿐이다. 그리고 이 무질서함은 오로지 거대한 원자 집단에서 통계적인 차원에서만 법칙적으로 성립한다. 개별적인 원자들은 패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고전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우리가 원자들보다 이토록 커야만 하는 이유다.

유기체와 유기체가 경험하는 모든 생물학적인 과정들이 극도의 ‘다수-원자’ 구조를 가져야 하며, 우연적인 ‘단일-원자’ 사건들이 너무 큰 중요성을 얻지 못하도록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이다, ‘유기체는 충분히 정확한 물리법칙들을 가질 것이며, 그에 의지하여 놀랄 만큼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활동을 할 것이다’라고 ‘소박한 물리학자’는 말한다.(<생명이란 무엇인가>, 41쪽)

자연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패턴은 생명이다. 기억으로서 생명은 끊임없이 패턴을 재생산하고 재현한다. 봄이 오면 꽃이 들판을 물들이고, 여름이 오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 공기를 물들인다. 꽃은 봄을 기억하고 개구리는 여름을 기억한다. 들판은 꽃을 재현하고 여름밤은 울음소리를 재현한다. 슈뢰딩거는 이 영속적인 패턴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수백 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큰 변화 없이 재생산되며, 세대가 바뀔 때마다 서로 융합하여 수정란을 형성하는 두 세포 핵의 물질적인 구조에 의해 전달되어 탄생하는 것은 개체의 가시적이고 분명한 성질 전체, 즉 ‘표현형’의 (4차원적인) 패턴 전체이다. 이것은 기적이다.(<생명이란 무엇인가>, 56쪽)

고전물리학자는 이 기적의 패턴 역시 통계적인 물리법칙에 따른 결과이며, ‘다수-원자’ 구조가 그 패턴을 형성한다고 예상할 것이다. 슈뢰딩거는 고전물리학자들의 이러한 귀결이 오류라고 단언한다. 결정적인 증거는 유전학자와 세포학자에게서 나왔다. ‘염색체’라는 아주 작은 물체가 생명체의 기적적인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원자 집단이, 정확한 통계적인 법칙성을 보이기에는 너무 작은 집단이 살아 있는 유기체 속에서 일어나는 매우 질서 있고 규칙적인 사건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작은 집단들은 유기체가 발생하면서 획득하는 관찰 가능한 거시적 특성을 통제하며, 유기체의 중요한 기능적 특징을 결정한다.(<생명이란 무엇인가>, 42쪽)


…기억은 분자에 기록된다…

이 오류를 극복할 방안이 고전물리학에는 없다. 염색체라는 그리 크지 않은 원자 집단이 생명의 기억을 담고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어쩌면 필연적으로) 염색체가 생물학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 시대에 새로운 물리학이 등장했다. 양자역학이다. 슈뢰딩거는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두 이론, 유전학과 양자역학의 통합으로 새로운 시대의 서곡을 썼다. 유전자의 시대 말이다.

양자이론이 해답을 제공한다. 현재의 지식에 따르면 유전 메커니즘은 양자이론의 기초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니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이 위대한 두 이론의 탄생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 양자이론의 가장 큰 업적은 자연의 책 속에서, 그 속에서는 오직 연속성만이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과거의 전통을 뒤엎고, 불연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83-84쪽)

기억은 비가역적인 무엇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말하면, 기억은 비가역적인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토대는 기록이어야 한다. 기록만이 기억을 품는다. 그것이 일기장이든, 우리 뇌 속의 신경구조든 말이다. 과거와의 접속은 오로지 기억을 매개로만 가능하며, 기억은 오직 기록에서만 호출될 수 있다. 기록이 사라졌다면 더 이상 기억은 없다. 망각이란 기록의 소거로 인한 기억의 소멸이다.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이 바로 기억을 망각으로부터 보호할 비가역적인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토대란 우주의 불연속성이다. 양자역학은 물은 위에서 아래로 연속적으로 흐른다는 과거의 전통을 뒤엎고, 양자라는 우주의 존재들이 불연속적인 상태를 뛰어다니며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소립자들의 세계는 아파트와 같아서 우리는 1층 혹은 2층에 살 수 있을 뿐, 1.5층이나 2.8층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1층을 선택하면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계단을 지나야 한다. 바로 그 계단이 기억의 비가역적 토대이며, 망각에 대한 성벽이다.

분자는 이처럼 양자화 된 우주의 역작이다. 주어진 원자 집단에 허용된 불연속적인 상태들 중 안정적으로 서로 근접한 상태가 분자이다. 분자는 한 집에 살기로 한 원자들의 공동체이며, 이들의 동거는 전자의 공유로 실현된다. 과학자들은 그 결속력을 공유결합이라 부른다. 시간이라는 무질서의 파도에 견뎌낼 수 있는 힘은 원자들이 분자공동체로서 지켜내는 질서이다. 기억은 이 공유결합 위에 기록되고, 보존되며, 재현된다. 생명의 기억은 유전자에 기록되며, 유전자는 분자여야 한다.

유전물질의 미세한 크기와 고도의 영속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분자를 제안함으로써’, 그러니까 세분된 질서를 구현한 걸작이며 양자이론의 마술지팡이에 의해 보호를 받는 예외적으로 큰 분자를 제안함으로써 자연적인 무질서화 경향성을 피해나가야 했다. … 생명은 물질의 질서 있고 법칙적인 행동이며, 그 행동은 물질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하는 경향성에만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에도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117쪽)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위대한 예언서인 이유는 그것이 분자와 생명의 결합, 즉 분자생물학의 시대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DNA의 등장을 예비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언자는 말한다. 생명은 우주의 예외적 법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보편적 법칙의 산물이다. 바위와 물을 이루는 존재들과, 그것이 있게 한 법칙이 생명 역시 꽃피우고 있다.

어쩌면 양자의 우주는 그 태초부터 생명의 출현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는 무질서의 법칙은 우주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는 기억이라는 생명의 법칙이 있다. 우주는 더디지만 온 힘을 다해 분자라는 기록으로 기억을 겹겹이 쌓아왔다. 생명은 그 기억의 공동체다. 어쩌면 생명이란 우주 전체이며, 지금의 우주를 넘어 지금까지의 우주를 모두 품은 138억 년의 기억이 아닐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