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금, 몽골 관계
남송, 금, 몽골 관계
남송, 금, 몽골 세 나라는 13세기에 복잡한 관계. 금나라는 북송을 멸망시키고 강남 지역을 차지한 후 남송과 대립. 이후 몽골 제국이 등장하여 금나라를 공격하고 멸망시켰으며, 결국 남송까지 정복.
금나라와 남송의 관계:
금나라는 12세기 초에 송나라를 공격하여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차지.
남송은 송나라의 황족이 강남 지역에서 재건한 나라로, 금나라와 대립.
두 나라는 군사적 충돌과 함께 때로는 화친을 맺기도 했다.
몽골의 등장:
13세기 초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이 등장하여 금나라를 공격.
몽골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송과도 전쟁을 벌였다.
몽골은 남송을 압박하며 점차 영토를 넓혀갔다.
남송과 몽골의 관계:
몽골은 남송에게 금나라 정벌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지만, 남송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남송은 몽골의 공격을 받아 수도 임안(현재 항저우)을 함락당하고 멸망했다.
몽골은 남송을 정복하면서 몽골 제국의 확장을 마무리했다.
몽골-금 전쟁
蒙金戰爭
Jin vs Mongol
기간
1211년~1234년
장소
금 전역
원인
금나라의 유목 민족 분열 정책
몽골-금 전쟁은 1211년부터 1234년까지 몽골 제국과 금나라가 싸운 공방전이다.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기병 전쟁이었으며, 더 큰 기병전(전투)은 있을지라도 이보다 더 많은 기병이 동원된 전쟁은 보기 드물다.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금나라는 이전부터 피지배 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과 몽골족 등 유목민족을 제어하는 정책을 쓰곤 했는데, 이와 더불어 유목민족을 차별하고 이간질시키며 주기적으로 몽골을 토벌해 남성들을 죽이는 정책을 써서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아예 밀어버릴 작정을 한 이유도 조상인 카마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이 금나라의 폭군인 해릉왕에게 끔살당한 원한 때문이었다.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내부를 안정시킨 후, 1211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 제국의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 명)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위에 나온 이유로 유목민족의 숙적이나 다름없었던 금나라를 공격했다.
1211년 가을, 몽골군은 금나라의 첫 번째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금군과 오사보 전투를 치렀다. 수적으로는 금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제베가 우회해서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 배치된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흩어져 있는 금군을 규합한 완안승유의 군대와 야호령 전투를 벌였는데 이번에도 무칼리의 별동군이 우회해서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여 승리를 거둔 후 패잔병을 수습한 금군과 회하보 전투에서 싸워서 또 승리를 거두었다. 금나라는 이 세 전투의 결과로 병력 35만여 명 정도를 상실했는데, 당시 금군의 최대 동원 병력이 90~100만명 정도가 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여기서 무려 1/3 이상을 한 큐에 날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금나라는 성채전에 의지해야 될 정도로 불리해졌다.
이후 회하보 인근을 초토화시킨 몽골군은 이제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 부근에 도착했다. 거용관은 알다시피 수도인 중도대흥부(현 베이징시)에서 불과 50~60km 정도 떨어진 말 그대로 최후의 관문이었기에 금나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최전방이었고, 이를 아는 금군은 거용관 근처의 100리에 마름쇠를 잔뜩 깔아놔서 몽골군이 침공하지 못하도록 막아놨다. 하지만 이후 몽골군이 샛길로 우회해서 거용관을 뚫었고, 마침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금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
이후 칭기즈 칸은 자신의 아들들인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를 시켜서 대동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시켰고, 인근의 목초지를 급습해서 군마를 모두 빼앗았다. 이로 인하여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금나라는 요동에도 목초지가 있었기에 만약 요동 일대의 거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기병을 어느 정도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금나라는 요동이나 화북 지역의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고, 여기에다가 거란족이 몽골과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들은 위소왕이 거란족의 부족장을 죽이고 일반 백성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 탄압정책을 시행했기에 요나라 황족의 후손인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동요를 세우는 바람에 실패했다. 물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서 포선만노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했지만, 당시 보병 위주인 금군은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의 부대에게 참패했다.
한편 휴식을 취한 몽골군은 1212년 다시 금나라를 두 갈래로 나눠서 침공했는데, 칭기즈 칸의 본부대는 대동을 포위하고, 이를 구원하러 온 금군을 격파했으며, 제베의 부대는 동경요양부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대동을 포위하는 도중에 칭기즈 칸이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었고, 다시 변경으로 후퇴했다. 이 실패 이후, 칭기즈 칸은 공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공병대를 창설하고 2년간 금나라의 공학기술자 500명을 납치한다.
이후 1213년 7월, 몽골군은 금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침공했는데, 이전에 한 번 뚫린 탓에 철벽 방어를 갖춘 거용관을 피해 다른 관문인 자형관을 뚫은 뒤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이후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공격해 다시 점령했다. 그리고 이후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를 포위했고, 이와 동시에 몽골군은 병력의 일부를 남긴 채로, 단 11개의 성을 제외한 모든 화북 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켰다.
한편 중도 포위가 1214년까지 계속되자 위소왕 이후에 즉위한 금선종은 막대한 세폐 및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했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며 철수했다.
급한 불을 끈 금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중도에서 방어가 용이한 남쪽의 남경개봉부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중도에는 황태자와 수비군 일부를 남겨 지키도록 했다(정우의 남천). 하지만 이에 자극을 받은 칭기즈 칸은 중도를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도록 했다.
1215년 무칼리는 20만 명 정도의 금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했으며, 이후에도 요하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전에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포선만노는 반란 세력이자 동요를 건국한 야율유가에게 2번이나 패퇴한 데다가 금나라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화북 지역과 만주 지역으로 영토가 나누어져 본국과 연락이 끊어져 그대로 독립해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며 대진을 세웠고, 이후 몽골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다시 동하를 세웠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이때 중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동요를 세운 야율유가는 몽골에게 정식으로 복속을 선언했지만, 자신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길 원했던 동생 야율시불을 위시한 일부 거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야율유가를 축출한 뒤 남쪽으로 내려가서 후요를 세웠으며 몽골을 등에 업은 야율유가가 압박을 가하자 고려를 침공했다.
무칼리의 침공: 1216년~1229년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에 호라즘 왕국을 침공했고, 이에 따라 몽골의 주력군은 서방 전역으로 차출되었다. 중국 방면에는 무칼리가 이끄는 소규모의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약 2만 명의 몽골인과 4만~7만 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칼리는 축소된 군대를 이끌고도 1217년~1218년에 산동 일대와 대정 일대를 점령했으며,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 및 고려와 연대해서 후요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1223년까지 남경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 지역을 정복했다.
한편 이때의 금나라는 30여 년간 휴전상태에 있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1217년부터 1224년 사이에 벌어진 대송전쟁은 별다른 소득이 없이 국력만 낭비했고, 오히려 남송의 금나라에 대한 적개심만 키웠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역으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었다. 또한 서하도 금나라를 공격했다. 이는 위소왕 시절 서하가 지원을 요청했으나 금이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1225년에는 무선이 그의 상관 사천예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다시 금나라로 돌아갔는데, 사천택이 장유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장유는 수하 장군을 보내 무선을 패배시켰다.
오고타이 칸의 침공: 1229년~1232년
1227년 칭기즈 칸이 붕어하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금나라에 화평 사절을 보냈으나, 금나라는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자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황하 북부의 대부분은 이미 몽골에게 넘어가 있었고,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시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남경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황하 연안, 특히 수도인 남경 근처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상대적으로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 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남경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금나라는 낙양에서 남경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당시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했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한 명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 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루트를 선택했는데, 이를 위해 몽골의 명장인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금나라의 장수였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월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8개월 동안 갇혀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금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하여 몽골군에 맞서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웠다.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20배에 달하는 8,000여 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했다. 이 대창원 전투의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에 벌어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였는데, 파르완 전투가 6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 소수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월등한 다수의 몽골군이 더 적은 수의 적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이 되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이었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의 정예부대로,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부, 강족, 위구르족, 그 외 기타 거란족, 여진족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 전력이 부족했던 말기의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다. 충효군은 비록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는데,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민간인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았다.
다음해인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그 전년도처럼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동쪽에서는 이와 조금 차이를 두고, 한인 출신 장군인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아직 남아있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衛州)를 공격했다. 위주는 금나라의 수도인 남경의 바로 북쪽에 있어서, 위주를 빼앗긴다면 비록 황하라는 천연 장애물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도 방어에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7(移刺蒲阿)가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돕게 했다.
서쪽 방면의 금군은 또 다시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하여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랄포아가 합류한 동쪽 방면의 금군은 이러한 수적 우세에 힘입어 서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완안합달-이랄포아 연합군에게 패배한 몽골군은 북쪽으로 물러가면서 일부의 군대를 금군의 배후로 은밀히 이동시켰는데, 이 몽골 별동대가 금군의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역습을 가해오면서 금군은 크게 패했고, 결국 위주를 몽골에게 내주었다.
한편 서쪽 전선에서는 이랄포아가 위주를 구원하러 이동한 뒤 몽골군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을 함락시켰고, 몽골군의 기세에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한 후, 그 지역의 모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다. 금나라는 장안의 동쪽에 있는 동관을 아직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이 지휘하는 금군은 동관에 머무른채 소극적으로 전투에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완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1,000명의 병력은 도회곡에서, 수부타이가 이끄는 동관을 우회한 10만여 명의 몽골군을 격파했다.
동관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몽골군은 이곳에서 여름을 보낸 뒤, 툴루이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남경을 공격했다. 당시 금나라의 국경을 보면 북쪽과 서쪽은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과 접하고 있었고,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를 도하하거나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크게 우회하며 남동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한중을 돌파하여 남송의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부터 남경을 급습하기로 했다. 그동안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남견 사이의 몽골 영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군의 관심이 서남쪽의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 안전하게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또한 일군의 몽골군은 동쪽에서 금나라를 위협했다.
툴루이가 한수를 건너자 완안진화상은 동관의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의 마지막 정예병 20만 명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금군은 한수 건너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격렬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골군의 기동력 때문에 잠시 시간을 늦췄을 뿐이었다.
한수를 건너는 데 성공한 툴루이는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완안진화상을 견제하기 위한 일부 병력만 남기고 금군이 주둔한 곳을 우회해서 남경으로 진격했다. 이를 알게 된 금군은 남경을 향해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인근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기습전략을 펼쳐서 금군이 남경까지 휴식없는 강행군을 하게 만들었고, 이 가운데 거센 비와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금군은 굶주리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금군이 남경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균주성 근처의 삼봉산(三峰山)까지 도달했을 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했다. 이때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하여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은 이를 기습했다. 결국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명장 완안진화상도 몽골군에게 스스로 찾아가 죽기를 자처해서 죽음을 당했다(삼봉산 전투). 마침내 균주성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이때 동관에 있는 11만 명의 병력도 남경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몽골군에게 궤멸되면서 이제 몽골군의 진격로엔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황하 이북이 무주공산이 되자 이를 틈타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하여 툴루이와 합류했다. 오고타이 칸의 합류로 몽골군의 군세는 5만 명까지 불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군은 남경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경개봉부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1232년~1234년
남경에 도착한 몽골군은 남경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꿔서 장애물을 없애고, 마침내 남경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경은 원래 있는 인구에 피난민까지 합쳐져서 인구가 막대하게 불어났고, 양식이 떨어지는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럼에도 이에 맞선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몽골군에게 거세게 저항했고, 이로 인해 전투가 장기화되어서 양측의 피해가 커지자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렸다. 몽골군은 비록 물러갔지만 남경에선 양식이 부족해졌고, 100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갔으며, 심지어는 식인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는 등 생지옥이 펼쳐졌다.
마침내 그동안 금나라에게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 명의 군대와 30만 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다. 결국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종은 남경을 버리고 채주로 피신했다. 이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남경성을 포위했고, 황제마저 떠난 남경은 더 이상의 저항력을 상실하여 결국 최립이라는 장수가 남경성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몽골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채주도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무선이 금 애종에게서 근황의 명을 받고 남송의 사천 지역을 빼앗아 그곳을 거점으로 재기하려고 했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전군이 복멸되고, 무선은 도망쳤다.
남경을 함락한 몽골군은 채주까지 진격했고, 때마침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했다.
몽골군과 남송군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점령한 후 채주 쪽으로 돌렸는데 이 때문에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하여 생지옥이 되어 갔다. 1234년 애종은 황족이었던 완안승린에게 제위를 양위했다. 그는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린 후, 공격해 올 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결국 애종이 죽은 다음날 채주는 함락되었고, 완안승린은 도망치다가 제위를 물려받은 지 하루도 안 되어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로써 금나라는 1234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곽하마의 항전, 최후의 불꽃이 꺼지다(1236)
최후의 거점인 채주가 함락되었지만, 금나라의 부흥운동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 한 명인 곽하마는 2년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몽골군에게 대패했고, 결국 아내와 자식을 죽인 후, 곽하마 자신도 자결했다. 금나라는 이로써 최후의 명맥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결과와 영향
결국 몽골 제국은 자신의 숙적이었던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도 성공했다. 이후 몽골은 여진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벌였으며, 일부 여진족은 이를 피해 고려로 피난을 가서 하층민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여진족과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한족은 한인이라는 이름으로 싸잡혀 원나라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남송은 비록 몽골과 힘을 합쳐 고토를 일부 수복하고 금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며 잠시 단맛을 봤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는 원인이 되었다. 몽골이 남송을 침공하려면 금나라를 거쳐야했다. 그래서 남송에게는 금나라가 원수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완충지대이기도 했기에 강력한 패권국가 몽골이 등장한 이상 금나라와 잠시 손을 잡거나 외교관계를 개선해서 몽골을 견제했다면 남송은 좀 더 버텼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송은 눈앞의 원수 처치에 눈이 멀어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숙원을 이뤄냈지만 사실상 몽골과 국경을 두게 되었고, 몽골은 몽골이 주공세를 맡은만큼 전리품 보상을 남송에게 적게 줌으로써 남송과의 동맹은 파탄날 여지가 충분하였다.
사실 여몽전쟁과 몽골-남송 전쟁에 가려져서 그렇지, 금나라도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 중원을 차지했던 국가인만큼 23년 정도로 꽤 많이 버텼다. 서하, 서요, 호라즘 제국, 조지아 왕국이 갈리던 이때도 금나라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이다. 초기에 기병의 상당수가 갈려나가고, 북중국 지역의 목초지마저 뺏긴 상황에서 저 정도 버틴 것만 해도 상당히 선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편 1368년에 한족의 명나라에 의해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난 후, 만주에서 준동한 여진족은 금나라 당시 중원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있었던 경우가 많았고, 해서여진의 예허부처럼 몽골(투메드부)계를 시조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명말청초 만주의 건주여진 중에서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구심점이 되어 만주족의 후금을 세웠고, 태종 홍타이지때 청나라를 일으켜 중원 지역을 다시 정복한 후, 최후의 정복왕조이자 마지막 중화제국으로 군림했다. 중원에 남아있었던 여진족은 명나라의 건국 이후 여진족 혈통임을 숨기고 살거나, 한족으로 동화되어 잊힌 경우가 많았는데,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뒤에 자신들의 조상이 여진족임을 청황실에 고했고, 이에 청나라에 고한 여진족들의 후손들은 팔기군에 편입되어 신분 상승의 혜택을 누렸다.
몽골-남송 전쟁
宋元戰爭
시기
1차: 1235년 (이종 2년) ~ 1241년 (이종 8년)
2차: 1258년 (이종 25년) ~ 1259년 (이종 26년)
3차: 1267년 (도종 6년) ~ 1279년 (소제 2년)
장소
남송 전역
원인
단평의 입락
몽송전쟁은 송원교체기에 몽골 제국과 남송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의 서막, 단평의 입락(1234~1235)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송나라는 하남성 동부 지역을 받았지만, 송나라는 북송 시절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20만 대군을 통해 화북 지역을 공격했고, 이는 몽골의 분노를 부른다. 송나라의 침입을 격퇴한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에서 송나라 공격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고, 몽골군은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한다.
오고타이의 침공(1235~1241)
처음엔 몽골이 파죽지세 그 자체였다. 초반 조우문이 양평관에서 항전하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군이 몰살당한 뒤 이어 12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황주까지 도달하였다. 하지만 명장 맹공이 전황을 완전히 바꿨는데,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왕세현이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 한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수의 주민과 군인들이 중원 지역에서 남쪽으로 피난해 왔는데, 맹공은 그들을 수용하여 군대에 편재하고 둔전을 하며 단단하게 방어망을 정비했다. 그리고 양회 지역에서는 두고와 여문덕, 하귀와 여개가 몽골군을 격파했다. 결국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다.
제1전간기(1242~1257)
몽골에서 귀위크 칸이 왕위에 올랐으나 서방 전선에 집중하느라 남송을 신경 쓰지 못했고, 1247년에 몽골의 장유가 사주를 공격했지만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그 이후 왕위에 오른 몽케 칸은 자신의 기반이 매우 약했기에 오고타이계를 숙청했고 이 때문에 몽골 내부가 뒤집어졌다.
한편 남송은 강남 특유의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위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번의 전투에서 성도가 함락되며 엄청난 피해를 받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방위 전선이 강화되었는데, 핵심은 산성 방어 체제였다. 이전 양회 전선에서 공을 세웠던 신임 사천제치사 여개의 주도 하에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아 몽골군을 방어하려 하였다. 특히 그는 염진과 염박 형제의 건의로 합주에 조어성을 쌓았다. 안 그래도 진입하는데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의 주요 강, 하천의 연안과 각종 교통 요지의 험준한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그런 성들을 무수하게 많은 별처럼 이어지어 서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작업도 물론 포함되었다. 송나라는 맹공의 주도로 사천 지방에만 10여 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다. 특히 양양 지역의 방어력은 실로 강대했으며, 이곳은 송나라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 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나오는 형주의 중요성이 역시 컸던 셈이다.
양양 지역은 중국 대륙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사천성 지역은 양양보다 더욱 지형이 험하여서 진격이 어려웠고, 회수 하류에서 강남(중국)으로 곧바로 공격하기엔 곳곳에 있는 하천과 호수, 습지 등으로 인해 몽골군의 장점인 기병의 활용이 대단히 어려웠다. 즉, 몽골군의 입장에선 이 양양을 반드시 확보해야 양쯔강으로 진격해서 남송의 수도인 임안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손오 정권 시절 육항은 형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후 사미원의 조카였던 사숭지는 일찍이 양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양양을 효율적으로 경영했다.
이후 이증백은 경호제치사에 임명되어 고달과 왕등을 보내 양양성을 수복한 이후 양양성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맹공 사후 그의 후임 경호제치사로 재직하였던 가사도는 1250년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양회(兩淮) 전선으로 부임하자마자 이정지와 함께 봉수대를 증설하였고 1254년에는 양주보성을 축조했으며 1257년에는 형산(荊山)에 몽골군보다 먼저 성을 축조했다.
그리고 사천 지역에서는 여개의 군대와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왕견은 여개의 명을 받고 흥원을 수복했다.
1253년 고달이 서류관(西柳關)에서 몽골군을 패배시켰다.
1254년 여개 사후 그의 수하 왕견이 사천 방어를 담당했는데, 왕덕신이 이끄는 몽골군과 분쟁이 있었고, 왕견은 합주 조어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였다.
또한 주사손(朱禩孫)은 이증백(李曾伯)과 포택지(蒲擇之)의 밑에서 근무하면서, 능소성(凌霄城) 등 사천 각지에 성을 쌓았다.
몽케 칸의 침공(1258~1259)
1258년 몽골의 대칸이었던 몽케 칸은 다시 군대를 나누어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다. 몽케는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당시 운남에 있던 대리국을 점령하여 송나라를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송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했다.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으며, 타차르와 이단은 강회 지역을 공격하였다.
중로군의 쿠빌라이가 강릉을 점령하고 장사까지 치고 나갔고, 남서쪽의 우량카다이는 광서(오늘날의 광서성)와 귀주(오늘날의 귀주성)을 초토화시킨다.
양회 전선 상황
이때 1258년 9월에는 야류간(也柳干)이 이끄는 동로군16은 양주(揚州)를 공격하다가 남송군의 반격을 받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랄한(阿剌罕)이 제익몽고군마도원수(諸翼蒙古軍馬都元帥) 직책을 이어받아 동로군을 이끌고 쿠빌라이의 중로군과 합류하였다.
참고로, 야류간의 양회 지역 공격 사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아랄한의 열전에 양주에서 전사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사전문 권35(宋史全文卷三十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1258년 11월 양회제신 가사도가 아뢰었다.
"회수 국경이 일거에 숙청되었고, 전후 모두 승리하여 모두 마필 천 계, 기갑 만 계를 획득했으며, 약탈당한 자 7천여 명을 탈환했사옵니다."
“淮境肅清,前后诸捷,凡获馬匹千计,器甲萬计, 夺回被掠者七千余人.”
송 이종이 답했다.
"유양의 승리는 기쁘나, 촉중의 고죽이 눈에 띄게 포위되어 있다고 들었다."
维揚之捷可喜,但聞蜀中苦竹隘見被圍.
또한 명신 주습(朱熠)이 아뢰었다.
"동회에는 목숨을 건 장수가 있어 누차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지금 왕등이 군대를 이끌고 촉에 들어가면 반드시 규모가 있을 것이고, 성려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東淮有用命之將, 所以屡奏捷. 今王登提兵入蜀, 必有规模, 可宽圣虑.
1259년에는 하귀(夏貴)가 몽골군에 맞서 회원(怀遠)을 백여 일 동안 수비한다.
그리고 이단이 연수군을 점령하기도 했다.
몽케 칸의 상황
북서쪽의 몽케는 사천성 지역으로 진군하여 사천의 성도를 함락시킨 뒤 곧이어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는데 여기는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과 그 부장 장각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이후 사천제치부사 여문덕이 이끄는 구원군이 사천택에게 격퇴당해 중경으로 퇴각하였음에도 왕견과 장각은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다. 몽케는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왕덕신이 남송군을 도발하나, 남송군에게 돌 세례를 맞고 진운산의 절에서 죽는 등 악재가 발발하였고, 몽골군 진영에 돈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이 합주 조어성 전투는 본의 아니게 남송 정권을 20년이나 더 연장시켰다. 더 나아가 몽골 제국군의 서아시아 정복전을 멈추게 하였는데, 몽케가 죽자 몽골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 필요가 있었고, 당시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진을 계속하던 서방 사령관 훌라구는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했다. 훌라구는 일부 병력을 지금의 팔레스타인 근처에 두었는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부대가 이 몽골군을 격파하고 훌라구가 남긴 부장 키트부카를 처형하면서, 끝도 없을 것처럼 계속되던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마침내 종료되었다. 어쨌거나 대칸마저 죽은 이상 몽골군은 두번째 대규모 원정도 실패하여 모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 측 상황
쿠빌라이가 이끄는 군대는 악주에서 남송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때 악주에서는 장승이 이끄는 군대만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송군은 사천 방면을 원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문신은 몽골군의 장영실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사하고 말았다. 쿠빌라이는 장승의 항복을 유도했다. 장승은 이에 동의하는 척했고, 몽골군이 철수한 뒤 장승은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 인근 민가와 상점을 불태우고 몽골군이 성을 공격하는 요새를 파괴했다. 쿠빌라이는 다시 돌아와 맹공을 계속했지만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달이 양양에서 군대를 이끌고 증원하러 왔고, 쿠빌라이는 이를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공언휘가 성을 공격하였지만 고달은 복병을 배치하였고 일부러 후퇴한 뒤 공언휘를 사로잡아 그를 주살한다. 악주가 위급해지자 송 이종은 가사도를 우승상 겸 추밀사로 삼아 악주를 지원하게 하였고, 중경에 주둔하고 있던 사천제치부사 여문덕도 악주로 향하였다. 쿠빌라이는 악주를 맹공하였는데, 가사도는 전군을 악주로 집중시켜 쿠빌라이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후 가사도는 황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손호신, 범문호와 함께 정예병 700기를 이끌고 황주로 이동하여 몽골군을 방어한다. 2달간의 공방전 뒤 남송군은 총 사상자가 1만 3천 명에 달하였고 우량카다이의 군대가 대리국 지역을 거쳐 광서 지역부터 담주를 거쳐 북상하고 있었으며, 전투 초기 맹활약했던 장승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엄청난 것 등 상황이 악화되었고, 몽골군도 역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후 쿠빌라이는 가사도와 문제의 화약을 맺고 가한 자리를 다투기 위해 북상한다.
우량카다이 측 상황
한편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군대는 운남에서 출발하여 광서 전동, 빈양, 내빈, 이주를 공략하였고 정강부로 향하였으나 광서안무사 이증백에게 가로막혀 정강부의 공략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량카다이와 그가 이끄는 군대는 이를 무시한 채 전주로 북상한다.
악주를 공격하고 있는 쿠빌라이는 우량카다이가 이미 담주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흥분했고 몽골군의 발도아가 이끄는 군대가 다시 나타나 우량카다이의 북상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이후 이증백은 우량카다이가 북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량카다이와의 대전에서 이증백이 이끄는 군대가 악양의 요충지를 점령한다.
발도아가 쿠빌라이의 지시로 악양을 함락한 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담주29에서 우량카다이를 접대했고 일시적인 전쟁의 형세는 남송에 불리해진다.
우량카다이와 발도아가 이끄는 군대가 잇따라 호남으로 들어오면서, 이어서 전쟁이 다시 호남 전체에서 타오른다.
호남 지역의 수비군이 우량카다이의 몽골군이 호남성 지역으로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많은 수비군이 남쪽으로 내려가 상강으로 북상하는 우량카다이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상북의 방어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리고 몽골군의 발도아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담주성 아래에 군사를 배치한다.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북상 중이었고 발도아는 담주성에서 남송의 상사벽30과 대치하고 있었다. 발도아는 이후 쿠빌라이의 지시로 악주로 북상했다.
또한 몽골군의 정정은 강서성 일대를 공격했다. 그 와중 우량카다이의 아들 아술이 담주성에 먼저 도착했다.
아술이 아직 담주성 아래로 진군하지 않았을 때, 상사벽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한밤중에 성을 나와 아술의 몽골군을 급습한다. 이에 우량카다이는 아술이 이끄는 군대가 담주성 아래에서 송군에게 포위되어 섬멸되는 것을 보고, 직접 후군을 이끌고 급히 달려오자 아술은 이 상황을 보고 즉시 송군에 반격을 가했고 우량카다이와 아술 부자의 앞뒤 협공으로 담주성 아래 송군은 다시 몽골군의 포위 속에 빠졌다.
담주성 아래의 송군이 포위되는 것을 보고, 상사벽은 친히 담주 수비군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송군을 구하려고 하나 실패한다. 상사벽의 지휘 아래 송군은 담주성 안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아술은 이를 틈타 계속 송군을 몰살한다. 결국 상사벽은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후퇴했고 송군의 대부분은 담주성 아래에서 전사했다. 상사벽은 즉시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고 몽골군이 수십일 동안 담주성을 공략하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 뒤 쿠빌라이가 가사도와 화의를 체결한 뒤 북상하자, 우량카다이는 쿠빌라이가 이끄는 군대를 맞이하여 북으로 귀환한다.
《신원사》 하귀 열전에 의하면 우량카다이가 황주(黃州)31의 신생주(新生洲)에서부터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북쪽으로 귀환할 때, 하귀가 위원(偉源)으로 나아가 올량합태의 후방을 공격하여 몽골군의 싸움배 300여 척을 탈취하였고 또 황석항(黃石港)에서 몽골군과 싸워서 그들의 군마(軍馬) 3백여 필(匹)을 노획하였으며, 마침내 수창군(壽昌軍)을 탈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량카다이는 상도(上都)에 이르러 병권을 해제당하였다. 몽케 칸의 중신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제2전간기(1260~1266)
남송 측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 되었던 가사도가 1260년 이후 덜컥 재상이 된다. 도량형, 통화개혁, 부정부패 엄단, 긴축 재정 정책 등 평시 수상으로는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군벌들을 중앙에서 밀어내어 군사력을 악화시켰고, 특히 송나라의 마지막 재상이 된 충신 문천상을 박해한 것 때문에 더욱 욕먹었다.
또한 남송의 또 다른 명장인 유정은 여문덕에게 무시당하였다. 여문덕이 유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유흥을 사천제치사에 임명하였고, 그렇잖아도 상사벽과 조세웅이 죽자 불안해하던 유정은 그가 지키던 노주를 몽골에 바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도는 아무 조치가 없었다.
1262년 이단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이용해 하귀 등이 이끄는 군대가 이단의 난을 이용해 북진하여 영토를 되찾으나, 곧 곽간과 장홍략, 한세안 등이 이끄는 몽골군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고 만다. 또한 청양몽염의 군대는 산동까지 북상하였고 송 이종에 의해 이단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으나, 몽골군의 기세가 강한 것을 보고 물러나고 말았다. 하귀가 점령지의 민심을 얻지 못한 채 남송군과 합류하려 하였던 것이 남송군의 가장 큰 패착이었고 결국 쿠빌라이는 남송군이 점령한 영토를 탈환한다. 또한 남송 정권은 무수한 돈과 식량을 소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쿠빌라이의 앞에 양회 방어선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제멋대로 지키고 공격하지 않으며, 송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할 수 있는 통군 대장이 없다는 것은 남송 후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이는 남송 멸망 시기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사천 전선 상황
1261년 유정이 몽골 제국에 노주를 바치고 투항하였고, 몽케 칸의 침공 당시 양대연이 몽골에 투항한 이래 그는 몽골군의 사천성 공격에 앞장서게 되는 등 사천성 지역이 위기에 처하였다.
이 해에는 왕견이 임안으로 전출되고, 장각이 조어성을 지키고 있었다.
1262년에는 여문덕이 노주를 수복한다.
1263년 고달이 이끄는 군대가 성도를 공격하려 했지만 동천 지역을 공격하러 가다 유정에게 패하였다. 또한 동년에는 왕양신(汪良臣)이 중경을 공략할 때, 주사손의 군대와 교전했고 왕양신이 돌아오는 길에 군사를 끌어들여 횡격하여 적병을 둘로 가른 뒤 적이 패하자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모두 죽였다.
또한 1264년 사천안무제치사(四川安撫制置使) 겸 지중경부(知重慶府) 하귀가 이끄는 군대는 호소산에서 몽골 제국군과 맞서지만 패하였다.
1265년에는 몽골군이 조어산에서 남송의 수군 전력을 탈취한다.
1266년 하귀가 유정을 맹공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광안군을 수복한다.
이때는 남송군의 산성방어체계에 맞서 몽골군도 산성을 쌓는 식으로 남송군에 대응하는 전략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41 몽골군이 남송군과의 전투를 통해 남송군의 전술들을 익혀 발전하게 된 반면, 남송군은 그대로였다.
몽골 제국의 상황
1260년 쿠빌라이 칸이 제위에 올랐지만 친동생인 아리크부카와의 쟁탈전으로 4년 동안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42 게다가 1262년 이단 등 한족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들이 남송과 같이 동맹을 맺어서 배신할 것을 우려했고, 이는 남송을 토벌하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 그리고 1264년 쿠빌라이 칸이 마침내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후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쿠빌라이 칸의 침공(1267~1279)
양양 공방전(1267~1273)
1267년 쿠빌라이 칸은 다시 남송을 침공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이전의 두번의 패배를 교훈을 삼아, 이전처럼 사천, 회수 남쪽의 튼튼한 요새들을 나누어서 공략하려는 전략을 버리고 거점지역인 양양-번성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한다. 양양 공성전은 대량의 식량을 준비해서 10만 대군이나 되는 대병력으로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 동안 이어졌다. 물론 송나라도 쿠빌라이 칸이 이 거점지역을 타격하는 걸 알았기에 6년치의 식량을 비축하고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등 많은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몽골군의 작전은 지난 두 번의 침공과는 전략이 완전 달랐는데, 직접적으로 양양성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 주위의 남송군을 궤멸시키는 데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양양성과 주위의 번성을 둘러싸는 환성을 건설했고, 그 길이는 무려 100km에 달했다. 남송군은 이 토목 사업을 멈추게 하려고 군사를 바깥으로 내보냈지만 번번히 궤멸되었다.
거기에다가 그 내부의 수로를 장악해서 남송군의 보급을 막고 양양성을 말려죽이려고 했다. 특히 이는 수군의 훈련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몽골군 입장에선 일거양득 그 자체인 것이다. 이에 남송군은 수차례나 대규모로 하귀, 범문호, 장세걸, 이정지 등이 이끄는 수군을 내보냈지만, 약 4,000여 척에 다다른 몽골 제국군에게 궤멸당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송군은 특공대를 침투시켜서 어느 정도 물자를 보급에 성공하였지만 이것도 몽골이 쇠말뚝을 박아서 차단을 했다.
원나라의 군대는 노주, 중경, 가정 등을 공략해 남송군이 양양을 지원하는 것을 견제했다.
그리고 남송군 내부에서도 문제가 심했다. 여문환은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여,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걸 꺼리고 상황이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유리한 전황이라고 허위 보고했다. 게다가 경호제치사였던 이정지와 범문호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범문호는 가사도에게 이정지의 명령을 무시해도 된다는 명령을 듣고, 가사도에 의해 전전부지휘사로 임명되어 매일마다 예쁜 첩을 거느리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이정지가 출병을 독촉하나, 범문호는 어쩌다 몽골군의 순찰 부대를 막는 등 매일 핑계대며 놀았다. 그리고 이정지는 경호 지역의 상황을 몰랐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식량을 많이 배급하고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등 많은 준비를 한데다, 주위가 습지인 까닭에 몽골군의 이점인 기병의 운용이 쉽지 않았고, 거기에 번성이 괴롭히기도 했기에 양양성은 5년이나 견뎠고, 결국 몽골군은 주위에 있는 번성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몽골군은 이슬람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형 투석기인 회회포(回回砲)로 번성을 공격하였다. 결국 1273년 1월 몽골군은 번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번성을 지키던 수비 대장 범천순은 미친듯이 쏟아져오는 몽골군을 보고,
"나는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라며 목을 메어 죽었다.
번성을 지키던 또 다른 장수인 우부는 백여명의 결사대로 무수하게 많은 적병을 베어내며 저항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찍은 뒤,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번성을 무너뜨린 회회포는 매일같이 양양을 포격했으며 양식은 떨어져가고,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몽골군 역시 송나라 사정에 능통한 여문환의 항복을 권했다. 결국 성 내부에서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의견에 따라서 1274년 3월 6년을 버틴 수비 대장 여문환이 항복해 양양이 함락되고야 만다. 이 양양의 함락으로 남송의 대몽골 방어선은 사실상 무너졌다.
여담으로 무협 소설인 신조협려에서 주연인 곽정이 참전하여 전사한 전투가 바로 이 양양 공성전이다. 물론 소설의 특성상 양양 공성전의 공로는 모두 곽정에게 돌아가고, 여문환, 여문덕 형제는 곽정에게 의지하는 범부로 등장한다.
양쯔강을 유린한 몽골군(1273~1276)
바얀 측 상황 및 전반적인 상황
1273년 양양이 함락된 이후 몽골군은 거침없이 송나라 남부 영토를 향해 진격하여 악주, 한양, 양라보 등 남송군의 요충지를 무너트렸다.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바얀은 "항복하라"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 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 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같은해 6월엔 20만 대군이 강주를 함락시켰다.
여기서 남송 출신 항장 유정은 바얀이 여문환을 앞세워 장강의 방어선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위성에서 급사하고 만다.
이에 남송은 13만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 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과 왕견, 여개, 두고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이 군세를 이끈 건 간신 가사도였다. 결국 정가주에서 이 군대마저 괴멸되어 가사도가 죽은 뒤엔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다. 이후 원나라의 군대가 장강의 흐름을 따라 동진하고 상주와 평강부가 원에 투항한다. 이에 왕안절이 바얀의 군대와 맞서지만 상주는 함락당하고 왕안절은 포로로 잡혀 항복을 거부하고 처형당한다.
또한 초산에서 장세걸과 손호신이 아술과 동문병 등이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와 맞서지만 원나라 군사들의 화공으로 인해 패하였고, 송나라 군대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초산 전투)
1276년 2월에는 수도 임안마저 함락되었다. 1276년 2월 남송 정부가 투항한 뒤 각지에 조서를 내려 투항하라고 하였고, 이에 회서 지역을 지키던 하귀52도 원에 투항하였지만, 회동 지역에서의 이정지와 강재가 아술이 이끄는 원의 군대와 분투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고53, 마지막 재상들인 진의중,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 이때 망명 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1277년 이항(李恆)은 문천상을 강서(江西)에서 대패시킨다.
진의중과 장세걸이 익왕 조하와 광왕 조병을 끼고 복주에 웅거하면서 익왕 조하를 새 황제로 옹립하였을 때, 1276년 회서 지역을 바치고 원나라에 투항하였던 하귀(夏貴)에게 남송이 장강 일대를 회복하였다는 거짓된 내용의 글을 보내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장강을 지키던 남송 장수들 대부분이 원나라에 투항하였던 상황이어서 그 글은 사격(史格)에게 그대로 넘어감에 따라 그 계획은 실패하였다.
이때 광서 지역의 원나라 군사들은 하귀가 다시 남송으로 돌아가 장강 일대를 수복했다는 소문에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1278년 2월 결국 복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장홍범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이 잔존 세력에는 옛 후주의 황실 가문이자 송 태조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도 끝까지 참여했다.
1278년 장진손이 광주를 수복하지만, 여사기(吕師夔)의 군대에 의해 패하고 사로잡힌 뒤 자살한다.
회서 전선
회서 지역에서는 1273년 연강제치부사(沿江制置副使) 겸 지황주(知黃州) 진혁(陳奕)57의 군대가 안풍주, 여주, 수주 등지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정양을 공격하여 원나라 군대의 축성을 견제했고 탑출은 매일 십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송군을 격퇴했다.
또한 1274년 하귀의 군대가 동문병(董文炳)이 주둔하고 있는 정양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탑출(塔出)과 아탑해(阿塔海)의 지원으로 인해 패배했다. 또한 대인주(大人洲)에서 유정(劉整)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였으며 아탑해의 공격으로 인해 안풍(安豐)으로 도주한다.
그 이후 동문병이 바얀의 군대와 합류한다.
1275년 6월 하귀는 태호(太湖)로 가서 수도 임안을 구하려 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정(李庭)은 신속히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저지하고 송나라 원군을 유계구(裕溪口)에서 패배시켰다.
그 이후 다시 자발적으로 출격하여 4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화주(和州)를 공격하고, 화주와 내응할 계획을 했으나, 만호 앙길아(昂吉兒)에 의해 패배하여 수천 명의 군사가 포로로 잡혔다.
1276년 2월 남송 조정이 항복하고 회서제치사 하귀가 자신이 다스리는 성을 고스란히 바치면서 항복하자, 회서 지역은 원나라의 소유로 되었다.
그러나 홍복(洪福) 치하의 진소군(鎮巢軍)만이 투항을 거부했고 하귀가 홍복의 조카를 보내 투항을 권하였는데, 홍복은 조카를 베어 죽였다. 하귀는 자신이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느냐고 설득한 뒤 홍복이 성문을 열자 아주의 복병이 나타나 그를 생포했고, 홍복은 그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사천 전선 상황
1274년에는 왕양신(汪良臣)이 가정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 이후 장각(張珏)이 중경 지역에서 원나라 군대와 항전하지만 결국 함락된다.
그리고 1279년 왕립이 조어성을 바치고 투항한다.
아릭카야 측 상황
1275년 초, 바얀이 십여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였을 때, 아릭카야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악주를 지킨다. 2월 20일, 원 조정은 활출에게 명하여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호 지역으로 와서 아릭카야의 통일된 지휘를 맡기고, 남송 이후 새로 귀부한 군대와 백성을 그의 관할하에 두었다.
바얀의 대군이 장강에 도착하기 전 한양 지역 주민들은 모두 대홍산으로 피신했다. 한양 지역의 전투가 끝난 뒤 쿠빌라이는 백성들을 한양으로 이주시키고 농사를 다시 짓도록 조서를 내렸다.
2월 24일, 아릭카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강 상류에 위치한 강릉은 송나라의 중요한 도시이며, 이곳에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우리 군이 파죽지세의 기세를 몰아 그를 함락하지 않는다면, 강물이 범람했을 때 송군이 총출동하면 악주와 한양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아릭카야의 제안에 동의하고 호북제치부사 고달이 지키는 강릉에 먼저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하는 동시에 쿠빌라이도 백술과 당영견 등을 보내 1000명의 중갑기병을 영주로 보내 투항하게 했다.
이때 강릉에는 호북제치부사 고달(高達)과 형호제형(荆湖提刑) 청양몽염, 경호 사천선무사 주사손(朱禩孫)66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쪽 사시진은 감군(監軍) 사마몽구(司馬夢求)가 주둔하였다.
처음에는 왕립신(汪立信)이 강릉 방어를 맡고 있었으나 왕립신이 몽골군의 거센 병세에 맞서 남송 조정에 아뢰었던 '장강 방어선' 계획이 직설적이라 조정 대신들의 불만을 샀기 때문에 조정에 의해 왕립신이 해임되고 고달이 왕립신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3월, 아릭카야가 강릉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기 전 악주에 주둔하고 있던 호북안무사 고세걸(高世傑)은 영주, 복주, 악주, 그리고 장강 상류 주둔군을 집결시켜 총 2만 병력과 1,600척의 전선을 악주 북서쪽 15리 형강구에 주둔시키고 악주를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이전에 복주의 장수 집귀가 원군에 투항했다가 원군이 떠난 후 다시 남송에 복속했다. 게다가, 당시 집귀의 가족은 모두 고세걸의 수중에 있었고, 집귀도 고세걸의 지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릭카야는 소식을 듣고 가거정(賈居貞)에게 악주를 지키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수사를 이끌고 장강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세걸과 싸우러 갔다. 3월 21일, 아릭카야는 형강구 동쪽 해안에 주둔했다. 한밤중에 고세걸은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고, 아릭카야는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다음날 아침, 양측은 동정호 입구에서 만났다.
아릭카야는 진을 치고 만호 장영실에게 군사를 이끌고 고세걸의 중군을 직접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또 만호 해여노 등에게 좌우에서 송군의 양쪽 날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송군은 패배하고 도망쳤고, 아릭카야는 송군의 잔존 부대를 동정호의 도화탄(桃花滩)까지 계속 추격했다.
아릭카야는 장정을 보내 항복을 권했고, 고세걸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결국 잔부를 이끌고 원군에 항복했다. 그 후 고세걸은 아릭카야의 명을 받아 악주에 남아 있던 장수 맹지소를 불러들여 그가 이끄는 악주 수비군도 원군에게 항복하게 했다. 그 이후 고세걸은 아릭카야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아릭카야는 장강을 따라 공안까지 계속 전진하여 원래 계획대로 강릉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4월 초, 아릭카야는 군대를 이끌고 강릉부 동남쪽 15리의 사시진을 공격했다. 때마침 장강의 수위가 갑자기 낮아져 사시진 남쪽 강에 많은 모래톱이 노출되었다. 아릭카야는 이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모래톱에 올라 사시진의 성루와 나무 울타리에 불을 질렀다.
남송군의 정문량은 마두안(馬頭岸)에서 원나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고 결국 투항했다. 원군은 사시진에 쳐들어와 송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4월 5일, 원군이 사시진을 점령하자 아릭카야는 도성을 명령했다. 송군 도통 맹사는 혼전 중에 죽었고, 감진 사마몽구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5일 후 장강의 수위가 다시 상승하여 사시진의 남쪽 해안의 노출된 모래톱이 강물에 잠겼다. 원군이 사시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강릉의 사천, 경호선무사 주사손과 호북제치부사 고달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마침내 사시진이 도성되는 것을 지켜봤다.
4월 7일, 아릭카야는 장정을 강릉으로 보내 투항을 권했다. 동정호와 사시진 전쟁 이후 호북성 송군의 정예는 고갈되었다. 고달은 청양몽염과 함께 원나라에 항복했다. 주사손은 독약을 먹고 자결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결국 원군에게 투항했다.
강릉이 항복한 후, 아릭카야는 사람을 보내 인근 주현에 투항하게 하였고, 협주, 귀주, 상덕, 복주, 영주 등의 성이 잇달아 원군에 투항했다. 이전에 영주에 주둔한 장세걸은 이미 경근왕에 임명되었고, 4월 20일 영주 유수 조맹도 원군에 투항했다.
5월 1일, 아릭카야는 명령을 받고 악주로 돌아갔다. 5월 11일이 되자 진주, 수주, 균주, 정주, 방주, 완주 등지의 송군도 속속 원군에 항복했다.
《원사》에 따르면, 아릭카야가 출정을 한 2개월 동안 원나라의 군대는 총 3개 부, 11개 주, 4개 군, 57개 현, 총 80만 3,415가구, 114만 3,860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로써 경서(京西)와 호북(湖北) 지역은 거의 모두 원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승전보가 원 조정에 전해지자 쿠빌라이는 3일간의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1276년에는 이불(李芾)의 군대가 담주에서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담주가 함락되고 이불은 자결한다. 뒤이어 호남성 지역 상당수가 아릭카야의 군대에 투항하였고 아릭카야의 군대는 정강을 포함한 광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 이후 아릭카야는 담주성으로 철수했고, 사격(史格)이 이끄는 군사들이 광서 지역과 광동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다.
남송 최후의 불꽃, 애산 전투(1279)
결국 1279년,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남송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멸망한다. 황족들과 신하들의 최후의 항전의 비극적인 전투와 마지막 송의 군대는 육군은 내륙, 나머지 해군은 800척 정도의 전함에 머물며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고, 백성들과 관료 황족들은 몽골 지배하엔 살지 않겠다고 수십 만이 그나마 안전한 바닷배에 있었다. 최후의 결전에서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가 유리해보였지만,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 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고,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 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다. 수백 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이미 포로로 잡혔던 문천상도 몽골 군영 내에 있었는데 남은 송나라군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장홍범이 종용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더 이상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육수부는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소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에 뛰어들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양 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에서 구출되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7살의 마지막 황제와 황족들, 신하들이 다 바다에 빠져 자살해버린다. 몽골 기록에 다음 날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한다.
장세걸은 전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양 태후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올리고, 안남 지역으로 재기를 위해 떠나려 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닥쳤다. 그러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국가의, 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세상의 끝에서 황제도 태후도 대장군도 재상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점령되지 않아 남아있던 마지막 송나라의 잔류 병력들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황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심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끝내 최후의 구심점 문천상까지 처형되어 부흥 운동도 중단된다.
남송이 무너지고 전쟁이 끝난 이후 몽골은 하도 저항이 심해서 깊이 빡친 나머지 전쟁이 끝난 후 송나라인들을 모조리 사실상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저항이 적었던 여타 국가의 백성들은 2급 시민 취급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결국 이 지역은 몽골에 강한 저항 정신을 가져 후일 원나라가 붕괴하자 한족 반격의 중심지가 되었다.
남송과 원나라의 전투는 물론 중간 중간 소강 상태도 있었고, 44년 동안 내내 싸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싸움들이 있었고, 전투가 없는 기간에도 늘 서로 전쟁에 대비하며 준비하고 있던 살얼음판 같은 시대였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위대한 충신으로 불리는 문천상(文天祥)이나, 결국 송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몽골의 명장 바린 바얀(伯顔)이 태어난 해는 모두 1236년이다.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40살도 훌쩍 넘어 그 당시 기준이라면 슬슬 황혼기를 생각해야 할 시점에서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20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에서 64살의 노인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세대 전부를 소진했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송나라는 역대 중국사의 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최약체 이미지가 강하고, 수많은 송군의 굴욕적인 역사 일화가 조롱거리로 언급되는 등등 송나라 사람들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외울 줄 알지 '상무 정신'이 없어서 칼들고 싸울 줄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대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더 장렬하게 순국하고 끝까지 뜻을 꺾지 않고,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북송 문서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문약한 송나라'의 이미지 자체가 일정 부분은 합리적인 근거를 두고 있지만77 다른 일면에서는 과장되거나 편협한 편견인 측면도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송사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이렇게 평했다.
송나라가 망할 징조는 이미 하루가 아니었다. 지난 세월은 돌아가고 진정한 군주가 천하를 다스렸지만, 송나라의 유신들이 충성스럽게 두 왕을 받들어 해상으로 달아났으니 천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노라. 그러나 신하들의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이 정도이니 이 또한 참으로 슬프도다!
청나라의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나라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진정의 《중국 과거 문화사》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부터 1279년 광동 애산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장장 40여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 또한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 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8. 결과 및 영향
몽골 제국은 남송을 멸망시키면서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자 정복왕조가 되었다.
몽골-남송 전쟁은 몽골 제국의 대외 원정 중 마지막으로 완료된 대외 원정이며 가장 오랜 시간 끌었던 원정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몽골은 남송에서 가장 고전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럽러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고려까지 다 갈리던7879 이 시기에도 몽골의 앞마당 지역인 남송이 존재했었고, 그래서 북송의 군대는 전형적인 당나라 군대의 예시로써 형편없었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남송인 경우는 군사력도 괜찮았다 같은 재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한편 남송이 무려 44년 동안 버텼기에80, 몽골은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를 건국할 때 남송에 사는 남인을 최하위 등급인 4등급으로 두고 많은 차별을 행했다.
그리고 애산 전투의 한 생존자의 손자 중 한명은 몽골이 약해진 틈을 타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쫒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고려의 반역자 홍복원의 5남인 홍군상(洪君祥)이 회동(淮東) 지역을 공격하고, 바얀의 밑에서 참전하기도 했다. 또한 남송 조정의 항복 문서 작성에도 관여한다.
사천 지역의 능소성(凌霄城)에서는 1288년까지 원나라에 항전하다 전 군민이 옥쇄하기도 했다.
남송 항장들의 동향
남송의 장수들 중 일부는 원에 항복하였는데, 조정의 간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성 안의 백성들이 몽골에 도성당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어떤 장수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배반했다. 원나라는 남송의 항장들을 중용하면서도 경멸하였다. 또한 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먼저, 쿠빌라이 칸이 남송의 항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왜 그렇게 쉽게 투항했는가?
남송의 항장들이 말하였다.
남송의 가사도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문신을 중시하고 무인들은 하대하였사옵니다. 이에 신 등이 불화가 쌓이고 마음이 멀어져서 투항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몽골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동문충이 통역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자면, 가사도가 그대들을 경시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리고 1276년 7월에는 강재가 양주에서 아술이 이끄는 군대에 패해 사로잡히고 처형당하기 직전, 동년 2월 회서를 바치고 원나라에 투항하였던 하귀82가 강재에게 다가오자 강재는 이를 갈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를 보면 차라리 죽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또한 제4차 양양 전투에서 투항하였던 여문환은 문천상에게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문천상이 포로가 되었을 때 여문환을 욕하자, 바린 바얀 또한 항복한 여문환이 아닌 문천상 쪽을 더 높게 평가했다.
여문환: 승상께선 어찌해 환(여문환)을 도적이라고 욕하는 겁니까?
문천상: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에는 그대가 장본인이니 그대가 난신적자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삼척동자도 모두 너를 욕하는데 어찌 나 뿐이랴!
여문환: 양양을 6년이나 지켰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문천상: 힘이 다하여 지원이 끊어지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 너는 몸을 아끼고 아들만 사랑했으니 나라를 져버렸을 뿐 아니라 가문의 명성도 없앤 것이다. 이제 온 백성을 거슬렀으니 만세의 적신이다!
바얀: 승상께서 잘 꾸짖으셨소.
(문천상이 임안으로 돌려보낼 것을 완강하게 청했으나 바얀은 웃으면서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정붕비의 아버지 정총83이 부주에서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히자 장덕윤이 정총을 가마에 싣고 돌아오며 말하였다.
"당신의 아들 정붕비84는 이미 참의를 지냈으니 당신 부자가 다시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포로가 되었지만 그는 항복하였으니 내 아들이 아니오.
이처럼 남송의 항장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원 조정에서도 경멸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항장들 대부분은 《송사》 열전에서 누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