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

이순신 해전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Jobs 9 2021. 4. 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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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출동

 

   01. 옥포해전 (1592.05.07)

   02. 합포해전 (1592.05.07)

   03. 적진포해전 (1592.05.08)

 

2차 출동

 

   04. 사천포해전 (1592.05.29)

   05. 당포해전 (1592.06.02)

   06. 1차 당항포, 진해해전 (1592.06.05) 

   07. 율포해전 (1592.06.07)

 

3차 출동

 

   08. 한산도대첩 (1592.07.08.)

   09. 안골포해전 (1592.07.10)

 

4차 출동

 

   10. 장림포해전 (1592.08.29)   

   11. 화준구미해전 (1592.09.01) 

   12. 다대포해전 (1592.09.01)      

   13. 서평포해전 (1592.09.01)

   14. 절영도해전(송도) (1592.09.01)

   15. 초량목해전 (1592.09.01)

   16. 부산포해전 (1592.09.01.)

 

5차 출동

 

17. 웅포 1차해전 (1593.02.10~20)

   웅포 2차해전 (1593.02.22~03.06)

 

6차 출동

 

18. 2차 당항포해전 (1594.03.04~05)

 

7차 출동

 

19. 장문포, 영등포해전 (1594.09.29~10.04)

 

8차 출동

 

20. 어란진 전투 (1597.08.27)

    벽파진 전투 (1597.09.07)

    명량대첩 (1597.09.16)

 

9차 출동

 

21. 절이도해전 (1598.07.19)

 

10차 출동

 

22. 예교, 장도해전 (1598.9.20~22. 10.2~4)

 

11차 출동

 

23. 노량해전 (1598.11.19)

 

 

1. 壬辰年(임진년)

 

1차 출동

 

이순신의 등장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부산포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 1번대 18,700명은 다음날 새벽에 곧바로 부산진성을 포위 공격함으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왜군들로 인해 다급해진 경상감사 김수는 4월 20일 이순신에게‘왜군들이 내륙으로 북상하고 있으니 경상도로 출동하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조정으로부터의 명령이 없어 이순신은 답답했다.

4월 27일 새벽 4시경. 드디어 조정으로부터 기다렸던 출전명령이 떨어졌고 4월 30일 이순신은 24척의 판옥선과 15척의 협선 46척의 포작선으로 함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함게 출전을 하기로 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를 기다리기 위해 출전을 연기하였다.

이억기를 기다리던 이순신은 작전회의 중 녹도만호 정운의 건의를 받아들여 5월 4일 새벽 2시에 출전하기로 확정했다.

5월 4일 새벽 2시 이순신은 여수를 빠져나가 원균과 만나기로 한 당포에 도착했다.

 

그러나 원균은 왜군과 싸우기도 전에 자기 휘하의 전선 대부분을 자침시키고 곤양땅 사천으로 갔다. 그러다가 이순신과 약속한 날짜를 하루 넘겨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순신은 이들을 자기 함대에 편입시켰다.

 

1. 옥포 해전

 

당포에서 원균과 만난 이순신은 송미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5월 7일 새벽 4시 출동한 이순신은 당일 오후 12시 옥포만 일대에서 왜군을 발견한다.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 여러 장수들에게 “경거망동하게 움직이지 말고 산과 같이 정중하라.”고 다짐을 시킨 후에 옥포만으로 진입했다. 과연 옥포만에는 30여척의 왜선들이 정박에 있었으며 왜군들은 주위의 마을을 분탕질하고 있었다. 이들의 병력은 약 4천 500명 가량이었다. 이순신은 질서정연한 대오를 유지하며 옥포만으로 밀고 들어갔다. 왜군들은 이를 보고 신속히 포구를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학익진으로 이들을 포위한 조선수군은 왜군 선단의 100미터 전방까지 밀고 들어가서 정지했고, 이어서 왜선들을 향해 포격과 불화살을 가했다. 이러한 집중포격에 왜군들은 혼비백산하며 패주했다. 이것이 조선수군의 첫 승리이자 조선군의 첫 승리인 옥포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26척의 왜선을 불태웠고 약 4천명의 왜군들을 사살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단 한 명의 부상자만이 발생했다. 패전이 끝나자 이순신은 영등포 앞바다로 회항했다.

 

2. 합포 해전

3. 적진포 해전

 

옥포에서 북으로 약 40여킬로미터 떨어진 거제도 북단 영등포 앞바다로 불러가 쉬고 있던 이순신 함대는 멀지 않은 바다에 왜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즉각 추격전에 돌입했고, 이를 본 왜선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약 15킬로미터 정도 도망친 왜선들은 합포 앞바다에서 배를 포기하고 육지로 도망쳤다. 이순신은 산 속으로 도망 친 왜적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그들이 버린 배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 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은 창원땅 남포 앞바다로 물러가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다음 날인 5월 8일 이른 새벽 또다시 척후장으로부터 진해 땅 고리량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순신은 주도면밀하게 수색을 하면서 이동했다. 수색이 끝날 즈음 고리량 서남방 6킬로미터 위치하고 있는 적진포에 왜선 13척이 정박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옥포해전에서 마찬가지로 이 왜선의 왜군들은 주변 마을을 분탕질하고 있었다. 이순신함대가 접근하자 이들은 산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조선 수군은 정박해 있는 왜선을 집중 공격하여 모두 격침했다. 이 해전을 끝으로 이순신은 여수 본영으로 귀영하였고, 여수에서 이순신은 선조가 관서지방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해 했다.

 

2차 출동

 

4. 사천 해전

 

1차 출동에서 귀영한 이순신은 한달 동안 전력을 재정비 한 후 6월 4일 2차 출동하기로 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6월 4일까지 여수 앞 바다로 합세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 공문을 보내왔다. 거기에는 사천 곤양에 왜선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이순신은 일정을 앞당겨 29일 출동하기로 하였다.

 

23척의 판옥선으로 출동한 이순신은 5월 29일 노량에서 원균과 만났다. 이때 그 근처로 왜선 한 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선봉 함대로 하여금 이들을 추적 격파하게 했다. 그 후에 이순신 함대가 사천만 입구에 당도하니 사천 선창에 왜군들이 왜성을 쌓고 있었다. 이 왜성은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해 쌓고 있던 것으로 이순신에 의해 왜군 함대의 서방 진출이 좌절되자 그것을 타계하기 위한 거점으로 건설 중이었다. 왜군들은 이 거점을 발판으로 서해안으로 진격해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이때 사천 선창에는 왜선 12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돌격해 들어가 활을 써려 했지만 사거리가 미치지 않았고 화공 또한 썰물로 인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왜군들을 바깥 바다로 유인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순신함대가 뱃머리를 돌리고 약 400미터를 물러가니 왜군들이 선창으로 내려와 조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북선의 위용에 놀라며 바다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조수가 바뀌어 바닷물이 사천포 방향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선함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천포로 진격하여 왜선을 불태웠다.

이 해전의 결과 왜선 12척을 격파하고 수군 약 2천명을 사살하였다. 조선군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약 3명이 부상하였다.

 

5. 당포 해전

 

사천해전 후 사량 앞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순신은 왜선이 당포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는다. 6월 2일 아침 이순신은 당포로 출동하였다. 이순신함대가 접근을 하여도 왜선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거북선이 왜장 기함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거북선과 다른 군선들에 의해 왜장의 기함은 순식간에 부숴졌다. 장수를 상실한 왜장들은 그대로 지리멸렬했고 조선수군은 모두 21척의 왜선을 불태우고 약 3000명의 왜군을 사살하였다. 그때 척후선이 달려와서 이 곳 당포를 향해 왜선 20여척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이를 추격했으나 날이 어두워져 단념했다.

 

6. 당항포 해전

 

창신도에서 하룻밤을 새운 이순신함대는 이른 새벽 다시 출동했으나 전날 추격했던 왜선단을 잡지는 못했다. 6월 4일 당포 앞바다를 수색하던 중 왜적들이 거제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거제로 막 이동하려는 중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판옥선 25척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이억기의 함대와 원균의 함대를 모두 지휘하게 되었다. 거제로 향한 이순신 함대는 거기서 왜선이 당항포로 향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뱃머리를 돌린다. 왜선 4척을 발견산 이순신은 녹도만호 정운에게 그 함대를 공격하게 하여 4척 모두를 격침시킨다.

 

소소강과 당항포에 대해 조사를 마친 이순신은 소소강 안으로 함대를 들여보냈다. 얼마 안가 왜선들이 발견되었고,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은 거북선에게 돌진명령을 내렸고 이어서 교대로 함대들을 왜선단에 접근시켜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소소강이 좁아서 포위를 할 수 없었기에 이순신은 모든 전선들에게 거짓 후퇴라고 명령했다. 이를 본 왜선들은 조선 수군을 쫓아서 넓은 바다로 나왔다. 이순신은 모든 함대에게 왜선단을 포위하라고 명령하고 왜군의 기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거북선에 의해 왜군의 기함이 격파되자 왜군은 다시 지리멸렬했다. 이순신은 왜선 한 척을 남겨두고 모든 배를 침몰시켰다. 다음 날 새벽 그 남겨둔 한 척의 배로 왜군들이 탈출하려고 하자 매복하고 있던 조선 함대가 이를 습격하여 격침시켰다.

 

7. 율포 해전

 

당항포 해전 이후 이순신 연합 함대는 소소강 입구에서 동쪽으로 11킬로미터 떨어진 정을우장(고성군 동해면 우두포)으로 이동하여 밤을 새웠다.

정오쯤 되어 이순신은 함대를 영등포 앞바다로 이동시켰다. 마침 왜선단 일곱 척이 율포에서 부산 방면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역풍을 무릅쓰고 이순신함대는 왜선에 접근하여 세 척을 나포하고 나머지는 불 태웠다. 이때 약 천명의 왜군이 목숨을 잃었다. 이순신은 이 해전의 결과를 기록한 장계에서 아주 만족하게 적어두고 있다. 여러 전선의 조선 수군들은 마음이 상쾌해졌다고.

 

이리하여 이순신의 제2차 출동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가덕도와 몰운대를 수색했으나 왜군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출동의 결과 이순신은 남해일대의 제해권을 완전히 제압했다. 때마침 전라 병마사로부터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연합함대를 해체하고 각기 본영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 전투를 통해 조선수군은 10명 내외의 전사자와 부상 50여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왜군은 72척의 선박을 포함 1만여명의 병력을 손실했다.

 

3차 출동

 

8. 한산도 해전

 

당초 왜 수군은 북상하는 육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기로 하였으나 이 이순신에 의해 왜 수군의 서해안 진출이 좌절되어 전쟁 수행전략에 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즉 해로가 막히면서 육군에 대한 전쟁물자 보급이 원활히 수행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타계하기 위하여 히데요시는 육군에게 전라도로 진격하게 하는 한편 대규모 수군선단을 조직 이순신을 격파하기로 한다. 왜 수군의 움직임이 이상함을 간파한 이순신은 더욱 더 전력을 강화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때 경상도의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이 수십척이 출몰했다는 급보를 듣는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7월 6일 출동하기로 하고 이억기 함대에게 7월 4일까지 여수에서 합세하도록 요청했다. 7월 6일 이순신 연합함대는 노량으로 출동했다. 이때 동원된 함대는 대략 56척으로 평가된다. 7일에는 이순신 함대가 당포에 도착하여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견내량은 매우 특이한 자연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어서 누가 이를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 승리를 좌우하게 한다. 이곳은 통영반도와 거제도가 형성하는 좁은 바닷길이며 남북의 길이가 약 3킬로미터 너비가 최대 폭이 될 때 약 400미터가 된다. 그러나 썰물이 되면 그 물의 폭은 200미터가 되고 그나마 양쪽 가장자리는 앝아서 큰 배는 다닐 수가 없다. 물이 흐르는 속도 즉 유속은 밀물과 썰물 그 중간 때에 가장 빠르며 약 시속 8킬로미터에 이른다. 이 정도에 빠르기에서 노를 젓는 배는 배를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며 억지로 배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면 전복되어 버리기  쉽상이다. 그러나 밀물과 썰물이 절정에 달할때에 유속이 가장 느리다. 이러한 견내량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이순신은 견내량 북단 입구에 있는 왜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포위 격멸하기로 한다.   

 

6월 18일 새벽. 드디어 이순신은 연합 함대를 이끌고 왜군이 정박하고 있다는 견내량으로 향했다. 견내량에 도착한 이순신은 판옥선 5-6척을 미끼로 투입했다. 그러자 왜선들은 일제히 닻을 올리고 돌진해 나왔다. 그들은 이 미끼를 선봉함대로 오인하고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각개 격파를 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미끼를 열심히 추격하여 견내량 수로를 빠져 나왔다. 당시 견내량은 밀물 때였기 때문에 왜선들이 통과하기에 좋았다. 왜선들은 복병이 있음직 했던 견내량을 무사히 통과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조선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왜선함대의 대형은 길다란 종대가 되었고, 순간 이순신은 학익진을 펴서 적을 포위 공격했다. 당황한 왜군들은 도망하려 했지만 포위망이 더욱 좁혀지면서 집중포화를 받았다. 결국 왜선 총 73척중 포위망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14척의 배를 제외하고 나머지 59척은 나포되거나 격침되었다. 왜군의 병력손실은 약 9000명 가량이었다. 그에 반해 조선 수군은 약간의 부상자와 전사자만이 발생했을 뿐 한척의 배도 손상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 해전을 한산도 대첩이라 부르며,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손꼽는다. 

 

9. 안골포 해전

 

한산도 해전을 끝낸 조선 수군은 피로로 인해 그날 밤을 그대로 견내량에서 보냈다. 이튿날인 7월 9일. 이순신은 또다시 왜선들을 찾아 나섰다. 막 출발하려는데 척후선이 달려와 안골포에 왜선 약 40여척이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다음 날인 7월 10일 새벽 이순신 함대는 외줄포를 출발하여 안골포로 향했다. 이때 이순신은 처음부터 학익진 대형으로 전진하였다. 이순신은 이들을 한산도 해전 때처럼 밖으로 유인하여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은 한산도 해전에서 다른 왜선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교대로 최대한 가까이 접근 화포를 발사하게 했다. 조선 수군은 특히 왜군의 3층 누각 대선과 2층 누각 대선을 집중 공격하여 많은 왜군을 살상했다. 왜군들은 이 누각대선들의 병력을 보충하여 맞섰으나 너무 많은 피해를 입자 패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육지로 패주한 이들을 추격하지 않아다. 이 해전의 결과 이순신 함대는 42척의 왜선을 격파하여 4000명의 왜군을 사살하였다.

 

이 3차 출동을 통하여 왜 수군은 사실상 전멸되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모두 19명이 사망했고, 118명이 부상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와 부상자는 모두 총탄에 의한 것으로 이는 이순신이 접근전을 피하고 포격전을 주로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4차 출동

 

부산포 해전

 

10. 장림포 : 1592.08.29 (6척 격파) 
11. 화준구미 : 1592.09.01 (5척 격파) 
12. 다대포 : 1592.09.01 (5척 격파) 
13. 서평포 : 1592.09.01 (8척 격파) 
14. 절영도 : 1592.09.01 (9척 격파) 
15. 초량목 : 1592.09.01 (4척 격파) 
16. 부산포 : 1592.09.01 (100척 격파) - 이상 4차 출전 

 

부산포 해전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공격 목표를 부산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에 돌렸다. 부산포에는 약 500척의 왜선과 67,000명의 왜군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들을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격파하고자 하였다. 8월 24일 이순신과 이억기의 연합함대는 당포로 출발한다. 여기에서 원균을 만나고 그날 밤을 보낸다. 8월 29일 새벽 이순신 연합함대는 천성보를 떠나 김해 양산강 강구의 남쪽 외항에 도달하였다. 여기에서 신중한 척후활동을 통해 왜선 6척을 발견 가볍게 격침시킨다. 9월 1일 새벽 이순신은 장항포를 떠나 거센 역풍에 시달리며 몰운대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왜선단의 전초함대와 수차례 충돌하게 된다. 이순신 연합함대가 몰운대 앞 바다로부터 2.6킬로미터 떨어진 화준구말에 당도했을 때 왜선 5척을 발견하고 격침시켰고, 얼마 후에 왜선 6척이 다시 등장하여 격침시켰다.

이러한 소규모의 교전을 거치면서 이순신 함대는 부산포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 거치는 초량목이라는 좁은 수로를 통과할 때 왜선 4척이 함대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 왜선들을 이순신 함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 왜선들이 손쉽게 격파되는 것을 본 부산포의 왜군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이순신 함대에 대항했다. 이에 이순신 함대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여 각종 화포로 왜선들을 공격하였으나 왜군들은 조총만을 쏴댈 뿐이었다.

결국 왜선 약 100여척이 격침되고 많은 수의 왜군이 살상되었다. 4시간에 걸친 부산포 해전이 끝나자 가덕도 북서단에 있는 장항포로 조선함대는 물러갔다. 다음 날인 9월 2일. 이순신은 연합함대를 해체하고 여수로 개선했다. 이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불과 31명의 사상자만을 내었다.

 

임진년 한 해 동안 이순신은 4번 출전하여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했으며 207척의 왜선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키고 152척을 재취항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시켰다. 도합 392선의 왜선을 손실시킨 것이다. 그리고 왜군의 병력 손실만도 약 3만 4천명에 이르게 했다. 반면 이순신의 함대는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해 약 240명의 인명피해만을 입었다. 이로써 남해안의 제해권은 조선 수군이 완전히 제압하게 되었다.

 

2. 鷄舍年(계사년)

 

1593년에 들어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하자 전세는 왜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평양을 상실한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부산을 퇴각한다. 이때에 왜군은 부산을 고수하여 그들의 퇴각로를 유지하려했다. 이순신은 지난해에 이어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하여 2월 6일 첫 출전을 한다. 4차 출동이후 병선을 대량 건조하여 이 당시 전력은 경상우수사와 전라우수사를 합하여 약 89척에 달했다.

 

5차 출동

 

17. 웅포 해전

 

부산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순신은 그 길목에 있는 웅포를 공격 부산을 공격할 때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웅포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왜군의 병참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의 연합함대가 웅포에 접근하자 왜선들은 웅포에 깊이 틀어박혀서 나오려 하지 않았으며 썰물 때 바닥이 드러나는 지점에 약 400미터의 폭으로 나무말뚝을 길게 박아놓고 아예 이순신의 배가 그 안으로 못 들어오게 했다. 또한 높은 산에 조총 사격진지를 구축하여 조선의 전선이 접근하면 집중 사격을 해댔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포구 남쪽에 있는 송도에 연합함대를 잠복시키고 거북선과 경쾌한 전선만을 투입하여 교대로 포구안에 있는 왜군과 왜선을 격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선들은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 한 차례 젊은 왜장 한 명이 세 척의 전선을 이끌고 나왔다가 무참히 깨졌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하여 이순신은 수륙 합동 작전을 시도하게 된다. 즉 왜군이 진을 치고 있는 산 뒤에서도 공격하고 앞에서는 연합함대가 공격하는 식이다. 2월 22일. 이순신은 약 600명의 의병들을 웅포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제포에 상륙시켜 왜군의 뒤를 치게 했다. 그리고 삼도수군등에서 특별히 활을 잘 쏘는 병사 약 1100명을 선발하여 웅포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남양리에 상륙시켜 이들 역시 웅포를 공격하게 했다. 이후에 이 순신은 15척의 공격함대를 편성하여 왜선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육지로 들어간 수군들은 이런 전투방식이 서툴러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지에서 공격하는 군사수가 왜군의 10분의 1 수준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좋은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2월 22일 좁은 웅포 포구안 깊숙히 들어간 조선 전선 두 척이 왜선을 공격하고 나오다 서로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자 왜군들은 조총으로 집중 사격을 했고 이를 피하고 위해 한 쪽으로 수군들이 몰리다가 충돌한 두 군선 다 전복하고 말았다. 이순신으로써는 처음 당하는 군선 손실이었다. 이순신은 이에 대해 장계를 통해 자신의 통분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포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많은 왜군을 사살했다. 3월 10일에 이르러 웅포를 감시하는 복병선을 배치시킨 후 이순신은 사량으로 이동했다. 조명 연합군이 올 때 까지 일단 가디린다는 작전 방침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 해전의 결과 왜선 20척을 대파하고 병사 2500명을 살상하였다.

 

17. 1차 웅천(웅포) : 1593.02.01 (20척 격파, 2척 손실) - 5차 출전 

 

웅천 1차 : 1593.02.10 (대치) 
웅천 2차 : 1593.02.12 (대치) 
웅천 3차 : 1593.02.18 (10여 척 격파) 
웅천 4차 : 1593.02.22 (수 척 격파, 2척 손실) 
웅천 5차 : 1593.03.06 - 이상 5차 출전 

 

5차 출전인 웅천 해전을 5개의 독립된 전투로 나누는 것은 일본측 시각(일본참모본부 편찬 '日本戰史')인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1개 해전으로 통괄하고 세부적으로 1차부터 5차까지 교전으로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같은 권역에서 동일한 아군과 적군이 연속적으로 교전하면 1개 해전으로 간주).


18. 2차 웅천(웅포) : 1593.05.02 (대치) - 6차 출전 

 

견내량 해전

 

웅포 해전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못 얻은 이순신은 4월 20일 서울이 조명 연합군에 의해 수복되자 이에 힘을 얻고 다시 출전하기로 한다. 5월 7일 이순신은 연합함대 104척을 이끌고 웅포를 향해 진격했다. 5월 10일 이순신은 견내량에 연합함대를 정박시켜 놓고 적정을 탐색했다. 그 결과 웅포일대에 지난 번보다 200여척이나 많은 왜선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이순신은 장계를 조정에 보내어 수륙협공이 필요하니 육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명과 왜간의 비밀 합의로 명군은 서울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견내량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6월 16일이 되자 무려 800여척의 왜선이 부산, 김해 등지로부터 웅포, 제포, 안골푸등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순신은 견내량만을 고수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적포로 연합함대를 이동시켰다.

이후로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7차례의 소규모 접전이 이루어졌다. 왜군들은 이순신의 연합함대를 견내량 북쪽 진해 앞바다로 유인하여 압도적인 수로 사방팔방으로 포위 섬멸할 작전을 세웠지만 이순신은 그러한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견내량을 고수함으로써 전라도를 수륙양면으로 침공하려는 왜군의 전략을 봉쇄하였다.

 

3. 甲午年(갑오년)

 

6차 출동

 

18. 2차 당항포 ․ 진해 해전

 

이순신은 1593년 10월 1일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었으며 한산도의 두억리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견내량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해를 넘겨 이듬해 1594년 갑오년. 삼도수군은 모두 134척의 전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순신에 의해 견내량에서 발이 묶인 왜군은 할 수없이 거제도의 영등포와 장문포에 성채를 구축하고 영구주둔에 들어갔다. 통영반도에 있는 삼봉산 초소로부터 왜성 발견 보고가 들어오자 3월 3일 이순신의 삼도 수군은 출동한다. 모두 31척의 왜선이 당항포, 오리량, 저도를 향해 분산하여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4일 새벽 이순신은 전선 21척으로 특수임무 함대를 편성하여 당항포와 오리량에 있는 왜성을 공격하고 나머지 함대는 자기 자신이 직접 지휘, 거대한 학익진을 취한 다음 진해만 일대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것은 왜선의 증원세력이 당항포 일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특수 임무 함대는 모두 8척의 왜선을 격파했다. 왜군들이 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자 이순신은 당항포에 있는 왜선 21척에 대해서도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썰물 때문에 봉쇄만을 하고 본격적인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밀물이 시작되자 특수임무 함대는 당항포로 진입 왜선들을 모두 격파하였다.

 

7차 출동

 

19. 장문포-영등포 해전

 

갑오년 9월 29일. 원균의 친족이었던 좌의정 윤두순은 장문포에 대한 공격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권율 휘하의 940여 병력을 동원 수륙합동으로 장문포를 공격하게 했다. 이 전투에 134척의 전선과 134척의 협선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장문포에는 왜선 117척에 1600명이상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문포 입구에는 뗏목을 설치하여 이순신의 삼도 수군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굳건히 막고 있었고 그 뗏목을 방어하기 위해 장문포 입구 양언덕에 강력한 조총진지를 구축하여 놓았다. 거기에 더불어 진지 뒤 고지에 왜성을 구축해 놓고 조선의 천자, 지자 총통을 구해다 설치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한 것이었다. 왜군은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넘어가지 않고 넓은 바다로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원균과 이억기의 함대를 뺀 나머지 함대로 영등포에 있는 영등포에 있는 왜군을 치러 10월 1일 떠났다. 이때 조선은 군선 한 척이 갯바닥에 걸려 왜군의 화공을 받았다. 이순신은 그 군선의 책임자를 처벌했다.

 

10월 4일 이순신은 의병장 곽재우와 김덕령에게 왜군의 뒤를 치도록 하고 이순신은 장문포로 선봉선을 보내 왜군의 심지를 돋우었다. 늦으막한 시간에 드디어 수륙양군이 하나가 되어 왜군을 공격했는데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10월 7일이 되자 곽재우와 김덕령들 육지의 대장들이 물러갔고, 다음 날에는 이순신이 일대 함대 시위를 한 후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 해전은 애초부터 현실 가능성이 희박한 해전이었다. 왜군의 강력한 방어진지에 대한 별 소득없는 작전이었지만 원균과 결탁한 윤두수에 의해 실행되었다.

 

20. 1차 장문포 : 1594.09.29 (2척 격파) 
21. 영등포 : 1594.10.01 (대치) 
22. 2차 장문포 : 1594.10.04 (대치) - 이상 8차 출전 

 

4. 丁酉年(정유년)

 

칠천량 해전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물러나자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596년 9월 명나라와 왜국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기 위하여 군사를 동원 다음 해 정유년(1597) 1월부터 조선 재침략에 들어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부산에 침입한 왜군들을 소탕하라고 원균에게 여러 번 지시했지만 원균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의 곤장을 치게했다. 어쩔 수없이 원균은 7월 5일 삼도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 7월 7일 원균의 삼도 수군이 절영도에 도착했는데 이때 이미 왜군들은 절영도 바깥 바다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수가 무려 1천여 척이었다. 왜군들은 조선 수군을 향해 싸움을 할 듯 하다가 뒤로 빠지는 작전을 계속하여 조선 수군의 힘을 소진시켰다. 그러는 중에 밤이 깊어지자 심한 바람이 불어서 삼도 수군은 바다에서 갈팡질팡했다. 이를 수습한 원균은 가덕도에 정박했으나 왜군들이 습격하여 장병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균은 다시 도망하여 모든 함선을 거제의 칠천량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권율은 원균의 곤장을 치고 다시 부산으로 진격해 들어가라고 독전했다. 그러나 원균은 삼도 수군을 위험 앞에 방치한 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7월 16일 새벽 왜선들에 의하여 조선 함대는 3․4겹으로 포위를 당했다. 이에 원균은 삼도수군을 버리고 달아났다. 남아있던 삼도수군 함선들은 왜성과 싸우면서 춘원포까지 후퇴했으나 상륙하자마자 왜군들에 의해 모조리 섬멸당했다. 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102척의 함선을 잃고 약 1만명의 군사 병력을 상실하는 재기 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원균 또한 전사했다.

 

23. 안골포 : 1597.06.19 (2척 격파) : 원균 지휘 - 9차 출전 
24. 다대포 : 1597.07.07 (8척 격파) : 원균 지휘 
25. 절영도 : 1597.07.07 (20척 손실) : 원균 지휘 
26. 외줄포 : 1597.07.15 (4척 손실) : 원균 지휘 
27. 춘원포 : 1597.07.16 (98척 손실, 12척 탈출) : 원균 지휘 - 이상 10차 출전 (칠천량 해전) 

 

8차 출동

 

20. 명량 해전

 

20. 어란진 전투 (1597.08.27)

    벽파진 전투 (1597.09.07)

    명량대첩 (1597.09.16)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인하여 조선 수군이 위기에 처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에 복직시켰다. 이순신은 남은 전선을 수습하였지만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출동하기 전 전선 한 척을 수리하여 13척의 함선으로 명량 해전을 맞게 된다.

이순신은 결전의 장소로써 울돌목을 이미 확정해 두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진도군수로 발령이 나서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곳의 지형을 자세히 조사해 두었던 것이다. 울돌목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해협이며 가장 좁은 목은 약330미터이며 깊이는 약 1.9미터에 불과하고 암초가 많다. 썰물 때에는 조수가 서쪽에서 흐르고 밀물 때에는 그 반대로 흐르는 급류지대로써 워낙 조수의 흐름이 빨라서 마치 우는 소리를 내서 명량, 즉 울돌목이라 불리고 있었다.

 

명량해전이 시작되기 15일전 이순신은 자신의 함대를 명량해협에서 약 4.7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벽파진에 머물게 하여 왜군의 관심을 그곳으로 돌렸다. 9월 15일 밤 9시경 이순신 함대는 벽파진에서 위치를 옮겨 전라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하였다. 드디어 9월 16일 왜선 200여척이 명량을 거쳐 지금 우리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는 첩보를 받았다. 이순신은 즉각 닻을 올리고 이에 맞서기 위해 울돌목으로 향했다. 이때는 오전이었기 때문에 물 흐름이 이순신이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였다.

 

이순신은 울돌목에 도착하여 함대로 하여금 해협을 완전히 막게 하고 역류에 밀려가지 않도록 닻을 내렸다. 과연 왜선은 울돌목을 목표로 하여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들은 공격방향으로 순류를 타고 있었다. 200여 척의 왜선 중에서 133척의 정예 공격함대만 명량해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를 다시 4개로 나누어서 30척씩 그룹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이를 본 이순신은 모든 함대에게 왜선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겁을 먹은 다른 전선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홀로 자신의 전선을 왜선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이렇게 되자 이순신은 위기에 빠졌다. 이에 이순신은 초요기를 매달게 하고 자신 휘하의 전선들에게 빨리 달려오도록 호령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 조류는 남동류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는 왜선이 역류를 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왜장이 조선 수군에게 사살되었다. 이에 기세를 올린 조선 수군은 이 사실을 적에게 알리며 총공격을 개시했다. 역류에 밀린 왜군은 별다른 저항을 해보지 못하고 조선군의 공세에 밀려났다. 결국 31척의 왜선이 불탔고 약 90척이 치명적으로 대파되었다.

 

5. 戊戌年(무술년)

 

9차 출동

 

21. 절이도 해전

 

명량 해전을 성공리에 마친 이순신은 수군 전력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전선 85척과 협선 85척, 수군 요원 17000명의 규모로써 수군을 재건했다. 얼마 후인 1598년 7월 18일 왜선 100여 척이 녹도를 침범했다. 이순신은 보고를 듣자마자 즉시 금당도로 출동했다. 이때 명나라 수군도 합세했다. 금당도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은 다음 날 새벽 왜선 백여척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즉시 닻을 올려 왜선이 출현한 방향으로 돌격했다. 절이도 북방 해역에서 왜선과 만난 이순신은 함포 사격과 궁시 사격으로 왜군을 격파했다. 50여척의 왜선이 격침되었고 도망간 50여척에서도 다수의 왜군이 사살되었다.

 

10차 출동

 

22. 예교 해전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조선의 침공함 왜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니시가 이끌던 부대는 조명 연합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 강력한 요새인 예교에 고립되어 있었다.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 수군은 안심하고 예교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제독 유정이 수륙합동으로 예교를 공격할 것을 이순신에게 제안했다. 이에 이순신과 진린은 연합하여 9월 15일 고금도를 출항했다.

 

예교에는 고니시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높은 성채를 구축해 두었고, 그 성을 중심으로 야산지대에 돌성을 구축하여 조선 육군이 육지로부터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포구에는 수많은 말뚝을 박아 두어 조선 전선의 진입을 방지하였다. 예교에 있던 왜군 병력은 15000명으로써 성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순신은 예교에 모두 6회에 걸쳐 공격을 했지만 밀물 때에만 공격이 가능했고 썰물이 되면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유정의 육군은 적극적이 감행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정의 비협조로 인해 여러 번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유정은 결국 10월 6일이 되자 그만 군사를 돌려 순천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 해전의 결과 이순신은 왜선 11척을 나포하고 30여 척을 불태웠다. 왜군의 병력 손실을 4000명에 달했다. 반면 조선 수군은 사상자만 360가량이었다. 그런데 명나라 수군은 5000명중에 거의 절반이 죽었다.

 

11차 출동

 

23. 노량(관음포) 해전

 

예교 해전이후 이순신은 고니시가 바다를 통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강력한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이 해상 봉쇄를 풀기위해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이순신을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린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해상 봉쇄를 단행했다. 왜군은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300여척의 군선과 6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11월 18일 밤. 수많은 왜선들이 노량으로 밀어닥쳤다. 이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즉시 츨전하여 이 선단을 격멸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의 함대는 관음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300여척과 대결했다. 조선 함대는 수많은 왜선을 맞아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사망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이 유언을 남기고 이순신은 쓰러졌고 왜선단은 결국 고니시 구원 계획을 포기했다. 결국 고니시 군은 육로로 탈출하여 부산으로 갔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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