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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정벌(對馬島征伐),고려 말, 조선 초,왜구 근절

Jobs 9 2021. 4. 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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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여말선초 약 70년간 우리 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다. 특히 고려 말의 약 40년간은 왜구가 창궐해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고려는 사절 파견, 성보(城堡) 수축, 수군 증강, 화기 개발 등의 왜구의 근절책을 세웠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의 장군출신이었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왜구대책에 부심해 이를 방어하는 한편, 흥리왜인(興利倭人)주 01)과 귀화왜인을 우대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그러나 침입이 계속되자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차차 왜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땅이 되었다. 대마도주는 소씨(宗氏)로서, 일본사에 의하면 가마쿠라막부시대(鎌倉幕府時代)주 02)지쿠젠주(筑前州)주 03)의 다사이부소이(太宰府小貳) 무토(武藤)가 그의 가신 소(宗尙重)를 대마도에 보내어 이를 점령하고, 그를 수호대(守護代)로 삼았기 때문에 이후 소씨가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매우 척박해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일본 국내의 내환으로 정상적인 교역을 통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다. 또한 몰락한 무사와 농민 등 빈민이 증가해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 공급이 요청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마도를 비롯한 삼도(三島 : 對馬·壹岐·松浦地方)가 왜구의 근거지가 되어 중국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대마도정벌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수군 확충과 화기 발달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즉,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했고, 현종 때는 동여진 해적을 막기 위해 도부서(都府署)를 설치,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다. 고려 말에는 도부서를 사수서(司水署)로 개편, 전함들을 건조하는 등 수군을 재정비하였다. 조선도 수군을 강화해 세종 때는 총 72곳에 829척의 병선과 5만 169명의 기선군(騎船軍)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기는 1377년(우왕 3)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 20여 종을 제조하였다. 나세(羅世)·최무선 등의 진포싸움과 정지(鄭地)의 남해대첩에서는 이들 화포를 전함에 배치, 왜구를 섬멸하였다. 화약과 화기는 태종 때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군기주부가 되어 더욱 개발, 대마도정벌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

내용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왕의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다. 1387년 왜국 격멸에 큰 공을 세운 정지가 건의한 바 있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벌을 결행할 때까지 꾸준히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백척 이상 되었던 것으로 보아, 1만 정도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해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또, 원수 김종연(金宗衍)·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 고려인 남녀 1백여 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정벌에 대한 기사는 너무 간략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과가 컸던 것으로 보아 왜국의 피해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들의 개선은 왜국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이에 창왕도 그의 공을 찬양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그 뒤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어들고 유구국(琉球國)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모두 대마도 정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태조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국에 대한 소탕과 변경의 방어를 엄중히 하였다. 그러나 사절·향화왜인·흥리왜인의 내왕이 빈번해진 반면, 침입도 1393년부터 1397년까지 모두 53회나 되었다.

정벌의 발단은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는 120척으로 동래·기장·동평성을 함락,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만호를 살해하였다. 또, 같은 달 18일 통양포에, 23일 영해성을 침략했으며, 11월에도 5회나 침입하는 등 이 해에만도 13회나 침입함으로써 이에 대한 강력한 응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월 30일에 돌아올 때까지 약 2개월간의 사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정벌이 주원방포(周原防浦)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 걸린 것을 미루어보면 김사형이 그 동안에 대마도를 정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김사형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고,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정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벌은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조선 최초의 대마도정벌이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동정(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라 함.)이었다. 1398년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후 거의 매년 와서 예물을 바치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 갔다.

이들 사절은 도주 소(宗貞茂)와 그 아들 및 도내의 각포만호(各浦萬戶)가 보낸 자들이었다. 이에 따라 상인들도 급증해 항구에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자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그것도 행장(行狀)주 04)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많은 왜인이 거주하였고, 그들 가운데에는 풍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의 허실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1418년(태종 18) 3월 경상도의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이렇게 왜인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 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60여 회나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주 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흥리왜선을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소가 죽은 후 아들 소(宗貞盛, 都都熊丸)가 아버지의 직을 이었으나, 도내의 실권은 산미(三味多羅)주 05)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번 조선과 통교한 적도 있지만, 왜구의 두목으로 동족과 함께 도내에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근이 들어 생활이 궁핍해지자, 대마도의 왜적이 명나라에 약탈하러 가는 도중 조선의 연안을 약탈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해동정이 결행되었다. 태종은 재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양위하고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군무(軍務)만은 계속하고 있었으며, 기해동정도 태종에 의해 시행된 것이었다.

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탈한 때문이었다. 이 싸움에서 병선 7척을 잃었고,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金成吉)와 그의 아들, 아군의 태반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같은 달 12일 왜선 7척이 해주를 침입, 약탈했고, 13일 황해도조전절제사 이사검(李思儉)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선 38척에 포위되어 식량을 요구받는 등 대규모의 왜구가 연안을 침입하였다. 이에 태종은 14일 대신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각 도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또, 정벌에 앞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에 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즉,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咸吉道)로 보내고, 흉악한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을 분치시켰다. 이 때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준비를 마친 다음 이종무는 9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올랐다. 그 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만 7285인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20일에 먼저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에 이종무는 지문(池門·望沙門 : 태조 때 항복해 귀화한 자)을 시켜 도주 소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권했으나 대답이 없자. 정벌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그 결과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했으며,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129척의 선박을 노획해 쓸만한 것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렸으며, 131명의 중국인을 찾아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또, 이종무는 적이 내왕하는 중요지점에 책(柵)을 세워 오래 머무를 뜻을 보여주고, 29일 두지포(豆知浦)를 수색해 가옥 68호와 선박 1척을 태우고, 적병 9명을 참하고 중국인 15명과 본국인 8명을 찾아내었다.

한편, 이로군(尼老郡)에서 좌우군을 이끌고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朴弘信)·김해(金該) 등 장수와 군사 백수십인이 전사하였다. 일본사료 『조선통교대기 朝鮮通交大紀』에는 이 때 아군 1,500인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하나, 과장된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박실의 패전이 있은 데다가 대마도주 소는 아군이 오래 머무를까 두려워서 퇴사(退師)해 수호하기를 애원하므로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동정(東征)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죄는 묻고, 약탈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벌의 본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해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 시위로 왜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3일 왜구가 재침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중지하였다.

대마도주는 1420년 정월 지오(時應界都)를 보내어 항복의 뜻을 전해왔다가 뒤에 번복하자, 같은 해 11월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심껏 귀순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또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기해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동정 후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도둑들이 차차 평화적 내왕자(商倭·客倭)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년 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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