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 해설-제49회

Jobs 9 2021. 4. 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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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01 -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

정답> ②

'금속이 우리의 삶으로, (가) 시대로의 여행'이라는 제목하에 '우리 박물관에서는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한 (가) 시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비파형 동검, 거푸집, 민무늬 토기 등 당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을 준비하였으니 많은 관람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시대'는 청동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오답 해설>

① 주로 동굴이나 막집에서 거주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③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을 생산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④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⑤ 대표적인 도구로 주먹도끼, 찍개 등을 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Q  02 – 고조선

정답> ⑤

'위만이 망명하여 호복을 하고 동쪽의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위만은 서쪽 변경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가)의 번병(藩屛)*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하였고 준왕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삼고백 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조선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위만 조선이 성립한 것은 기원전 194년의 일이다.

* 번병(藩屛) : 변경의 울타리고조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금 8조를 두었다.

오답 해설>

① 국가 중대사를 정사암에서 논의한 나라는 백제이다. 정암사는 사비(지금의 부여) 근처의 호암사(虎巖寺)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②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한 나라는 신라이다. 신라의 제17대 내물 때(재위 356-402)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21대 소지 마립간 때(재위 479-500)까지 사용].

③ 여러 가(加)들이 다스리는 사출도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④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시행한 나라는 고구려이다(194, 고국천왕 16).

 

 

 Q  03 – 삼한

정답> ③

맨 왼쪽 말풍선에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던 나라에 대해 발표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제천 행사를 열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삼한'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삼한에는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오답 해설>

①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②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을 거느렸던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④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12배로 갚게 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와 고구려이다(1책 12법).

⑤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였던 나라는 초기국가, 동예이다.

 

 

 Q  04 – 충남 부여

정답> ②

'문화유산 답사 안내'라는 제목하에 '우리 지역의 역사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지 5년이 된 바 이를 기념하여 답사를 준비하였으니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답사 경로로 '출발 → 부소산성 → 관북리 유적 → 정림사지 → 나성 → 능산리 고분군 → 도착'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지역'은 충남 부여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부소산성과 나성은 사비 시대 성곽이며, 관북리 유적은 궁궐터이다. 백제 성왕이 재위 16년인 538년에 새롭게 수도를 정한 지역이 바로 사비, 즉 지금의 충남 부여이다. 이로써 웅진(공주) 시대가막을 내리고 사비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답 해설>

① 장용영의 외영이 설치된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1793, 정조17).

③ 배중손(?~1271)이 삼별초를 지휘하였던 근거지는 전남 진도이다.

④ 한성근 부대가 서양 세력에 맞서 항전한 장소는 경기도 김포의 문수산성이다(병인양요, 1866).

⑤ 남북한 경제 협력 사업으로 설치된 공단의 위치는 개성[개경]이다(개성 공단).

 

 

 Q  05 – 신라 법흥왕의 업적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 '금관국의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나도 들었다며, 우리 왕께서 그들을 예로써 대접하여 높은 벼슬을 주고, 그가 다스리던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한 것은 신라 법흥왕 19년인 532년의 일이다.

법흥왕은 재위 23년인 536년에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오답 해설>

① 관료전을 지급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7년인 687년의 일이고, 녹읍을 폐지한 것은 신문왕 9년인 689년의 일이다.

③ 지방에 22담로를 두어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무령왕 대(재위 501-523)의 일이다.

④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인재를 등용한 것은 (통일) 신라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⑤ 자장(590~658)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한 것은 신라 선덕 여왕 12년인 643년의 일이다.

 

 

 Q  06 – 통일 신라의 경제 상황

정답> ④

'서원경 부근 4개 촌락의 인구 수, 토지 종류와 면적, 소와 말의 수 등을 기록한 문서로,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문서의 내용을 통해 (가)이/가 촌락의 경제 상황 등을 세밀하게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라 촌락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서원경'은 지금의 충북 청주 지역이고 작성된 시기는 755년설(경덕왕 14), 816년설(헌덕왕 8), 876년설(헌강왕 6) 등 여러가지가 있다.

통일 신라에는 울산항, 당항성이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은병(활구)이 화폐로 제작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②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었던 국가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③ 목화, 담배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직전법이 실시된 것은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

 

 

 Q  07 – 연개소문의 정변

정답> ④

(가)에 '살수에 이르러 [수의] 군대가 반쯤 건너자 을지문덕이 군사를 보내 그 후군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둔위 장군 신세웅을 죽이니, [수의[ 군대가 걷잡을 수 없이 모두무너져 9군의 장수와 병졸이 도망쳐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612, 고구려 영양왕 23).

(나)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함께 평양을 포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英公)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668).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은 642년의 일이다(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내세움).

오답 해설>

① 안승이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에 책봉된 것은 674년의 일이다(신라 문무왕 14).

②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힌 것은 311년의 일이다(고구려 미천왕 12).

③ 광개토 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은 400년의 일이다(고구려 광개토 대왕 10).

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킨 것은 475년의 일이다(고구려 장수왕 63). 이때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백제의 한성 시대도 끝났다(문주왕에 의해 웅진 천도).

 

 

 Q  08 – 발해

정답> ②

'이것은 (가)의 중대성에서 일본의 태정관에 보낸 외교 문서의 사본이다. 문서에는 정당성의 좌윤 하복연 등 주요 사신단의 명단과 두 나라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사신을 파견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중대성'과 '정당성'라는 관제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시된 '(가)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일종의 국립 대학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오답 해설>

① 광군을 창설하여 외침에 대비한 국가는 고려이다(947, 고려정조 2).

③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를 마련한 국가는 신라이다.

④ 9주 5소경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춘 국가 역시 (통일) 신라이다(685, 신문왕 5).

⑤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룬 국가는 백제이다.

 

 

 Q  09 – 신라 진성 여왕 대의 사실

정답> ④

삼국사기 신라 본기 검색창이 나와 있으며, 재위 1년(887)에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재위 2년(888)에 '삼대목을 편찬하다', 재위 3년(889)에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재위 10년(896)에 '서남쪽에서 적고적이라고 불리는 도적이 일어나다'는 내용이, 재위 11년(897)에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러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신라의 제51대 왕인 진성 여왕(재위 887-897)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 태자 요: 신라 제52대 왕인 효공왕(재위 897-912)

고운 최치원(857~?)이 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건의한 것은 진성 여왕 8년인 894년의 일이다. 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수용되지 못하였다.

오답 해설>

① 왕의 장인인 김흠돌(?~681)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② 강조(?~1010)가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을 제거한 것은 고려 목종 12년인 1009년의 일이다(강조의 정변).

③ 거칠부(502~579)가 왕명을 받들어 국사를 편찬한 것은 신라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⑤ 복신과 도침 등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한 것은 661년의 일이다(백제 부흥 운동).

 

 

 Q  10 – 궁예

정답> ⑤

맨 왼쪽 말풍선에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송악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운 인물에 대해 말해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광평성 등 여러 정치 기구를 마련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맨 오른쪽 말풍선에는 '미륵불을 자칭하며 폭정을 일삼기도 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900년에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918)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연호를 무태로 고쳤다. 궁예는국호와 연호를 자주 바꾸었다.

오답 해설>

① 후당, 오월에 사신을 보낸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이다.

② (아들들에 의해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 유폐된 후 고려에 귀부한 인물 역시 견훤이다(935).

③ 지방관을 감찰하고자 외사정을 파견한 인물은 신라의 문무왕이다(673, 문무왕 13).

④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을 전개한 인물은 장보고(?~846)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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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11 – 고려 태조의 정책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신 의도는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투항한 김부의 공을 치하하고, 부호장 이하의 관직 등에 대한 일을 맡게 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상 인터뷰의 왕은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다. 여기서 '김부'는 신라의 제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흑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918, 고려태조 원년).

오답 해설>

② 양현고를 두어 장학 기금을 마련한 왕은 예종이다(1119, 예종14).

③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재정을 확충한 왕은 광종이다(956, 광종 7).

④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한 왕은 성종이다(983,성종 2).

⑤ 전시과 제도를 (처음) 마련하여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한 왕은경종이다(976, 경종 원년, 시정 전시과).

 

 

 Q  12 – 고려 시대의 문화유산

정답> ③

'우리 연구회에서는 고려 시대 문화유산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이 건조된 것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의 일이다(원각사는 현 서울 탑골 공원 자리에 세조 11년인1465년에 세워짐).

오답 해설>

① 논산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936, 태조 19). 또 철확(鐵鑊)은 대형 철제솥이다.

② (석가모니불을 모신)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지은 건물이다.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④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은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11세기경 제작 추정). 불두를 따라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한 형식이다.

⑤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Q  13 – 고려 시대의 경제 상황

정답> ⑤

위의 자료에 '화폐를 주조하는 법을 제정하여, 그것에 따라 주조한 전(錢) 15,000관을 재추와 문무 양반 및 군인에게 나누어 주어 화폐 사용의 시작점으로 삼고 이름을 해동통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해동통보가 발행된 것은 고려 숙종 7년인 1102년의 일이다.

아래의 자료에는 '주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술과 음식을 파는 점포를 열고 백성에게 교역을 허락하여 전(錢)의 이로움을 알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을 언급한 자료로, 고려 숙종이 화폐의 주조는 물론 유통에도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제7대 왕인 목종 대(재위 997-1009)로 추정된다(경시서 자체는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 대(재위 1046-1083)에 이르러 경시서의 직제가 확대되었다. 참고로 경시서는 조선 초에도 계속 존속되다가 세조 12년(1466)에 관제를 개혁할 때 평시서(平市署)로 개칭되었다.

오답 해설>

①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과 무역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동래 상인인 내상이 왜관 개시를 통해 대일 무역에 종사하였다.

③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都賈)가 활동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감자, 고구마 등의 (구황) 작물이 널리 재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Q  14 – 최충헌의 봉사 10조

정답> ④

(가)에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동계(東界)에서 군대를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전왕(前王)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이 장순석 등에게 거제(巨濟)로 가서 전왕을 받들어 계림에 모시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의종 복위 운동을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것은 고려 명종 3년인 1173년의 일이다.

(나)에는 '만적 등이 노비들을 불러 모아서 말하기를, 장군과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만적 등 10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임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축출하고 집권한 직후)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건의한 것은 1196년(명종 26)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신라 헌덕왕 14년인 822년의 일이다. 웅천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 지역이다.

② 최우가 인사 행정 담당 기구로 정방을 설치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③ 이자겸과 척준경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운 것은 고려 인종 4년인 1126년의 일이다(이자겸의 난).

⑤ 김부식이 서경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것은 고려 인종 13년인 1135년의 일이다(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Q  15 – 조선 태종의 업적

정답> ③

위의 자료에 '왕은 우리나라에 서적이 대단히 적어서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글자 자형을 떠서 활자를 만드는 대로 인출(印出)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주자소가 설치된 것은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의 일이다.

아래의 자료에는 '왕이 시경·서경··좌전의 고주본(古註本)을 자본(字本)으로 삼아 이직 등에게 십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계미자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계미자는 조선 태종 3년에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왕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재위 1400-1418)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은 재위 원년인 1401년에 문하부 낭사를 분리하여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오답 해설>

①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법령을 정비한 왕은 조선 성종이다(1476, 성종 7).

참고로 경국대전을 '반포'한 것은 성종 16년인1485년이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한 것은 세조 7년인 1461년이다.

② 청과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왕은 조선 숙종이다(1712, 숙종 38).

④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한 왕은 조선정조이다(1791, 정조 15).

⑤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왕은 조선세조이다(1467, 세조 13).

 

 

 Q  16 – 팔만대장경 간행

정답> ⑤

'이곳 죽주산성은 송문주 장군이 (가)의 침입을 격퇴한 장소이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빌미로 (가)이/가 쳐들어오자,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과 이곳에서 거듭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225년(고려 고종 12)에 있었던 '사신저고여의 피살을 빌미로 고려에 쳐들어온 국가는 몽골이다. 몽골 침입 시 고려의 최씨 무신 정권[최우]은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1236~1251).

참고로 고종 23년인 1236년에 피난 도읍지인 강화에 대장도감 본사를 두고, 진주(晋州) 관내의 남해현에 분사를 두어 판각을 분담시켰다.

오답 해설>

① 화통도감을 두어 화포를 제작한 것은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1377, 고려 우왕 3).

②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국방을 강화한 것은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

③ 별무반을 편성한 것은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이고, 여진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축조한 것은 3년 뒤인 1107년(고려 예종 2)의 일이다.

④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은 조선 선조 26년인1593년의 일이다(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Q  17 – 고려 공민왕

정답> ①

'왕이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고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기철 등이 군주의 위세를 방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뒤흔들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자신의 기분에 따라 관리를 마음대로 임명하여 정령(政令)이 원칙 없이 바뀌었고,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차지하고, 노비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다. 이제 다행히도 조종(祖宗)의 영령에 기대어 기철 등을 처단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기철'이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시된 '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1351-1374)임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재위 5년인 1356년에 원의 연호[지정]를 폐지하고, 구관제를 복구하였다(중서문하성과 상서성 복구).

오답 해설>

② 원의 요청으로 일본 원정에 참여한 고려의 왕으로는 원종과 충렬왕이 있다[제1차 원정 → 1274년(원종 15)/제2차 원정 →1281년(충렬왕 7)].

③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을 제정한 고려의 왕은 공양왕이다(1391, 공양왕 3).

④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고 왕권을 회복한 고려의 왕은 우왕이다(1388, 우왕 14).

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고려의 왕은 광종이다(958, 광종 9).

 

 

 Q  18 – 사헌부

정답> ⑤

'이것은 악장가사에 실린 상대별곡(霜臺別曲)으로 '상대'는 관리를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은 (가)을/를 의미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의 대사헌을 역임한 권근은 이 가사에서 관원들이 일을 끝내고 연회를 즐기는 장면 등을 흥미롭게 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시대 3사 중 하나인 사헌부임을 알 수 있다. 사헌부의 별칭으로는 상대 외에도 헌부·백부(柏府)·오대(烏臺) 등이 있었다. 사헌부는 5품 이하의 관리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은대(銀臺)라고도 불린 조선의 기구는 왕명의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인 승정원이다.

② 집현전의 학문 연구 기능을 계승한 조선의 기구는 홍문관이다(1478, 성종 9). 홍문관의 등장으로 이른바 '언론 3사'가 성립하였다.

③ 서얼 출신 학자들이 검서관에 등용된 기구는 규장각이다(1776, 정조 즉위년).

④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국정 최고 기구로 성장한 기구는 비변사이다(1510, 중종 5). 비변사는 처음 3포 왜란 시 설치(임시 군무협의 기구)되었으며, 을묘왜변 시 상설 기구화(1555, 명종 10)되었다.

 

 

 Q  19 – 기묘사화

정답> ⑤

'이것은 능주 목사 민여로가 건립한 정암 선생 적려 유허비이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정암 선생은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등을 추진하다가 이 사건으로 능주에 유배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사건'은 조선 중종 14년인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임을 알 수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는 도학 정치를 펼치다가 사화로 희생되었다.

참고로 조광조가 귀양 간 '능주'는 전남 화순의 옛 지명이다.

기묘사화는 위훈 삭제에 대한 훈구 세력의 반발이 원인이었다.

오답 해설>

①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된 사화는 무오사화이다(1498,연산군 4).

②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는 경신환국(1680, 숙종 6)과 갑술환국(1694, 숙종 20)을 들 수 있다.

③ 윤임 일파가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을사사화이다(1545, 명종 원년).

④ 상왕의 복위를 목적으로 성삼문 등이 일으킨 사건은 단종 복위 운동이다(1455, 세조 원년).

 

 

 Q  20 – 조선 성종 시기의 사실

정답> ③

'동국여지승람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알려 줄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노사신, 양성지 등이 팔도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이왕 때 완성한 지리지'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각 지역의 지도와 지리, 풍속 등을 총 50권에 수록하였고, 이후 증보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편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것은 조선 성종 12년인 1481년의 일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것은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의 일이다.

음악 이론 등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이 간행된 것은 성종 24년인 1493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전통 한의학을 정리한 동의보감이 (허준에 의해) 완성된 것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의 일이다.

②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된 것은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④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태종 2년인 1402년의 일이다.

⑤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이 제작된 것은 세종 26년인 1444년의 일이다.

 

 

 Q  21 – 임진왜란 때의 수군의 활약

정답> ①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이라는 제목하에 맨 왼쪽의 말풍선에 ' 옥포에서 26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옥포 해전이 있었던 것은 1592년(선조 25) 5월 7일의 일이다(옥포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

가운데 말풍선에는 '견내량에 머물던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술을 펼쳐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진주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도 대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한산도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1592년 7월 8일의 일이다.

맨 오른쪽 말풍선에는 '10여 척의 배로 명랑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랑 대첩을 가리키는 것으로 1597년(선조 30) 9월 16일의 일이다. 명랑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위치하는 해협이다(세칭 울돌목).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Q  22 – 조선 후기의 경제 모습

정답> ②

'사행(使行)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는 만상과 송상 등이 은과 인삼을 몰래 가지고 인부나 말 속에 섞여들어 물건을 팔아 이익을 꾀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되돌아올 때는 수레를 일부러 천천히 가게 하고 사신을 먼저 책문으로 나가게 하여 거리낄 것이 없게 한 뒤에 저희 마음대로 매매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을 책문 후시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 대청 무역 중 하나인 책문 후시(사무역인 후시 무역중 한 곳)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공무역(관무역)은 개시무역].

벽란도에서 송의 상인이 교역한 것은 고려 전기의 일이다(벽란도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

오답 해설>

① 전기수가 장시에서 책을 읽어주었던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중인이 시사(詩社)에서 시를 낭송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공인이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덕대가 물주의 자금으로 광산을 경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Q  23 – 대동법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 '이 법은 공납의 폐단을 해결할 목적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다면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이 법을 확대 시행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그렇다면 충청도에 먼저 시행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법'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처음 시행된 대동법임을 알 수 있다. 대동법은 이후 인조 원년인 1623년에 강원도, 효종 2년인 1651년에 충청도, 효종 9년인 1658년에 전라도, 숙종 3년인 1677년에 경상도, 숙종 34년인 1708년에 황해도에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전국에 걸쳐 시행되기까지 100년여가 걸린 셈이다. 대동법에서는 특산물 대신 쌀, 베,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였다(1결당 쌀 12두).

오답 해설>

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한 것은 호포법이다(1871, 고종 8).

② 1결당 쌀 4~6두로 납부액을 고정한 것은 영정법이다(1635, 인조 13).

③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눈 것은 공법의 전분6등법이다(1444, 세종 26)

④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징수한 것은 균역법이다(1750,영조 26).

 

 

 Q  24 –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정답> ⑤

위의 자료에 '이항 등이, 지금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은 간사한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하다며 송시열은 방자하게도 상소를 올려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멀리 유배 보내소서라고 상소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장희빈(희빈 장씨)의 아들[후일 경종]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노론과 소론)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1689, 숙종 15)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당시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

* 원자(元子) :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

이어 아래의 자료에는 '임금이, 기사년 송시열의 상소는 한때의 실수였을 뿐 그가 어찌 다른 뜻을 가졌겠는가, 이제 그동안 잘못된 일이 다 해결되었으니 특별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하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기사환국 때 송시열이 사사(賜死)된 후 4년 후에 일어난 갑술환국(1694)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도 지낼수 있게 된 일을 가라킨다(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오답 해설>

①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된 것은 두 차례이다. 현종 즉위년인 1659년에 1차 예송(기해예송)이, 현종 15년인 1674년에 2차 예송(갑인예송)이 일어났다.

②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해 기축옥사가 발생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

④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해 (성균관 앞 반수교 옆에) 탕평비가 건립된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Q  25 – 나선 정벌

정답> ②

'이것은 (가)의 결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 대군이 쓴 한글편지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편지에는 척화론을 내세우다 끌려와 함께 있던 김상헌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병자호란을 가리킴을 알 수있다(1636, 인조 14).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가 동원된 것은 두 차례로 조선 효종 5년인 1654년(변급), 효종 9년인 1658년(신류)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국경 지역에 4군 6진이 개척된 것은 조선 세종 대의 일이다(1433/1434).

③ 강홍립 부대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한 것은 조선 광해군 11년인 1619년 3월의 일이다.

* 사르후 전투 : 조·명 연합군이 후금[청]의 군대가 만주의 사르후에서 맞서 싸운 전투로 조·명 연합군이 대패하였다. 이후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④ 정봉수와 이립이 용골산성에서 항전한 것은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1627, 인조 5).

⑤ (일본과) 제한된 무역을 허용한 기유약조가 체결된 것은 광해군 원년인 1609년의 일이다.

 

 

 Q  26 – 다산 정약용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 '수원 화성 건설을 위해 설계한 거중기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공사에 참여한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기기도설에 실린 도르래의 원리를 활용하였다. 전하께서는 거중기의 사용으로 4만 냥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상 인터뷰의 주인공은 다산 정약용(1762~1836)임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홍역에 대한 의학 지식을 정리하였다(1798, 정조 22).

오답 해설>

① 북학의에서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한 인물은 초정 박제가(1750~1805)이다(1778, 정조 2).

②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1766, 영조 42).

③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을 주장한 인물은 농암 유수원(1694~1755)이다(1729~1737 집필 추정).

⑤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한 인물은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1852, 철종 3).

 

 

 Q  27 – 청화 백자

정답> ④

'국보 제258호인 이 자기는 회회청 또는 토청 등의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러한 종류의 자기는 조선 전기부터 생산되었고,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점과 '조선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다'는 부분을 통해 제시된 '(가)'는 청화 백자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7세기 이후 널리 생산되고 보급됨).

④ 청화 백자 죽문 각병이다(백자 청화죽문 각병).

오답 해설>

① 분청사기 조화어문 편병이다(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②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이다. 고려 시대 청동 정병의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고려) 자기가 아니라 은입사 기술이 적용된 금속 공예품이다.

* 정병(淨甁) : 본래 깨끗한 물을 담는 수병[물병]으로 승려의 필수품인 18물(物)의 하나이던 것이 차츰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供養具)로서 그 용도의 폭이 넓어졌다.

③ 상감 청자 운학문 매병이다. 12세기 중엽 개발되기 시작한 고려의 독창적인 상감 기법이 적용된 대표적인 상감 청자이다.

⑤ 청자 참외형 병이다(청자 참외 모양 병). 상감 청자가 개발되기 직전의 고려청자이다(순수 청자).

 

 

 Q  28 – 홍경래의 난

정답> ①

'이것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 등에 반발하여 일어난 (가) 을/를 진압하기 위해 관군이 정주성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그린 그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후 관군은 땅굴을 파고성벽을 폭파하는 전술로 봉기군을 진압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리고 '정주성공격도'가 나와 있는 바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사건'은 조선 순조 11년인 1811년 평안도에서 발생한 홍경래의 난임을 알 수 있다. 홍경래의 난은 홍경래(1771~1812), 우군칙(1776~1812) 등이 주도하였다.

오답 해설>

② 흥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임오군란이다(1882, 고종 19).

③ 정부가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는 계기가 된 사건 역시 임오군란이다(동학 농민 운동 때도 출병 요청, 갑신정변 때는 출병이 아니라 주둔해 있던 청군이 진압).

④ 사건 수습을 위해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된 사건은 진주[임술] 농민 봉기이다(1862, 철종 13).

⑤ (동학 농민군이) 폐정 개혁안 실천을 위해 집강소 설치를 요구한 사건은 동학 농민 운동 때이다(1894, 고종 31). 참고로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 사이에 집강소 설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1884년 7월 6일이다.

 

 

 Q  29 – 신미양요

정답> ③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서양 오랑캐가 광성진을 침범하였을 때 진무 중군 어재연의 생사는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방수령이 대신할 진무 중군을 임명해 달라고 이미 청한 것을 보면 절개를 지켜 싸우다 전사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광성진을 침범한 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진무 중군 어재연(1823~1871)에 대한 내용이므로 곧 신미양요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1871.5). 제시된 연표에서는 (다) 시기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Q  30 – 도원 김홍집

정답> ①

'○○○ 연보'라는 제목하에 '1842년에 출생'하였으며, '1880년에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다'는 점이 나와 있다. 이어 '1884년에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1894년에 총리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한' 점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1896년에 사망'한 점이 나와 있는 바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도원 김홍집(1842~1896)임을 알 수 있다. 김홍집은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귀국하면서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국내에 들여와 고종에게 바쳤다(1880.9).

오답 해설>

② 초대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미국에 파견된 인물은 죽천 박정양(1841~1904)이다(1888.1).

③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 인물은 임병찬(1851~1916)이다(1912.9).

④ 영국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인물은 양기탁(1871~1938)이다(1904.7).

⑤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한 인물은 구당 유길준(1856~1914)이다(1889년 탈고, 1895년 출간).

 

 

 Q  31 – 갑신정변

정답> ①

'이것은 개화당이 (가) 당시 발표한 개혁 정강의 일부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개화당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강을 내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시된 정강에는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를 페지할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 의정소에서 회의하고 왕에게 보고한 후 정령을 반포해서 시행할 것'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임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이 개화당의 '3일 천하'로 끝난 후 조선 정부와 일본은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1885.1).

오답 해설>

②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된 것은 고종 18년인 1881년 4월의 일이다.

③ 부산 외 두 곳의 항구가 개항된 것은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조약) 때문이다(제5관). 원산이 1880년에, 인천이 1883년에 개항하였다.

④ 김윤식(1835~1922)이 청에 영선사로 파견된 것은 1881년 9월의 일이다(~1882.11).

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년 12월의 일이다.

 

 

 Q  32 – 근대 역사의 현장(서울)

정답> ⑤

'근현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주제가 나와 있고, 경로로 '구 러시아 공사관 → 손탁 호텔 터 → 중명전 → 석조전 → 환구단 터'가 제시되어 있다. 고종 34년인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 터에서 고종의 대한 제국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오답 해설>

①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이 습격한 곳은 일본 공사관이었다(1882.6). 참고로 구 러시아 공사관은 1896년 2월 고종이 피신한 곳이다(아관 파천).

②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된 곳은 손탁 호텔이 아니라 덕수궁 석조전이다(1946.3).

③ 은세계, 치악산 등의 신극이 공연된 곳은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이었던 원각사이다(1908.7).

④ 일본 낭인들이 명성 황후(1851~1895)를 시해한 곳은 경복궁 건천궁의 곤녕합이다(1895.10). 참고로 덕수궁 중명전은 1905년11월 을사늑약이 강요된 곳이다.

 

 

 Q  33 – ‘녹두장군’ 전봉준

정답> ②

'선고서'라는 제목하에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임하여 학정을 행하니 (가)은/는 그 무리를 이끌고 고부 관아의 창고를 털어 곡식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무장에서 일어나 장성에 이르러 관군을 격파하고, 밤낮없이 행군하여 전주성에 들어가니 전라 감사는 이미 도망하였다. ······ 위에 기록한 사실은 피고와 공모자 손화중 등이 자백한 공초, 압수한 증거에 근거한 것이니 이에 피고 (가)을/를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부 농민 봉기(1894.1)와 제1차, 제2차 동학 농민 봉기(동학 농민 운동)를주도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은 제2차 봉기 후 1894년 11월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맞서 싸웠다(우금치 전투).

오답 해설>

① 단발령 시행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의암 유인석(1842~1915), 습재 이소응(1852~1930) 등 을미의병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 복수보형(復讐保形) 등의 명분을 내세웠다.

③ 동학의 2대 교주로 교조 신원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해월 최시형(1827~1898)이다

④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인물은 이재명(1886~1910)이다(1909.12).

⑤ 13도 창의군을 지휘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인물은 군사장 왕산 허위(1854~1908)이다(1908.1).

 

 

 Q  34 – 을미개혁(‘건양’ 연호)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 '며칠 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력으로 일본이 청에 라오둥 반도를 반환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묻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들었다며 우리도 이 기회에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대화는 러시아의 삼국 간섭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95.4).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오답 해설>

①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한 것은 1882년 8월의 일이다.

③ 행정 기구를 6조에서 8아문으로 개편한 것은 제1차 갑오개혁때의 일이다(1894.7~12).

④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근대적 개혁을 추진한 것 역시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⑤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은 1885년 4월의 일이다(~1887.2, 이른바 '거문도 사건').

 

 

 Q  35 – 독립 협회

정답> ④

'해산 명령을 철회하고 탄압을 중지하라!'는 제목하에 '정부가 우리 협회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보부상까지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오늘 오후 종로에 모여 해산 명령 철회와 탄압 중지를 요구합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협회'는 독립 협회임을 알 수 있다. '보부상까지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한다는 말은 정부의 보수세력에 의해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황국 협회(1898.6)가 의도적으로 독립 협회의 만민 공동회를 방해한 일을 가리킨다.

독립 협회는 1898년 10월 개최된 관민 공동회에서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헌의 6조 채택).

오답 해설>

①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설립한 단체는 신민회이다[각1908.9(평양)/1907.12(평북 정주)].

②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대한 자강회이다(1907).

③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는 보안회이다(1904).

⑤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국채보상 기성회이다(1907).

 

 

 Q  36 – 경부선 완공(근대 문물)

정답> ②

'이것은 한성 전기 회사가 공급하는 전기를 사용하여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를 운행하던 전차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전차가 개통된 이후에 도입된 근대 문물에 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가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의 일이다. 경부선이 완공된 것은 러·일 전쟁 중이던 1904년 12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박문국이 세워진 것은 1883년(고종 20) 10월의 일이다.

③ 기기창이 설치된 것은 1883년 3월의 일이다.

④ 한성주보가 발행된 것은 1886년 1월의 일이다(~1888.7).

⑤ 육영 공원이 설립된 것은 1886년 9월의 일이다. 헐버트, 길모어 등의 외국인[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였으며, 문벌 가문의 인재를 선발(좌원과 우원 두 반으로 편성)하여 영어[서양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Q  37 – 광무개혁

정답> ⑤

맨 왼쪽 말풍선에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추진된 개혁에 대해 말해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상공업 진흥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상공 학교를 세웠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맨 오른쪽 말풍선에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개혁'은 대한 제국수립 이후 추진된 광무개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897~1904).

황제 직속의 원수부를 설치한 것은 고종 36년인 1899년 6월의 일이다. 전제 황권 강화를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오답 해설>

① 과거제를 폐지한 것은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1894).

② 홍범 14조가 반포된 것은 1895년 1월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제2차 갑오개혁이 본격화되었다. ③ 공사 노비법을 혁파한 것도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④ 전국 8도를 23부(331군으)로 개편한 것은 제2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1895). 참고로 23부제는 이듬해인 1896년 2월 아관 파천 이후 친러파 내각이 수립되면서 폐기되고 13도제(한성부와 13도로 구분)로 개편되었다.

 

 

 Q  38 – 보재 이상설

정답> ①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가)의 유허비를 관리하기 위해 현지 교민들이 나섰다. 이 비에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가)이/가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이끈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보재 이상설(1870~1917)임을 알 수 있다. 이상설은 1914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종의 망명 정부인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대한 광복군 정도령(正都領), 부도령은 성재 이동휘(1873~1935)].

오답 해설>

②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인물은 안중근(1879~1910)이다(1909.10).

③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한 인물은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1919.11).

④ 숭무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인물은 이근영(?~?)이다(1910.11).

⑤ 일본의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를 저술한 인물은 백암 박은식(1859~1925)이다(1915.6).

 

 

 Q  39 – 원산 학사

정답> ③

'(함경도) 덕원부의 관민이 힘을 합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로, 외국어 교육 등을 실시한 이 교육 기관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나와 있다. 답은 1883년 8월에 세워진 원산 학사이다.

오답 해설>

① 동문학은 1883년 8월에 세워진 관립 외국어 교육 기관이다(일종의 통역사 양성소, 통변 학교).

② 명동 학교는 1908년 4월에 간도(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된 학교이다.

나운규(1902~1937)와 윤동주(1917~1945)가 이 학교 출신이다.

④ 서전서숙은 1906년 8월경 북간도(용정)에 세워진 학교이다(이상설).

⑤ 배재 학당은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중등 과정의 사립 학교이다.

 

 

 Q  40 – 6•10 만세 운동

정답> ③

'이것은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가) 당시 장례 행렬에 모인 사람들에게 뿌려진 격문의 일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시된 격문에는 '대한 독립운동가여 단결하라!,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일본 물자를 배척하자!,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보통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가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1926년 6월 10일 서울에 일어난 6·10 만세 운동임을 알 수 있다. 6·10 만세 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준비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진영의 거사 준비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고, 민족주의 진영 중 일부인 학생 운동 세력이 거사에 성공하여 이후 학생 운동이 대중적 차원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답 해설>

①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민족 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이다(1907.2).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항을 준 민족 운동은 3·1 운동이다(1919.3).

④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실시하는 배경이 된 민족 운동 역시 3·1 운동이다.

⑤ 신간회 중앙 본부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한 민족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1929.11).

 

 

 Q  41 – (서)간도의 민족 운동

정답> ②

'허은 지사, 독립 유공자로 서훈'이라는 제목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孫婦) 허은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허 지사는 (가)의 삼원보에서 결성된 서로 군정서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녀는 기본적인 생계 활동과 공식적인 행사 준비 외에도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군복을 제작·배급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삼원보'는 신민회 인사들이 간도(서간도)에 세운 독립군 기지이다(1911). 신흥 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지역 역시 서간도이다(1911.6). 신흥 강습소는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1919.5). 참고로 석주 이상룡(1858~1932)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지사(1907~1997)의 회고록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오답 해설>

① 해조신문을 발간하여 국권 회복에 힘쓴 지역은 연해주이다(1908.2).

③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여 외교 활동을 펼친 지역은 미국이다(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1910.2).

④ 대조선 국민 군단을 창설하여 군사 훈련을 한 지역 역시 미국이다(미국 하와이, 박용만, 1914.6).

⑤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지역은 일본이다(일본 도쿄, 1919.2).

 

 

 Q  42 – 조선 농민 총동맹 결성

정답> ④

'최근 개통된 천사대교를 건너면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소작 쟁의가 전개된 암태도를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 당시 암태도의 농민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지주 문재철에 맞서 목포까지 나가 단식을 벌이는 등 약 1년에 걸친 투쟁으로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말은 1923년 8월에 발생한 암태도 소작 쟁의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924.8).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된 것은 1927년 9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허가제) 회사령이 제정된 것은 1910년 12월의 일이다.

② 농광 회사가 설립된 것은 1904년 7월의 일이다(~8월까지 존속).

③ 토지 조사 사업이 실시된 것은 1910년에서 1918년까지의 일이다. 1912년 8월에 토지 조사령이 공포되었다.

⑤ 함경도에서 방곡령이 선포된 것은 고종 26년인 1889년 10월의 일이다(함경도 관찰사 조병식).

참고로 동년 5월에 황해도에서 방곡령이 선포되었고(황해도 관찰사 조병철), 이듬해인 1890년 2월에도 같은 황해도에서 다른 관찰사에 의해 방곡령이 선포되었다(황해도 관찰사 오준영).

 

 

 Q  43 – 일제 강점기 말의 모습

정답> ①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라는 제목하에 "1991년 8월 14일은 고(故)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날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정부는 이날을 로 제정하여 2018년부터 매년국가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김학순 할머니는 일제가 국가 총동원법을 적용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던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 '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임을 알 수 있다(여자 정신 근로령이 1944년 8월에 공포).헌병 경찰이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집행한 것은 1910년대, 무단통치기의 일이다.

참고로 조선 태형령은 1912년 4월부터 시행되어 1920년 3월까지 존속하였다.

오답 해설>

② 신사 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한 것은 1938년 이후부터의 일이다.

③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한 것은 1937년 이후부터의 일이다.

④ (친일파 인사들이) 학도병 출전 권고 연설을 1943년 이후부터의 일이다.

⑤ 놋그릇, 수저가 공출된 것은 1942년 이후부터의 일이다(금속공출).

 

 

 Q  44 – 대동단결 선언(문)

정답> ①

'이 선언문은 상하이에서 신규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 선언으로 주권 재민 사상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융희 황제가 삼보(三寶)*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날이니 ······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떄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즉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이 제시되어 있다.

* 삼보(三寶) : 토지, 인민, 정치

대동단결 선언(문)이 발표된 것은 1917년 7월의 일이다. 대동단결 선언문은 2015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652호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연표에서는 (가) 시기에 해당한다.

 

 

 Q  45 – 지청천(한국 독립군)

정답> ③

'한국 광복군 창설의 주역 ○○○ 장군'이라는 제목하에 생몰연도가 '1888년~1957년'이고, 주요 활동으로 '정의부 총사령관 역임, 한국 독립당 창당에 참여,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역임'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지청천임을 알 수 있다(제시된 사진을 통해서도 바로 알 수 있음).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당 소속의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1930년대 전반).

오답 해설>

① (조선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의열단원 나석주(1892~1926)이다(1926.12).

②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처단한 인물은 박상진(1884~1921)이다(1915.7).

④ 대한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인물은 홍범도(1868~1943)이다(1920.6).

⑤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는 조선 혁명 선언을 집필한 인물은 단재 신채호(1880~1936)이다(1923.1).

 

 

 Q  46 – 조선 건국 동맹

정답> ①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자천자임(自薦自任)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라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 회합이라든가 조선 인민 공화국이라든지 조선인민 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혀 없는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미군정 장관 육군 소장 아놀드가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바 제시된 글은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군정 장관의 기자 회견 발표문이다.

참고로 미군이 진주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에 군정을 선포한 것은 1945년 9월 9일의 일이다.

이때 '남한' 진주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군정 장관에 아놀드소장을 임명하였다.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동맹이 결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8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좌우 합작 위원회에 의해)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된 것은1946년 10월 7일의 일이다.

③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된 것은 1947년 11월 14일의 일이다.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등 8개국 대표로 위원단이 구성되었고, 1948년 1월 7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우크라이나도 지명되었으나 참여를 거부하였다.

④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1948년 10월 23일의 일이다(위원 10명 선출, 임기 2년).

⑤ 귀속 재산 처리를 위해 신한 공사가 설립된 것은 1946년 3월3일의 일이다(~1948.3.22.).

 

 

 Q  47 – 브라운 각서와 3선 개헌

정답> ②

(가)에는 '국군 장교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권을 장악하고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는 최고 통치 기구인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출범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출범한 것은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18일의 일이다(제3공화국이 출범하는 1963년 12월 17일까지 존속).

(나)에는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통일 정책을 최종 결정하고 대통령 선거권 등을 행사하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가 발족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발족한 것은 1972년 12월 5일의 일이다(제7차 개헌, 이른바 '유신 헌법'상에 규정, 제8차 개헌이 이루어진 1980년 10월 27일까지 존속).

ㄱ.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1969년 9월 14일의 일이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14일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있던 야당(신민회) 의원들을 피하여국회 제3별관에서 여당계 의원 122명이 모여 기명 투표 방식으로 투표하여 찬성 122표, 반대 0표로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그 후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 투표에서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으며, 10월 21일에공포 및 시행되었다

ㄴ.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 불황이 심화된 것은 1978년 10월의 일이다(제1차 석유 파동은 1974년 1월).

ㄷ. 베트남 파병에 관한 브라운 각서가 체결된 것은 1966년 3월7일의 일이다.

ㄹ,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 8월 12일의 일이다.

이상에서, 1961년 5월과 1972년 12월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ㄱ과 ㄷ'이다.

 

 

 Q  48 – 제8차 개헌 시기의 사실

정답> ④

제39조 ①에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거한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②에는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자는 정당의 추천 또는 법률이 정하는 수의 대통령 선거인의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③에는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재적 대통령 선거인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 당선자로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45조에는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중임할 수 없는 7년 단임을 규정한 것으로 이를 통해 제시된 헌법은 1980년 10월에 공포된 제8차 개헌임을 알 수 있다('대통령선거인단'이란 용어도 키워드).

제8차 개헌은 1987년 10월 공포된 제9차 개헌 때까지 시행되었으므로 사실상 전두환 정부와 함께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로 야구가 6개 구단으로 출범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2년 3월 27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긴급 조치 9호가 발동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5년 5월 13일의 일이다.

② 국민 교육 헌장이 공포된 것 역시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8년 12월의 일이다.

③ 지방 자치제가 전면 시행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5년6월의 일이다. ⑤ 한미 자유 무역 협정(FTA)이 체결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6월의 일이다.

 

 

49 – 6월 민주 항쟁

정답> ③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 대회'가 열렸다는 제목하에 '경찰이 사상 최대 규모인 5만 8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국 집회장을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서울을 비롯한 전국 20여 개 도시에서 국민 대회가 열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국민 합의를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고 발표하면서 민주 헌법 쟁취를 통한 민주 정부 수립 의지를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임을 알 수 있다. 6월 민주 항쟁 결과 여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 선언'이 발표되었으며, 이를 통해 동년 10월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제9차 개헌).

오답 해설>

①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1980년 5월 31일의 일이다(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직후).

② 신군부가 (1979년 10월 26일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선포되었던, 즉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건' 때문에 선포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은 1980년 5월 17일의 일이다(이른바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④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된 것은 1960년 4월 27일의 일이다(4·19 혁명 직후, 동년 6월 15일까지 존속).

⑤ 조봉암이 혁신 세력을 규합하여 진보당을 창당한 것은 1956년 11월 10일의 일이다.

 

 

 Q  50 – 김대중 정부의 통일 노력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외환 위기 극복에 힘을 보탰습니다. 정부는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말씀해 달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정부는 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 조정, 노사정 위원회 설치 등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지원금을 예정보다 3년이나 빨리 상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정부'는 김영삼 정부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1997년 12월 3일, IMF 구제 금융 신청)를 조기 수습(2001년 8월 23일, IMF 구제 금융 조기 졸업)한 김대중 정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98.2~2002.2).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 11월부터 금강산 (해로)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금강산 육로 관광 사업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오답 해설>

②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9월의 일이다.

③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2년 8월의 일이다(예비회담이 아니라 본회담).

④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이 채택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1991년 12월의 일이다.

⑤ 남북 간 이산가족 상봉이 처음 실현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5년 9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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