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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이중계약, 팔레스타인, 유대인, 중동 문제 뿌리

Jobs9 2024. 8. 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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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제국주의 열강(영국)의 서아시아 분할

 

1915년 : 후세인-맥마흔 서한
1916년 : 사이크스-피코 밀약
1917년 : 밸푸어 선언
1920년 : 세브르 조약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년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대신이 발표한 외교 선언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약속한 이 선언은 근현대 중동의 역사를 뒤흔든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들에게도 시민으로의 권리가 부여됨에 따라,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유럽 시민 사회에 동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1890년대 프랑스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 사건 당시 유럽 사회가 여실히 보여준 반유대주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아무리 동화되고자 해도 언제든지 유대인 박해가 부활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신되었다. 빈 출신의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 역시 그중 한 사람으로 1896년 그는 <유대 국가>(Der Judenstaat)라는 저서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를 재건할 것을 역설한다. 그의 주장은 이듬해인 1897년 시온주의자 세계대회(ZO)의 수립으로 점차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어 나간다.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힘을 발휘해 1903년 헤르츨은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대신 우간다에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은 어떻느냐'라는 제안을 받고 헤르츨 본인도 비교적 긍정적으로 검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 헤르츨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뒤를 이어 ZO의 수장이 된 인물은 저명한 화학자이기도 했던 하임 바이츠만. 하임 바이츠만은 '오로지 조상들이 살았던 팔레스타인만이 우리들의 터전이 될 수 있다.'라며 영국의 제안을 거절한다. 나중에 바이츠만의 회고에 따르면 바이츠만은 밸푸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밸푸어 씨, 만약 내가 런던 대신 파리를 제안한다면 당신은 그걸 수용할 겁니까?(Mr. Balfour, supposing I was to offer you Paris instead of London, would you take it?)" 

 

진행
이러한 와중이었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적성국이 되면서 바이츠만의 주장이 탄력을 받았고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은 열성 시온주의자였던 당시 영국 내무 장관 허버트 새뮤얼 경. 이어서 1916년 영국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한다'는 내용의 비밀 협정을 체결한다. 이 비밀 협정에 의거하여 팔레스타인 일대는 영국의 관할로 들어오는 것이 계획되면서 밸푸어 선언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당시 영국의 수상을 역임하고 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선언을 세계에 발표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망설였는데,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았다.
1. 1917년 당시에도 전선은 여전히 고착화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고 군사적으로 빠른 상황 반전이 있을 것인가?
2.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목숨줄이었던 수에즈 운하와 지척이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가 세워진다면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식민지 인도 제국에 대한 지배권 역시 흔들린다.

이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반박은 다음과 같았다.
1. 영국의 유대인 국가 수립 지지는 러시아, 독일, 미국 내에서 유대인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불러올 것이고, 이는 전쟁 수행에 무시할 수 없는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2. 어차피 지금 팔레스타인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으로 바뀐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에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총대를 매고 적극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면서 밸푸어 선언은 급진전을 타고, 마침내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의 명의로 당시 영국 내 유대인들의 대표자 격이었던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가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로스차일드 경에게 (Dear Lord Rothschild),

국왕 폐하의 정부를 대신하여, 시온주의자들의 염원이 담긴 다음 지지 선언문이 내각에 제출되고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신께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본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를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하략....)

 


바이츠만을 비롯한 시온주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선언문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주권이 명확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는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유대인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의 수 역시 급증한다.  

한편 동맹국들 역시 '질 수 없다'는 듯이 이 선언의 발표 직후 우리도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계 공동체의 건설을 허락하겠다는 공약을 독일계 유대인 단체들에게 제시한다. 

 

 

문제는 영국이 1915년 아랍인들과도 똑같은 내용의 약속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이중계약

맥마흔-후세인 각서라고도 불리는 이 약조를 통해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아랍 지역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워주는 것을 약속했고, 아랍인들은 이것을 믿고 1916년 반란을 일으킨다. 맥마흔-후세인 각서에 따르면 '전후 아랍인들의 국가에서 시리아 일대는 제외한다.'라고 적혀 있고 시리아의 범위를 두고 논란이 있어 영국측도 할말이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후술된데로 이거고 저거고 영국은 약속을 하나도 안 지켰으며, 시리아를 제외한 이유가 시리아는 프랑스 몫으로 할당되어 영국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발뺌했다.

이 약속을 한 이유는 영국의 입장에서 골칫거리인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아랍인들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결국 이 약속의 내용은 성공하여 오스만 제국이 1922년 멸망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영국은 아랍인들과의 약속도 지킬 마음이 없었다. 영국은 1916년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 어떻게 땅을 나눠먹을지에 대해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비밀리에 맺어 놓았던 것이다.삼중계약 이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즉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 정도를 공유하고 모든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직접 지배해 버리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시리아 일대'가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졌으며,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을 규탄하면서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단호히 표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일이 대차게 꼬여버리는데, 벨푸어 선언 20일 뒤인 11월 23일, 러시아 제국을 뒤엎은 볼셰비키들이 프라우다에 위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공개한 것이다. 20일 동안 그래도 영국이 괜찮은 놈이겠지라며 협상을 생각하던 아랍인들은 몇 술 더 뜬 삼중계약의 진실을 알고 경악했고, 일은 대차게 꼬여 버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영국은 이젠 아예 오스만 제국에게 협상국으로 전환한다면 팔레스타인을 오스만 제국에게 보전할 것임을 타전하기까지 한다.  

결국 밸푸어 선언과 맥마흔 서한은 종전 후 서서히 흐지부지되어 갔으며, 전간기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감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간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벌어진 홀로코스트는 국제사회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수립을 승인하게 만들었고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70년이 넘는 지금까지 중동에는 피가 마르지 않게 된다. 또한 이 문제의 가장 큰 원흉이자 중요 당사국이던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미국과 구 소련에 밀려 초강대국 대열에서 몰락하면서 은근슬쩍 그들의 뒤에 숨어 책임을 외면하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벨푸어 선언을 통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일으킨 원흉이 영국이라고 비난하면 영국인들은 '그 당시에 서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아프리카나 중동 등 비서구권 지역 국가들 중 유럽의 식민지 독립 이후에 내전, 전쟁 등 분쟁이 일어난 나라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수두룩했거든?.'이라며 적반하장 수준으로 격하게 반발하며 그저 비서양권 세계 타 지역에서 일어난 유럽 제국주의 식민유산 그 이상 이하도 아닌것처럼 여기며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있으며, 어쩌다 영국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려 해도 역효과가 나거나 미국이나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다른 타 열강들의 견제에 부딪혀 흐지부지 되는 일이 많아 잘 개입하질 않는다.  

 

그로부터 99년 만에 팔레스타인이 벨푸어 선언의 당사국 영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2017년 벨푸어 선언 100주년 앞두고 영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영국 정부는 사과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2017년에 전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단체, 정당들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벨푸어 선언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극우파들과 나치 독일이 배후중상설의 근거로 써먹는데 악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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