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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 앉아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 논두렁이 절이라네

Jobs 9 2025. 6. 2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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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논두렁에 앉아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 논두렁이 절이라네"

 

 

서암홍근(西庵鴻根) 대종사. 1914년에 태어났으니, 내년이면 이 세상에 온지 100년이 된다. 열반 10년을 맞아 서암스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정토출판에서 펴낸 <그건 내 부처가 아니다>가 바로 그것.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것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화산(華山)스님의 경책에 난생 처음 부끄러움을 배우고 “제 인연은 스님에게 있습니다”라고 답한 후 행자 생활을 시작한 서암스님이다. 이때가 세상 나이 15세였다. 3년이나 행자로 지내고 김용사에서 낙순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뒤에 서암스님은 본격적으로 교학을 배울 수 있었다. 김천 김용사 강원을 거쳐 종비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어차피 인생은 ‘시한부’란 생각에 이르자, 스님은 ‘생사의 근본도리’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이후 참선수행에 집중했다. 

 

<그건 내 부처가 아니다>에는 서암스님을 찾아온 한 수행자와의 대화가 실려 있다. 10ㆍ27법난 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한국불교계에 ‘분노’한 수행자가 거침없이 비판을 쏟아냈다. 이때가 1981년이다. 두 시간 넘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서암스님이 말미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조용히 앉아,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요, 그곳이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불교라네.” 스님의 답변에 그 수행자는 큰 충격을 받고 삶과 불교운동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 수행자가 바로 법륜스님이다.

 

이같은 일화처럼 서암스님은 스스로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이 세상을 맑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청정국토청정(心淸淨國土淸淨)과 진속불이(眞俗不二)가 곧 서암스님의 가르침과 같다. 서암스님의 법문이다. “우리는 위대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자기 인생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백 년 안팎의 인생과 한낱 고깃덩이인 몸뚱이를 살찌우려고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모략중상을 하니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내 눈을 뜨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세계에서 살 때만이 삶이 흐뭇해지고 그제야 비로소 성현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서암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일평생 화두를 참구하는 납자의 길을 걷던 서암스님은 1970년 문경 봉암사 조실로 추대됐으나 정중하게 사양하고 선덕(禪德) 소임을 자처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원인 봉암사에 방부를 들인 수좌들이 용상방(龍象芳)에 ‘조실’이라고 소임을 붙이면, 서암스님은 이를 떼어내곤 했다. 이렇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종단은 스님을 요구했다. 하지만 1975년 제10대 총무원장이 되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는 2개월 만에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훌쩍 지난 뒤에 스님은 대중의 간청에 의해 원로회의 의장에 이어 종정으로 추대됐다.

 

서암스님에게 참선이란 목적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스님은 “생활을 하자는 게 참선이지, 생활을 여의고 나면 참선이고 불법(佛法)이고 어디에 써먹겠냐”고 설했다. 그러면 참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암스님의 가르침이다. “생각 비우기란 참으로 힘이 들며 일부러 비우고자 하면 잘되지 않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불을 켜듯, 이럴 때 화두를 하면 일체의 생각이 끊어집니다. 일체 이론이 끊어져 마치 수십 미터 절벽이 앞을 가로막은 것과 같이 되니 사량 분별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 종정에서 물러난 뒤 스님의 일상도 엿볼 수 있다. 봉화에 작은 토굴을 짓고 머물 때 손수 끼니를 해결했고, 시봉하겠다고 찾아온 제자들의 바랑을 문밖으로 집어던지며 “공부하려고 중 되었지, 남의 종 노릇 하려고 중 되었냐”고 호통 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수행자들에게 지침이 되는 서암스님의 선방 결제 해제 법문을 비롯해 증도가 법문도 실려 있다. 정토출판을 통해 책을 펴낸 법륜스님은 “이러한 법문은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 수행자의 공부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면서 “마음이 답답할 때 꺼내 읽으면 깨달음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빛이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일독을 권했다.

 

서암스님은 2003년 3월29일 봉암사 염화실에서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임종게 아닌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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