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개관
- 성격 : 상징적, 감각적, 철학적
- 특성
① 의인화 기법으로 산의 모습을 형상화함.
② 산의 다양한 모습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함.
- 제재 : 산
- 주제 :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1연 → 새벽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의 산의 그림자를 묘사함. 의인화를 통해 산의 의연함을 보여줌.
*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 산의 의연한 모습을 의인화하여 나타냄.
* 산은 날아가도 ~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 산의 덕성을 표현한 부분임. / 꽃잎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굴 속에 사는 짐승들을 위해서 흙 한 줌 돌 한 개 들썩거리지 않도록 하는 배려심 많은 산의 모습을 의인화하여 표현함.
*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 남을 배려하는 자애로운 덕성을 지닌 산의 모습
* 3연 → 다정다감한 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으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산의 모습은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주된 내용임.
*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 인간과 함께 하는 산의 모습
*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 인간의 죽음을 받아 주는 산
*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 산의 성스러움
* 5연 →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산이지만 사람들의 모습이 어수선하면 물러가는 것을 표현함. / 혼탁한 인간 세상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김.
*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 산을 친근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은둔자의 모습)
* 6연 → 인간의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줌. / 산을 인내와 겸허를 인간에게 가르쳐 주는 스승으로 인격화함.
* 나무를 기르는 법 → 인내
* 벼랑을 오르지 못하는 법 → 겸허
* 7연 → 산의 모습을 인간적인 면모로 해석함.
* 8연 → 세상을 평온하게 관조하는 것만으로는 고산도 명산도 될 수 없으며, 진솔하게 삶에 부대껴 보아야만 산으로나 인간으로나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임.
* 9연 → 산의 융통성과 포용성을 계절감으로 표현함.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인간과 함께 하는 산
- 2연 : 동식물들을 품는 산의 모습
- 3연 : 다정다감한 산의 모습
- 4연 : 성스러운 산의 모습
- 5~6연 : 사람과 친하기도 하고 사람을 다스리기도 하는 산
- 7~8연 :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산
- 9연 : 산의 포용성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인이 병고를 이겨 내는 과정에서 삶에 대해 깨달은 바를 표현한 작품으로, 기존의 작품과는 색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산은 이전의 것과는 다르다.
이 시에서 산은 모든 것을 보듬어 주는 항상 여유로운 산만은 아니다. 때로는 성내기도 하고 서러워하기도 한다. '산'은 아름다움 속에서 등장할 수 있는 인간의 갖가지 양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연까지의 '산'의 모습은 자기와 함께 남을 배려해 주는 다정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다스린다. 그러나 7연부터는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받아 줄 것으로만 알았던 산이 '신경질'을 낸다. 이 때 사람들은 비로소 '산'의 소중함과 존재이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고는 9연에서 다시 '고산'과 '명산'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이 시는 이처럼 산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위대한 인간의 풍모는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시적 성찰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자연의 모습
이 시는 긍정적인 자연관을 가지고 삶과 사람과 자연의 일체감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종래 청록파들의 시와는 달리 자연의 서경을 노래하거나 자연 친화만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산이 주는 넉넉함과 자애로운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면서 산의 장엄함과 포용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서 산의 모습은 참모습의 인간과 이런 인간들이 어울려 이루는 참된 인간적 삶의 또다른 모습이다.
이 시에서 산은 인간과 유리딘 찬양과 외경의 대상만이 아니라 늘 인간 가까이서 인간과 함께 지내려는 친한 친구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산은 모든 것을 품안에서 키우며 따뜻하게 감싸준다. 억지로 구속하고 간섭하는 일은 없다. 그저 묵묵히 웃으며 기다릴 뿐이다. 그렇지만 산은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은근한 자연의 섭리로 인간을 깨치려 한다. 때로는 신경질도 부리고 엄한 스승의 모습을 보이면서, 나무를 기르는 인내와 벼랑을 오르는 겸허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의 스승으로서의 산의 모습, 다시 말하면 산의 자세로서 인간의 모습을 바라는 시인의 의지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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